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로키의 도움을 받아 몇몇 약물 전문가를 찾았다. 사실 심씨 가문의 인맥으로도 찾을 수 있지만 가장 권위 있는 사람을 찾기엔 정계 쪽 인물이 제격이었다.우산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 강하리는 때마침 걸려 온 로키의 전화를 받았다.“전문가가 2시간 후에 B시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니 마중 나가요.”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강하리는 가정부를 부르고 옷을 챙겨입은 뒤 밖으로 나갔다.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가로등 밑의 남자는 옆에 있는 여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밖으로 나온 강하리의 눈에 머리와 온몸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하얗게 물든 남자가 동상처럼 서 있고 옆에 있는 여자가 쉬지 않고 재잘거리는 모습이 들어왔다.강하리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나가니 운전기사는 이미 큰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눈길이 미끄러워 그녀는 직접 운전할 생각이 없었다.강하리가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저쪽의 두 사람은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강하리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곧장 아파트 앞 큰길로 걸어갔다.“사모님, 늦은 시간에 어디 가세요?”임희주가 갑자기 외쳤다.“급한 일 있어요? 아니면 누구 만나러 가는 건가요?”강하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저쪽을 바라보았다.“임 선생님께선 오지랖도 참 넓으시네요. 내연녀 주제에 무슨 자신감으로 내 앞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죠?”임희주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간 굳어지더니 이내 다시 웃었다.“사모님, 전 두 사람 사이 방해할 생각 없어요. 다만 지금 이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게 저밖에 없으니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그래도 정신과 의사니까 걱정 마세요. 제가 잘 챙길게요.”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잘 부탁드릴게요.”말을 마친 그녀가 구승훈을 힐끗 보고는 뒤돌아 떠났다.구승훈은 휴대폰을 꺼내 노진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강 대표 외출했으니까 잘 지켜.]메시지를 보낸 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붉은 불빛이 번뜩이며 구승훈이 마침내 임희주에게 시선을 돌렸고, 그와
임희주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쪽을 바라보았지만 칠흑같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런데도 그녀의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다.“구승훈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그렇게 물으면서도 그녀의 마음속엔 서늘한 감각이 일렁거렸다.‘여초연이 사람을 보내 감시하는 걸까?’구승훈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돌아서서 차 쪽으로 걸어가더니 쓰레기통을 지나칠 때 입고 있던 외투를 망설임 없이 벗어서 던져 넣었다.“신경 많이 쓰셨네요. 굳이 같은 걸로 사 오시고.”임희주는 입술을 벙긋하며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물론 구승훈도 그녀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던 터라 말을 마친 후 그대로 차를 몰고 떠났다.임희주는 구승훈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무의식적으로 다시 그늘진 곳을 바라보았다.여전히 깜깜한 밤이었지만 그녀는 저쪽에서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그저 단순한 의심이었다.정신과 의사로서 이러한 심리적 작용에 휘둘려선 안 되지만 여초연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았다.원래도 충분히 사람을 보내 그녀를 감시할 만한 사람이라고 의심했는데 이 순간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자신과 구승훈 중에 먼저 백기를 들 사람은 당연히 구승훈이라고 생각했다.그녀가 구승훈 곁에 있으면서 계속해서 이간질하면 언젠가 강하리가 이혼을 제기할 것이고, 강하리가 이혼을 고집하는 한 구승훈은 불안할 수밖에 없으니까.초조해지면 당연히 한발 물러서 손을 잡으려 할 거다.물론 구승훈이 이혼할 의향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말이다.한배를 타는 것보다 구승훈과 단단히 엮여있는 게 더 좋았다.그런데 강하리가 연성에 다녀온 이후 태도가 180도 바뀔 줄이야.강하리는 그녀가 구승훈 곁에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걸 보면서도 이혼을 제기하지 않았고 임희주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그녀는 황급히 어두운 쪽을 힐끗 쳐다보다가 차로 뛰어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한 인물이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강하리는 도착한 전문과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가려 했다.그런데 이제 막 그들과 얘기를 끝마칠 무렵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하리야!”강하리의 걸음이 멈칫하며 다가온 상대를 보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선배?”강하리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놀라움이 묻어났다.주해찬을 여기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오랜만에 만난 주해찬은 예전의 따뜻하고 쾌활한 모습을 되찾은 듯했다.그는 미소를 머금은 눈으로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전문가분들과 함께 온 거예요?”주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로키 선생님께 연락할 때 나도 옆에 있어서 같은 비행기 타고 왔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한 뒤 강하리에게 전문가들의 경력에 대해 소개했고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갔다.