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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Author: 봄은어디
유하늘은 한 걸음 한 걸음 송우주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동안 내 아이로 사느라 많이 힘들었지?”

송우주는 유하늘이 부드럽게 말하자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으나 억지로 표정을 굳혔다.

“난 좋은 엄마가 아니야. 너한테 숙제하라고 하고, 전자기기 오래 쓰지 못하게 하고, 아이스크림이랑 몸에 안 좋은 음식들 많이 먹지 못하게 하고, 네 자유를 너무 많이 억압했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앞으로는 절대 네 일에 간섭하지 않을 테니까. 아람 이모가 그렇게 좋으면 아람 이모한테 엄마가 되어달라고 해. 나는 상관없으니까.”

유하늘은 정중하게 말했다. 마치 마지막 작별을 고하듯이 말이다.

그녀는 곧 죽을 것이다.

남편은 그녀를 속였고 아이는 그녀를 원망했다.

실패한 삶이었다.

송우주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엄마, 화가 나서 일부러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유하늘은 냉담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아니. 진심이야. 네가 지금 당장 아람 이모를 엄마라고 부른다고 해도 상관없어. 나는 앞으로 너를 낳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 거니까.”

유하늘은 말을 마친 뒤 시선을 내려뜨리고 빠르게 떠났다.

유하늘이 떠난 뒤에도 송우주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치솟아 올랐기 때문이다.

송우주는 문득 울고 싶어졌다. 유하늘에게 버림받는 것이 마치 온 세상에 외면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곧이어 송우주가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가 울렸다.

권아람에게서 걸려 온 전화인 걸 확인하자 송우주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는 조금 전에 느꼈던 두려움을 금세 잊어버렸다.

송우주는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아람 이모!”

유하늘은 차에 오르기 전 송우주의 신난 목소리를 듣고 잠깐 멈칫했지만 끝내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차에 탔다.

바에 도착한 뒤 어두운 복도를 지나 홍이수가 있는 룸 밖에 도착하자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게 보였다.

안에서 송여준은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분위기는 떠들썩했고 누군가 옆에서 그를 놀렸다.

“여준이는 참 여자 복이 많아. 여준이가 잊지 못하던 권아람도 돌아왔잖아.”

“그러게 말이야. 우리도 들었어. 네가 좋아하던 권아람이 돌아왔다면서? 맞지!”

“현모양처도 있고 예쁜 애인도 있고. 나였다면 둘 중에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을 거야.”

송여준은 문을 등지고 있었고 유하늘은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송여준은 그들의 말을 부인하거나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유하늘은 조금 창백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송여준과 결혼한 지 오래되었음에도, 그동안 최선을 다해 노력했음에도 유하늘은 늘 본인과 송여준 사이에 벽이 있다고 느꼈다.

물론 송여준은 그녀에게 매우 잘해주었다. 그와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차갑고 냉정한 모습과 달리 결혼 후 송여준은 다정하고 세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매번 유하늘이 송여준과 행복하게 결혼 기념일을 보내려고 할 때마다 송여준은 늘 은근히 회피했다.

유하늘은 송여준이 로맨틱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 것들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러는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사실은 찔려서 그런 것이었다.

유하늘이 결혼 기념일을 언급할 때 송여준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와 권아람의 결혼 기념일을 떠올렸을까?

유하늘은 목걸이가 든 케이스를 꽉 쥐었고 그 탓에 손끝이 서서히 하얘졌다.

“형수님, 무슨 얘기라도 들었어요?”

고개를 돌린 유하늘은 홍이수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자신의 뒤에 서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았다.

유하늘은 입술을 깨물며 그에게 케이스를 건넸다.

“이수 씨 여자 친구 목걸이에요. 지난번에 우리 집에 왔을 때 흘리고 갔더라고요.”

“고마워요, 형수님. 형수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겠네요.”

홍이수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하늘을 힐끗 보며 그녀에게서 케이스를 건네받았다.

“아람 씨 돌아온 거 알고 있죠? 아람 씨야말로 여준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홍이수는 더 이상 연기하지 않았고 유하늘은 놀라지 않았다.

“예전에는 두 사람 인연이 아닌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하늘 씨가 여준이를 위해 아이를 낳은 걸 생각해서 예의를 차렸어요. 하지만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하는 법이에요.”

유하늘은 차가운 얼굴로 자신을 조롱하는 홍이수를 바라보았다. 순간 모든 것이 바뀐 듯한 기분이 들었다.

권아람이 귀국하고 그녀가 권아람의 존재를 알아챈 뒤로부터 유하늘의 남편과 아이, 그리고 주변 사람들 모두 그녀를 버리기 시작했다.

