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말 없이 그 자리에 서서 시선을 구승훈 옆에 앉아 있는 어린 여자에게 옮겼다.이보다 더 명백할 수는 없었다.‘당신도 결국 그렇게 놀려고 나온 거 아닌가?’이때 어린 여자는 적대적인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구 대표님, 이분은 누구예요?”구승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으로 강하리를 계속 바라보았다.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옆에 앉아 있는 어린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나가.”그의 말이 끝나자 어린 여자는 순간 멍하니 앉아 있었다.“구 대표님, 무슨 말이에요? 저는...”“꺼지라고! 못 알아들어?”얼굴이 창백해진 어린 여자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그 여자가 떠나자 구승훈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이리 와.”강하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의 옆에 다가가 앉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행히 구승훈도 더 강요하지 않았다.그는 비웃음을 날리더니 몸을 일으켜 강하리의 앞에 다가왔다. 그런 다음 강하리의 옆에 서 있는 어린 남자에게 시선을 옮겼다.“강 부장, 이런 스타일 좋아해?”눈앞에 이 남자는 흰 피부에 깔끔하고 청량한 느낌의 꽤 괜찮은 외모였다. 구승훈의 주위에서 점점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강하리는 입술을 움찔거리더니 2초 동안 아무 말도 안 하다가 입을 열었다.“안 좋아해요.”구승훈은 싸늘한 눈썹을 치켜올리며 표정을 조금 부드럽게 푸는 듯싶더니 다음 순간 더욱 일그러졌다. 그는 강하리의 목덜미를 잡으며 그녀의 고개를 강제로 들어 올렸다.“그렇게 급하게 이사를 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야?”강하리는 그에게 잡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촉촉하게 젖어 드는 눈으로 앞에 있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구승훈 씨, 이 남자는 당신 동생이 일부러 나한테 붙여놓은 사람이에요.”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더니 차가운 비웃음을 날렸다.“넌 언제 또 구승현하고 엮인 거야? 구승재 한 명으로는 부족해서 또 구승현을 꼬신 거야?”“그런 거 아니에요.”
안현우는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이 답답해져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앞으로 다가가 어린 남자를 한 번 더 발로 찼다. 그제야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강하리를 찾아가 일을 만들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의 마음속에서 악마처럼 자라났다.아무리 노력해도 막을 수가 없었고 안현우를 끔찍하게 괴롭혔다. 그리고 더욱더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그는 강하리와 구승훈의 갈등에 대해 어느 정도 들었다. 원래 그는 강하리가 구승훈을 떠나면 그녀를 자기 손에 넣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호스트바 선수를 만나면 만났지 그를 찾지 않았다.안현우는 너무 화가 나서 어린 남자를 또다시 발로 찼다.빌어먹을 년!구승훈은 강하리를 데리고 바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녀를 차에 태운 후 그는 비웃음을 날렸다.“강 부장은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어.”강하리는 침묵을 지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늘 밤 일어난 일에 대해 그녀는 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구승훈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하리는 알고 있었다.“왜 로열 클럽으로 온 거야?”“우리 부서 연말 회식이었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고 구승훈은 또 차가운 웃음을 터트렸다.“그럼 너희 부서는 평소 회식을 이렇게 해?”강하리는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더 말하지 않았고, 구승훈도 그녀를 바라보다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집에 돌아오자마자 구승훈은 강하리를 침대 위로 밀었다.“강 부장, 내가 널 만족 시키지 못했나?”강하리는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승훈 씨, 오늘 밤 일어난 일은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아요.”구승훈은 차갑게 웃었다.“정말 네 탓이 아니야? 그럼 왜 구승현이 다른 사람한테는 남자를 붙여주지 않은 건데?”강하리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이 들었다.“승훈 씨, 난 당신의 애인일 뿐이지 와이프가 아니에요. 당신이 뭔데 내 주위에 이성이 하나도 없길 요구하
구승훈은 그녀의 허리를 잡고서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보기 드문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다.강하리는 그의 얼굴에 나타난 부드러움을 보고 순간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그녀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웃었다.“대표님, 설마 후회하는 거예요?”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본 뒤 놓아주고서는 그녀의 옆에 기대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강하리 지금 내가 너 자존심 상하지 않게 양보하는 거야. 정말로 돌아오지 않을 거야?”“네.”그녀는 말을 마친 뒤 문을 열고 바로 집을 떠났다. 구승훈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잠시 후 그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오늘 밤 구승현 이름으로 된 모든 재산을 회수해.”전화를 끊은 뒤 구승훈은 창가에 서서 이미 아래로 내려간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밤거리를 걸어 점점 시야에서 사라졌고, 구승훈은 그제야 담배를 피웠다.그는 원래 강하리를 밖에서 며칠 동안 쉬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 일 때문에 그는 강하리를 밖에서 지내게 한 것을 후회했다. 카나리아는 카나리아다워야 한다.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고서는 야경을 바라보다가 잠시 후 다시 전화를 걸었다.강하리는 돌아온 뒤 씻고 바로 잠에 들었다.다음날 그녀는 핸드폰 벨소리에 의해 잠에서 깨어났다. 비몽사몽 핸드폰을 확인한 강하리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정서원의 주치의 전화였다.순식간에 졸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선생님, 무슨 일 있나요? 혹시 저희 엄마한테...”“아니요.”의사의 대답에 강하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무슨 일이죠?”“그게 강하리 씨 어머니께서 사용하는 약은 사실 가격이 엄청 높은 것입니다. 전에는 구 대표님 때문에 약들을 전부 할인해 드렸는데 지금 구 대표님의 뜻은 앞으로 약들을 강하리 씨에게 할인해 드릴 필요가 없다고 하셔서요.”강하리는 순간 깜짝 놀라 전화기를 잡은
