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승재의 목소리가 무겁게 들렸다.“문연진이 임신했어.” 구승훈의 얼굴이 살짝 구겨지다가 곧 차가운 웃음을 내뱉었다.“임신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문연진이 구정우와 몇 번이나 밤을 보냈는지는 모른다.하지만 하필 문씨 가문이 몰락하는 시기에 문연진이 임신할 줄이야.“어젯밤에 문원진이 깨어나자마자 할아버지한테 연락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할아버지가 문연진과 구정우 결혼에 동의했어. 그리고 문씨 가문 도와줄 생각인 것 같아.”구승훈의 얼굴에 냉기가 감돌았다.“그럼 남 걱정 못하게 본인 처지부터 곤란하게 해드려야겠네. 내가 전에 시켰던 일 진행해.”구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한참 후 대답했다.“알겠어.”전화를 끊은 구승훈이 노진우에게 연락했고 노진우는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강하리 씨가 눈치챘나요?”“아니.”말을 마친 구승훈이 잠시 멈칫했다.“강하리 한동안 나랑 있으니까 당분간 나한테 전화하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승재한테 연락해.”노진우는 서둘러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 대표님.”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방으로 돌아갔고 그가 눕자 강하리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구승훈의 두 눈에 미소가 담기며 강하리를 품에 꼭 껴안고 이마에 부드럽게 입 맞춘 뒤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그날 SH그룹은 갑작스럽게 큰 사건이 터졌다.15년 전 구씨 가문 소유의 건물이 부실 공사로 인해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하룻밤 사이에 갑작스럽게 무너졌고 당시 비를 피하기 위해 건물 안에 있던 민간인 근로자 여러 명이 건물 아래에 깔렸다.당시 구씨 가문 가주였던 구명진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보상금을 줄이기 위해 모든 책임을 민간 노동자들에게 전가했고 아래층에 매몰된 인부들은 최소한의 보상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건물 붕괴에 대한 책임까지 떠안게 되었다.구명진이 직접 덮었던 이 사건이 15년이 지난 지금 다시 드러날 줄이야.마침 주식시장에서 큰 변동을 겪은 구씨 가문은 다시 한번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다.그리
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렸다.“무슨 일이야?”막 말을 꺼내던 그녀가 멈칫했다.그녀의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잠겨 있었고 손연지는 순식간에 그녀의 상황을 알아차렸다.“쯧, 못 들은 걸로 해. 잘 지내나 보다.”강하리는 누가 봐도 갈라진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다.“그, 내가 감기 기운이 좀 있어. 뭐라고 했어?”손연지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만해. 외박하고 이런 목소리를 내는데 누가 모를 줄 알아?”강하리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방금 뭐라고 했어? 구승훈이 왜?”그러자 손연지가 본론으로 들어갔다.“누가 죽이려 하는 거 몰랐어?”놀란 강하리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해갔고 손연지가 망설이며 말을 이어갔다.“인터넷에서 그러더라. 네가 직접 가서 물어봐.”강하리가 입술을 축였다.“그래, 알았어. 고마워, 연지야.”통화를 마친 강하리는 인터넷에 들어가서야 오늘 하루 종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구명진이 구승훈을 죽이려 했다는 기사를 보며 마음이 아려왔다.저 개 같은 남자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강하리는 곧장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고 구승훈은 뒤를 돌아보다가 맨발로 부엌문 앞에 서 있는 강하리를 발견했다.“왜 맨발로 여기 왔어?”그가 다가가 강하리를 안아주려는데 그녀가 물었다.“당신 아버지가 당신 죽이려고 했어?”구승훈이 멈칫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인터넷에 떠도는 헛소문 믿지 마.”“구승훈!” 강하리는 타는 듯한 눈빛으로 눈앞의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말했다.“왜 나한테 말 안 했어?”구승훈은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 들고 성큼성큼 걸어가 소파에 내려주었다.“속상해?”강하리가 시선을 돌렸다. 속상했다.이 망할 남자가 대체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걸까?“속상하면 밤에 힘들다고 하지 마.”멈칫한 강하리가 발로 그의 배를 차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발목을 잡은 뒤 몸을 숙여 키스했다.“걱정하지 마. 인터넷 얘기는 사실이 아니야. 사실 차를 보내 나를 미행하다가
