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서윤은 휴대폰을 쥔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옆자리 시트는 이미 차가웠다.태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만 가다 끊겼다. 두 번, 세 번. 마지막에는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가 흘러나왔다.어젯밤 손을 잡았던 남자가, 아침에는 사라지고 없었다.하루는 지옥처럼 길었다.서윤은 한성건설 재무팀과 함께 거래 은행들을 돌았다. 대답은 모두 같았다. 태강이 손을 뗐다는 소문이 이미 업계에 돌고 있었다.같은 시각, 태강그룹 본사 32층 부회장 집무실.태하는 책상 위에 펼쳐진 결재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성건설 긴급 자금 지원 철회」. 결재란에 형의 인감이 붉게 찍혀 있었다. 그는 이 서류를 본 적도, 도장을 찍은 적도 없었다.옆구리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태하는 이를 악물고 형의 책상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잠금장치는 형의 생일이었다. 자기 생일이기도 한.검은 파일 하나가 나왔다. 표지에는 짧게 적혀 있었다.「한성건설 채권 매입 건 — 비공개」부도가 난 뒤 헐값이 된 한성의 채권을 사들이는 계획이었다. 날짜는 결혼식 석 달 전. 서윤과 약혼하던 바로 그달이었다.태하는 한참 동안 그 날짜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만년필을 들었다. 승인란 옆 빈칸에 두 글자를 썼다.보류.그 아래에 강태준의 서명을 했다. 끝을 왼쪽으로 조금 더 기울여서."그 건은 부회장님께서 직접 챙기시던 일입니다."문간에 비서실장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었다.태하는 파일을 덮고 서랍에 돌려놓았다. 형의 목소리로, 형의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제가 보류하는 겁니다."비서실장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태하는 코트를 집어 들고 집무실을 나섰다.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여덟 시간. 형의 이름으로는 한성을 구할 수 없었다. 이제 자기 이름을 써야 할 때였다.오후 네 시, 마지막 은행을 나서는데 문자가 왔다.[새아가, 많이 힘들지? 저녁에 본가로 오렴. 내가 도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보낸 사람은 윤미경이었다. 서윤은 그 문자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도와주
사망신고서.서윤은 그 단어를 따라 말하지 못했다.태하는 바닥에 떨어진 붕대를 주워 그녀의 손에 다시 쥐여 주었다. 마저 감으라는 듯이."할아버지가 정했대. 쌍둥이는 후계 다툼을 부른다고. 형은 장남으로 출생신고를 하고, 나는 다음 날 죽은 걸로 하자고.""……그럼 당신은.""미국으로 보내졌어. 유모 한 명이랑. 그 유모가 일 년 만에 돈을 들고 사라진 다음부터는, 그냥 살아남았지."그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했다. 서윤은 그의 등을 가로지르던 흉터들을 떠올렸다. 지도처럼 얽혀 있던 그 상처들이 하나씩 이름을 갖기 시작했다."이 문신은 열여덟 살에 새겼어. 서류에서 지워진 날을 몸에라도 남겨 두려고."서윤은 아무 말 없이 붕대를 마저 감았다. 매듭을 짓는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그가 눈치채지 않기를 바랐다."오늘부터 내 방에서 자."구급상자를 정리하던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뭐?""다음엔 둘 다라고 했어. 그놈들은 이 집 위치도 알아. 네 방은 창문이 정원 쪽이고.""그래서 같은 방을 쓰자고?""같은 침대."서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태하는 피 묻은 셔츠를 집어 들며 덧붙였다."선은 안 넘어. 약속해."선은 정말로 넘지 않았다.넓은 침대 한가운데에 베개 하나가 놓였다. 태하는 등을 돌리고 누웠고, 서윤은 반대편 끝에 몸을 붙였다. 불이 꺼지자 빗소리와 서로의 숨소리만 남았다.잠이 오지 않았다. 베개 하나 너머에서 그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안 자?"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당신도 안 자잖아.""옆구리가 아파서.""거짓말."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가 웃는 게 느껴졌다."그래. 거짓말이야."서윤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석 달 동안 나를 만난 사람, 당신이야? 그 질문이 다시 목 끝까지 차올랐다. 지금이라면 그는 대답할지도 몰랐다. 어둠 속에서는 사람들이 조금 더 솔직해지니까.하지만 서윤은 묻지 않았다. 대답을 듣는 순간 무언가가 돌이킬 수 없이 바뀔 것 같았다. 그게 두려운 건지 기다
