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Author: 알라리

제1화

이승하가 귀국했다. 그의 베일에 싸인 애인으로서, 서유는 곧바로 8호 맨션으로 보내졌다.

계약의 규정에 따라 그를 만나기 전엔 티 없이 깨끗하게 몸을 씻어야 했고 향수나 화장품 냄새를 절대 풍겨선 안 됐다.

그의 취향에 완벽하게 맞추기 위해 그녀는 오랫동안 목욕을 하고 실크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2층 침실로 왔다.

컴퓨터 앞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이승하는 그녀가 들어오는 기척에 그녀를 흘긋 바라봤다.

“이리 와.”

별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은, 담담하면서도 차가운 말투가 이어졌다. 그 목소리는 서유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평소에 무덤덤한 것 같으면서도 종잡기 어려운 성격을 가진 그가 혹시나 화가 나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그의 앞에 제대로 서기도 전에 이승하가 그녀를 와락 안아버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그녀의 붉은 입술에 키스하는 이승하.

항상 그런 식이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고 부드러움도 없었다. 그녀를 만나면 그저 함께 자고 싶을 뿐이었다.

이번에 외국으로 출장 가게 되면서 3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여자를 만지지 못했으니 오늘 밤은 쉽게 그녀를 놓아줄 리가 없어 보였다.

그녀가 잠에 곯아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남자는 끝날 기미가 보였다.

다시 잠에서 깨어난 서유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욕실에서 샤워기 소리가 들려와 그녀는 그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간유리 너머로 흐릿하게 귀의 기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매번 검사를 마치고 나면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린 적이 없었던 그였다. 그런데 이번엔 왜 떠나지 않은 걸까?

서유는 가까스로 피곤한 몸을 이끌어 침대에서 일으켜 세우고 착한 고양이 마냥 남자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몇 분 뒤, 욕실에서 물소리가 멈추고 남자가 샤워 타워를 두른 채 걸어 나왔다.

머리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의 넓은 어깨로부터 쇄골 언저리를 타고 흘러내리다가, 가슴골을 따라 부드럽고도 단단해 보이는 그의 복근 위로 미끄러졌다.

치명적일 만큼 유혹적이다. 그의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은 칼끝을 연상케 할 만큼 날카로웠고 뚜렷한 오관에서 특히나 매력적인 부분은 차가우면서도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내뿜는 긴 눈매였는데 그윽하고 깊었다.

흠잡을 때 없이 잘생긴 남자다. 문제라면 온몸에서 싸늘한 냉기를 뿜어낸다는 것, 그로 인해 아무도 다가가기 쉬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깨어있는 서유를 싸늘하게 흘긋 보더니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젠 오지 마.”

‘오지 말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의아한 서유를 향해 그가 문서 하나를 건네줬다.

“이 계약, 미리 해지해야겠어.”

애인 계약서를 보니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승하는 둘의 관계를 끝내려는 것이다.

오늘 그녀 곁을 미리 떠나지 않은 것은 그녀가 아쉬워서가 아니라 관계를 끝내기 위해서였다니.

그와 함께 한지 이젠 오 년이 되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런 결과가 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

아무런 이유도 그렇다고 별다른 변명이나 해석도 없이 한마디 통보로 끝났다.

심장이 찌르듯이 아파져 오는 느낌을 가까스로 누르며 서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옷을 입고 있는 이승하를 바라봤다.

“반년만 더 있으면 계약이 끝나요. 조금만 더 기다릴 순 없었나요?”

그녀의 시한부 인생이 아직 삼 개월이 남았다고 의사가 말했었다. 삶이 끝나기 전에 그의 곁에 조금 더 오래 남고 싶었던 서유였다.

이승하는 묵묵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싸늘한 눈빛은 조금도 아쉬운 기색이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이미 질려버린 장난감을 바라보듯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침묵에서 서유는 자기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오 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는 그의 마음을 따듯하게 데울 수 없었다. 이제 이 꿈도 그만 깰 때가 된 것 같다.

계약서를 손에 들고 그녀는 일부러 입꼬리를 살짝 당겨 따듯하고 예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장난이에요.”

그리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진작 떠나고 싶었어요. 이제 계약이 미리 끝났으니 기분이 너무 좋은데요?”

셔츠를 정리하던 이승하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가 고개를 들고 서유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그녀의 얼굴은 안타까운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마치 이제 자유라는 듯 약간의 흥분이 깔린 것 같았다.

그의 짙은 눈썹이 구겨졌다.

“진작 떠나고 싶었다고?”

서유는 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요,저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아야죠. 언제까지나 아무런 명분 없이 당신이랑 함께 할 순 없잖아요?”

결혼하고 아이를 갖는 건 이번 생엔 그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이승하 앞에서 그녀는 당당한 모습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 생각이 드니 그녀는 미소를 유지하며 계속해서 물었다.

“이제 우리 계약 끝났으니까 저 앞으로 남자 친구 사귀어도 되는 거죠?”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던 이승하는 침대 옆에 놓여있는 블랑팡 손목시계를 들고 그녀를 지나쳐갔다.

“마음대로 해.”

떠나기 전 그가 남긴 말이다.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서유의 미소가 차츰 사라졌다.

자기 물건을 남이 건드리는 것에 치를 떨던 이승하가 남자 친구를 사귄다는 말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제 정말… 내게 질렸나 봐.’

Related chapters

Latest chapter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