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의야.”“네, 엄마.”“가... 하, 의.”“네 엄마. 저 여깄어요.”병실 안.강하리가 굳은 엄마의 손가락을 꼭꼭 눌러주고 있었다.정서원의 눈길은 그런 딸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이따금씩 딸을 불러보려 입을 열었지만, 하도 오래 쓰지 않은 혀가 말을 잘 듣지 않았다.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엄마가 깨어났는데.따뜻하게 웃으며 이렇게 부를 수도 있는데.강하리는 엄마의 부름소리가 들릴 때마다 또랑또랑 대답해 주었다.문득, 엄마가 반대쪽 손을 들어 병실문 유리창에 비치는 뒷모습을 가리켰다.강하리는 문득 코끝이 찡해났다.엄마 옆에 기대앉아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구승훈이 아직 안 간 건 진작부터 알고있었다.그렇다고 달라지는 게 뭐가 있을까.송유라가 일이 생기기만 하면 둘의 관계에 깊은 골짜기가 쩍쩍 파이는데.정승처럼 병실 문앞을 지키고있는 구승훈.그 앞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구승훈을 보고는 흠칫했다.늦게나마 소식을 듣자마자 만사를 제치고 부랴부랴 달려온 손연지였다.“안녕하세요 구 대표님.”구승훈이 송유라를 정신병원에 보낸 걸 알고있는지라, 모처럼 구승훈을 향해 날을 세우지 않는 손연지.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이 없었다.왜 안 들어가냐고 물으려다가 꾹 참은 손연지가 구승훈을 에돌아 병실 문을 떼고 들어섰다.닫히는 문틈으로 강하리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아마 네가 어떻게 왔냐고 묻는 말일 거다.이윽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구승훈은 꿈쩍도 않고, 병실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서 있었다.“형! 역시 여기 있었네.”승재가 부랴부랴 달려왔다.“송유라가 또 날뛰고 있어. 형 만나겠다면서 병실 안을 다 뒤집어놨어.”“송씨 집안 그 메디컬사 자금 지원 끊어버려.”구승훈이 서늘한 목소리로 분부를 내렸다.강하리에게 진 빚을 송유라가 갚지 못한다면, 그 집안이라도 대신 갚아 줘야지.누군가는 갚아야 하는 거니까.승재가 멈칫했다가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형, 그러잖아도
구승훈이 냉소를 머금었다.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피어나기 시작했다.아예 강하리와 완전히 갈라서라는 건가?“아닐 거야 형. 누군가가 연지 씨한테 덤터기 씌운 게 분명해.”승재가 급급히 덧붙였다.구승훈은 말없이 꾹 닫힌 병실문을 바라보다가, 한쪽 켠으로 멀어져갔다.“저 두 사람 나와 보라고 해.”구승훈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승재가 병실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유리창으로 승재를 본 강하리가 문을 열었다.“승재 씨? 어쩐 일이에요?”의아한 강하리의 얼굴. 승재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강 부장, 잠시 나와볼 수 있을까요?”거절하려던 강하리가 승재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와 문을 닫으려는 순간.“연지 씨도 함께요.”강하리가 멈칫했다. 연지는 왜?갑자기 불안한 느낌이 급습했다.“뭐가 잘못된 거예요?”“일단 같이 저 쪽으로 가서 천천히 얘기해요.”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지를 불렀다.세 사람은 병원을 나서 근처 한 카페에 들어갔다.구석진 자리에 한없이 어둡기만 한 얼굴을 한 구승훈이 보이자, 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칫했다.“이번에는 수작질 아니에요! 진짜 중요한 일이에요!”승재를 돌아보자 황급히 손사래를 치는 승재.그제야 강하리는 손연지를 이끌고 구승훈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무슨 일이죠?”구승훈 옆에 앉은 승재가 자초지종을 얘기하기 시작했다.불쑥 튀어나오는 자신의 이름에 손연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무슨 그런 미친! 내가 왜 돈까지 들여가며 그 싸구려 년을 죽여야 해요? 정신병원에 처박혀서 찌그러지는 걸 보는 게 더 후련한데?”승재의 미간이 꿈틀했고, 강하리는 구승훈을 돌아보았다.손연지는 어젯저녁에 보경시에서 있었던 일을 몰랐다.때문에 자연스레 송유라의 말로가 정신병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고.하지만 강하리 자신은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지옥 끝에서라도 수작질을 꾸밀 송유라란 걸.타이밍 역시 너무나도 공교로웠다. 어제 구승훈과 그런 얘기를 하기 바쁘게 단서들이 손연지를 향하다니.