강하리는 더 이상 구승훈과 송유라의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강하리는 정서원의 손을 잡고서는 어쩔 수 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엄마, 빨리 일어나 봐요. 네? 나... 조금 힘들어요.”강하리는 말을 한 후 눈물을 흘렸다. 손을 올려 눈물을 닦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다행이에요. 사실 3년 동안 쭉 한 사람이 도와줬어요. 그 사람 이름이 구승훈인데 엄마도 기억나요? 어렸을 때 우리 어촌마을에서 살았잖아요. 그때 울보였던 남자애예요. 근데 지금은 엄청 대단한 사람이 됐어요. 엄마 깨어나면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근데... 그 사람은 우리를 기억하지 못해요.”그녀는 웃으며 정서원의 손을 쓰다듬었다.“어차피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는 꼭 일어나야 해요. 늦어도 상관없어요. 그냥 날 혼자 버려두지 마세요...”정서원의 병실에서 나온 뒤 강하리는 의사에게 가서 병원비 청구서를 받은 뒤 수납하러 갔다. 자기 카드 안에 있는 모든 돈을 다 병원비로 냈고 모든 일을 끝마친 그녀는 그제야 병원을 나섰다.병원 입구까지 걸어왔을 때 우연히 심준호를 만났다.“하리 씨.”심준호의 불음에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심 대표님,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심준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에게 물었다.“울었어요?”강하리는 다급하게 눈을 피했다.“아니요. 방금 바람이 너무 강하게 불어서요.”심준호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하리 씨,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럽긴 하지만 날 친구라고 생각해요. 아니면 인생 선배라고 생각해도 좋고요. 안 좋은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도 돼요.”강하리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방금 엄마를 보고 와서 조금 기분이 안 좋았던 것뿐이에요.”심준호는 당황했다.“그렇군요. 어머님이 이 병원에 입원해 계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려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확인해 보니 손연지의 전화였다. 그녀는 조금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심 대표님, 죄송하지만 제가 일이 좀 있어서
강하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구승훈이 이 문제로 꼬투리를 잡을 것이라는 걸 예상했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이 남자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조금의 퇴로도 남겨주지 않을 작정이었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말했지만, 대표님이 동의하지 않았잖아요.”구승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떴다.“강 부장, 애초에 별장을 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진실을 알아봐달라고 한 거 아닌가? 이제 진실도 알았으니 별장을 갖고 싶은 거야? 그건 좀 아니지 않아?”그는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아무런 온도도 없었다.“승훈 씨.”강하리는 가슴속에서 전해져 오는 고통을 참으며 눈앞에 남자를 바라보았다.“그 별장은 내가 내 아이의 목숨으로 바꿔온 거예요.”그 순간 구승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입을 열었다.“강하리, 나하고 이런 감성팔이 할 필요 없어. 나는 그 아이 신경도 안 쓰니까.”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잠시 후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그렇다면 나도 더는 승훈 씨의 소유가 아니겠네요. 어차피 이 세상에 돈 많은 사람은 많아요. 승훈 씨 당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부자가 아니라고요. 내가 마음먹고 열심히 찾아보면 언젠가는 날 기꺼이 도와줄 사람을 찾을 수 있겠죠.”구승훈의 얼굴이 바로 어두워졌다.그의 차가운 시선이 강하리에게 향했고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강하리, 다시 말해 봐.”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싸늘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런 말들이 분명 이 남자를 화나게 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또한 그녀가 그의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지도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조금 흔들기라도 하면 그녀는 최선을 다해 버텨야 했다.하지만...“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해요. 승훈 씨, 나도 그냥 잘 살아가고 싶을 뿐이에요.”그녀는 더 이상 이 남자에게서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결과가 없는 이 감정의 늪에 빠져들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강하리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어젯밤 그로 인한 아픔이 아직 가라앉지도 않았다.그러나 다행히도 구승훈은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고 그저 그녀에게 두 번 정도 입을 맞춘 뒤 놓아주었다.퇴근하기도 전에 전담 비서는 절차를 끝내놓았다.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부동산 등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느끼고 있는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며 서류를 챙겨 부동산으로 향했다. 그녀를 맞이한 직원은 며칠 전 그녀에게 월셋집을 소개해 준 사람이었다.