구승재는 한숨을 쉬더니 나지막이 말했다.“형, 강하리 씨랑 두 사람 조심해.”구승훈이 답했다.“너도.”구승재는 미소 지었다.“난 괜찮아. 나한테까지 어쩌진 못해.”대답을 마친 구승훈이 전화를 끊었고 강하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고마워.”이번 구승훈의 행동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었다.구승훈은 그녀의 코를 꼬집었다.“고맙다는 인사는 말로만 하는 게 아니야.”강하리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밀어냈다.이 개자식은 빈틈만 보이면 어떻게든 이득을 취하려고 들었다.“당신이 위험해진 거야?”강하리가 나지막이 묻자 구승훈은 그녀의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위험했으면 구씨 가문 떠났을 때부터 일이 생겼겠지. 문제는 너야, 하리야. 네 옆에 힘 좋은 사람 둘 정도 붙이는 거 어때?”강하리는 거절하지 않았다.구동근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자신의 곁을 지켜줄 사람을 찾고 싶었다.그녀가 흔쾌히 동의하는 모습에 구승훈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안으며 입을 맞추었다.“강 대표님 이젠 얌전하네. 그땐 가시 곤두세운 고슴도치 같더니.”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밀어낸 뒤 부엌으로 향했다.“뭐 먹고 싶어?”구승훈은 그녀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왔다.“뭐든 만들어주는 대로 먹을게.”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냉장고를 열어 그가 좋아하는 음식 몇 가지를 꺼내 고개를 숙이고 요리를 시작했다. 한편 통화를 마친 구승재가 구동근에게 다가갔다.구승훈이 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구동근은 또다시 화가 나서 쓰러질 것 같았다.“그 망할 놈이 정말 구씨 가문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거야?”구승재는 옆에서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무너지는 건 시간 문제지. 그러게 누가 뭐에 홀려서 그렇게 훌륭한 며느리를 받아주지 말랬나.’구동근이 구승훈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지만 구승훈은 이미 번호를 차단한 상태였고 화가 난 구동근이 전화기를 바닥에 내리쳤다.막 안으로 들어선 여초연은 눈앞에서 망가진 휴대폰을 발견했고 여초연을
연정이가 열이 난다는 소식을 들은 구승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서둘러 노민준에게 전화를 걸었고 문 앞에 서 있던 문연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구승재의 표정이 좋지 않아 강하리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엿듣고 싶었는데 이게 뭘까.그녀가 지금 뭘 들었지? 아이? 구승훈과 강하리의 아이?그게 아니면 구승재가 저렇게 초조해할 이유가 없었다.아이가 열이 나는데 급히 노민준에게 연락해 병원 특수 통로까지 열어달라고 한다니.전화 상대는 노진우인데 한낱 경호원인 노진우가 뭐라고?‘하지만 어떻게?’분명 구승훈과 강하리의 아이는 죽었고 그때 병원 사람들도 전화해서 아이가 죽었다고 했다.순간 그녀는 문원진의 말이 떠올랐다.‘아이가 죽지 않은 걸까? 죽지 않고 구승훈이 숨긴 걸까?’문연진의 손톱이 살을 깊숙이 파고들며 머릿속에 수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하나로 귀결되었다.그 아이를 절대 그냥 둘 수가 없다.만약 노진우 아이라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게 누가 강하리를 지키라고 했나.하지만 그 아이가 강하리와 구승훈의 아이였다면 더더욱 죽여버려야 한다.문씨 가문은 두 사람 때문에 풍비박산 났는데 무엇 때문에 그 아이는 멀쩡히 살아 있단 말인가!문연진은 주먹을 꽉 쥔 채 살기 어린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고개를 드는 순간 갑자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여초연이 보였다.문연진의 눈에 머금었던 불길한 독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입꼬리를 올리며 상대를 불렀다.“어머님.”여초연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문연진 씨, 더 이상 승훈이랑 하리 양 방해하지 마세요. 두 사람 해치는 일도 하지 말고요.”문연진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제가 강하리보다 못한 게 뭐에요? 전 모든 면에서 강하리에게 뒤처지지 않아요.”여초연의 얼굴에 머금은 미소가 유난히 부드러웠다.“승훈이가 그쪽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죠.”순간 문연진의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지만 금세 다시 억지로 미소를 지었