썩 유쾌하지 않은 대화는 손연지의 “내가 한 거 아니에요”로 마무리되었다.“가 보셔도 좋습니다, 연지 씨.”구승훈의 무거운 음성이 떨어지자 바람으로, 승재가 구승훈을 한 번, 강하리를 한 번 보고는 손연지를 이끌고 도망치듯 나갔다.“아닛, 이거 좀 놔 봐요! 하리! 하리는요?”“강 부장은 남아서 어떻게 해결할지 형이랑 상의해야 할 거예요.”손연지의 다급한 목소리에 승재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구 대표님이 하리를 정말 믿을까요?”“안 믿었으면 이렇게 조용히 대화할 게 아니라, 바로 경찰 불렀겠죠.”“하긴. 쓰레기가 일말의 양심은 있나 보네.”“...잠시만, 지금 그거 우리 형 얘기예요?”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손연지의 말에 흰자를 까뒤집는 승재.“왜요. 하리 그렇게 대해 놓고는 쓰레기가 약과지.”“...”할 말이 없다 없어....“그래서, 할 얘기가 뭐예요?”손연지가 승재와 떠난 뒤, 강하리가 입을 열었다.구승훈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넌 의심하지 않아. 하지만 손연지는 혐의를 벗을 수가 없는 상황이야.”“연지가 그런 애 아니란 거 잘 아시잖...”강하리의 외침이 뚝 끊겼다.생각해 보니, 구승훈이 손연지에 대해 잘 알 리 만무했기 때문.게다가 구승훈과 송유라를 볼 때마다 눈에 쌍심지를 켜던 손연지기도 했다.“내가 본 손연지 씨는 착한 사람이었어.”구승훈이 입을 다시 열었다.“하지만!”갑자기 온도가 뚝 떨어지는 구승훈의 음성.“성격이 불 같은 데다가, 송유라라면 치를 떠는 사람이기도 하지.”“그래서 지금, 연지가 송유라 같은 년 때문에 손 더럽히기라도 한다는 뜻인가요?”강하리가 기가 차다는 얼굴로 구승훈을 쏘아보았다.“혐의가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 부인할 수 있어?”구승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내가 제대로 조사해 낼 거예요!”“어떻게?”구승훈의 외마디 물음에 말문이 막힌 강하리.울화가 치밀어 가슴이 들썩였지만, 아직 그럴만 한 인맥과 세력이 없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내가
병원 청소부가 대걸레질을 하다가 잊고 간 양동이였다.대걸레를 빨고 그 대로 놓아둔.눈길을 걸어 병원에 오는 사람들이 남긴 시커먼 발자국을 닦던 대걸레였고.그걸 빤 양동이의 물은 거의 흙탕물 수준.그 오수가 신속하고 정확하게 병실 안, 송유라의 온 몸에 끼얹어졌다.시간이 정지된 듯 그 자리에 얼어붙은 송유라.거뭇거뭇한 액체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송유라 옆에 있다가 같이 봉변을 당한 장진영의 멍해진 얼굴에서도 흘러내렸다.병실 안 모든 사람의 얼빠진 눈길이 씩씩거리는 손연지에게 쏠렸다.“야 이 염통 썩어 빠진 썅년아! 엄한 사람 갈구는 게 재밌니? 사람 해치는 게 취미야? 니 부모님은 대체 똥을 얼마나 쳐 드셨길래 너 같은 희대의 악녀를 낳았냐? 너 같은 걸 그나마 사람 취급해 주는 구승훈이 부처님으로 다 보인다 야!”손연지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다발총 연사로 쏟아져 나왔다.온갖 방면으로 골고루 두드려 패는 욕설에 송유라의 동공에 9급 대지진이 일어났다.“이... 이 천박한 년이...”덜덜 떨리는 입술로 말을 차마 잇지 못하는 송유라.“이 미친 년이 감히... 물을 끼얹어? 이...벌레 같은 년이?”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안면이 푸들푸들 떨리기까지 했다.“끼얹고 보니 물이 아깝네! 요강 들고올 걸 그랬나?”한 술 더 뜨는 손연지.병실 안에 있던 노민우가 헤 벌어진 입을 황급히 닫았다.뭐지? 여건달? 산적 여두목?한 손으로 옆구리를 척 짚은 채 세상 들어본 적 없는 욕설을 퍼붓는, 전투력 만렙 손연지의 모습이 그의 눈에 맺혔다.“끼아아아악!”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장진영이 비명을 내질렀고, 날카로운 그 소리에 병실 안 일동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병실 밖에 마찬가지로 얼어붙었던 강하리가 부랴부랴 병실에 들어섰다. “참, 대단하네요. 강 경리 친구분.”강하리를 본 안현우의 입가에 보일락 말락 미소가 어렸다.강하리는 말 없이 손연지를 끌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병실 문에 기대 선 구승훈을 지나 병실을
“하, 하리야, 미안해. 내가 참았어야 하는 건데.”병원 입구에서 고개를 푹 떨구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 손연지.저지르고 보니 후회막심인 손연지였다.송유라 혼자만 있었다면 모를까, 하필이면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송유라를 막 대하는 게 두려운 건 아니었다.그 독사 같은 여자한테 꼬투리가 잡힌 게 걱정이었다.자신에게든 강하리에게든 독니를 박을 구실을 만들어준 셈이 되니까.“나 생각해 줘서 그런 거 다 알아. 하지만 다신 그러지 마, 응?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송유라’잖아.”강하리의 말에 손연지가 흠칫 몸을 떨었다.