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송유라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아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은 줄 알았지만, 오늘 또 언급할 줄은 몰랐다.강하리는 일부러 태연한 척하면서 말했다.“대표님이랑 출장 온 거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송유라가 웃으면서 말했다.“계속 건강이 안 좋았다면서요? 아픈 몸으로 출장을 다 오시고. 회사에 그렇게도 사람이 없었나?”강하리는 시선을 피했다.“요즘 많이 나아졌어요. 유라 씨한테까지 걱정을 끼쳤네요.”말을 끝낸 강하리는 바로 화장실 밖으로 나갔고 그제야 숨을 쉴 것만 같았다.화장실에서 나온 송유라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똑같이 애교를 부리면서 구승훈의 옆으로 다가갔다.“승훈 오빠, 나 이따 오빠랑 같이 앉을래요.”구승훈은 눈썹을 움찔했다.“네 자리는 못 앉아?”송유라는 잠깐 심기가 언짢았다.“그냥 오빠랑 같이 앉고 싶어서 그래요. 왜요, 싫어요?”구승훈이 웃으면서 말했다.“강 부장한테 물어봐. 네가 앉고 싶은 자리가 강 부장 거라서.”구승훈은 또 강하리를 언급했다.강하리는 송유라와 눈이 마주치더니 입술을 깨물었다.“그래요, 유라 씨가 원한다면 바꿔드릴게요.”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송유라가 웃으면서 말했다.“고마워요, 강 부장님.”*비행기 안, 송유라는 구승훈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고 강하리는 혼자 앉게 되었다.강하리는 돌아가는 길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송유라가 화장실에서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정말 의심하고 있는 거 아니겠지? 이제부터 더 조심해야 하겠네.’구승훈은 전화 받으러 밖으로 걸어가더니 차 옆으로 다가가서야 강하리한테 물었다.“왜 자리 양보했어?”강하리는 입을 움찔할 뿐 침묵을 지키더니 말했다.“대표님께서 그랬잖아요. 유라 씨랑 싸우지 말라고.”구승훈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언제부터 그렇게 말을 잘 들었어?”강하리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구승훈은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었다.“그렇게 말 잘 들으면 저녁에 파티에도 같이 참석하든가.”“안 가도 돼요?
강하리는 건성으로 대꾸했다.다행히 구승훈은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그녀가 정리를 다 마치자 구승훈은 그녀를 데리고 바로 문을 나섰다.뜻밖에 이번 연회는 평소에 봤던 그런 연회가 아니라 규모가 성대한 자선 만찬 행사였다.연회장 앞에 있는 거리는 전부 통제되었고, 고급 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거리 끝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 곁을 따라다니며 약간 놀란 얼굴을 했다.구승훈은 그녀의 놀라워하는 눈빛을 보고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왜? 강 부장은 이런 장면 처음인가?”강하리는 침묵했다.그녀는 확실히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없었다.그녀의 가정 형편으로 이런 장면을 어디 가서 보겠는가?비록 지금은 구승훈과 자주 연회장에 드나들며 유명 인사들도 만나보고 견식을 넓혔지만, 오늘 밤 만찬 행사와는 그 스케일을 겨룰 수 없었다.만약 구승훈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아마 평생 이런 자리에 올 기회가 없었을 거다.구승훈의 신분은 늘 그렇게 고귀했지만, 그녀는 3년 동안 두 사람이 사실은 이토록 크게 차별된다는 걸 처음 깨우쳤다.이 순간에 그녀는 똑똑히 알게 됐다. 그녀와 구승훈은 한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그녀가 그의 세상에 들어와 3년이나 그의 곁에 머물렀다는 건 아마 뜻밖의 사고였다고나 할법했다.“대표님께 누추한 모습 모여드렸네요.”강하리는 눈초리를 깔고 한마디 말했다.구승훈은 강하리의 가녀린 쇄골뼈에 시선을 떨궈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앞으로 이런 데 가능한 널 많이 데리고 올 거야.”강하리는 그가 이런 말 하리라고는 생각 못 하고 멍하니 있었다.그런데 구승훈은 그녀의 시선을 마주 보며 말했다.“강 부장,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 상사를 모시고 이런 자리에 나오는 건, 원래 강 부장이 해야 할 일 아닌가? 매달 그러라고 돈을 그리 많이 주는데.”강하리의 눈빛에서 뭔가 한순간 휙 꺼져버렸다.그녀는 자조적으로 웃었다.대체 방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구승훈이 무슨 특별한 뜻으로 자신을 여기 데리고
