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장에 나타난 신랑은 쌍둥이 동생이었다.

결혼식장에 나타난 신랑은 쌍둥이 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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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직전의 건설사 딸이 정략결혼식 버진로드 끝에서 신랑이 존재조차 지워진 쌍둥이 동생으로 바뀌었다는 걸 알아챈다. 사라진 약혼자를 찾기 위해 가짜 남편과 비밀 동맹을 맺지만, 진실을 파헤칠수록 누가 그녀를 지키고 누가 그녀를 이용했는지 모든 것이 뒤집힌다. "소리 내지 마. 모른 척해. 안 그러면 형이 죽어." 아버지의 회사를 살리기 위해 재벌가 후계자 강태준과 정략결혼을 택한 한서윤. 그런데 결혼식 날, 버진로드 끝에 선 신랑은 그녀의 약혼자가 아니었다.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 하지만 그는 태어나자마자 존재가 지워진 쌍둥이 동생, 강태하였다. 사라진 약혼자를 찾기 위해 가짜 남편과 맺은 비밀 동맹. 사람들 앞에서만 부부인 척하기로 했는데, 왜 그의 키스가 이렇게 익숙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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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 1

1화. 베일 너머의 남자

"웃어. 오늘만큼은."

아버지의 목소리는 낮았다. 신부 대기실 거울 속에서 한서윤은 자기 얼굴을 낯선 사람처럼 바라봤다. 순백의 드레스, 진주를 엮은 베일, 목덜미를 따라 정돈된 머리카락. 삼 주 동안 피팅을 다섯 번이나 했는데도 이 드레스는 여전히 남의 옷 같았다.

"웃고 있어요."

"눈은 안 웃잖니."

"아빠. 나 괜찮아."

거짓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절반은.

그 남자와의 결혼이었다면.

"신부님, 입장하실게요."

진행 요원의 목소리에 서윤은 숨을 골랐다.


호텔 그랜드볼룸의 문이 열렸다.

샹들리에 아래로 하얀 꽃길이 길게 뻗어 있었다. 정재계 인사 오백여 명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고, 카메라 셔터 소리가 빗소리처럼 쏟아졌다. 서윤은 아버지의 팔에 손을 얹고 첫걸음을 뗐다.

버진로드 끝에 강태준이 서 있었다.

같은 얼굴, 같은 키, 같은 검은 턱시도. 반듯하게 넘긴 머리와 날카로운 턱선까지. 그런데 세 걸음쯤 걸었을 때, 서윤의 발이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

다르다.

무엇이 다른지 머리보다 눈이 먼저 알았다. 그녀는 매일 수백 년 된 그림 위에서 머리카락 한 올만 한 균열을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붓질의 방향, 덧칠의 두께, 원작자의 습관. 진품과 위작을 가르는 건 언제나 그런 사소한 것들이었다.

남자의 왼손목이 비어 있었다.

상견례에서도, 약혼식에서도 그 은색 시계는 단 한 번도 그의 손목을 떠난 적이 없었다. 결혼식 날 아침에 그 시계를 풀어둘 남자가 아니었다.

시계 하나쯤이야. 서윤은 스스로를 달랬다. 긴장한 탓에 별것 아닌 게 크게 보이는 거라고.

그런데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왜.'

하객석에서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오르간 연주는 멈추지 않았다. 서윤의 다리는 저절로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멈추면 모든 게 끝난다. 아버지의 회사도, 이천 명의 월급날도.

버진로드 끝. 아버지가 그녀의 손을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의 손이 서윤의 손을 감쌌다.

뜨거웠다.

서윤은 그 온도를 알았다. 한강 바람 속에서, 편의점 커피 캔 너머에서 몇 번이나 잡았던 손. 석 달 동안 밤마다 그녀를 찾아오던, 바로 그 손이었다.

그리고 냄새. 약혼식 날의 묵직한 향수 대신 비누와 희미한 담배 냄새가 났다. 한강을 걷던 밤의 냄새. 오늘의 그는 처음으로 밤의 얼굴을 하고 버진로드 끝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주례 앞에 섰다. 주례사가 시작됐지만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윤은 베일 너머로 남자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완벽한 강태준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눈이 달랐다. 강태준의 눈이 얼어붙은 호수라면, 이 남자의 눈은 그 얼음 밑에서 무언가가 들끓고 있었다.