머리채를 움켜쥔 손이 서윤을 창밖으로 끌어내려는 순간이었다.운전석 문이 터져 나가듯 열렸다.무엇이 일어났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빗속에서 둔한 소리가 나고, 서윤의 머리를 잡았던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놓았다. 손목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눈 감아."태하의 목소리였다. 서윤은 눈을 감지 않았다.그래서 보았다. 이마에서 피를 흘리는 남자가 빗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다가오는 주먹을 피하지도 않고 팔꿈치로 흘려내더니, 그대로 상대의 멱살을 잡아 승합차 문에 처박았다. 두 번째 남자는 무릎을 채여 그대로 주저앉았다. 싸움이 아니라 정리에 가까웠다. 수백 번은 해 본 사람처럼 짧고, 정확하고, 차가웠다.강태준은 절대 저렇게 움직이지 못한다.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세 번째 남자의 손에서 칼날이 번뜩였다."뒤에!"태하가 몸을 틀었다. 칼날이 그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신음 하나 없이 남자의 팔을 꺾어 칼을 떨어뜨렸다. 칼이 빗물 웅덩이에 떨어지는 소리가 난 것과 동시에, 멀리서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다가왔다."철수해!"남자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승합차에 올랐다. 마지막 남자가 문을 닫기 직전 내뱉었다."다음엔 둘 다야."병원에는 가지 않았다."병원 가면 기록이 남아. 강태준이 칼에 맞았다는 기록."그래서 서윤은 별채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구급상자를 열었다. 손이 떨리지 않는 게 신기했다. 수백 년 된 그림에서 먼지 한 톨을 덜어내던 손이었다.핀셋으로 그의 팔뚝에 박힌 유리 조각을 하나씩 뽑아내는 동안, 태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무서웠어?""응.""그놈들이?""당신이."핀셋이 마지막 조각을 끌어냈다. 태하가 낮게 웃었다. 웃음인데 어딘가 아파 보였다."그런 게 내 진짜 모습이야. 형이랑은 다르지.""알아."서윤은 손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처음부터 달랐어."태하의 숨이 아주 짧게 멈췄다. 그가 무언가 물으려는 듯했지만, 서윤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셔츠 벗어. 옆구리
같은 날 오후, 태강그룹 본사 32층 대회의실.열두 명의 임원이 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결혼식 이후 첫 임원회의였다. 상석의 태하는 서류를 넘기며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형의 말투, 형이 앉는 자세, 형이 펜 끝으로 책상을 두 번 두드리는 버릇까지. 밤새 외운 것들이었다."베트남 물류센터 건은 이대로 진행하시죠."태하가 서류를 덮자, 전략기획본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부회장님, 그 건은 지난주에 직접 반려하셨잖습니까."회의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열두 쌍의 눈이 상석으로 향했다. 펜을 쥔 태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형이 무엇을 왜 반려했는지, 그는 알 길이 없었다.그때 뒤에 서 있던 비서실장이 다가와 서류 한 장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첫 줄에 '반려 사유 보완 후 재상정'이라고 적혀 있었다."보완된 수정안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비서실장이 담담하게 말했다.태하는 서류를 내려다보았다가, 형이 했을 법한 얼굴로 본부장을 보았다."수정안도 안 읽고 회의에 들어오십니까."본부장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회의실이 비고 난 뒤, 비서실장이 결재 서류를 내밀며 낮게 말했다."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회장님 서명은 끝이 왼쪽으로 조금 더 기웁니다."태하가 고개를 들었다. 비서실장은 이미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그날 밤 태하는 자정을 넘겨서야 들어왔다.불 꺼진 거실 소파에 서윤이 앉아 있었다. 태하가 걸음을 멈추자 그녀가 물었다."태준 씨 차가 발견된 곳, 한강 어디야?""왜.""가 볼 거야. 같이 찾기로 거래했잖아.""위험해.""그럼 혼자 갈게."태하는 한참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방금 내려놓은 차 키를 다시 집어 들었다."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새벽 한 시의 한강 공원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빗물 고인 아스팔트 위에 번졌다. 태하가 우산을 쓴 채 맨 안쪽 구석 자리를 가리켰다."저기. 운전석 문은 열려 있었고, 시동도 안 꺼져 있었대.
