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휴가요? 몸이 안 좋으신가요?”현다영이 무심코 묻자 비서는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주단우가 없으니 결재도 일단 멈출 수밖에 없었다.자리로 돌아온 현다영은 몸 상태가 어떤지 주단우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했다.막 취임한 주단우는 일이 많았다. 몸이 정말 안 좋은 게 아니면 휴가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메시지를 다 써 놓고도 결국 지웠다.지금 두 사람은 무엇보다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였고, 그다음이 친구였다.현다영은 주단우에게 이미 분명히 선을 그었다. 하지만 어제 보니 주단우는 아직 마음을 접지 못한 것 같았다.지금은 거리를 두는 수밖에 없었다.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희망을 줘서는 안 됐다.퇴근길에 현다영은 혼자 먹을 음식과 맥주를 조금 샀다.기분이 안 좋을 때는 먹고 마셔야 잠이라도 잘 왔다.집이 있는 동네는 그다지 외진 곳이 아니었지만 한적한 골목길이 조금 있었다.편의점에서 나왔을 때 골목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비틀거리며 따라오는 듯했다.현다영은 이유 없이 긴장했다. 뒤돌아볼 엄두도 못 낸 채 걸음을 재촉했다.그 순간 뒤따라오던 사람이 뛰기 시작했다.현다영은 있는 힘껏 달렸다.다행히 집이 멀지 않았다.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집 앞에 도착해서야 숨을 헐떡이며 뒤돌아보고 계단 창문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골목에 술 취한 남자 몇 명이 비틀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식은땀을 한바탕 흘린 뒤에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괜히 놀랐던 모양이었다.현다영은 집에 들어가 불을 켰다. 그러자 다시 허전한 기분이 밀려왔다.‘어제 이 시간에는 송준호와 부엌에서 나란히 다정하게 음식을 만들고 있었는데...’손에 든 음식은 더는 맛있어 보이지 않았다.‘혼자 먹는 밥이 둘이 먹는 밥만 하겠어? 아니지. 혼자 먹는 밥이 좋아하는 사람과 먹는 밥만 하겠냐고.’현다영은 사 온 음식을 대충 내려놓고 소파에 털썩 몸을 던졌다.심심해서 휴대전화를 뒤적였다.마침 오늘 새벽 강지현이 붉게 물
현다영은 밤새 뒤척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났다.예상대로 방에서 나왔을 때 송준호는 이미 떠난 뒤였다.소파는 말끔하게 정리돼 있었다.송준호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탁자 위에 있던 케이크 상자까지 쓰레기와 함께 치워 갔다.바람처럼 왔다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현다영은 어제 송준호가 누웠던 자리에 앉았다. 가슴이 답답해 견딜 수 없었다.‘사랑이란 대체 뭘까? 서로 같은 마음이 되기는 왜 이렇게 어려울까... 왜 하필 좋아하는 사람은 붙잡으려 할수록 멀어지는 걸까...’녹초가 된 현다영은 출근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회사에 도착했다.안내 데스크를 지나던 중 누군가 강지현을 최대한 빨리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모습을 봤다.“강 대표님은 요즘 자리에 안 계시는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안내 데스크에서 강지현을 만나겠다고 하는 사람은 드물어서 현다영도 궁금해졌다.지난번 이렇게 강지현을 찾아온 사람은 송준호였다.직원이 곧바로 방문객의 명함을 현다영에게 건넸다.“안녕하세요. 예전에 김 대표님 의료진으로 일했던 의사예요.”현다영이 명함을 보니 이름은 성하윤, 직함은 새봄 대학병원 초빙 외과의였다.“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성하윤이 곧바로 답했다.“사실 김 대표님을 뵈러 왔어요. 그런데 친분이 없어서 연락처도 모르고, 미래 그룹에 문의했더니 안 계시더라고요. 병세는 좀 나아지셨나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는 치료법이 있어서 한번 시도해 보셨으면 해요.”M 국에서 돌아온 뒤 성하윤은 인터넷에서 김태하에 관한 소식을 여러 번 접했고, 한동안 걱정으로 마음을 졸였는데, 두 사람의 결혼식 소식을 보고서야 겨우 마음을 놓았다.그동안 성하윤은 아버지와 함께 종양 치료에 도움이 될 만한 정통의학 치료법을 연구해 왔다.그 과정에서 예전에 품었던 편견도 많이 사라졌다.일반적인 서양의학 치료만으로는 김태하의 종양 진행을 일시적으로 억제할 수 있을 뿐, 완치는 어려웠다. 악화하거나 변성될 위험도 여전히 컸다.하지만 아버지