"이제 신랑 신부, 서로를 마주 보시겠습니다."

남자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얀 장갑을 낀 손이 천천히 베일을 걷어 올렸다. 시야가 트이는 순간, 두 사람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오늘 왜 그래요. 그 한마디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 순간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하객들 눈에는 신랑이 신부에게 애틋하게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사진 기자들의 플래시가 일제히 터졌다.

뜨거운 숨결이 귓바퀴에 닿았다.

"소리 내지 마."

낮고 갈라진 목소리. 강태준의 정돈된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그런데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

"모른 척해."

남자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목 안쪽, 맥박이 뛰는 자리를 꾹 눌렀다. 마치 그녀의 심장 소리를 세기라도 하는 것처럼.

"안 그러면 형이 죽어."


형.

그 한 글자가 서윤의 머릿속을 하얗게 지웠다.

강태준에게 형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태강그룹의 족보에도, 경제지 기사에도, 상견례 자리의 그 길고 지루한 집안 소개에도. 강태준은 외아들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신랑 강태준 군은 신부 한서윤 양을 아내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평생 사랑하고 아끼겠습니까?"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서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채 대답했다.

"네. 맹세합니다."

그 목소리에는 거짓이 하나도 섞여 있지 않은 것처럼 들렸다. 그게 더 무서웠다.

"신부 한서윤 양은 신랑 강태준 군을 남편으로 맞아……."

오백 명의 시선. 카메라. 하객석 맨 앞줄에서 우아하게 미소 짓고 있는 시어머니 윤미경. 그리고 그 옆, 낯선 눈빛으로 신랑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동생 강도현.

손목 안쪽에서 남자의 엄지가 다시 한번 맥박을 눌렀다. 재촉하듯. 혹은 애원하듯.

"……맹세합니까?"

서윤은 숨을 들이켰다.

진짜 강태준은 어디에 있는가. 이 남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지난 석 달, 밤마다 그녀의 손을 잡던 사람은 대체 누구였는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단 하나만 분명했다. 여기서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누군가가 죽는다.

"……네."

박수 소리가 그랜드볼룸을 가득 메웠다.

남자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서약의 키스였다. 서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입술은 내려오지 않았다. 대신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아주 짧게, 조심스럽게 닿았다.

석 달 전 한강에서, 그가 처음 그녀에게 입 맞추던 날과 똑같이.

서윤이 눈을 떴을 때, 남자는 이미 하객들을 향해 완벽한 강태준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쥔 채, 입술만 움직여 속삭였다.

"환영해, 형수님. 아니지."

남자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비틀렸다.