"……연기였어."서윤은 겨우 그 한마디를 밀어냈다."거짓말 안 하기로 했잖아.""당신은 대답도 안 하잖아."태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틈에 서윤은 그의 팔 아래로 몸을 빼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등 뒤에서 그가 따라오지 않았다. 대신 낮은 웃음소리가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그녀를 쫓아왔다.귀가 뜨거웠다. 계단을 다 내려갈 때까지.그 뒤로 사흘 동안 태하는 거의 밤마다 집을 비웠다.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기다렸다는 걸 들킬 것 같았다. 서윤은 대신 오랫동안 비워 두었던 복원 작업실로 돌아갔다. 붓과 용제 냄새 속에 있으면 적어도 생각은 멈췄다.사흘째 오후, 작업실 문에 노크 소리가 났다."형수님, 바쁘세요?"강도현이었다. 한 손에는 커피 두 잔, 다른 손에는 신문지에 싼 액자를 들고 있었다."엄마가 아끼는 그림인데 모서리가 좀 들떴대요. 형수님 실력 좋다고 소문났잖아요."핑계라는 건 둘 다 알았다. 그래도 서윤은 액자를 받아 작업대 위에 눕혔다. 시댁 식구를 문전박대할 수는 없었다.도현은 작업실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그녀 바로 뒤에 섰다. 너무 가까웠다. 그녀가 루페를 눈에 대고 있는 동안 그의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신기하다. 이런 걸 하루 종일 들여다봐요?""좀 떨어져 주시겠어요? 용제 냄새가 독해서요.""괜찮아요. 나 이런 냄새 좋아해요."그가 손을 뻗었다. 서윤이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엄지가 그녀의 뺨을 쓸었다."물감 묻었어요."서윤은 의자를 밀며 일어섰다. 도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거두며 웃었다."형이 질투하려나. 아, 아니다. 형은 질투 같은 거 할 줄 모르는 사람이지.""도련님.""근데 요즘은 모르겠어요."도현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형 요즘 좀 이상하지 않아요? 갈라에서 사람들 앞에서 키스하고, 웃고. 나 형이 사람들 앞에서 웃는 거 스무 살 이후로 처음 봤어요. 결혼하더니 사람이 아예 바뀌었더라고요.""신혼이니까요.""그렇죠. 형수님이
다음 날 오후 두 시 오십오 분. 서윤은 청담동 갤러리 차(次)의 유리문 앞에 섰다.태하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명함은 핸드백 깊숙이 넣어 두었다. 이유는 스스로도 정확히 몰랐다. 그가 막을까 봐서인지, 아니면 그가 모르는 무언가를 먼저 알고 싶어서인지.전시장은 비어 있었다. 휴관일 팻말이 걸린 하얀 공간에서 하이힐 소리만 울렸다."정확하네요."차은서가 2층 계단 난간에 기대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검은 실크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내려와 서윤 앞에 섰다."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태준이한테 무슨 일 있어요?""무슨 말씀이세요?""결혼식 사흘 전부터 그 사람이랑 연락이 끊겼어요. 십 년 동안 한 번도 없던 일이에요."차은서가 한 걸음 다가왔다. 향수 냄새가 짙었다."그런데 결혼식장에는 멀쩡히 나타났죠. 내가 준 시계는 빼고, 나를 보고도 눈빛 하나 안 흔들리는 얼굴로. 그 사람이 나를 이렇게 정리할 리 없어요. 당신, 그 사람한테 뭐라고 했어요?"서윤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이 여자는 모른다. 신랑이 바뀌었다는 걸 알고 온 게 아니었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온 것뿐이었다.하지만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단 하룻밤. 풀려 있는 시계와 키스 한 번만으로 이 여자는 그 사람이 변했다는 걸 알아챘다. 강태준을 가까이서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은 누구일까."그건 대표님이 그 사람한테 이제 아무것도 아니라서겠죠."차은서의 눈가가 꿈틀했다."말 조심해요. 나는 회장님께 전화 한 통이면 돼요. 결혼 전날 밤까지 태준이가 누구 옆에 있었는지. 기자들한테도요. 재벌가 신혼 스캔들이 터지면, 당신 집안 회사 지원은 어떻게 될까요?"서윤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부도 유예 기간. 이천 명의 월급날. 숫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그때, 차은서의 어깨 너머 벽에 걸린 그림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19세기 프랑스 풍경화. 해 질 녘의 강변. 서윤은 그 그림을 알았다. 작년 겨울, 석 달 동안 매일 들여다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