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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정체가 뭐야?

Author: 6jay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4 23:25:48

차도혁은 시아의 건조하고 당돌한 대답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좋아. 사흘 뒤에 스스로 짐 싸서 나갈 때 위약금이나 청구하지 마십시오.”

도혁은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태블릿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거기 적힌 규칙이 총 47가지입니다. 실내 온도는 정확히 21.5도, 조도는 40럭스, 침구류 각도는 침대 헤드와 직각을 유지할 것. 냉장고 음료 라벨은 정면을 향해야 하고 물때나 먼지는 단 1mg도 용납 안 합니다.”

“외우는 데 1분이면 충분합니다.”

시아는 태블릿을 훑어보지도 않은 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백 페이지짜리 다국적 기업 인수 계약서의 독소 조항도 10분 만에 외워버리는 그녀에게 47개의 가사 수칙은 장난 수준이었다.

“출근 시간 전까지는 내 눈에 띄지 마십시오.”

도혁은 차가운 경고를 남긴 뒤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현관에 홀로 남겨진 시아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47가지라…… 너무 느슨한데.”

시아는 수수한 린넨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를 깔끔하게 묶어 올렸다. 그녀의 눈에 비친 180평 펜트하우스는 엉망진창이었다.

이전 하우스키퍼들이 결벽증 도혁의 눈치를 보느라 겉만 번지르르하게 닦아놓았을 뿐, 구조적 질서가 엉망이었다. 시아의 전신에서 10조 원을 움직이던 극단적 효율주의자의 본능이 깨어났다.

우선 거실 통유리창의 미세한 유막을 알코올 용액으로 완벽하게 제거했다. 창틀 모서리의 먼지를 초미세 틈새 브러시로 걷어내자, 강남 도심의 야경이 마치 유리가 없는 것처럼 투명하게 드러났다.

다음은 드레스룸이었다. 도혁의 수트 수십 벌을 계절별, 원단 두께별, 컬러 스펙트럼 순서로 완벽하게 재배치했다.

모든 옷걸이의 간격은 레이저 측정기라도 댄 듯 정확히 3.5cm로 통일되었다. 주방 냉장고를 열었을 때 시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소스병 라벨이 제각각 돌아가 있잖아.”

시아는 탄산수와 주스, 생수병의 바코드를 일렬로 정렬하고, 각 양념통의 높이와 용량에 맞춰 완벽한 직각 그리드를 구축했다. 한 병씩 제자리를 찾을 때마다 관자놀이를 조이던 압박이 조금씩 풀렸다.

수백 장짜리 재무모델을 맞출 때보다 단순하고, 그래서 더 확실한 만족감이었다. 욕실 타일의 물때와 배수구의 유분기까지 전용 스팀 살균기로 박멸한 뒤에야 시아는 고무장갑을 벗었다.

시계는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앞치마 주머니 속 비밀 서브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발할라 캐피털의 최고투자책임자(CIO)에게서 온 최고 등급 보안 알림이었다. 시아는 다용도실 문을 걸어 잠그고 태블릿을 활성화했다.

[스위스 바이오테크 ‘노바젠’ 지분 42% 블록딜 인수 승인 요청 건 - 결재 대기]

인수 금액은 한화 1,870억 원. 시아는 스위스 법인의 재무제표와 특허 라이선스 계약서를 30초 만에 속독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화면 우측 하단의 [최종 승인] 버튼에 지문을 갖다 댔다.

삑.

[1,870억 원 규모 블록딜 최종 승인이 완료되었습니다. 집행 절차를 개시합니다.]

1,870억 원짜리 안건이 자신의 손을 떠나자, 시아는 태블릿을 끄고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걸레를 집어 들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욕실 실리콘 모서리에 물때가 미세하게 남았네.”

***

밤 11시 반. 서재에서 지독한 두통과 함께 나온 도혁은 거실로 발을 내딛는 순간 우뚝 멈춰 섰다.

“……뭐지?”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은은한 편백나무 향과 21.5도로 맞춰진 서늘한 공기가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전의 집이 먼지 하나 없는 전시장 같았다면, 지금은 필요한 물건이 필요한 자리에 놓인 생활 공간처럼 느껴졌다. 도혁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장식장 상단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먼지 한 톨 묻어나오지 않았다.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는 숨을 들이켰다. 수십 병의 음료와 소스통이 마치 현대 미술관의 조형물처럼 완벽한 질서와 수평을 이루고 있었다.

“어떻게 반나절 만에…….”

침실로 들어간 도혁은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침대 매트리스 위의 최고급 이불은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고, 베개의 각도는 정확히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항상 침대에 눕기만 하면 온갖 불안과 잡념으로 심장이 뛰던 도혁이었다. 그는 협탁 위에 놓인 수면제 캡슐을 집어 들려다 손을 멈췄다.

방 안의 질서가 10년 동안 곤두서 있던 신경을 이상할 만큼 부드럽게 풀어냈다. 도혁은 홀린 듯 침대 위로 몸을 뉘었다.

바스락거리는 시트의 감촉과 흠잡을 데 없는 공기. 매일 밤 2시간도 채 자지 못하며 그를 괴롭히던 지독한 불면증이 거짓말처럼 옅어졌다.

‘그 여자…… 대체 정체가 뭐야.’

생각을 끝맺기도 전, 수면제 없이 침대에 누운 도혁이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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