문득 출입구에 다다랐을 때 강하리는 발걸음이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주해찬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왜 그래?”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요.”강하리의 차가 떠난 뒤에야 구승훈은 담배를 끄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노진우가 다소 걱정스러운 마음에 따라가려 했지만 갑자기 그의 걸음이 멈추며 그가 고개를 돌렸다.“왜 날 따라와? 너한테 준 임무가 뭔지 잊었어?”남자의 목소리는 싸늘했다.조금 전 그 장면은 구승훈이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는 노진우도 마음이 불편했다.구승훈은 그들 모녀의 안전을 위해 홀로 여초연과 싸우면서 평생 몸이 회복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짊어지고 있는데, 정작 그녀는 주해찬을 맞이하기 위해 한밤중에 공항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다니.원망스러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다.어쨌든 두 사람은 아직 이혼하지 않았으니까.“대표님 모실게요.”오랫동안 구승훈 곁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노진우는 그의 명령에 반기를 들었다.그는 말을 마친 뒤 구승훈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고집스럽게 구승훈 옆에 서 있었다.구승훈은 비웃
게다가 손에 든 보고서에 대해선 더더욱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주해찬의 입꼬리가 얕게 올라갔다.이 여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사실 이번에도 마침 강하리가 전문가를 찾는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고 찾아온 건 아니었다.이모를 통해 강하리의 결혼식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 들은 그는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아직도 병원에서 강하리가 망설임 없이 구승훈을 택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그녀는 언제나 망설임 없이 그 남자를 향해 달려가지만 모든 것을 내어준 뒤 또다시 깊은 상처를 받았다.이대로 무너진 그녀가 다시는 이겨내지 못할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주변에서 말려도 꿋꿋이 돌아왔다.오로지 그녀가 잘 지내는지 보기 위해.하지만... 지금 주해찬은 웃고 있다.이게 무슨 감정인지는 모르겠다.훌륭한 후배를 둔 것에 대한 뿌듯함?귀하게 자라야 할 여자가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진 것에 대한 안쓰러움?아니면 그녀에게 더 이상 자신이 필요 없는 것 같아 느껴지는 허탈한 좌절일 수도 있다.강하리는 전문가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준 뒤 주해찬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가는 동안 주해찬은 그녀에게 유학 시절에 있었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과거나 결혼식에 대해 그가 물어볼 줄 알았는데 주해찬은 일절 말이 없었다.단지 주씨 가문 앞에 차가 멈춰 섰을 때쯤 그가 말했다.“연말에 같은 과 선배가 파티를 연다는데 그때 같이 가자.”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고 주해찬은 그녀가 차를 돌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한참 멀어진 뒤 문득 상대를 불렀다.“하리야.”강하리의 차가 속도를 줄이며 멈췄다.주해찬은 다가가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조심히 가.”강하리는 창을 내리고 손을 흔들었다.늦은 밤이라 도로가 유난히 조용했지만 도시는 여전히 환한 불이 켜져 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운전했다.연말이 가까워진 시점이라 거리에는 아직 문을 연 가게들이 많았다.한 여자가 명품 매장에서 남자에게 목도리를 둘러주고 있는데 문득 강하리가 차 속도를 늦추었다.결국 그녀는
강하리는 손목을 잡은 손을 바라보다가 다시 침착하게 시선을 들어 구승훈의 두 눈을 마주했다.눈앞의 남자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어서 기쁜 건지 화난 건지, 슬픈 건지 속상한 건지 알 수 없었다.강하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가볍게 웃었다.“그게 구 대표님과 무슨 상관이죠?”구승훈은 마음이 답답했다. 그는 언제나 여자의 말 한마디에도 말문이 턱 막혔다.본인이 먼저 손을 놓아버렸으니 물어볼 자격이 없다는 걸 잘 알지만 여전히 강하리의 손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단호하게 결심을 내렸던 만큼 미련이 그득했다.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코트 주머니에서 벨벳 상자를 꺼내더니 이렇게 말했다.“생일 선물로 주려고 얼마 전에 낙찰받은 거야.”강하리의 시선이 상자로 향하며 이렇게 대꾸했다.“필요 없어.”구승훈이 손아귀에 힘을 주자 강하리는 손목에 전해지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그녀는 다쳐도 상관없다는 듯 그의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금 더 세게 몸부림쳤다.“하리야...”“구승훈!”강하리의 눈에는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애초에 그런 결정을 내렸으면 다신 날 찾아오지 마. 힘들게 마음먹고 놓아줬는데 왜 계속 날 찾아오는 거야. 나는 뭐 힘들지 않은 줄 알아? 아니면 난 이런 고통을 겪어도 싸다고 생각하는 거야? 구승훈, 제발 나 좀 그냥 내버려둬!”강하리의 말이 떨어지자 구승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더니 강하리의 손목을 천천히 놓아주었다.“미안, 일찍 자.”말을 마친 그가 뒤돌아 가버렸고 엘리베이터가 마침 도착했다.문이 열리고 구승훈이 안으로 들어서기까지 불과 몇십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힌 뒤에야 강하리는 힘이 풀린 듯 벽에 기대었다.그런 말을 뱉고도 마음이 괴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하지만 그것 말고는 뭘 할 수 있겠나.차라리 구승훈이 예전처럼 냉정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으면 좋겠다.그러면 무의미한 갈등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니까.아무리