"이제 내 아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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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베일 너머의 남자
"웃어. 오늘만큼은."아버지의 목소리는 낮았다. 신부 대기실 거울 속에서 한서윤은 자기 얼굴을 낯선 사람처럼 바라봤다. 순백의 드레스, 진주를 엮은 베일, 목덜미를 따라 정돈된 머리카락. 삼 주 동안 피팅을 다섯 번이나 했는데도 이 드레스는 여전히 남의 옷 같았다."웃고 있어요.""눈은 안 웃잖니.""아빠. 나 괜찮아."거짓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절반은.그 남자와의 결혼이었다면."신부님, 입장하실게요."진행 요원의 목소리에 서윤은 숨을 골랐다.호텔 그랜드볼룸의 문이 열렸다.샹들리에 아래로 하얀 꽃길이 길게 뻗어 있었다. 정재계 인사 오백여 명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고, 카메라 셔터 소리가 빗소리처럼 쏟아졌다. 서윤은 아버지의 팔에 손을 얹고 첫걸음을 뗐다.버진로드 끝에 강태준이 서 있었다.같은 얼굴, 같은 키, 같은 검은 턱시도. 반듯하게 넘긴 머리와 날카로운 턱선까지. 그런데 세 걸음쯤 걸었을 때, 서윤의 발이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다르다.무엇이 다른지 머리보다 눈이 먼저 알았다. 그녀는 매일 수백 년 된 그림 위에서 머리카락 한 올만 한 균열을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붓질의 방향, 덧칠의 두께, 원작자의 습관. 진품과 위작을 가르는 건 언제나 그런 사소한 것들이었다.남자의 왼손목이 비어 있었다.상견례에서도, 약혼식에서도 그 은색 시계는 단 한 번도 그의 손목을 떠난 적이 없었다. 결혼식 날 아침에 그 시계를 풀어둘 남자가 아니었다.시계 하나쯤이야. 서윤은 스스로를 달랬다. 긴장한 탓에 별것 아닌 게 크게 보이는 거라고.그런데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왜.'하객석에서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오르간 연주는 멈추지 않았다. 서윤의 다리는 저절로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멈추면 모든 게 끝난다. 아버지의 회사도, 이천 명의 월급날도.버진로드 끝. 아버지가 그녀의 손을 남자에게 건넸다.남자의 손이 서윤의 손을 감쌌다.뜨거웠다.서윤은 그 온도를 알았다. 한강 바람 속에서, 편의점 커피 캔 너머에서 몇 번이나 잡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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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피 묻은 시계
신혼집은 태강그룹 본가 뒤편의 별채였다. 피로연이 끝나고 차에서 내릴 때까지 남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현관문이 닫히고 경호원의 발소리가 멀어진 뒤에야, 서윤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돌아섰다."당신 누구야."남자는 넥타이를 풀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하객들 앞에서 짓던 강태준의 미소는 흔적도 없었다."강태하. 네 남편의 쌍둥이 동생. 정확히는,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 동생.""태준 씨는 어디 있어. 형이 죽는다는 게 무슨 뜻이야.""알 필요 없어.""난 방금 오백 명 앞에서 당신이랑 결혼했어!"태하가 한 걸음 다가왔다. 서윤은 물러서지 않았다. 둘 사이의 거리가 숨결이 닿을 만큼 좁혀졌다."그러니까 더 알 필요 없어. 아는 게 많을수록 위험해지는 건 너야."그는 복도 끝 방을 턱으로 가리켰다."네 방은 저쪽, 내 방은 이쪽. 밤에는 서로 문 열지 않는다. 이 결혼의 첫 번째 규칙이야.""첫날밤부터 각방이라고?"태하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아쉬워?"서윤은 대답 대신 문을 쾅 닫았다.새벽 두 시. 잠은 오지 않았다.목이 말라 부엌으로 내려가던 서윤은 욕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수증기 사이로 남자의 등이 보였다.숨이 멎었다.넓은 등 위로 상처가 지도처럼 얽혀 있었다. 칼에 베인 듯한 긴 흉터, 움푹 팬 자국, 오래된 화상. 강태준의 매끈한 세계에서는 절대 생길 수 없는 흔적들이었다.그때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구경 다 했으면."수건을 허리에 두른 채 그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물방울이 쇄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서윤은 뒷걸음질 치다 벽에 등이 닿았다. 태하가 한 손을 그녀 머리 옆 벽에 짚었다."규칙 첫날부터 어기는 거야, 한서윤?""……물 마시러 나왔을 뿐이야.""그래?"그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잠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뜨거운 체온이 얇은 잠옷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석 달 동안 밤마다 잡았던 그 손과 똑같은 온도였다. 그럴 리 없는데.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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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식탁 아래의 손