강하리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그쪽으로 바라보니, 송유라가 어느새 와서 구승훈의 팔짱을 끼고 그와 같이 서 있었다.둘은, 하나는 상큼하고 세련되었고 하나는 차분하고 잘 생겨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한눈에 띌 만큼 출중하여 천생연분이 따로 없었다.송유라가 무슨 말을 하자 구승훈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이는 두 사람이 관계를 공개하고,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나란히 나타나는 거라, 연회장의 포커스가 그 둘한테 맞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짧은 찰나에 귓가에는 온통 송유라와 구승훈의 얘기만 들렸다.“구승훈 대표님과 송유라 씨의 소문이 진짜였네요.”“구 대표님 눈빛을 좀 보세요.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눈빛 아니에요?”“둘이 너무 잘 어울리는데 결혼은 언제 할까요?”“아마 곧 하겠죠. 이제 관계도 다 공표했는데 결혼이 멀겠어요?”......사람들의 그 한마디 한마디 얘기를 듣다 나니 강하리는 가슴이 너무 답답해졌다. 그 순간 널찍한 연회장에 서 있는 것마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어때요? 네가 저 둘 사이에 낀 세컨드라는 게 이제 실감 나요?”강하리는 안색이 어두워졌다.“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미안한데,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당장 일어나 떠나려고 하는데, 또 한 번 고이선이 그녀의 팔을 당겼다.“강하리 씨. 잘 생각하고 판단해요. 그런다고 당신한테 나쁠 거 없으니까. 내가 오늘 분명 경고했어요.”강하리는 그녀를 뿌리치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연회장 바깥에 있는 정원에 도착해서야 강하리는 조금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하지만 마음속이 저리는 건 여전히 그대로였다.저렇게 정정당당하게 구승훈 곁에 설 수 있는 여자는, 영원히 송유라인 거겠지.그녀는 그저...영원히 구석에서 빛을 못 보는 그러한 사람으로 남을 거야.“강 부장님, 왜 나와 있어요?”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누군지 봤다. 구승재가 술 한 잔을 들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승재 씨였어요.”구승재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었다.
강하리는 그 순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어떤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그녀는 어린 시절의 그 나날들이 구승훈한테는 좀 특별하지 않았을까 여겨왔다.근데 그게 아니었다.그의 인생 중에 유일한 빛은 오직 송유라였고 그게 그의 솔직한 마음이었다.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한없이 우습게 생각되었다.지난날 추억들을 소중한 보물처럼 품에 간직해 왔는데, 알고 보니 그건 오직 그녀만의 보물이었다.“경매가 곧 시작되니까 이젠 돌아갈까요?”구승재가 옆에서 말했다.강하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네.”그녀는 구승재를 따라 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한 웨이터가 그녀를 불렀다.“강하리 씨, 구 대표님이 오시라고 하셨어요.”강하리는 구승재를 보며 말했다.“전 그럼 먼저 가볼게요.”“네, 그러세요.”웨이터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있는 데로 데려갔다.구승훈은 첫 번째 줄에 앉아 있었고, 그 바로 옆에 송유라가 앉아 있었다.송유라는 강하리가 입꼬리를 약간 끌어당기는 걸 봤다.“강 부장님도 계셨네요?”강하리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와 별다른 인사말을 나누지 않았다.구승훈은 강하리를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물었다.“몸은 괜찮아?”강하리는 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괜찮아요.”“방금 어디 갔어?”강하리는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바깥에 좀 서 있었어요. 구승재 씨와 거기서 마주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일 뿐 더 묻지 않고 책자 한 권을 건넸다.“한번 봐봐, 뭐 관심 가는 거 없나.”강하리는 갑자기 좀 어리둥절하여 입을 열었다.“아까...”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송유라가 먼저 말했다.“오빠, 저 귀걸이 되게 이쁜 거 같아요. 좀 이따 저걸 꼭 낙찰해줘요.”구승훈은 웃으며 말했다.“그 말 대체 몇 번째야?”“암튼, 저거 내 것이에요.”“그래, 알았어.”구승훈이 대답했다.강하리는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구승훈의 대답을 듣고 송유라는 불시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강하리를 힐끔
