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가 다시 깨어났을 땐 병원이었고 깨어난 그녀를 본 손연지는 황급히 물었다.“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의사 선생님이 가벼운 뇌진탕이래, 어지럽고 메스껍지 않아?”강하리는 살짝 멈칫하다 말했다.“아니, 난 괜찮아. 구승훈은 어딨어?”손연지는 그녀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다가 한참 만에야 말을 꺼냈다.“아주머니는 중환자실에 입원하셨고 구승훈도 다쳤어. 출혈이 심해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강하리의 심장이 철렁했다.“어디 다쳤는데? 지금 어디 있어?”다그쳐 묻던 그녀가 이불을 뒤척이며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자 손연지가 서둘러 말렸다.“아직 움직이지 마, 아직 안 깨어났어. 네가 가도 소용없어, 일단 의사 선생님 먼저 부를게.”손연지는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의사가 간단한 검사를 통해 괜찮은지 확인한 후에야 손연지는 그녀를 침대에서 내려오게 했다.“구승훈 씨한테 먼저 가 봐. 아주머니 쪽은 아직 면회 시간도 아니고 의사 선생님도 교대 중이라 당직 선생님 오면 가서 상황 물어보면 되잖아.”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잠시 후 이렇게 물었다.“의사 선생님이 엄마에 대해선 말씀하신 거 없어?”손연지는 고개를 저었다.“난 가족이 아니라 당장은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만 했고 자세한 건 네가 깨어나면 설명해 줄 거래.”강하리의 마음이 무거워졌다.“일단 구승훈 씨부터 보러 가야겠어.”구승훈의 병실은 건물 가장 안쪽 끝에 있었다.강하리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지만,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를 보자 가슴이 먹먹해지며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이 조여졌다.구승재는 강하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일어났다.“강하리 씨, 괜찮아요?”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쪽 형 상태는 어때요?”“비장이 파열돼서 피를 좀 많이 흘렸는데 큰 문제는 없고 아직 안 깨어났을 뿐이니 걱정하지 마요. 가서 말동무나 좀 해줘요. 난 나가서 통화 좀 하고 올게요.”구승재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고 강하리는 침대 가장자리
강하리는 심장이 철렁해서 서둘러 다가왔다.“왜 그래요, 상처가 아파요?”하지만 구승훈은 갑자기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하리야,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내 상처 건드릴 수 있어.”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강하리의 몸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구승훈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고 저도 모르게 목울대가 일렁거렸다.그의 의도를 감지한 강하리는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구승훈은 예상했다는 듯이 그녀의 뒤통수를 꽉 잡았다.“하리야.”남자는 낮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아무 데도 가지 말고 잠시만 이렇게 나와 함께 있어 줘.”두 눈이 마주치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튕기는 듯했다.메말라가는 주변 공기에 강하리는 당황한 기색으로 애써 그의 시선을 피했다.하지만 이윽고 구승훈은 그녀를 꽉 붙들고 바로 입을 맞추었다.두 입술이 맞닿자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갈증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괴롭게 했다.구승훈의 다른 손이 그녀의 허리를 붙들어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혀가 잇새를 가르며 들어오자 방안에는 거친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그러다가 불순한 그의 손이 그녀의 옷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고 강하리는 얼굴이 빨개져서 화를 냈다.“구승훈 씨, 여긴 병실이에요. 언제 누가 들어올지 모르는 곳이라고요.”“그럼 나중에는 돼?”강하리가 곧바로 그의 손을 쳐내자 구승훈이 웃음을 터뜨렸다.“하리야, 너한테 빚진 목숨 오늘로 갚았는데, 다시 한번 나에게 기회를 주면 안 될까?”강하리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그동안 줄곧 갈피를 잡지 못하고 구승훈에게 흔들린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 어려웠다.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구승훈 씨, 그동안 당신이 해준 것들은 정말 감동이지만... 또다시 아무런 명분도 없이 당신 곁에 있을 수는 없어요.”구승훈이 멈칫했다.“누가 그래, 명분이 없다고?”