송준호와 현다영이 뒷정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주단우는 이미 떠난 뒤였다.“주 대표가 오늘은 기분이 별로 안 좋았나 봐.”송준호는 말하다가 옆에 있던 케이크의 위치가 달라진 걸 발견했다.거실 탁자 위에 있던 케이크가 식탁 한가운데로 옮겨져 있었다.“원래 저래요. 걸핏하면 화내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현다영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주단우에게 아직 자신을 향한 마음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건 알았다.하지만 자기 뜻은 이미 분명히 전했다.그런데도 가끔은 주단우의 거만한 태도 뒤에 숨은 안쓰러운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약해졌다.“난 신경 안 써. 그래도 주 대표는 네 친구이자 같이 일하는 동료잖아. 나 때문에 너희 사이가 틀어지는 건 싫어.”잠시 말을 멈춘 송준호가 덧붙였다.“난 잠깐 머물다 가는 사람일 뿐이니까. 잠깐 스쳐 가는 사람 때문에 곁에 있는 사람과 멀어지는 건 아깝잖아.”“오빠는 잠깐 스쳐 가는 사람이 아니에요.”현다영이 곧바로 송준호 앞으로 다가가 진지한 표정으로 깊고 고요한 송준호의 눈을 바라봤다.“오빠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적어도 저한테는... 오빠는...”“케이크 먹자.”현다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준호가 끊었다.송준호는 이미 시선을 돌린 채 케이크 상자를 열고 있었다.상자 안에는 고급스러운 연보라색 2단 크레이프 케이크가 들어 있었다. 쿠키로 화려한 성 모양까지 만들고 알록달록한 초콜릿으로 장식한 걸 보니 정성껏 주문 제작한 모양이었다.케이크에 꽂힌 작은 카드에는 [승진 축하해]라고 적혀 있었다.송준호는 주단우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현다영을 향한 마음만큼은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현다영이 마음을 맡겨도 될 만한 사람 같았다.현다영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더 말하지 못하게 막은 것 자체가 송준호의 대답이었다.그런데도 현다영은 송준호의 얼굴에서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흔적을 찾고 싶었다.송준호가 아무렇지 않게 케이크를 잘라 건네주고 나서야 겨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더는 참지 못한 주단우가 헛웃음을 흘렸다.“송준호 씨, 갑자기 왜 돌아왔어요? 공회가 잡혔다고 들었는데, 송준호 씨도 몸을 사리고 있는 거 아니에요?”그 말에 송준호가 잠깐 굳었다.현다영도 곧장 주단우를 노려봤다.‘하필 그 이야기를 꺼내다니. 주 대표님이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게 분명해!’“주 대표님, 정말 음식이 안 넘어가세요? 못 드시겠으면 억지로 드시지 마세요.”현다영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화제를 돌렸다.그러자 주단우는 오히려 더 신이 난 듯 식탁에 팔꿈치를 괴고 송준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그럴 리가요. 국제 수배 중인 용병과 한 식탁에서 밥을 먹다니, 영광이죠.”“주단우 씨!”송준호의 얼굴이 굳자 현다영도 흥분해 식탁을 내리쳤다.“현다영.”그 순간 송준호도 입을 열었다.송준호는 그릇을 내려놓고 손끝으로 고깃국물이 묻은 입가를 가볍게 닦으며 낮게 말했다.“저 내일 떠나요. 걱정하지 말아요. 두 사람에게 피해는 안 줄 테니까.”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 화를 내기는커녕 여전히 담담했다.다만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은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현다영은 누군가 심장을 세게 움켜쥔 듯 아팠다. 그 아픔을 말로 표현할 수도 없었다.주단우와 더 말다툼할 마음도 사라졌다.오히려 송준호의 반응에 당황한 건 주단우였다.이렇게 대놓고 적의를 드러냈으니 송준호도 조금쯤은 불쾌해하리라 생각했다.그런데 송준호가 너무 너그럽게 나오자 오히려 자신이 지나쳤나 싶어졌다.“이 소고기찜은 양념이 제대로 배었네. 파를 곁들인 소고기도 부드럽고... 밖에서 아무리 맛있는 걸 먹어도 집밥만 못하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마음 편히 밥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 둬야지.”현다영이 말없이 젓가락을 내려놓은 채 있자 송준호가 다시 말했다.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송준호는 현다영의 그릇에 고기를 덜어 준 뒤 주단우의 그릇에도 한 점 올려놓았다.“이 고기는 별로 느끼하지 않아요. 주 대표님도 먹어 봐요. 환자한테
