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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남자와 어쩌다 여름이

네 남자와 어쩌다 여름이

​가족의 완성은 혈연일까, 아니면 함께 보낸 시간일까?" 완벽주의 변호사, 자유분방한 예술가, 무뚝뚝한 체육관 관장, 정체를 숨긴 재벌 3세. 각자의 상처와 결핍을 안고 타인과 거리를 두며 살아가던 네 남자가 핏덩이 아기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삶을 양보하고 희생한다. 육아라는 극한의 일상을 통해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재정의하고, 아이가 자라는 만큼 어른들도 함께 성장해 나가는 따뜻한 코믹 힐링 스토리를 그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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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34화: 첫 번째 어린이날, 그리고 깨진 평화
4월 27일, 밤 11시 30분. 연희동 셰어하우스의 거실 불이 모두 꺼진 가운데, 주방 식탁 위로 펜던트 조명 하나만이 은밀하게 켜져 있었다.안방에서 윤의경과 여름이가 깊은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한 네 남자가, 마치 국가 기밀 회의를 하듯 심각한 표정으로 식탁에 둘러앉았다."다들 모였지. 안건은 이미 공지한 대로다." 상석에 앉은 이태준이 미간을 짚으며 낮게 속삭였다."다음 주면 5월 5일. 우리 여름이가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이후 맞이하는 '생애 첫 어린이날'이다. 의경 씨도 백화점 기획팀에 무사히 복직해서 안정됐으니, 이번 어린이날은 그동안 고생한 모녀를 위해 완벽하고 압도적인 이벤트를 열어줘야 해.""맞아! 어린이집에서 다른 애들한테 절대 기죽으면 안 돼!" 최강태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래서 각자 준비한 기획안을 브리핑해 보자. 나유준부터." 태준의 말에, 해성그룹 기획조정실 본부장으로 완벽 적응한 나유준이 태블릿 PC를 탁 켜며 자신만만하게 일어섰다."저희 해성 테마파크 쪽에 지시해서, 5월 5일 하루 동안 놀이공원 전체를 전세 대관하는 안을 기획했습니다. 퍼레이드 카 메인 좌석에 여름이랑 의경 씨를 태우고, 하늘에선 드론 500대로 여름이 얼굴을 띄우는 거죠. 팝콘과 솜사탕은 무제한 공짜입니다!""탈락. 기각한다." 태준이 단칼에 잘랐다. "아, 왜요 형!! 자본주의의 끝판왕이잖아요!""여름이 키 74cm다. 놀이공원 가봤자 회전목마 마차 칸 말고는 탈 수 있는 놀이기구 단 하나도 없어. 드론 소리에 애 경기나 안 일으키면 다행이지." 팩트 폭격에 유준이 꿍얼거리며 자리에 앉았다."다음, 관장님." 강태가 헛기침을 하며 커다란 설계도 하나를 식탁 위에 펼쳤다."나는 우리 집 마당을 활용해 봤어. 이름하여 '익스트림 정글짐 챌린지'! 마당 전체에 스펀지 풀장을 깔고, 높이 3미터짜리 클라이밍 월이랑 짚라인을 설치하는 거지! 우리 딸 코어 근육 발달에 이만한 게 없어!""형. 우리 여름이 이제 막 걷기 시작했어. 특수부대 훈련시키
Última atualização: 2026-05-12
Chapter: 제33화: 1cm의 핏자국, 그리고 피의 학부모 면담
오후 3시 50분. 대한민국 경제와 법조계가 숨 가쁘게 돌아가는 평일 오후, 각자의 전쟁터에서 맹활약하던 네 남자의 스마트폰 알람이 동시에 울렸다.[여름이 하원까지 D-10분!]"김 변호사, 이 사건 검토 의견서 내일 아침까지 내 책상 위에 올려놔. 난 퇴근한다." (서초동 이태준 법률사무소) "관원 여러분! 오늘 복근 운동은 각자 100개씩 하고 자율 하원 하십쇼! 관장님은 이만!" (연희동 주짓수 체육관) "본부장님, 방금 말씀하신 그 합병 건은… 내일 다시 얘기하죠! 저 지금 엄청 급한 VIP 미팅이 있어서!" (해성그룹 기획조정실)서울 각지에서 튀어 나간 네 남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정확히 오후 4시 정각에 한남동 해성 로열 키즈 아카데미 현관문 앞에 집결했다."다들 안 늦었지? 우리 딸내미가 아빠들 안 온다고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강태가 숨을 헐떡이며 앞장섰다.원장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보육실. 여름이는 아침의 쿨했던 모습 그대로, 한 손에는 삑삑이 망치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옆자리 남자아이의 간식(떡뻥)을 호시탐탐 노리며 아주 훌륭하게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여름아! 