서윤은 시계를 쥔 채 돌아섰다. 태하가 문틀에 기대 서 있었다. 잠든 척했던 것이다."이 피, 태준 씨 거야?""내려놔.""대답해. 당신이 그런 거야?"태하가 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나 시계를 빼앗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 위로 자기 손을 겹쳐, 시계를 함께 쥐었다."내가 형을 해쳤으면 이걸 서랍에 넣어뒀을까. 강물에 던졌겠지.""그럼 누가.""그걸 찾는 중이야."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낮게 갈라졌다."결혼식 사흘 전 밤에 형한테서 전화가 왔어. 한마디만 하고 끊겼지. 내가 안 나타나면, 네가 서라고."다음 날 아침, 강태준의 차가 한강 공원 주차장에서 발견됐다. 운전석은 비어 있었고 이 시계만 남아 있었다."경찰에는…….""태강그룹 후계자가 결혼식 사흘 전에 실종됐다는 소식이 나가는 순간, 형을 데려간 놈들한테 형은 더 이상 필요 없어져."서윤은 그제야 그가 왜 오백 명 앞에 섰는지 이해했다. 강태준이 멀쩡히 결혼했다는 사실 자체가 인질의 목숨값이었다.태하가 시계를 그녀 손에서 천천히 빼냈다."내일 아침 본가에서 가족 식사가 있어. 그 식탁에 형을 데려간 사람이 앉아 있을 수도 있어. 넌 그냥 웃기만 해."본가 식당의 식탁은 지나치게 길었다.상석에는 태강그룹 회장 강진혁이 앉아 있었다. 그 오른쪽에 시어머니 윤미경, 맞은편에 시동생 강도현. 은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조용히 오갔다."새아가, 어젯밤은 잘 잤니?"윤미경이 부드럽게 웃었다. 진주 귀걸이가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서윤은 그 미소가 자신을 해부하듯 훑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네, 어머님.""다행이구나. 태준이가 원래 잠자리가 예민해서 걱정했단다."도현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키득거렸다."형이 예민한 건 잠자리만이 아니죠. 형수님, 형 생각보다 피곤한 남자예요.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 말해요."그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서윤의 목선에 머물렀다. 서윤이 대답을 고르는 순간, 식탁 아래에서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태하였다.그는 표정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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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계약 조건
회장 강진혁이 신문에서 눈을 들었다."무슨 얘기요?""아니에요, 여보."윤미경이 소리 내어 웃었다. 찻잔을 들어 올리는 손끝까지 우아했다."새아가가 벌써 태준이 식성까지 꿰고 있길래요. 금슬 좋겠다 싶어서. 제가 괜히 샘이 다 나네요."회장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신문으로 돌아갔다. 도현이 피식 웃으며 서윤을 흘끗 보았다. 대화는 그렇게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흘러갔다.하지만 서윤은 알았다. 방금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경고였다.식탁 아래에서 태하의 손이 아주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놓았다. 손등에는 서윤의 손톱자국이 초승달 모양으로 붉게 남아 있었다.별채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서윤이 돌아섰다."어머님, 알아.""알아."태하는 놀라지도 않고 재킷을 벗어 소파에 던졌다."알고 있었다고? 그럼 그 정과도…….""나를 시험한 게 아니야. 너를 시험한 거지. 네가 아는지, 모르는지."서윤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우아하게 웃던 그 얼굴이 처음부터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소름으로 기어올랐다."그럼 왜 아무 말도 안 하셨어? 회장님 앞에서 한마디만 하면 끝나는 일이잖아.""그러게."태하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무언가를 이미 계산해 둔 눈이었다."왜일까. 그게 내가 찾는 답이야."서윤은 숨을 골랐다. 어젯밤 핏자국이 번진 시계. 오늘 아침 장난감을 보는 듯한 시어머니의 눈. 이 집에서 혼자 버티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거래하자."태하의 눈썹이 올라갔다."태준 씨 찾는 거, 나도 도울게. 나는 그 사람 약혼녀였어. 당신이 모르는 것도 알아. 대신 조건이 있어.""말해 봐.""첫째, 태준 씨를 찾으면 모든 진실을 말해 줘. 당신이 누군지, 왜 여기 있는지 전부. 둘째, 한성건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줘. 셋째."서윤이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나한테 거짓말하지 마."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태하의 입가에 알 수 없는 웃음이 스쳤다."셋째가 제일 어렵네.""그럼 거래 없어.""좋아. 대신 내 조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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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연기가 아닌 키스