그 직원은 강하리가 들고 온 부동산 등기부등본을 살피더니 깜짝 놀라며 말했다.“강하리 씨, 이렇게 큰 별장이 있으면서 왜 월세에서 살아요? 설마 별장에서 지내는 게 불편한가요?”강하리는 더 설명하지 않았고 그저 최대한 빨리 구매자를 찾아달라고 당부했다.“강하리 씨가 소유한 별장은 위치도 워낙 좋고 시설도 좋아서 부동산 시장에서도 최상급의 매물이에요. 그리고 하리 씨가 정한 가격도 비싸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 소식이 전해지면 몇 분 안에 구매자가 나타날 겁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인 뒤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부동산을 나왔다.집에 도착했을 때 주해찬에게서 전화가 왔다.“하리야, 박 교수님께서 너와 식사 함께 하고 싶으시다는데 시간 있어?”강하리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좋아요.”박근형은 지난번 강하리를 만난 뒤로 계속 잊지 않고 있었다. 사실 외교부 통역실에는 사람이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하리처럼 모든 외교부의 통역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이런 사람을 외교부에서 잡지 않는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그래서 박근형은 줄곧 강하리와 외교부가 협력하길 바랐다. 지금 바로 그녀에게 외교부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협력이라면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강하리는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했고 주해찬과 박근형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강하리가 온 것을 발견한 박근형의 눈빛이 순간 밝게 빛났다.“드디어 널 만나는구나.”강하리는 미소를
강하리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사실 그녀와 구승훈의 관계는 그가 그녀에게 잘해주는지 아닌지에 관해 얘기할 사이가 아니었다. 결국 그들 사이는 거래일 뿐이기 때문이다.“네, 그럼요.”강하리는 웃으며 대답했다. 적어도 지난 3년 동안 두 사람은 꽤 즐겁게 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해찬은 강하리의 눈빛에 깃든 상실감을 알아차렸다.그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묻고 싶었지만 어떻게 물어봐도 황당하게 느낄 것 같았다.긴 침묵이 흘렀고 그제야 그는 입을 열었다.“하리야, 나 쭉 너 좋아했어.”주해찬은 정말 큰 용기를 내어 말했다.그는 3년 동안 강하리를 찾았고 3년 동안 그녀를 기다렸다.강하리가 갑자기 그에게 연락했을 때 그가 얼마나 기뻤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도 지금 이런 순간에 이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자기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녀의 대답을 듣지 못하더라도 그녀에게 주해찬이라는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만약 그 남자가 그녀에게 못 해준다면 그녀가 자기에게 와주길 바랐다.그는 그녀를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모두 그녀 앞에 가져다줄 것이다.강하리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선배님, 전 좋은 여자가 아니에요. 선배님은 더 좋은 사람 만나세요.”강하리는 위선을 부리지 않고 그저 자신의 속마음을 얘기했다. 그녀의 지금 상황은 어떤 여자가 겪더라도 좋은 경험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녀의 신세를 깨끗하다고 말하기도 힘들었다.그녀는 여전히 구승훈과의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구승훈이 그녀에게 계약이 끝났다고 하기 전까지 그녀는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주해찬은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심지어 가문까지 미래가 아주 탄탄했다. 정말 좋은 여자와 어울리는 남자였다.하지만 강하리는 이미 소문까지 안 좋게 나 있었다.주해찬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하리야, 내가 너한테
“오늘 드디어 집을 보겠다는 분이 계세요. 하리 씨, 꼭 시간 맞춰서 오셔야 해요.”강하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네,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강하리는 서둘러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사람과 마주한 강하리는 얼굴이 단번에 하얗게 질렸다. 다름 아닌 김주한이 별장 문 앞에 서서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하리는 애써 자신의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말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김 대표님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김주한의 탐욕스러운 눈길이 강하리의 몸에 머물렀다.“당연히 집 보러 왔지. 왜, 깜짝 놀랐어? ”저번에 그는 거의 강하리를 취하게 만들 수 있었는데, 구승훈이 때마침 들이닥치는 바람에 일을 망쳐버렸다. 이 몇 개월 동안 그는 계속 마음이 근질거렸지만, 구승훈이 두려워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 강하리와 구승훈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주한은 과연 이번에도 이 빌어먹을 여자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지 지켜볼 참이다.“김주한 씨도 저와 승훈 씨의 관계를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강하리는 등골이 오싹해 났지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자 김주한이 픽 웃으며 말했다.“강하리, 너와 구승훈 사이가 틀어진 걸 내가 진짜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이를 꽉 깨문 강하리는 태연한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누가 그래요. 우리 사이가 틀어졌다고? 그냥 재미 삼아 장난치는 건데 설마 김 대표님께서 그런 것도 모르실 리는 없겠죠? 아니면 제가 지금 당장 승훈 씨한테 전화해서 증명이라도 해드릴까요?”말을 하던 강하리는 김주한을 앞에 두고 바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쪽에서 전화를 받기도 전에 김주한이 냉큼 다가와 강하리의 휴대폰을 빼았아 땅바닥에 집어 던졌다.김주한은 이를 뿌드득 갈며 강하리의 목을 졸랐다. 그는 구승훈을 정말 두려워했다. 그 남자는 냉혹하고 무자비했으며 일 처리를 함에 있어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