아빠들 왔다!" 유준이 두 팔을 벌리며 달려가자, 여름이가 빙긋 웃으며 쪼르르 기어 와 유준의 품에 쏙 안겼다."아이고, 내 새끼! 오늘 친구들이랑 잘 놀았… 어?"유준이 여름이의 뺨에 뽀뽀를 퍼부으려던 찰나, 매의 눈을 가진 전직 국가대표 최강태가 흠칫 놀라며 여름이의 얼굴을 낚아챘다."잠깐. 가만있어 봐. 이거 뭐야?!"강태의 호통에 태준과 이수도 사색이 되어 달려들었다. 여름이의 통통하고 하얀 왼쪽 뺨. 그 한가운데에, 마치 예리한 맹수의 발톱에 긁힌 듯한 약 1cm가량의 붉은 생채기가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피… 피 났어! 우리 애기 얼굴에 피가 났다고!!" 이수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태준의 안경 너머로 지옥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는 즉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해성 의료원 피부과 최고 권위자 당장 수배해.
Última atualização: 2026-05-11
Chapter: 제32화: 아빠들의 분리불안과 VVIP 어린이집 입성
"다들 주목! 오늘부터 우리 셰어하우스는 비상 체제에 돌입한다."아침 8시, 윤의경이 해성 백화점으로 출근한 직후. 연희동 셰어하우스 거실 화이트보드 앞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태준이 보드마카를 들고 섰고, 그 앞에는 최강태, 서이수, 나유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윤의경 씨가 성공적으로 복직했다. 하지만 우리도 더 이상 백수나 프리랜서처럼 살 순 없어. 강태 넌 오전부터 체육관 주부반 수업 뛰어야 하고, 이수는 다음 달 갤러리 개인전 마감이지. 나유준, 너도 오늘부터 해성그룹 본사 기획조정실로 출근이고."태준이 자신의 수트 깃을 탁탁 털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오늘부로 '이태준 법률사무소'를 정식 개업하고 서초동으로 출근한다.""와, 형 드디어 개업이야? 축하해!" 이수가 박수를 쳤지만, 태준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축하가 문제가 아니야. 우리 넷 다 집을 비우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이 마의 7시간 동안 우리 여름이는 누가 보지?"순간 거실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방금 전까지 혼자 뽀로로 매트 위를 뽈뽈거리며 걸어 다니던 여름이가, 꺄르륵 웃으며 태준의 수트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았다. 네 남자의 심장이 동시에 쿵 내려앉았다."아, 안 돼…! 내가 체육관을 접을게! 우리 딸을 어떻게 남의 손에 맡겨!" 강태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제가 할아버지한테 말씀드려서 사내 어린이집을 이 셰어하우스로 옮겨버릴까요?!" 유준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며 흥분했다."진정해. 다행히 대비책은 마련해 뒀으니까." 태준이 화이트보드를 휙 뒤집었다. 그곳에는 화려한 금박 로고가 박힌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해성 로열 키즈 아카데미 - 최상위 VVIP를 위한 프리미엄 영유아 보육 시설]"해성그룹 재단에서 운영하는 한남동 최고급 어린이집이다. 대기 번호만 3년을 기다려야 한다지만, 여름이의 '다섯 번째 아빠(나 회장)' 백으로 어제저녁에 프리패스로 입소 허가를 받아냈지. 오늘이 바로 대망의 첫 등원 날이다."태준의 브리핑에
Última atualização: 2026-05-07
Chapter: 제31화: 낙하산 출근길과 네 명의 극성 보디가드