같은 시각 노진우는 연정이를 데리고 검진에 호흡기치료까지 받은 뒤 병원을 나섰고 그들이 막 떠나자 여러 대의 차량이 뒤따라갔다.노진우는 시종일관 매끄럽게 차를 몰았고 연정이는 가정부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노진우가 백미러를 통해 뒤를 살펴보면서 차 안의 온도를 올리는데 고개를 드는 순간 갑자기 표정이 확 변했다.반대편에서 오던 밴 차량이 통제 불능 상태로 이쪽으로 돌진했다. 노진우가 급하게 핸들을 잡았지만 뒤차가 쾅 소리를 내며 차 뒷부분을 들이받았다.아주머니가 비명을 지르고 노진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연정이 꽉 안으세요.”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한 다음 곧바로 액셀을 밟고 차를 몰고 나갔다. 동시에 손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뒤에 따라오는 차 알아서 처리해.”그는 말을 마친 후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원래 그를 따라나섰던 두 대의 경호 차량도 재빨리 이쪽으로 다가왔다.노진우는 정신을 꽉 부여잡았다. 현재 뒤따라오는 차가 최소 대여섯 대가 되는데 그는 이번에 네 사람만 데리고 나왔다.머릿수로는 상대에게 밀리기에 속도로 경쟁해야 했다.가정부는 뒤에서 연정이를 꼭 붙잡고 있었는데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노진우 씨, 대체 무슨 일이에요?”노진우는 대답하지 않고 액셀을 한 번 더 밟았다.그는 교외로 달리고 싶지 않았지만 코너를 돌려고 할 때마다 교차로를 막고 있는 차가 나타났다.노진우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고 뒤에 있는 가정부와 연정이를 힐끗 바라보았다.“제가 지금 최대한 저 사람들과 거리를 벌려서 앞 사거리에 도착했을 때 일부러 수풀로 들어갈 테니까 속도 늦추면 연정이랑 차에서 내려요. 그리고 옆 수풀에 숨어서 구승재 씨가 도착할 때까지 나오지 마세요. 알겠어요?”가정부의 얼굴이 창백했다. “그럼 노진우 씨는...”“내 말 알겠냐고요!”가정부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고 노진우는 침묵했다.“제발 연정이 지켜주세요. 부탁드립니다.”말을 마친 그는 다시 한번 한계에 이른 속도로 달렸다.지금 구승훈에게 전
노진우의 전화를 받은 구승재는 순간 당황했다가 서둘러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다. 뛰어가며 그는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구승훈과 강하리가 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승재의 전화가 걸려 오자 구승훈은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먼저 씻어.”그가 강하리에게 말하자 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을 갈아 신고 화장실로 향했다.강하리가 화장실에 들어간 후에야 구승훈이 전화를 받았다.“형, 노진우와 연정이가 쫓기고 있어.”구승훈의 표정이 확 했다.“뭐? 무슨 일이야?”구승재도 잘 몰랐기에 노진우의 말을 구승훈에게 반복할 뿐이었다.“지금 저쪽으로 가고 있으니 서둘러 와.”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재빨리 화장실로 향했다.“나 일이 있어서 나갔다 올게.”강하리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무슨 일인데?”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괜찮아,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그렇게 말한 후 그는 곧장 문밖으로 나갔고 강하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구승훈 씨.”구승훈의 걸음이 멈칫했고 강하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빨리 와.”고개를 끄덕인 구승훈은 더 지체하지 않았고 위층에서 내려오기 바쁘게 노진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더 이상 노진우 측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구승훈은 휴대폰을 옆으로 던지고 액셀을 밟으며 달려 나갔다.그가 도착했을 때 구승재도 막 도착했고 수풀 근처 차량 흔적이 지나치게 선명해 두 사람은 굳이 애를 쓰지 앟아도 노진우가 스쳐 지나간 곳을 찾았다.하지만 두 사람이 다가갔을 땐 바닥에 쓰러져 있는 가정부만 보였고 연정이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구승훈을 힐끗 쳐다보던 구승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급히 가정부를 향해 달려갔다.“형, 누가 약물을 주사한 것 같아.”구승훈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찾아!”구승재는 서둘러 대답한 뒤 부하들을 이끌고 주변을 둘러보았다.구승훈은 서리가 내린 듯 차가운 얼굴로 자리에 서 있었고 구승재는 돌아서는 순간 그의 손이 떨리고 있다