강하리는 잠시 말을 않고 있다가 대답했다,“송유라 씨 배웅해 주러 갔어요.”구승재는 입을 딱 벌리더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시동을 걸고 인파를 뚫고 나와 빠른 시속으로 연회장 근처의 제일 가까운 병원을 향해 달렸다.병원에 도착해 강하리는 의사를 따라 상처를 치료하러 갔다.“약을 안 쓰면 안 돼요?”그녀는 나지막이 물었다.의사가 그녀의 말에 약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환자분 칼자국이 꽤 커서 약을 안 쓰면 안 됩니다.”강하리는 아랫입술을 축이며 말했다.“제가 임신했는데 아이한테 안 좋을까 봐 그래요.”의사는 동작을 멈칫하더니 말했다.“아, 그래요? 그럼 태아에 영향이 없는 약을 쓰도록 할게요. 약을 아예 안 쓰면 감염돼서 안 돼요.”강하리는 그렇게 하라는 수밖에 없었다.“감사합니다.”의사는 웃으며 말했다.“감사하긴요, 임신했으니까 초음파 검사도 한번 해보세요. 혹시 아이한테 무슨 문제가 없는지 확인을 해보는 게 좋아요.”“네, 알겠어요.”강하리는 초음파 검사를 받고 아이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가 초음파실에서 나올 때 구승훈과 송유라가 이미 와있었다. 송유라의 매니저도 같이 있었다.구승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강하리의 팔을 칭칭 감싼 거즈를 바라보았다.“괜찮아?”강하리는 눈까풀을 내리깔고 대답했다.“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그러자 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그녀를 다시 바라봤다.송유라가 구승훈 곁에 서서 얼굴에 눈물이 주렁주렁 한 채로 말했다.“죄송해요, 강 부장님. 제 팬이 이런 일을 저지를 줄 몰랐어요.”강하리는 잠시 말을 안 하다가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송유라 씨 탓도 아닌데요.”“그러니까요, 이 일은 아무래도 우리 유라와는 상관이 없어요.”그때 송유라의 매니저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그러자 강하리는 갑자기 인내심을 잃고 좀 차가운 말투로 내뱉었다.“전 그저 좀 이상하네요. 팬들이 저랑 구 대표님 관계를 어떻게 알았을까. 회사
구승재는 부인할 수 없었다.송유라는 확실히 이런 일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형님과 강하리의 관계는 한눈에 봐도 송유라한테 위협이 될 정도가 아니었으니까.“그럼 진짜 팬이 자발적으로 한 거라고? 근데 아까 강 부장이 말한 것처럼, 두 사람의 관계는 주변 사람이라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팬들이 어떻게 알았을까?”구승재는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구승훈은 그저 눈살을 찌푸린 채 창밖을 내다보며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경찰 쪽 상황을 잘 주시해. 결과가 나오면 즉시 나한테 알려주고. 그 밖에 인터넷 여론도 잘 통제해. 다시 이상한 소문 나오는 거, 나 원치 않아.”그러자 구승재가 대답했다.“알았어, 형.”구승훈이 차에 돌아왔을 때 강하리는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아파?”구승훈이 물었다.강하리는 눈을 뜨며 창밖을 내다보았다.“대표님이 보기에는요?”차가운 기운이 구승훈의 얼굴에 감돌았다.“강하리, 내가 널 다치게 했니?”강하리는 잠시 말 없다가 대꾸했다.“죄송해요, 제가 기분이 안 좋아서.”구승훈은 그녀한테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이 일은 내가 잘 조사할 거야.”강하리는 코끝이 찡해 오는 느낌을 겨우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많이 아파?”“조금요.”“내가 진통제 좀 가져다줄까?”“아뇨, 조금 아파요, 참을 만해요.”구승훈은 또 잠깐 말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그래. 눈 좀 붙이고 있어. 이따 집에 도착하면 푹 쉬고.”“네.”그리고 두 사람은 집 가는 길에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시각, 다른 한편.송유라는 차로 돌아가자마자 휴대전화를 세게 내던졌다.“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배를 공격하랬는데 팔만 다쳤잖아!”매니저의 눈빛이 약간 반짝였다.“걔가 임신한 거 확실해?”콧방귀를 차갑게 뀌며 송유라는 눈을 부라렸다.“임신을 안 했는데 유산방지약은 왜 먹겠어? 그리고 방금 초음파실에 사람을 보내서 물어봤어. 확실히 임신 맞대.”매니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그