월요일 아침 7시. 연희동 셰어하우스 거실에는 흡사 국가 중요 작전을 앞둔 벙커와도 같은 비장함이 감돌고 있었다.오늘이 바로 윤의경이 해성 백화점 본점 기획팀으로 첫 출근을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자, 다들 장비 점검해."이태준이 거실 테이블에 커다란 화이트보드를 세우며 지시했다. 그 앞에는 평소 입던 낡은 티셔츠 대신, 이수가 심혈을 기울여 골라준 '차도녀(차가운 도시 여자) 룩'의 완벽한 블랙 수트를 차려입은 윤의경이 바짝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의경 씨. 해성그룹 본사 기획팀은 사내 정치의 최전방이자 텃세가 가장 심한 곳입니다. 명문대 출신 엘리트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나 회장님 직속 '낙하산'으로 꽂혔으니 뒤에서 온갖 말이 나올 게 뻔합니다. 명심하세요. 첫인상에서 밀리면 끝입니다."태준이 소형 녹음기 하나를 의경의 재킷 안주머니에 찔러 넣어주었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제76조의 2. 누군가 의경 씨의 학력이나 출신을 들먹이며 모욕적인 발언을 한다? 즉시 녹음기 켜세요. 노동청 고발부터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까지 제가 완벽하게 인실좆(인생의 실전을 보여주는 것)을 시켜드리겠습니다.""변, 변호사님… 저 그냥 열심히 배우면서 조용히 다닐 건데…." 의경이 덜덜 떨며 대답하자, 이번엔 최강태가 나서서 의경의 양어깨를 꽉 쥐었다."의경 씨. 말로 안 통하는 진상 상사도 분명 있을 겁니다. 자, 내 팔을 잡고 엎어치기 자세 한 번만 더 복습해 봅시다! 상대방의 멱살을 잡고, 중심을 무너뜨린 다음 명치를 향해 팔꿈치를…!""관장님! 첫 출근 날 상사를 엎어치기 하면 쇠고랑 차요!" 이수가 기겁하며 강태를 말렸다.이수는 자신의 화장대에서 가져온 새빨간 립스틱을 꺼내 의경의 입술에 정성껏 덧발라 주었다. "의경 씨, 잊지 마요. 예술적이고 기가 센 아우라! 탕비실에서 누가 커피 심부름을 시키면 이 빨간 입술로 씩 웃으면서 '저는 커피를 타면 사약 맛이 나서요' 하고 거절하는 겁니다!""아니… 다들 저를 무슨 전쟁터에 내보내요?" 의경이 울
Última atualização: 2026-05-06
Chapter: 제30화: 연희동 셰어하우스의 아침, 그리고 문센 대첩
"헉, 늦었다!"아침 7시 30분. 윤의경이 안방 텐트에서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푹신한 이불과 완벽한 방음, 그리고 긴장이 풀린 탓인지 8개월 만에 처음으로 알람 소리도 듣지 못하고 늦잠을 자버린 것이다.'여름이 맘마 먹일 시간 지났는데! 기저귀도 갈아야 하고!'의경이 허둥지둥 방문을 열고 거실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거실 한가운데에 선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연희동 14-2번지 셰어하우스의 아침은, 마치 톱니바퀴가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공장 같았다."1번 라인, 젖병 열탕 소독 완료! 건조기 들어갑니다!" "2번 라인, 유기농 소고기 브로콜리 미음 40도로 데웠어! 온도 완벽해!" "3번 라인, 여름이 모닝 응가 처리 및 엉덩이 뽀송뽀송하게 말리기 완료!"주방에서는 쓰리피스 수트 바지에 앞치마를 두른 이태준과 이탈리아제 실크 파자마를 입은 나유준이 분유와 이유식을 세팅하고 있었고, 화장실 앞에서는 최강태가 한 손으로 여름이를 안은 채 능숙하게 가제 손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고 있었다."저, 저기… 제가 할게요!" 의경이 미안함에 어쩔 줄 모르며 다가가려 하자, 구석에서 여름이의 낮잠 이불에 햇살을 쬐어주던 서이수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막아섰다."어허, 의경 씨. 스톱. 의경 씨는 오늘부터 이 셰어하우스의 VVIP 입주민입니다. 육아는 우리 '지옥에서 온 네 아빠'들이 전담할 테니, 의경 씨는 푹 쉬면서 체력만 보충하시죠.""그래도 명색이 엄마인데 제가 늦잠을 자서…."태준이 온도계로 이유식 온도를 재며 무심하게 툭 던졌다. "지난 8개월 동안 도망 다니느라 편히 잔 적 하루도 없었을 텐데, 이제라도 늦잠 좀 자둬요. 그리고 오늘 일정 빡빡합니다. 오전 11시에 여름이 생애 첫 '문센(문화센터)' 가는 날이니까.""네? 문화센터요?""어제 해성 백화점 VVIP 전용 문화센터 '오감 발달 촉감 놀이' 클래스에 등록해 뒀습니다. 우리 여름이가 이제 두 발로
Última atualização: 2026-05-05
Chapter: 제29화: 성북동 호랑이의 항복, 그리고 다섯 번째 아빠