가정부는 이 재벌가 사람들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연정이를 찾지 못하면 누구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구 대표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연정이를 지키지 못했어요. 제 탓입니다.”구승훈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그의 눈에는 극도로 억눌린 복잡한 감정이 묻어났다.“누가 기절시켰죠?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봤나요?”“대표님, 저는 연정이를 안고 수풀 속에 숨어 있었는데 누군가 우산을 들고 다가와서 제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구승훈은 병동에서 나와 고개를 숙인 채 담배를 꺼냈다.하지만 몇번이나 시도해도 불이 붙지 않자 그는 담배를 라이터와 함께 손에 움켜쥐고 힘껏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내리쳤다.“형...”구승재가 옆에서 황급히 불렀다.이마를 짚은 구승훈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구승재도 무너지기 직전이었다.“형, 어떡하지? 연정이를 잃어버렸는데 이제 어떡해?”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가서 문연진이랑 구정우 전부 잡아서 때려!”구승재는 서둘러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대답한 뒤 전화를 걸어 지시했다.시간이 1분 1초 흘렀고 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강하리의 문자를 바라보았다.[일은 어떻게 됐어?][잘 안됐어? 왜 아직도 안 와?][언제 와? 기다릴게.]구승훈은 한참 동안 전화를 붙들고 있다가 답장을 보냈다.[오늘 못 갈 것 같으니까 먼저 자.]전송을 마친 후 그는 한숨을 내쉬며 구승재에게 말했다.“일단 하리가 모르게 해.”구승재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른다.강하리는 구승훈이 휴대폰으로 보낸 메시지를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왠지 모르게 마음이 심란했다.서재를 두어번 둘러보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려고 할 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휴대폰을 들어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로부터 문자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강하리, 네 딸 살아있는 거 알아?]강하리의 머릿속이 윙윙거렸다.몇 초가 지나서야 메시지 의미를 파악했고 거의 순식간에
강하리의 머릿속은 백지장이 되었고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다.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물었다.“아기 어딨어? 아이 보고 싶어. 구승훈, 아이 좀 보게 해줘!”구승훈은 얼굴을 찡그렸지만 말하지 않았다.강하리는 침묵하는 상대 때문에 마음이 답답했다.“나한테 아이 안 보여주려는 거지?”그녀가 묻자마자 구승훈 쪽에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노진우 씨 가족분 있나요?”구승재는 서둘러 답했다.“선생님, 노진우 씨 어떻게 됐나요?”강하리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얼굴이 한층 더 하얗게 질렸다.“지금 병원에 있어? 구승훈 씨, 병원이야? 노진우 씨가 왜? 연정이가 우리 아이지? 구승훈 씨, 연정이는?”구승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마침내 대답했다.“그래, 병원에 있고 노진우가 좀 다쳤어. 걱정하지 마.”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그녀에게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지금 갈게.”하지만 구승훈은 단호하게 거절했다.“하리야, 집에서 기다려. 내가 돌아가서 다 얘기할게.”“구승훈!”“하리야, 얌전히 있어. 내가 연정이 데리고 갈게, 알았지?”강하리의 눈가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왜 우는지는 그녀도 잘 몰랐다.그녀는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알았어, 기다릴게.”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운 돌로 짓누르는 듯 숨이 턱턱 막혔다.구승재는 얼굴을 찡그렸다.“형, 하리 씨도 안 거야?”하지만 구승훈은 옆에 있는 응급실 문만 쳐다보며 물었다.“노진우는 어때?”구승재는 고개를 저었다.“왼쪽 다리뼈가 골절돼서 수술할 수밖에 없고 추후 후유증이 남을지도 모른대.”“연정이 소식은?”구승재는 구승훈을 향해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형, 하리 씨한테는 말하지 마. 혹시라도...”구승훈은 두 눈을 감았다.“승재야, 내가 미안할 짓을 했어.”이렇듯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임신시키는 게 아닌데. 안 그러면 연이어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 텐데.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