입술과 입술 사이, 종이 한 장 두께의 거리.서윤은 눈을 감지도, 피하지도 못한 채 굳어 있었다. 태하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렸다.그런데 입술은 끝내 내려오지 않았다.태하가 피식 웃으며 몸을 뗐다."눈 감는 것부터 연습해야겠네. 그렇게 노려보면 누가 봐도 원수지간이야.""……당신이!"서윤이 쏘아붙이기도 전에, 그는 소파 위의 재킷을 집어 들고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 닫힌 문 앞에서 서윤은 한참 동안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눌렀다.연기다. 이건 연기일 뿐이다.그런데 왜 아쉬운 걸까.사흘 뒤, 태강그룹 창립 오십 주년 자선 갈라.신혼부부의 첫 공식 행사였다. 호텔 연회장은 샴페인 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카메라 플래시로 가득했다. 서윤은 태하의 팔짱을 낀 채 끝없이 이어지는 인사에 미소로 답했다."생각보다 잘하네."태하가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남들 눈에는 다정한 귓속말로 보일 각도였다."당신도 생각보다 뻔뻔하고.""칭찬으로 들을게."그때 도현이 잔을 들고 다가왔다. 그 뒤에는 투자자 몇 명과 경제지 기자가 따라붙어 있었다."형, 형수님. 다들 궁금해하시던데요. 정략결혼이라 신혼인데도 각방 쓴다는 소문이 돌던데, 설마 사실은 아니죠?"웃음 섞인 말이었지만 칼끝이 숨어 있었다. 기자의 펜이 수첩 위에서 멈췄다. 저 멀리 계단 위에서 윤미경이 샴페인 잔을 든 채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서윤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르는 그 짧은 순간.태하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그리고 대답 대신, 입을 맞췄다.플래시가 폭죽처럼 터졌다.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고, 투자자들 사이에서 웃음과 박수가 번졌다. 연기였다. 소문을 덮기 위한, 계산된 한 장면.그런데 플래시가 잦아들어도 태하는 떨어지지 않았다.허리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볍게 닿기만 했던 입술이 천천히 깊어졌다. 서윤은 그를 밀어내려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 손끝에 닿은 심장이 그녀만큼이나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그 순간 서윤은 알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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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붉은 드레스의 시험
서윤의 손끝이 태하의 셔츠 자락 위에서 굳었다.그러나 태하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서윤의 허리를 감싼 팔을 풀지 않은 채, 느긋하게 차은서를 돌아보았다."사람은 결혼하면 변해. 너도 해 보면 알 거야."차은서의 미소가 아주 잠깐 굳었다가 다시 피어났다. 그녀는 처음으로 서윤에게 시선을 돌렸다."오랜만이에요, 한서윤 씨. 작년에 우리 갤러리 그림 복원해 줬던 거 기억하죠? 그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네.""저도요, 대표님."서윤은 웃었다. 입꼬리만."태준아, 잠깐 얘기 좀 해. 일 얘기야. 다음 달 경매 건."차은서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테라스 쪽으로 걸어갔다. 붉은 드레스 자락이 대리석 바닥 위로 미끄러졌다. 거절하면 더 의심받는다. 태하도 그걸 알았다.그가 서윤의 귓가에 짧게 속삭였다."오 분."오 분은 길었다.서윤은 샴페인 잔을 쥔 채 연회장 구석, 테라스로 이어지는 유리문이 비스듬히 보이는 자리에 섰다. 일부러 그 자리를 고른 건 아니었다. 아마도.유리 너머로 두 사람이 보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차은서가 무언가 말하며 태하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넥타이를 천천히 고쳐 매 주었다.익숙한 손길이었다. 수십 번은 해 본 사람의 손.서윤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샴페인 잔이 가늘게 떨렸다.'저 여자는 태준 씨 연인이야. 태하 씨가 아니라.'머리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저건 형의 옛 연인이 형의 얼굴을 한 남자를 떠보는 장면일 뿐이라고. 그런데 가슴은 머리의 말을 듣지 않았다.차은서가 까치발을 들었다. 붉은 입술이 태하의 귀 바로 옆까지 다가갔다.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태하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서윤은 잔을 내려놓았다. 더 보고 있다가는 저 유리문을 열고 나갈 것 같았다."칠 분."돌아온 태하에게 서윤이 내뱉은 첫마디였다.태하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주 천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세고 있었어?""……약속을 안 지켰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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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균열이 없는 그림