서둘러 문제를 해결하고 강하리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가볍게 미간을 누르던 그가 잠시 후 나지막이 말했다.“백화점에 가서 아무 장신구나 하나 사서 임희주에게 보내. 크리스마스에 나랑 같이 비즈니스 파티에 참석하라고 해.”준봉은 얼굴을 찌푸렸다.“하지만 대표님, B시 비즈니스 파티에는 사모님도 무조건 참석할 텐데요.”구승훈의 다리에 얹은 손이 움찔하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신경 안 쓸 거야.”지금 그와 임희주가 함께 들락날락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준봉은 문득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강하리는 밤새 서재에서 자료를 보다가 날이 밝을 무렵 가정부에게 연정이를 심씨 가문으로 보내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회사로 달려갔다.연말이 다가오면서 회사에도 일이 많아졌다.그런데 회사 입구에 막 도착했을 때 길 건너편 정안 건물에서 서둘러 걸어 나오는 사람들이 몇 명 보였다.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각자 엎거나 들고 있었는데 심각한 다친 것처럼 보였다.보이는 얼굴마저 푸른 멍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그녀가 다가가기도 전에 구승재가 안에서 황급히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그는 재빨리 문 앞에 주차된 마이바흐 차량으로 걸어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구승훈은 천천히 걸었지만 엉망진창인 모습을 감추지는 못했다.그의 몸에 걸친 옷은 어젯밤과 똑같았고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으며 항상 꼼꼼하게 손질하던 머리도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강하리의 숨이 턱 막혔다.분명 새벽까지만 해도 구승훈이 멀쩡했는데 헤어진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사이에 왜 이렇게 된 걸까.강하리의 입술이 움찔하며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찰나 구승훈이 갑자기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환한 아침 햇살 속에서 남자는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추운 겨울인데 강하리는 그의 얼굴에 뒤덮인 땀방울이 보였다.마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참는 것 같았다.그녀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지만 구승훈
강하리의 입꼬리가 파들 떨렸다.이유는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웃음이 났다.조금 전 당황했던 자신이 퍽 우스웠다.“이미 결정했다면 그렇게 해.”어차피 그녀는 남자의 결정을 바꿀 수 없으니까.“그러면 오늘 오후 2시에 법원 앞에서 기다릴게.” 구승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유로웠고 강하리는 시선을 바닥으로 보내며 대꾸했다.“오후에 바빠. 내일 오전 10시로 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전화를 먼저 끊었다.아직 출근 시간 전이라 회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했고 강하리는 한참을 자리에 앉아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휴대폰을 잡은 손이 살짝 떨리더니 이내 웃음이 터져 나왔다.나중에 병원 측에서 다시 연락이 왔지만 그쪽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그러다 안예서가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전했다.“대표님, 혹시 인수 때문에 연성으로 가시는 거예요? 제가 어떤 서류를 준비해야 할까요?”그제야 강하리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그녀는 시계를 보고 벌써 열한 시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안예서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아니야. 이번엔 개인적인 일로 가는 거야.”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짐을 챙겨 몇몇 전문가들이 묵고 있는 호텔로 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한 후 함께 연성으로 향했다.노민준의 연구실에 온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전문가들은 지체하지 않고 도착하자마자 노민준과 토론을 진행했고, 강하리는 소파에 앉아 무심코 잡지를 넘기며 저쪽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경청했다.휴대폰에 여러 개의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지만 강하리는 슬쩍 보고는 이내 휴대폰을 치워버렸다.굳이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임희주가 보낸 것이니 보지 않아도 내용은 뻔했다.기껏해야 그녀를 조롱하면서 과시하는 말들이겠지.강하리는 조용히 번호를 차단했다.“수고했어요.”문득 노민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강하리가 고개를 들고 웃었다.“그건 제가 할 말이죠. 그동안 그 사람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저는 부담만 줬네요.”노민준은 얼굴을 찡그렸다.“
강하리가 시선을 바닥으로 보냈다.“제가 직접 하고 싶어요.”이를 본 최하영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녀에게 당부했다.“그럼 이따가 조심해요.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날 부르고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최하영과 함께 파티장으로 들어섰다.두 사람은 입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강하리와 최하영이 함께 등장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두 사람의 모습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애초에 강하리와 구승훈의 열애설이 연성에서 큰 이슈가 됐던 데다,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면서 강하리와 최하영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자연히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안현우는 사람들 틈에 서서 두 사람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역시 천박하다니까. 구승훈과 헤어지자마자 최하영에게 들러붙네.”