강하리에게 온갖 비인간적인 음모궤계를 퍼부은 송유라란 걸 너무나도 잘 아는지라,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나고 온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그런 손연지의 모습에 강하리가 빙긋 웃으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걱정 마. 네가 나 지켜줬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너 지켜줄 거야.”“미안해. 나 때문에.”“네가 뭐가 미안해. 오히려 미안한 건 나지. 걱정 말고 일찍 들어가서 쉬어.”“널 놔두고 어떻게 가.”송유라의 병실에 모여든 사람들, 그 사람들의 타깃은 누가 봐도 강하리였다.“괜찮아. 나는-.”바로 그때 그들 앞에 멈춰선 차 한 대.유리창이 내려갔고, 담배를 문 한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걱정 마. 구승훈이 있잖아.”딱 봐도 자신을 데리러 온 구승훈이었다.정말이지 엮이기가 싫지만, 앞서 한 약속에 묶인 몸이었다.“언제 돌아와?”손연지의 걱정스런 말투.“음, 엄마 돌봐드리느라 좀 늦을 수도 있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손연지는 시름이 놓이지 않았는지, 간병인 아줌마에게 꼭 귀띔해 줘라느니, 자기 전 문을 꼭 걸어 잠그라느니 부탁을 한가득 늘여놓으면서 떠났다.손연지가 떠나간 뒤, 강하리가 구승훈의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CCTV 보러 가자.”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구승훈의 음성이었다.그제야 강하리는 구승훈이 언제 갈아입었는지, 말끔한 정장 차림이란 걸 발견했다.은은한 우드향 향수 냄새까지 풍
이 말을 들은 강하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그녀만을 원한다면서 송유라를 놓칠 수가 없었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물었다.“구승훈 씨, 한 사람만 원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세요?”구승훈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오직 한 사람만 원하는 것이고 유일하다는 의미였다.강하리는 그가 지금까지 원했던 유일한 여자였다. 이건 무슨 일이 생겨도 바꿀 수 없었다. 그는 송유라를 원한 적도, 그녀를 곁에 두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가 그녀를 소중하게 대하는 건 단지 그 어린 시절의 작은 우정 때문이었다.그녀가 없었더라면 그가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좀 챙겨주는 것뿐이었다.“하리야, 나는 유라에게서 남녀 사이의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어.”강하리는 얼떨떨해졌다.남녀 사이의 정이 없었다고?“예전엔 연인이었잖아요.”구승훈의 눈빛에 냉기가 돌았다.“그때도 그저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어. 나는 유라에게 마음을 가진 적이 없어.”강하리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꽉 쥐었다.그녀는 구승훈의 말이 어디까지 진심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 몰랐다.하지만 그녀 눈에 보이는 건 바로 그가 송유라를 놓지 못한다는 것이었다.그녀는 더 이상 구승훈과 이런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대표님, 연지가 오늘 송유라에게 물을 뿌리는 건 단지 너무 화가 난 것 때문이지만 송유라가 저지른 일을 보면 물을 맞아도 싸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제발 송유라를 잘 챙기세요. 그리고 연지에게 불리한 일을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구승훈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친구 성격이 보통이 아니네.”강하리도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그녀는 손연지대신에 변명을 몇 마디 해주었다.“연지는 성격이 불같지만 무리하게 소란을 피운 적은 없어요. 연지가 오늘 이렇게 한 이유는 대표님께서 누구보다 잘 알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이렇게 화를 내는 건 단지 다른 사람이 그녀를 이용해서 저를 모함하기 때문이에요.”구승훈은 잠시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누군가가 손연지를 이용해 강하리를