다음 날 오후 두 시 오십오 분. 서윤은 청담동 갤러리 차(次)의 유리문 앞에 섰다.태하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명함은 핸드백 깊숙이 넣어 두었다. 이유는 스스로도 정확히 몰랐다. 그가 막을까 봐서인지, 아니면 그가 모르는 무언가를 먼저 알고 싶어서인지.전시장은 비어 있었다. 휴관일 팻말이 걸린 하얀 공간에서 하이힐 소리만 울렸다."정확하네요."차은서가 2층 계단 난간에 기대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검은 실크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내려와 서윤 앞에 섰다."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태준이한테 무슨 일 있어요?""무슨 말씀이세요?""결혼식 사흘 전부터 그 사람이랑 연락이 끊겼어요. 십 년 동안 한 번도 없던 일이에요."차은서가 한 걸음 다가왔다. 향수 냄새가 짙었다."그런데 결혼식장에는 멀쩡히 나타났죠. 내가 준 시계는 빼고, 나를 보고도 눈빛 하나 안 흔들리는 얼굴로. 그 사람이 나를 이렇게 정리할 리 없어요. 당신, 그 사람한테 뭐라고 했어요?"서윤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이 여자는 모른다. 신랑이 바뀌었다는 걸 알고 온 게 아니었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온 것뿐이었다.하지만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단 하룻밤. 풀려 있는 시계와 키스 한 번만으로 이 여자는 그 사람이 변했다는 걸 알아챘다. 강태준을 가까이서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은 누구일까."그건 대표님이 그 사람한테 이제 아무것도 아니라서겠죠."차은서의 눈가가 꿈틀했다."말 조심해요. 나는 회장님께 전화 한 통이면 돼요. 결혼 전날 밤까지 태준이가 누구 옆에 있었는지. 기자들한테도요. 재벌가 신혼 스캔들이 터지면, 당신 집안 회사 지원은 어떻게 될까요?"서윤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부도 유예 기간. 이천 명의 월급날. 숫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그때, 차은서의 어깨 너머 벽에 걸린 그림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19세기 프랑스 풍경화. 해 질 녘의 강변. 서윤은 그 그림을 알았다. 작년 겨울, 석 달 동안 매일 들여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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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석 달의 빈칸
"……연기였어."서윤은 겨우 그 한마디를 밀어냈다."거짓말 안 하기로 했잖아.""당신은 대답도 안 하잖아."태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틈에 서윤은 그의 팔 아래로 몸을 빼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등 뒤에서 그가 따라오지 않았다. 대신 낮은 웃음소리가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그녀를 쫓아왔다.귀가 뜨거웠다. 계단을 다 내려갈 때까지.그 뒤로 사흘 동안 태하는 거의 밤마다 집을 비웠다.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기다렸다는 걸 들킬 것 같았다. 서윤은 대신 오랫동안 비워 두었던 복원 작업실로 돌아갔다. 붓과 용제 냄새 속에 있으면 적어도 생각은 멈췄다.사흘째 오후, 작업실 문에 노크 소리가 났다."형수님, 바쁘세요?"강도현이었다. 한 손에는 커피 두 잔, 다른 손에는 신문지에 싼 액자를 들고 있었다."엄마가 아끼는 그림인데 모서리가 좀 들떴대요. 형수님 실력 좋다고 소문났잖아요."핑계라는 건 둘 다 알았다. 그래도 서윤은 액자를 받아 작업대 위에 눕혔다. 시댁 식구를 문전박대할 수는 없었다.도현은 작업실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그녀 바로 뒤에 섰다. 너무 가까웠다. 그녀가 루페를 눈에 대고 있는 동안 그의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신기하다. 이런 걸 하루 종일 들여다봐요?""좀 떨어져 주시겠어요? 용제 냄새가 독해서요.""괜찮아요. 나 이런 냄새 좋아해요."그가 손을 뻗었다. 서윤이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엄지가 그녀의 뺨을 쓸었다."물감 묻었어요."서윤은 의자를 밀며 일어섰다. 도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거두며 웃었다."형이 질투하려나. 아, 아니다. 형은 질투 같은 거 할 줄 모르는 사람이지.""도련님.""근데 요즘은 모르겠어요."도현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형 요즘 좀 이상하지 않아요? 갈라에서 사람들 앞에서 키스하고, 웃고. 나 형이 사람들 앞에서 웃는 거 스무 살 이후로 처음 봤어요. 결혼하더니 사람이 아예 바뀌었더라고요.""신혼이니까요.""그렇죠. 형수님이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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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두 캔의 커피