"회, 회장님! 바지에 침이…!"비서실장이 사색이 되어 최고급 실크 손수건을 꺼내 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 회장은 말없이 손을 들어 비서실장을 제지했다.거대한 응접실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대한민국 재계를 호령하는 호랑이의 바짓가단에 감히 침을 묻히고 지팡이를 빼앗으려 드는 생명체라니."꺄아! 맘마!"여름이가 나 회장의 호두나무 지팡이를 잡고 흔들며 까르륵 웃었다. 나 회장의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아주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평생을 얼음처럼 차갑게 살아온 노인의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통제할 수 없는 '무장 해제'의 신호였다."…허, 참. 겁도 없는 녀석이군."나 회장이 천천히 커다란 손을 뻗어 여름이의 통통한 뺨을 살짝 건드렸다. 여름이는 낯선 노인의 거친 손길에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제 뺨을 부비며 나 회장의 굵은 손가락을 작은 두 손으로 꼭 쥐었다.그 순간, 나 회장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100억짜리 수표를 집어 들었다. 윤의경이 숨을 헉 들이켰고, 네 남자는 긴장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찌익- 찌지직.나 회장은 망설임 없이 100억짜리 수표를 반으로, 다시 네 조각으로 찢어 허공에 던져버렸다."할아버지…?" 유준이 멍하니 불렀다."100억으로는 턱도 없겠어." 나 회장이 헛기침을 하며 엄격한 표정을 꾸며냈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여름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이태준 변호사라고 했나. 네놈이 아까 '네 명'이서 완벽한 성벽을 치겠다고 했지?" "그렇습니다만." "틀렸다. 오늘부터 이 녀석의 아빠는 다섯이다. 증조할아버지뻘인 내가 특별히 다섯 번째 보호자 자리를 맡아주지.""예엣?!" 응접실에 있던 모든 사람의 입이 떡 벌어졌다. 심지어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태준조차 안경이 흘러내릴 정도로 놀란 표정이었다.나 회장이 비서실장을 향해 턱짓하며 불호령을 내렸다. "당장 받아 적어라! 해성그룹 차원에서 우리 '막내 증손녀'에게 지원할 항목들이다
Última atualização: 2026-05-03
핏빛 유산

핏빛 유산

비 오는 밤. 나는 내 동생에게 살해당했다. 다리 위에서 밀려 강물로 떨어졌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3년 후. 죽은 줄 알았던 내가 재벌가 태성그룹에 돌아왔다. 그때 알게 된 진실. “당신이 진짜 상속녀입니다.” 병원에서 바뀐 아이. 내 인생을 훔친 동생. 그리고 나를 버린 남편. 게다가— 내 아이가 태성그룹 진짜 후계자라고 한다. 이제 시작이다. 재벌 상속 전쟁. 복수. 그리고 핏빛으로 얽힌 가족. 이번엔 내가 묻는다. “누가 진짜 주인인지 끝까지 확인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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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4화 — 네 이름은 처음부터 따로 묶여 있었어
창고 안쪽 사무실은 바깥보다 더 차가웠다.낡은 형광등 하나가 천장에서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고, 문혜린은 창문도 아닌 벽 쪽을 등진 채 서 있었다. 도윤은 문 가까운 쪽에서 태블릿을 켜고 있었고, 태준은 서아보다 반 걸음 뒤에 멈춰 있었다.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지만, 공기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S-01이 왜 폐기 직전까지 갔는지부터 물으라고 했지.”문혜린은 서아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그래.”“그럼 말해.”짧은 정적.“왜 내가 같은 표에 올라갔는데.”문혜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아주 잠깐 태준 쪽으로 돌렸다가 다시 서아에게 가져왔다.“네가 몰랐다는 게 더 놀랍네.”서아가 차갑게 말했다.“알았으면 여기까지 안 왔겠지.”문혜린이 아주 미세하게 웃었다.“아니.”짧은 숨.“알았어도 왔을 거야.”서아의 눈이 가늘어졌다.“말 돌리지 마.”문혜린은 그 말을 흘리지 않고 그대로 받았다.“좋아. 그럼 바로 말할게.”짧은 정적.“너는 아이 때문에 같이 묶인 게 아니야.”공기가 순간 멎었다.도윤의 시선이 바로 올라왔고, 태준의 턱선도 굳었다.서아가 아주 천천히 되물었다.“그럼.”문혜린이 말했다.“반대지.”짧은 침묵.“그 애가 너 때문에 묶인 거야.”정적.서아의 손이 천천히 굳었다.“무슨 뜻이야.”문혜린은 벽에 기대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도망치지 않는 대신, 쉽게 다가오지도 않는 사람의 자세였다.“너는 처음부터 따로 관리되던 쪽이었어.”도윤이 낮게 물었다.“관리 대상이었다는 뜻입니까.”문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단순 출생 조작 케이스가 아니라, 별도 분류표 안에 올라간 대상.”서아가 바로 잘랐다.“왜.”문혜린은 이번에도 답을 아끼지 않았다.“모계 라인.”짧은 정적.“네 어머니 때문이야.”공기가 조용히 가라앉았다.서아는 그 말을 바로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더 낮게 물었다.“엄마가 뭘 했는데.”문혜린의 시선이