연락처를 삭제한 그는 계속 강하리를 보고 있었다.강하리는 자신의 손을 빼며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전 신경 안 쓴다고 했어요.”구승훈이 웃으며 대답했다.“응,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그냥 네 손을 빌렸을 뿐이야.”강하리는 입꼬리를 오므리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정주현과 정양철을 만났다.정주현은 구승훈을 보고 말했다.“아이고, 구 대표님이 왜 여기 계세요? 구 대표님 첫사랑인 송유라 씨가 다쳤다고 들었는데 왜 보러 가시지 않고...”구승훈의 눈빛이 살짝 번뜩였다. 그는 강하리를 본 후 굳은 표정으로 정주현을 바라보았다.“소식이 빠르시네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당신이 유라를 짝사랑하는 줄 알겠어요.”정주현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제가 누구를 짝사랑하는지 모르시는 것도 아니고...”구승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 대표님을 좋아하시는구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정주현은 순간 이 남자의 뻔뻔함에 탄복했다.구승훈, 구 대표, 구 씨 집안의 권력자, 이 대단한 남자가 여기서 몇 마디로 질투까지 하다니.강하리는 두 사람의 말다툼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양철만 쳐다보았다.“정 이사님은 어디 아프세요?”정양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나이가 들면 여기저기 불편할 수밖에 없죠.”“방금 검사를 받았는데 큰 문제는 없고 모두 작은 병이래요.”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주현이 바로 옆에서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나이가 들수록 더 엄살이 심해서 그래요. 오늘 아침부터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검사해 봤는데 아무 일도 없었어요.”정양철은 발을 들어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정주현은 웃으며 그를 피해 강하리에게 다가와 말했다.“저녁에 같이 밥이나 먹을까요? 상의할 일이 있어요.”강하리는 생각 하지도 않고 승낙했다.구승훈의 안색이 변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들은 간단히 이야기하고 헤어졌다.강하리와 구승훈은 병원 보안실로 향했
하지만 그는 이 말을 강하리에게 하지 않았다.그렇지 않으면 강하리는 또 자신이 송유라를 보호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누가 CCTV에 손을 댔나요?”강하리가 옆에서 물었다.구승훈이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최대한 회복할 수 있도록 할게. 회복이 안 되더라도 은행 쪽에 물어보면 돼. 두 사람이 병원에서 은행으로 가는 길에 CCTV가 많이 있을 거야. 다 망가뜨렸을 리 없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의 말에 위로 됐다.“고마워요.”구승훈은 웃더니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잡고 그녀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두 사람의 자세는 순식간에 애매해졌다.그의 호흡이 그녀의 피부에 닿았다.“어떻게 감사해야 하지?”그가 나지막하게 물었다.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리를 들어 그의 발을 밟았다.“이렇게요.”구승훈은 아파서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 목표를 달성했으니 이젠 됐다, 이거야?”“대표님께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강하리는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그는 그녀를 차로 끌고 가며 말했다.“내가 데려다줄게.”말하다가 가는 잠깐 멈칫했다.“걱정 마, 병원에 데려다주고 갈게. 유라를 보러 가지 않을 거야. 하리야, 나랑 유라는 정말...”송유라 얘기를 꺼내자 강하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설명할 필요 없어요.”어쩌면 구승훈이 말했듯이, 그는 송하리와 사랑에 빠진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그녀도 구승훈이 이제 송유라를 귀찮아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는 송유라가 죽는 걸 지켜볼 수 없었다.그리고 송유라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그러니 언제든 송유라가 죽기 살기로 밀어붙이기만 하면 그는 항상 나타날 것이었다.어쩌면 구승훈은 진심으로 강하리와 화해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늘 송유라의 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 자리는 아무도 흔들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도 그녀의 표정을 보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설명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구승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물 흐르는 소리가 막 멈춘 참이었다.그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살균 티슈로 손을 닦는 강하리의 모습이 차가운 벽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조시욱 때문이야?”구승훈은 무릎을 꿇고 강하리 앞에 앉아 그녀의 턱을 잡아올렸다.