그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강하리를 바라보는 눈빛이 살벌하게 번뜩였다.강하리도 당연히 안현우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저 조용히 최하영을 따라다니며 사교를 이어갔다.한바탕 대화를 나눈 후 강하리는 다소 술기운이 오른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바깥 복도로 나갔다.안현우는 강하리가 혼자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와인 잔을 비우고 강하리를 따라 나갔다.그런데 그가 막 밖으로 나왔을 때 강하리의 목소리가 들렸다.“기명 사건은 이제 포기해요. 애초에 우리의 목적은 기명 제약이 아니었고 그건 단지 눈속임이라는 걸 잊지 마요. 성동 지역 땅만이 우리의 진짜 목적이에요.”상대가 무슨 말을 하자 강하리가 피식 웃었다.“삼촌이 곧 그쪽 땅을 개발한다고 알려줬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투자 규모가 크진 않아도 손에 넣으면 반드시 배로 뛸 테니까. 게다가 이미 최 대표님과 얘기 끝났어요. 최씨 가문과 협력하면 손에 넣는 건 시간 문제죠.”안현우의 눈에서 어두운 빛이 번쩍이며 가슴 속에 울화가 치밀었다.‘기명 제약이 사실은 강하리의 연막작전이라니, 젠장!’기명 제약을 손에 넣기 위해 수백억을 들이부었던 안현우는 강하리의 뒷모습을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
강하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후에야 구승훈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익살스러운 미소가 남아 있지 않았다.“여진 쪽은 어떻게 됐어?”그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준봉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출시일이 확정됐습니다. 에비뉴보다 하루 빠릅니다.”구승훈은 손에 불경스러운 듯 염주를 굴리며 냉소를 지었다.“승재와 천아름 쪽에 협조 잘하라고 전해.”“네.”준봉이 재빨리 대답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 사실 이 일은 사모님께도 일부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용히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준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은 항상 그랬다. 강하리를 도와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다.‘정말 답답해.’여진 주얼리는 지난 몇 년간 에비뉴와 계속해서 대립해 왔다.겉보기에는 구씨 가문이나 강하리와 아무 관련 없는 작은 회사처럼 보이지만 이런 작은 회사들이 대형 브랜드의 모조품을 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하지만 여진 주얼리는 단순한 모조품에 만족하지 않았다.작년에 해외에서 에비뉴 주얼리의 표절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배후에는 여진 주얼리가 있었다.그 사건으로 여진 주얼리는 큰 이득을 봤고 에비뉴는 큰 타격을 입었다.그 후 여진 주얼리는 더욱 탐욕스러워졌다.사람이란 달콤한 맛을 보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여진 주얼리는 에비뉴에게 항상 위험 요소였다.구승훈은 에비뉴를 강하리에게 넘긴 이상 그녀에게 어떤 위험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대표님, 상대방의 배후 세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대놓고 에비뉴를 도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뭐? 지금 내가 잃을 게 뭐가 있다고?”준봉은 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강하리가 때린 따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강렬했다.그러자 구승훈의 뺨에는 순식간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천아름은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이내 강하리를 향해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잘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맞아야 해. 제대로 한 대쯤은 맞아 봐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좀 깨달아야 해.’천아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통쾌해했다.한편 구승훈은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스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강하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눈엔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그는 목울대를 두 번 삼킨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를 봐서... 토한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지만 더는 이 남자 앞에서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었다.“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요.” 강하리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구승훈의 눈에는 오히려 그 말이 묘하게 따뜻하게 비쳤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들었다.‘적어도 하리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긴 한 거잖아. 미움이든 혐오든... 감정이 있는 한 아직 끝은 아니겠지.’그는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강하리의 입가를 닦아주었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를 스치고는 가볍게 떠났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쓸쓸하게 웃었다.“불쾌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하리야, 미안하지만 다신 안 나타날 수는 없을 거 같아. 난 그건 못 해.”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화장실을 나갔다.순간, 화장실 안은 적막 속에 잠겼다.강하리는 다시금 구역질했고 천아름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밖에서 구승훈은 그녀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얼마 후, 급히 달려온 준봉의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