“경찰서에서 상해 진단서를 끊으라네요. 사건 진술도 녹취해야 하고요.”구승훈은 여전히 안색이 별로였지만 머뭇거리다가 말했다.“데려다줄게.”강하리는 거절하려고 했다.이번 일에 대한 구승훈의 태도가 명백히 기울어 있는 것에 대해 그녀는 다소 마음이 불편했다.만약 그녀와 송유라가 서로 위치를 바꿨다면, 그는 아마 끝까지 조사하려 들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한쪽을 두둔하는 게 아니라.그는 마치 그녀가 송유라한테 무슨 불리한 일이라도 할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굴었다.비록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며 그녀도 이미 현실을 똑바로 인식했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가끔 송유라가 너무 부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곁에는 그녀를 애지중지 여기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송동혁이든 장진영이든 그녀를 만지면 깨질까 불면 날아갈까 하며 키웠고, 주변에도 마찬가지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그녀를 공주처럼 아끼고 떠받들었다.지금의 구승훈도 그녀가 조금이라도 상처를 받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지 않은가.강하리는 갑자기 자신이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송유라에 비해 자신은 뭘 갖고 있는지 생각해봤다.유일하게 갖고 있는 건 예전의 그 알량한 추억과, 또 깨어나겠는지도 모르는 그녀의 어머니였다.“감사합니다.”강하리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결국 그녀는 구승훈과 같이 집을 나섰다.그녀도 경찰서 같은 곳에 혼자 가고는 싶지 않았다.......가는 길에 구승훈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송유라의 전화였다.강하리는 뜨는 이름만 보고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구승훈은 와이파이에 연결을 안 하고 직접 받았다.“응…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확실히 자발적인 행동이 맞대. 너무 자책하지 마.”통화하던 중 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말했다.“강 부장, 유라가 강 부장한테 사과하겠다네?”강하리는 줄곧 창밖을 응시하며 대꾸했다.“아니에요. 송유라 씨하고 관련이 없다면서요. 관련 없는 일에 사과할 필요 있나요?”게다가 송유라가 진짜 사과를
경찰서를 나오자마자 강하리는 손연지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너 어젯밤에 다쳤다며?”강하리는 웃으며 대답했다.“응, 심각한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미치겠네.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방금 인터넷에서 소식 보니까, 송유라 팬이 그런 거라던데?”“응, 맞아.”강하리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송유라와 구승훈 사이에 껴서 훼방 놓고 있다고 그러더라. 그래서 송유라 대신 나한테 매운맛 좀 보여준다면서.”“웃기지 말라 그래! 누가 누구한테 훼방 놓았는데?! 송유라랑 구승훈이 지금 뭐 반 푼어치도 되는 사이라고 그래? 구승훈도 그냥 X 여자친구라고만 그랬잖아. 그럼 구승훈과 송유라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 뭘 훼방 놨다는 거야. 너 봐라, 너. 구승훈과 3년이나 같이 지내고 애까지 생겼는데, 대체 누가 세컨드인데?”강하리는 이 말을 듣고 씁쓸하기만 했다.“어쩔 수 없지 뭐. 내겐 떳떳한 명분이 없잖아.”손연지는 그녀의 자조적인 말에 목이 메었다.“그럼 뭐 송유라는 명분 있어? 걔도 마찬가지잖아. 걔가 너보다 더 잘난 게 뭔데? 누가 누굴 얕보고 있어! “강하리는 웃음을 터뜨렸다.“걱정하지 마, 난 괜찮아.”“아이는? 네가 지금 이리 올래? 내가 초음파 검사 다시 해줄게.”강하리는 입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어젯밤 병원에서 검사했는데 의사가 괜찮대.”손연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이가 무사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내가 그 송유라를 확 죽여버릴 거야!”“걱정하지 마, 아이는 괜찮다니까. 배 속에 잘 있어.”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일은... 송유라랑 관련이 없대.”“하, 내가 그걸 믿을 것 같아?”손연지는 콧방귀를 꼈다.“이 일이 송유라랑 관련 없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강하리는 가볍게 웃었다. 그녀도 이 일이 반드시 송유라와 관련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하지만 증거가 없잖아. 방금 경찰서에서 나오는 길인데, 이 사건은 이미 그렇게 결론이 났어.”그뿐 아