“대답해 봐, 조시욱을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거냐고?”강하리는 고개를 쳐들며 비웃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묻는 건데요?”구승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휠체어를 돌려 화장실을 나서는 그녀의 등 뒤에서 구승훈은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구승훈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병실 문이 열리고 심준호와 백아영, 조시욱이 들어와서였다.구승훈을 본 심준호와 백아영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예전에는 무슨 일이 있든 심준호가 먼저 구승훈에게 상황을 묻고 강하리와 화해할 수 있도록 조율하려 했다.하지만 이번 일 이후 심준호는 단 한 번도 구승훈을 찾지 않았다.그건 구승훈에 대한 더 말할 나위 없는 실망을 의미했다.백아영은 당장이라도 구승훈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수십 년간 유지해 온 품격과 매너로 화를 억눌렀다.세 사람이 강하리와 함께 연정이 주위에 둘러앉자, 병실 한구석에 있던 구승훈은 마치 외부인 같이 느껴져 굳은 표정으로 병실을 나와 유리 창가에 서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뒤늦게 찾아온 심준호가 말을 꺼냈다.“일은 다 정리됐어?”구승훈은 낮게 대답했다. “거의.”비록 여초연의 주변이 완전히 정리되진 않았지만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이상 큰문제는 없었다.“하리랑 조시욱 일은 너도 알고 있겠지. 승훈아, 너한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제 그만 하리 인생에서 나가줘.”구승훈은 멈칫하다 이내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강하리 인생을 방해한다고? 준호야,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넌 알잖아, 어떻게 된 일인지.”“알면 뭐 하냐? 구승훈, 우리 하리가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그걸로도 부족해?”심
강하리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무의식적으로 구승훈을 밀쳐내려 했지만 연정이의 웃음소리에 잠시 망설였다.아직 열이 가시지 않은 구연정은 강하리와 구승훈을 보고 흥분했던 것도 잠시, 곧 다시 기운이 빠졌다.구연정은 힘없이 구승훈 어깨에 기댄 채 한 손은 구승훈의 옷자락을, 다른 한 손은 강하리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강하리를 바라봤지만 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그가 한숨을 내쉬며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의사가 검사 결과를 들고 들어왔다.“강 대표님, 아가씨는 현재 바이러스 감염으로 보입니다. 며칠 입원이 필요할 것 같아 이미 병실은 준비해두었습니다. 곧 간호사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수고 많으셨습니다.”병실에 도착하자마자 연정이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강하리는 침대 곁에 앉아 연정의 손을 꼭 잡고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은 다른 한쪽에서 의사와 연정이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의사가 떠난 뒤에야 그는 강하리 옆으로 돌아왔다.“의사 말로는 보기보다 심각하진 않대. 너무 걱정하지 마.”하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연정이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그녀 곁에 앉아 손을 잡으려 하자 강하리는 황급히 그 손을 빼냈다.“이제 돌아가요. 나랑 아주머니가 있으면 돼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조시욱이 오기 편하게 나더러 가라는 거야?”강하리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노려보다가 이내 비웃듯 말했다.“여기 남아 있으면 임 선생님이 화내지 않을까?”구승훈은 끝내는 강하리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임 선생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너 정말 나 못 믿는 거야?”그의 목소리엔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강하리가 이를 악물고 손을 빼내려 하자 구승훈이 낮게 말했다.“움직이지 마. 연정이 깼어.”강하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급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연정이는 여전히 곤히 자고 있었다.분노에 찬 강하리를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