그의 말을 들은 강하리는 덜컥 심장이 뛰며 입술을 다물고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일 있으면 연락해.”강하리는 대답을 하고 병동을 나섰다.그녀가 막 엘리베이터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안에서 가 나온 사람은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 몇 명과 근엄한 노인이었다.생활한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은 노인은 바로 구씨 가문 어르신, 구동근이었다.그 옆에는 젊은 여자도 있었는데 스물다섯, 여섯 살로 보이는 그녀는 예쁜 외모에 우월한 분위기를 자랑했다.여인은 강하리를 살며시 훑어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할아버지, 승훈 오빠가 저를 반기지 않으면 어떡해요?”구동근의 눈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그러기만 해봐, 내가 그 자식 혼내야지!”여자의 입가에 번진 달콤한 미소가 유난히 교태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안 돼요, 때리게 둘 수는 없죠.”강하리는 그 순간 이 여자의 정체를 알아챘다. 구씨 가문에서 구승훈에게 찾아준 맞선 상대겠지.입술을 달싹이며 옆에 서 있던 그녀의 마음이 저릿했다.진작 생각했어야 하는데, 구씨 가문에서 구승훈의 결혼을 재촉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지난해 그의 생일부터 구동근은 한차례 주선한 적이 있었지만 결국 구승훈에 의해 무산되었다.이번에도 같은 수법인 것 같은데 그녀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내색은 안 해도 마음이 말이 아니었다.구승훈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만 마음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그들 사이에는 너무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언제 귀국할지 모르는 송유라와 이젠 집안에서 주선한 맞선 상대에 그녀는 안중에도 없는 구씨 가문 사람들까지.강하리는 가슴 속 답답함을 숨기며 한숨을 내쉬고 병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구동근의 매서운 눈빛이 문득 그녀의 뒷모습에 향했고,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에는 혐오감을 감추려는 노력조차 없었다.…손연지가 아침 식사 2인분을 손에 들고 들어왔다.“어때, 구승훈은 일어났어? 심각하게 다친 거야? 팥죽 주문했는데 네가 갖다줄래?”강하리는 음식을 건네받으며 애써 웃었다.“고마워.”그녀의 안색이 어두워 보이자 손연지가
이어서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렸다.“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저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구승훈, 네가 재주 좀 부린다고 내가 널 못 건드릴 줄 알아?”바로 이어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할아버지, 화내지 마세요. 승훈 오빠도 말만 그렇게 하는 거예요. 오빠, 할아버지 화나게 하지 마요. 어제도 오빠 때문에 고혈압 오셨어요.”듣다 못 한 강하리는 문 앞 창턱에 죽을 놓고 곧장 뒤돌아 떠났다.병실로 돌아왔을 때는 의사 선생님도 교대를 마친 뒤였다.중환자실 밖에서 강하리는 의사가 진찰을 마치고 내부에서 나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고 의사는 강하리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강하리 씨, 진료실 가서 얘기하시죠.”강하리의 심장이 철렁하며 양옆으로 드리운 손에 힘이 들어갔다.의사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가자 상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이어갔다.“어머니 상태가 좋지 않아요.”강하리의 심장이 순식간에 바닥을 치는 것 같았다.“어떻게, 어떻게 안 좋으신데요?”의사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막 깨어나셨을 때 이미 몸의 여러 장기가 각기 서로 다른 정도로 망가졌으니 평소에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전에 재활 기계에서 넘어진 후에 대량의 안정제를 투여받았어요. 그 정도 양이면 어머니 같은 분은 말할 것도 없고 정상인도 견디지 못하죠. 이미 투석을 하고 있지만 장기부전이 계속 악화되고 있어요. 강하리 씨,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런 식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밖에 없고 기적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멍하니 듣고 있던 강하리는 얼핏 보기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엄청난 고통 뒤엔 무뎌지기 마련이다.이제 곧 밝은 나날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충분히 노력했는데 무심한 하늘은 그녀가 잘 살길 바라지 않는 듯싶다.그녀의 손에 모든 걸 다 쥐여주고서 또다시 잔인하고 매정하게 다시 빼앗아 간다.강하리는 자신이 어떻게 진료실에서 나왔는지, 어떻