같은 날 오후, 태강그룹 본사 32층 대회의실.열두 명의 임원이 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결혼식 이후 첫 임원회의였다. 상석의 태하는 서류를 넘기며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형의 말투, 형이 앉는 자세, 형이 펜 끝으로 책상을 두 번 두드리는 버릇까지. 밤새 외운 것들이었다."베트남 물류센터 건은 이대로 진행하시죠."태하가 서류를 덮자, 전략기획본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부회장님, 그 건은 지난주에 직접 반려하셨잖습니까."회의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열두 쌍의 눈이 상석으로 향했다. 펜을 쥔 태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형이 무엇을 왜 반려했는지, 그는 알 길이 없었다.그때 뒤에 서 있던 비서실장이 다가와 서류 한 장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첫 줄에 '반려 사유 보완 후 재상정'이라고 적혀 있었다."보완된 수정안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비서실장이 담담하게 말했다.태하는 서류를 내려다보았다가, 형이 했을 법한 얼굴로 본부장을 보았다."수정안도 안 읽고 회의에 들어오십니까."본부장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회의실이 비고 난 뒤, 비서실장이 결재 서류를 내밀며 낮게 말했다."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회장님 서명은 끝이 왼쪽으로 조금 더 기웁니다."태하가 고개를 들었다. 비서실장은 이미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그날 밤 태하는 자정을 넘겨서야 들어왔다.불 꺼진 거실 소파에 서윤이 앉아 있었다. 태하가 걸음을 멈추자 그녀가 물었다."태준 씨 차가 발견된 곳, 한강 어디야?""왜.""가 볼 거야. 같이 찾기로 거래했잖아.""위험해.""그럼 혼자 갈게."태하는 한참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방금 내려놓은 차 키를 다시 집어 들었다."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새벽 한 시의 한강 공원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빗물 고인 아스팔트 위에 번졌다. 태하가 우산을 쓴 채 맨 안쪽 구석 자리를 가리켰다."저기. 운전석 문은 열려 있었고, 시동도 안 꺼져 있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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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갈비뼈 아래의 날짜
머리채를 움켜쥔 손이 서윤을 창밖으로 끌어내려는 순간이었다.운전석 문이 터져 나가듯 열렸다.무엇이 일어났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빗속에서 둔한 소리가 나고, 서윤의 머리를 잡았던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놓았다. 손목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눈 감아."태하의 목소리였다. 서윤은 눈을 감지 않았다.그래서 보았다. 이마에서 피를 흘리는 남자가 빗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다가오는 주먹을 피하지도 않고 팔꿈치로 흘려내더니, 그대로 상대의 멱살을 잡아 승합차 문에 처박았다. 두 번째 남자는 무릎을 채여 그대로 주저앉았다. 싸움이 아니라 정리에 가까웠다. 수백 번은 해 본 사람처럼 짧고, 정확하고, 차가웠다.강태준은 절대 저렇게 움직이지 못한다.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세 번째 남자의 손에서 칼날이 번뜩였다."뒤에!"태하가 몸을 틀었다. 칼날이 그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신음 하나 없이 남자의 팔을 꺾어 칼을 떨어뜨렸다. 칼이 빗물 웅덩이에 떨어지는 소리가 난 것과 동시에, 멀리서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다가왔다."철수해!"남자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승합차에 올랐다. 마지막 남자가 문을 닫기 직전 내뱉었다."다음엔 둘 다야."병원에는 가지 않았다."병원 가면 기록이 남아. 강태준이 칼에 맞았다는 기록."그래서 서윤은 별채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구급상자를 열었다. 손이 떨리지 않는 게 신기했다. 수백 년 된 그림에서 먼지 한 톨을 덜어내던 손이었다.핀셋으로 그의 팔뚝에 박힌 유리 조각을 하나씩 뽑아내는 동안, 태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무서웠어?""응.""그놈들이?""당신이."핀셋이 마지막 조각을 끌어냈다. 태하가 낮게 웃었다. 웃음인데 어딘가 아파 보였다."그런 게 내 진짜 모습이야. 형이랑은 다르지.""알아."서윤은 손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처음부터 달랐어."태하의 숨이 아주 짧게 멈췄다. 그가 무언가 물으려는 듯했지만, 서윤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셔츠 벗어. 옆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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