마치 유하늘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인 것처럼 말이다.

유하늘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자 홍이수는 당황하며 고개 숙여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왜 웃는 거예요?”

유하늘은 경멸 어린 어조로 말했다.

“다들 내가 여준 씨에게 매달리다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여준 씨랑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 산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고까운가 봐요? 그리고 권아람 씨가 돌아와도 내가 떠나지 않고 기어이 들러붙을 거라고 생각하나 봐요.”

“아닌가요?”

홍이수가 되물었다.

유하늘은 그를 바라보며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곧이어 그녀는 온몸의 힘을 쥐어짜 내듯이 또박또박 말했다.

“난 사라질 거예요. 이제 곧 당신들 인생에서 유하늘이란 사람은 완전히 자취를 감출 거예요.”

유하늘은 그렇게 말한 뒤 당황해하는 홍이수의 눈빛을 받으며 그곳을 떠났다.

예전에는 송여준을 사랑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며 7년 동안 헌신했다.

그러나 송여준은 그녀를 배신하고 속였다. 그러니 유하늘 또한 주저하지 않고 사랑을 거두어들일 것이다.

어차피 그녀에게는 살날이 많지 않았다. 인생의 4분의 1을 온통 거짓뿐이었던 결혼 생활에 낭비했으니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얼른 이곳을 떠나 송여준의 아내라는 존재를 지워버리고 다시 유명하고 유능한 재벌가 딸 유하늘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지난 7년을 긴 악몽으로 치부할 것이다.

유하늘은 바 앞에 서서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 뒤 고개를 들어 길 맞은편의 가로등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은 어느 순간 선명했다가, 또 어느 순간은 흐릿한 빛무리가 되었다.

유하늘은 미간을 찌푸린 채 가로등을 한참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올려 눈앞에서 흔들어 보았다.

역시나 가까이 있는 손도 잘 보이다가 흐릿해지기를 반복했다.

유하늘은 의사의 말을 떠올렸다.

두개 내압이 상승한 탓에 속이 메슥거려서 구토하고, 코피를 흘리는 것은 단지 초기 증상일 뿐이었다. 이제 곧 시력도 저하될 것이다.

심지어 운이 나쁜 경우엔 종양이 신경을 압박하여 전신 마비가 될 수도 있었다.

‘벌써 증상이 악화하기 시작하다니.’

어쩌면 두 달 내로 움직일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해외에 있는 유시훈은 유하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기에 유하늘은 한시라도 빨리 그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유하늘은 작게 한숨을 쉰 뒤 길가로 걸어가서 택시를 타려고 했다.

불빛이 그녀의 몸을 비추었다. 그러나 유하늘은 옆에서 그녀를 비추는 환한 불빛을 보지 못했고, 오히려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점점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종국에는 쓰러져버렸다.

...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소독수 냄새였다. 그리고 곧이어 흰색의 천장과 머리 위에 걸려 있는 링거가 보였다.

유하늘의 시선이 수액 관을 따라 아래로 향했다. 그러다 송여준이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침대 옆에 엎드려서 자는 모습이 보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조용히 송여준을 바라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결혼한 지 7년, 송여준은 점점 더 준수해지고 듬직해졌다. 시간은 그의 몸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유하늘은 아니었다. 유하늘은 병약하고 초췌했고, 창백하고 무력했다. 마치 속이 다 썩어버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나무처럼 말이다.

유하늘은 갑자기 마음이 울렁거려 손끝을 살짝 움직였다.

그러자 송여준이 곧바로 잠에서 깼다. 고개를 든 그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유하늘의 눈동자를 보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일어났어?”

송여준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무언가를 들고 왔다.

그것은 도시락과 벚꽃 모나카였다.

“배고플 텐데 뭐라도 좀 먹어.”

유하늘의 시선이 모나카로 향했다.

날이 밝아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걸 사 온 걸 보면 밤새 줄을 섰을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당연히 감동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들의 결혼조차 가짜인데 송여준이 그녀를 사랑해서 그런 거라는 걸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하늘은 고개를 돌렸다.

“가져가. 안 먹을 거야.”

유하늘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기분이 안 좋은 게 티가 났다.

송여준은 순간 마음이 아렸다.

그는 유하늘이 바 앞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걸 떠올리고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녀의 손을 힘껏 쥐며 말했다.

“이수 말을 들어 보니 이수한테 줄 물건이 있어서 바에 찾아온 거라며? 나 룸 안에 있었는데 왜 나 찾아오지 않았어? 혹시... 찾아왔었다가 무슨 말을 듣고 쓰러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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