간단한 한마디가 강하리의 거짓된 평온함을 무너뜨리는 날카로운 무기가 된 듯했다.순식간에 그녀의 모든 강인함이 무너졌다.맨발로 침대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그의 무릎에 고개를 묻고 낮은 소리로 흐느꼈다.구승훈의 눈에도 안타까움이 가득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울게 내버려뒀다.그녀의 울음이 잦아들고 나서야 그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강하리는 왠지 불편한 마음에 붉어진 눈으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시간 없는 줄 알았는데.”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시간이 없어도 너를 위해서라면 낼 수 있어.”강하리는 한참 입술을 다물고 있다가 물었다.“아까 그 여자 집안에서 결혼 주선해 준 사람인가요?”구승훈은 피식 웃더니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질투해?”강하리는 그의 손을 치웠다.“질투할 게 뭐가 있어요.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닌데.”구승훈이 그녀를 확 끌어당겨 고개를 파묻더니 그녀의 목덜미를 파득 깨물었다.“지금은 아무 사이가 아니라도 나중엔 다를 수도 있지!”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미 송유라 한 명 때문에 충분히 힘들었는데 이젠 정서원마저 그녀 때문에 더 힘들어졌다.송유라보다 더 훌륭한 집안과 구씨 가문 사람들의 반대에 그녀처럼 힘없는 사람이 과연 그들과 싸울 수 있을까?구승훈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다시 물러서려는 그녀를 보며 남자의 얼굴이 말없이 어두워졌다.그는 여자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은 기회를 잡기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노력했는데 그녀는 이대로 한 순간에 물러나겠다고?어림도 없지.그는 강하리의 허리를 붙잡았고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대로 안아 들고 휠체어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갔다.다리를 뻗어 병실 문을 발로 차고 돌아선 다음 곧바로 침대에 눕혔다.“구승훈 씨, 미쳤어요?”“강하리, 정말 상관없다면 그냥 날 밀어내.”말을 마친 구승훈은 한껏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의 앞섬을 열고 고개를 숙여 입
“누구요?” 강하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돌아보았다.“아마 장진영인 것 같아요. 아주머니를 납치한 주범이 장진영 고등학교 동창이고, 얼마 전에 둘이 연락을 주고받았어요.”구승훈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장진영과 송동혁은 어디 있어?”“송동혁은 회사 일로 바빠서 한동안 얌전히 지내면서 여기저기서 투자를 받고 있어. 장진영은 우리가 데려왔는데 계속 울면서 그 사람한테 뇌물을 준 적도 없고 단순히 동창이라서 연락한 것뿐이래. 송유라도 이미 보냈는데 지금 강하리 씨를 건드려도 자기에게 좋을 게 없다는 걸 계속 강조하더라.”구승훈은 차갑고 어두운 눈빛으로 강하리를 돌아보았다.“내가 장진영을 만나야겠어.”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몸 괜찮아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이제야 날 걱정하는 거야?”강하리는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고 구승훈은 웃었다.“걱정 마, 의사한테 붕대 고정해 달라고 하면 상처 안 찢어질 거야.”구승재가 옆에서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강하리 앞에서 형이 이런 모습일 줄이야.구승훈은 붕대를 감으러 갔고 강하리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같이 가요.”멈칫하던 구승훈이 잠시 후 웃으며 말했다.“가서 보고 날 싫어하면 어떡해.”강하리는 당황하더니 그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챘다.“구승훈 씨, 내가 모르는 당신 모습도 있어요?”구승훈의 목울대가 잠시 일렁거리더니 그녀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난 사람을 심문할 때 침대에서보다 훨씬 더 사나워.”강하리는 이 남자의 뻔뻔함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좀 정상적일 수는 없어요?”구승훈은 웃다가 진지하게 말했다.“하리야, 가지 마, 알았지?”그는 정말 강하리가 가지 않기를 바랐다. 그의 어두운 면을 강하리 앞에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강하리 역시 그의 뜻을 이해했기에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다만 장진영의 몰락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해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걱정하지 마, 진짜 장진영이라면 절대 쉽게 봐주지