Última atualização: 2026-05-12
Chapter: 73화 — 마지막 키를 쥔 사람
차가 고속도로로 올라서자 도시 불빛이 뒤로 길게 밀려났다.도윤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고, 서아는 조수석에서 태블릿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쪽에 앉은 태준은 창밖을 보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가 진짜로 바깥 풍경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셋 다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부산. 옛 태성 해양물류 창고. 그리고 그 안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마지막 키를 쥔 사람.먼저 입을 연 건 서아였다.“다시 정리해.”도윤이 바로 답했다.“김하령 씨 진술 기준으로, 부산 쪽 옛 태성 해양물류 창고 라인이 마지막 위원회 키와 닿아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연 씨가 먼저 하령 씨를 건드렸고, 그 직후 위원회 패턴 통신이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아직 살아 있다면—”서아가 바로 이어받았다.“지금 도망치고 있거나.”짧은 정적.“흔적 지우고 있거나.”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뒤에서 태준이 낮게 말했다.“둘 다일 수도 있어.”서아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좋아.”짧은 숨.“그럼 우린 지금 아이를 찾으러 가는 것도 맞고, 엄마를 붙잡고 있는 구조를 찾으러 가는 것도 맞고, 위원회 키를 쥔 사람을 먼저 끊으러 가는 것도 맞네.”도윤이 짧게 웃지도 못한 채 말했다.“네. 세 개가 지금 같은 선 위에 있습니다.”서아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네. 이제야 하나 같아서.”태준이 물었다.“뭐가.”“목표.”짧은 정적.“아까까진 아이 쫓다가 위원회 파고, 위원회 파다가 엄마 얘기로 새고, 계속 흩어지는 느낌이었거든.”도윤이 조용히 듣고 있었다.서아가 계속 말했다.“근데 이제는 아니야. 아이를 데려간 선, 엄마를 못 벗어나게 만든 선, 위원회 키. 다 같은 선이잖아.”태준이 아주 낮게 말했다.“그래.”서아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덧붙였다.“그러니까 이번엔 하나라도 빼고 말하면 안 돼.”짧은 침묵.“너도.”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정적이 길어지자, 도윤이 말을 자연스럽게 이어붙
Última atualização: 2026-05-11
Chapter: 72화 — 먼저 움직인 쪽이 판을 꼬인다
회장실 문이 닫히자마자 서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복도를 가로지르는 발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대신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도윤이 곧바로 따라붙었고, 태준은 한 발 늦게 뒤를 따라왔다. 셋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공기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판이 다시 바뀌었다.회장이 숨겨둔 봉투, 그 안에서 나온 분류 기록, 하령으로 이어지는 메모, 그리고 지연이 먼저 움직였다는 보고.전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먼저 입을 연 건 도윤이었다.“지금 바로 하령 씨 쪽으로 다시 가야 합니다.”서아가 짧게 답했다.“응.”“지연이 먼저 접촉했으면, 하령 씨가 다시 잠길 가능성이 큽니다.”“알아.”짧은 침묵.“그래서 더 빨리 가야지.”태준이 낮게 말했다.“지금 가면 문 안 열릴 수도 있어.”