조시욱은 짙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어디서 얘기할 건데? ”그녀는 구승훈과 눈을 마주쳤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차분하고 흔들림이 없었다.구승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그녀의 휠체어를 밀고 병실을 나섰다.조시욱은 당황한 듯 따라가려 했지만 구승훈은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등을 향한 채 차갑게 한마디 내뱉었다.“조 선생은 그렇게 남의 집안일에 끼어드는 걸 좋아하나 보죠?”조시욱은 굳은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난 단지, 하리가 당신과 단둘이 가는 게 걱정될 뿐입니다.”구승훈이 고개를 돌렸고, 얼굴은 마치 한겨울 서리처럼 싸늘했다.그런데 그가 아무 말 꺼내기도 전에 강하리가 또 먼저 입을 열었다.“따라오지 마.”조시욱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문제 생기면 바로 전화해.”“응.”구승훈은 그녀를 데리고 병원 아래 정원으로 향했다.겨울의 정원은 생각보다 을씨년스럽지 않았고, 몇 그루의 납매가 피어 있어 오히려 단정하고 고고한 느낌이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납매나무 아래로 데려갔다.금빛 꽃잎에서 은은한 향이 퍼졌지만 지금 두 사람 모두 향기를 느낄 여유는 없었다.“난 연정이 양육권 포기 안 해.”강하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구승훈은 두 팔을 가슴 앞에 교차하고 나무 아래에 섰다.노란 꽃잎들이 흩날리며 그녀의 얼굴을 더욱 눈부시게 만들었다.“왜?”그는 갑자기 몸을 기울였고, 손으로 휠체어 양쪽 팔걸이를 움켜잡았다.너무 가까웠다.그의 숨결이 얼굴을 스칠 정도였다.이 자세는 마치 그녀를 품 안에 가두는 것처럼 느껴졌다.“구승훈, 비켜.”강하리는 냉랭하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익숙한 향수 냄새 속에서 임희주의 체취가 느껴져 역겨웠다.구승훈은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렸고, 눈빛엔 장난기 섞인 악의가 담겨 있었다.“안 비키면?”강하리는 온몸이 들끓었다.역시, 이 뻔뻔한 남자랑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핸드폰을 꺼내 조시욱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하지만 번호를
말이 끝나자마자 구승훈은 심준호의 손에 밀쳐 그대로 흡연실의 유리 벽에 쾅 하고 부딪쳤다.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그쪽을 바라봤다. 마치 말려들까 봐 겁이라도 난 듯 서둘러 자리를 떴다.등이 세게 부딪쳤는데도 구승훈의 표정은 변함없었다.“임희주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그는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심준호는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럼 임희주랑 관계 있는 사람은 나란 거냐? 한 사람과 자면서도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고, 너 구승훈, 정말 뻔뻔하구나.”구승훈은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외삼촌.”그는 담배를 손가락으로 짓눌러 껐다.“강하리랑 내 사이에서 내가 잘못한 건 인정해. 그래서 지금 벌을 받고 있잖아. 심지어 그녀가 화가 나서 칼로 내 가슴을 찔러도, 난 감수할 거야. 하지만, 내가 하지도 않은 일까지 뒤집어쓸 생각은 없어.”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왜 심준호가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안 됐다.하지만 최근 강하리의 태도를 생각해보면, 자신을 보면 역겨워 하고, 스치기만 해도 손을 씻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구승훈은 벌떡 일어나 나가려 했다.하지만 심준호가 막아 섰다.“어디 가?”구승훈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이미 죄를 뒤집어썼으니, 적어도 무슨 죄인지 알고 죽어야 하지 않겠어?”심준호는 여전히 놓아주지 않았다.둘은 흡연실에서 대치하게 되었다.구승훈의 눈빛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고, 거기에 살기까지 담겼다.“심준호, 나를 손쓰게 만들지 마.”심준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그게 무슨 뜻이야?”구승훈은 그의 팔을 거칠게 밀치고 병실 쪽으로 향했다.병실 안에는 아직 몇 명이 연정아 곁을 지키고 있었다.가정부 이모는 백아영 옆에, 조시욱은 강하리 옆에 앉아 있었다.구승훈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네 사람 모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백아영은 여전히 분노가 남아 있었는지 시선을 피했고, 강하리 역시 한 번 쳐다보곤 금방고개를 돌렸다.가정부 이모는 눈짓으로 구승훈에게 말했다.“조 선