“당신들 이거 불법 감금이야! 날 내보내 줘! 무슨 권리로 날 가둬, 내가 한 것도 아닌데!”방문이 열리자 그녀는 구승훈을 보고 달려들었고 구승훈이 한 발짝 물러서자 장진영은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며 아예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다.“구 대표, 정말 내가 한 게 아니야. 누가 누명을 씌웠어, 나 아니야. 유라도 갔는데 내가 강하리 모녀를 건드려서 얻는 게 뭐가 있겠어. 구 대표, 정말 내가 한 게 아니야.”구승훈이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구승재에게 눈치를 주자 구승재는 다가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장진영을 붙잡더니 가느다란 칼날을 장진영의 목에 대었다.장진영은 온몸이 굳어버렸고 방금 전까지 울부짖으며 소리를 지르던 여자가 순식간에 창백한 얼굴로 변해 입가마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사모님, 우리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요?”장진영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정말 내가 한 게 아니야. 구 대표, 유라도 갔는데 내가 그럴 이유가 없잖아.”구승재가 옆에서 피식 웃었다.“복수는 이유가 될 수 없나요?”장진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난 복수 안 했어, 진짜 안 했어. 구 대표, 가서 확인해 봐. 난 정말 그 사람 매수한 적 없어!”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허, 그럼 왜 그 사람한테 연락했죠?”장진영은 흠칫하며 시선을 피했다.“나는 그냥... 그냥 동창이라 연락한 것뿐이야.”장진영을 노려보는 구승훈의 눈빛이 번뜩였다.구승재의 손에 쥔 칼날이 안으로 파고들자 장진영은 비명을 질렀다.“사모님, 한 번만 더 기회를 드릴게요.”장진영의 온몸은 떨리고 있었고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정말 내가 안 그랬어...”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불쑥 이렇게 물었다. “지난번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은요?”순식간에 장진영의 몸은 심하게 굳어버렸고 조금 전까지 억울하던 표정도 공포로 바뀌었다.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자리에 있던 두 사람은 똑똑히 보았다.“난, 난 몰라, 무슨 영상?”구승재가 구승훈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는
구승훈은 장진영을 처리한 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중환자실 문 앞에 서 있는 강하리가 의사와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구승훈은 바로 다가가지 않고 옆으로 가서 손을 씻은 뒤 강하리 곁으로 갔다. “어머님 보러 왔어? 상황은 좀 어때?” 강하리의 눈은 아직도 약간 충혈되어 있었다. 정서원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고 의사는 최대한 에둘러 말을 전했다. 겨우 기운을 되찾았는데 지금 병상에 누워있는 그녀의 얼굴은 거의 투명할 정도로 하얗게 변해 있었다. 강하리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더니 표정을 감추며 물었다. “장진영 씨 쪽은 어떻게 됐어요?”구승훈은 강하리에게 상황을 전했고 그녀는 순간 당황했다.“그럼 우리 엄마를 납치한 사람이 정말 그 여자가 아니라고요?” 구승훈은 눈이 아주 잠깐 번뜩였다.“아직 몰라. 동영상 일도 순간적으로 물어본 거고, 정말 납치를 지시했다면 진작 준비를 했을 거야.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어. 나중에 더 털어놓을 수도 있으니까 지켜보자.”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장진영 씨는 어떻게 했어요?”구승훈의 눈빛이 서늘했다.“좋은 데로 보냈어.”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좋은 곳 어디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먹고 자고 즐거움도 있는 곳.”구승훈은 강하리를 병동으로 다시 끌어당기며 말했다. “나 너무 피곤해서 좀 쉬고 싶어.” 말을 마친 남자는 강하리 앞에서 대놓고 옷을 벗으며 병원복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우려 했고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그쪽 병실 가서 쉬어요.”하지만 구승훈은 누워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 좀 쉬게 해줘.” 강하리는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차마 그를 내쫓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구승훈은 정말 피곤한 상태였다. 피도 많이 흘린 데다 수술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 신기할 지경이었다. 침대에 누운 그는 정말 잠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강하리는 곁에 서서 그를 깨워야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