서아가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뒤돌아 태준을 봤다.“안 열리면?”짧은 정적.“이번엔 부순다.”도윤이 조용히 끼어들었다.“물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하령 씨가 공포 상태로 들어가면 정보가 더 닫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연이 이미 거길 스쳤다면—”서아가 바로 받았다.“하령은 지금 우리가 아니라 지연 때문에 더 무서울 거고.”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태준이 낮게 말했다.“지연은 직접 캐내기보다, 상대가 숨기고 싶은 걸 찌르는 식으로 움직여.”서아가 피식 웃었다.“그건 너도 똑같잖아.”짧은 정적.태준은 그 말에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서아가 다시 정면을 보며 말했다.“차 준비해.”도윤이 바로 답했다.“이미 지시했습니다. 지하로 내려가면 바로 출발 가능합니다.”셋이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서아가 아주 낮게 말했다.“이번엔 정리하고 가자.”도윤과 태준의 시선이 동시에 서아에게 향했다.“뭘요.”도윤이 물었다.서아는 엘리베이터 닫힌 문을 보며 말했다.“난 아이만 찾으러 가는 거 아니야.”짧은 침묵.“그 애를 어디로 옮겼는지, 누가 그 결정을 내렸는지, 왜 엄마가 그걸 알고도 끝까
Última atualização: 2026-05-07
Chapter: 71화 — 알고도 인정하지 않은 사람
봉투 안의 마지막 장을 내려다보던 내 손끝이 아주 천천히 굳었다.S-01 / maternal link unstable / transfer urgency increased문장은 짧았는데, 그 짧은 문장 하나가 사람을 산 채로 찢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종이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회장은 여전히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표정은 무너지지 않았고, 시선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더 역겨웠다.“좋네요.”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엄마 녹음도 들었고, 연구동 기록도 있었고, 분류표도 있었고.”짧은 침묵.“그런데도 끝까지 모르는 척했네.”회장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한 번 눌렀다.“모르는 척한 것과—”짧은 숨.“확정하지 않은 건 다르다.”나는 피식 웃었다.“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해요?”회장은 낮게 말했다.“변명이 아니라 기준이지.”정적.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그럼 그 기준이 뭐였는데요.”회장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내게 올라왔다.“의심과 인정은 다르다.”“아니.”나는 고개를 저었다.“회장님은 의심한 게 아니에요.”짧은 침묵.“붙잡고 있었지.”책상 위 봉투를 손끝으로 툭 쳤다.“이런 걸 모을 정도면.”짧게.“이미 알고 있었던 거잖아요.”도윤이 조용히 숨을 삼켰고, 태준은 아무 말 없이 회장을 보고 있었다. 회장실 안은 너무 조용해서, 누구 숨이 먼저 흔들리는지까지 들릴 것 같았다.회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가능성은 봤다.”나는 웃지 않았다.“그게 알고 있었다는 뜻이죠.”회장은 곧바로 부정하지 않았다.대신 아주 천천히 말했다.“네가 내 딸일 수 있다는 가능성.”짧은 침묵.“병원 조작 구조와 네 출생이 연결돼 있다는 가능성.”또 한 단어씩 눌러 말했다.“그리고 그걸 입 밖으로 내는 순간, 태성 전체가 흔들릴 거라는 가능성.”정적.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게 너무 회장다운 대답이라서. 너무 차갑
Última atualização: 2026-05-06
Chapter: 70화 — 같은 녹음을 먼저 알아들은 사람