구승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물 흐르는 소리가 막 멈춘 참이었다.그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살균 티슈로 손을 닦는 강하리의 모습이 차가운 벽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조시욱 때문이야?”구승훈은 무릎을 꿇고 강하리 앞에 앉아 그녀의 턱을 잡아올렸다.“대답해 봐, 조시욱을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거냐고?”강하리는 고개를 쳐들며 비웃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묻는 건데요?”구승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휠체어를 돌려 화장실을 나서는 그녀의 등 뒤에서 구승훈은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구승훈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병실 문이 열리고 심준호와 백아영, 조시욱이 들어와서였다.구승훈을 본 심준호와 백아영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예전에는 무슨 일이 있든 심준호가 먼저 구승훈에게 상황을 묻고 강하리와 화해할 수 있도록 조율하려 했다.하지만 이번 일 이후 심준호는 단 한 번도 구승훈을 찾지 않았다.그건 구승훈에 대한 더 말할 나위 없는 실망을 의미했다.백아영은 당장이라도 구승훈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수십 년간 유지해 온 품격과 매너로 화를 억눌렀다.세 사람이 강하리와 함께 연정이 주위에 둘러앉자, 병실 한구석에 있던 구승훈은 마치 외부인 같이 느껴져 굳은 표정으로 병실을 나와 유리 창가에 서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뒤늦게 찾아온 심준호가 말을 꺼냈다.“일은 다 정리됐어?”구승훈은 낮게 대답했다. “거의.”비록 여초연의 주변이 완전히 정리되진 않았지만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이상 큰문제는 없었다.“하리랑 조시욱 일은 너도 알고 있겠지. 승훈아, 너한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제 그만 하리 인생에서 나가줘.”구승훈은 멈칫하다 이내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강하리 인생을 방해한다고? 준호야,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넌 알잖아, 어떻게 된 일인지.”“알면 뭐 하냐? 구승훈, 우리 하리가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그걸로도 부족해?”심
강하리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무의식적으로 구승훈을 밀쳐내려 했지만 연정이의 웃음소리에 잠시 망설였다.아직 열이 가시지 않은 구연정은 강하리와 구승훈을 보고 흥분했던 것도 잠시, 곧 다시 기운이 빠졌다.구연정은 힘없이 구승훈 어깨에 기댄 채 한 손은 구승훈의 옷자락을, 다른 한 손은 강하리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강하리를 바라봤지만 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그가 한숨을 내쉬며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의사가 검사 결과를 들고 들어왔다.“강 대표님, 아가씨는 현재 바이러스 감염으로 보입니다. 며칠 입원이 필요할 것 같아 이미 병실은 준비해두었습니다. 곧 간호사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수고 많으셨습니다.”병실에 도착하자마자 연정이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강하리는 침대 곁에 앉아 연정의 손을 꼭 잡고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은 다른 한쪽에서 의사와 연정이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의사가 떠난 뒤에야 그는 강하리 옆으로 돌아왔다.“의사 말로는 보기보다 심각하진 않대. 너무 걱정하지 마.”하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연정이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그녀 곁에 앉아 손을 잡으려 하자 강하리는 황급히 그 손을 빼냈다.“이제 돌아가요. 나랑 아주머니가 있으면 돼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조시욱이 오기 편하게 나더러 가라는 거야?”강하리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노려보다가 이내 비웃듯 말했다.“여기 남아 있으면 임 선생님이 화내지 않을까?”구승훈은 끝내는 강하리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임 선생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너 정말 나 못 믿는 거야?”그의 목소리엔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강하리가 이를 악물고 손을 빼내려 하자 구승훈이 낮게 말했다.“움직이지 마. 연정이 깼어.”강하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급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연정이는 여전히 곤히 자고 있었다.분노에 찬 강하리를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