현다영은 케이크를 탁자에 내려놓고 곧장 부엌으로 들어갔다. 주단우에게 물 한 잔 따라 주는 예의조차 차리지 않았다.환영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건 누가 봐도 분명했다.주단우도 잘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소파에 조용히 앉았다.그러면서도 부엌에서 나란히 붙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현다영과 송준호를 곁눈질했다.현다영이 방금 만든 음료를 건네자 송준호는 숟가락으로 한 모금 맛보고 고개를 끄덕였다.“맛있네.”그러더니 한 잔을 따로 따라 주단우에게 다가왔다.“다영이가 직접 만든 거예요. 맛있어요.”주단우는 입꼬리만 살짝 올린 채 잔을 받아 탁자에 내려놓았다.“고마워요.”“참, 몸은 좀 어때요? 다친 데는 다 나았어요?”송준호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눈빛에도 다른 속셈은 비치지 않았다.정말로 주단우를 걱정하는 듯했다.주단우는 송준호를 잠시 바라보다 대답했다.“많이 나았어요.”“다행이네요. 칼에 베이거나 피부에 상처가 났을 때 흉터를 옅게 하는 데 효과 좋은 약이 몇 가지 있어요. 적어 줄게요.”송준호는 종이와 펜을 꺼내 약 이름 몇 개를 적어 주단우에게 건넸다.주단우는 종이를 받았지만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순식간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그때 분위기를 눈치챈 듯 현다영이 송준호를 나직이 불렀다.송준호는 곧바로 일어나 다시 부엌일을 도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식탁에 올랐다.환자라는 이유로 내내 앉아서 기다리기만 한 주단우는 현다영과 송준호가 함께 그릇과 수저를 나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눈빛과 손짓까지 주고받는 두 사람을 보자 속에서 불이 치밀었다.더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고기만 잔뜩 있네. 채소는 하나도 없어? 환자인데 이렇게 기름진 음식은 못 먹겠어.”주단우가 입을 열자 식탁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현다영은 주단우가 찾아와 방해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 있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트집까지 잡으니 화가 치밀었다.그래도 송준호가 있어서 애써 예의를 지켰다.“못 드시겠으면 집에 가서 드시는 게 낫겠네요. 주 대표
송준호가 배고플까 봐 현다영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재료 손질을 시작했다.송준호는 먼 길을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도 쉬려고 하지 않고 옆에서 돕겠다고 나섰다.“고기는 내가 손질할게.”그는 재료를 한번 훑어보고 소매를 걷었다. 단단하고 매끈한 팔뚝 근육이 드러났다.현다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주방에서 함께 움직였다.송준호의 칼질은 마치 공연을 보는 것처럼 현란했다. 고기를 써는 그의 손놀림을 보던 현다영은 멍하니 넋을 잃고 말았다. 웬만한 특급 셰프라도 이렇게 일정하고 예쁜 두께로 고기를 썰지는 못할 것 같았다.현다영은 채소 손질을 끝내고 양념을 준비했다.높은 곳에 있는 병이나 통을 꺼내려고 까치발을 들 때면 송준호가 늘 먼저 손을 뻗어 내려 줬다.두 사람의 호흡은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사람들처럼 잘 맞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냄비에는 소고기찜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고, 주방에 진한 향이 퍼졌다.도마 위에도 예쁘게 썰어 놓은 재료들이 가득했다.그때 초인종이 갑자기 울렸다.인터넷 레시피를 보며 음료를 배합하던 현다영은 멈칫하며 의아한 표정으로 현관으로 향했다.현관문 구멍을 통해 보니 밖에는 주단우가 서 있었다.손에는 뭔가를 들고 있었는데 케이크 상자처럼 보였다.현다영은 주방에 있는 송준호를 힐끗 보고는 잠시 망설이다 문을 아주 조금만 열었다.“주 대표님, 여기 웬일이세요?”“밥 얻어먹으러 왔지.”주단우가 입꼬리를 올리며 코를 킁킁거렸다.“타이밍이 기가 막히네? 대단한 요리라도 하나 봐? 냄새 끝내주는데?”“그런건 아니고요...”주단우가 몸을 비집고 들어오려 하자 현다영은 얼른 막아섰다.“주 대표님, 무슨 일 있으세요?”“있지.”주단우는 코웃음을 치며 손에 든 케이크를 들어 보였다.“승진 축하하러 왔어.”현다영이 미간을 찌푸렸다.“주 대표님, 마음은 감사한데 아직 몸도 다 안 나으셨잖아요. 저 때문에 굳이 여기까지 오실 필요는 없는데. 그러니까...”“현다영, 너 양심도 없어? 내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