회장실 문이 열리자마자 안쪽 공기가 달라졌다.늦은 시간인데도 조명은 밝았고, 책상 위 서류는 가지런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공간이었다.그런데 나는 문 앞에 서는 순간부터 알았다.여긴 아무 일도 없던 공간이 아니라, 너무 많은 일이 지나가고도 정리된 척하고 있는 공간이라는 걸.회장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우리가 들어오는 순간 시선을 들었고, 먼저 나를 보고, 그다음 도윤, 마지막으로 태준에게 시선을 멈췄다.“다시 왔군.”나는 대답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도윤이 한 발 뒤에서 멈췄고, 태준은 내 오른쪽보다 조금 뒤에 섰다. 이번엔 누구도 먼저 앉지 않았다.회장은 그걸 보고 낮게 말했다.“이번엔 앉지 않나.”내가 답했다.“앉을 얘기 아니니까요.”짧은 정적.회장은 천천히 손을 깍지 낀 채 나를 봤다.“그래서.”짧은 숨.“또 무엇을 찾았지.”나는 곧장 말했다.“엄마 녹음.”회장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정말 잠깐이었다.보통 사람은 못 봤을 것이다. 하지만 난 놓치지 않았다.회장은 바로 표정을 정리했다.“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오지.”나는 웃지 않은 채 그를 봤다.“갑자기가 아니니까요.”짧은 정적.“그 녹음, 회장님도 들으셨죠.”공기가 조용히 가라앉았다.도윤의 시선이 아주 낮게 움직였고, 태준의 턱선이 굳었다. 회장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낮고 일정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그렇게 말하던가.”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대답부터 하세요.”회장은 등을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질문하는 방식이 거칠어졌군.”“돌려 말할 단계는 지났잖아요.”짧은 침묵.“그 녹음, 전 그냥 엄마의 마지막 말로 들었어요.”짧은 숨.“근데 누군가는 그걸 경고로 들었더라고요.”회장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았다.“그리고 그 경고를 먼저 알아들은 쪽이 먼저 움직였고요.”정적.나는 더 이상 멈추지 않았다.“그래서 묻는 거예요.”짧게.“회장님은 그 녹음을 언제 들으셨어요.”회장은
Última atualização: 2026-05-05
Chapter: 69화 — 너를 살린 게 아니라, 분류에서 뺀 거야
문이 아주 조금 열렸고, 안쪽 어둠 사이로 한 사람의 얼굴이 드러났다.김하령은 바로 문을 완전히 열지 않았다. 체인까지 걸린 상태에서 밖을 내다보던 그녀의 시선은 제일 먼저 태준에게 가 닿았다. 그 눈빛엔 반가움도, 안도도 없었다. 오히려 오래 눌러둔 경계와 피로가 먼저 있었다.“왜 왔어요.”첫마디부터 차가웠다.태준은 문 앞에서 한 발도 더 다가가지 않고 낮게 말했다.“확인할 게 있어.”김하령이 짧게 웃었다.“확인?”짧은 정적.“지금 와서 그 말이 나와요?”서아는 그 짧은 대화만으로도 느꼈다. 이 둘은 분명 서로를 알고 있었고, 그냥 이름만 아는 관계가 아니었다. 도윤은 옆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김하령의 시선이 천천히 이동하더니 이번엔 서아에게 멈췄다.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도 그 눈빛이 확 바뀌었다. 경계가 아니라, 충격에 가까운 흔들림이었다.“…누구.”서아가 대답했다.“서아.”김하령의 손이 문 손잡이 위에서 굳었다.“서아…”짧은 침묵.“설마.”그녀의 시선이 다시 태준에게로 갔다.“당신, 미쳤어요?”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이제 숨길 수 있는 단계 지났어.”김하령이 체인을 풀지 않은 채 말했다.“당신은 늘 그래요. 자기가 정한 선 넘어가면 그다음 사람 인생이 어떻게 되든 밀어붙이잖아요.”서아가 낮게 끊었다.“싸우러 온 거 아니야.”김하령의 시선이 다시 서아에게 돌아왔다.서아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난 찾으러 왔어.”짧은 침묵.“내 아이.”문 안쪽 공기가 순간 얼어붙은 것처럼 조용해졌다.김하령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도윤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N-12.”그 코드가 떨어지는 순간, 김하령의 손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그녀는 곧장 문을 닫으려 했다.서아가 바로 손을 뻗어 문을 막았다.“도망가지 마.”김하령이 날카롭게 말했다.“손 치워요.”“못 치워.”“여기 오면 안 됐어요.”“알아.”서아가 낮게 말했다.“근데 더 늦기 전에 와야 했
Última atualização: 202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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