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미스터리/스릴러 / 괴담 규칙 / 제1화 던전속으로

Share

괴담 규칙
괴담 규칙
Author: 은지수

제1화 던전속으로

Author: 은지수
“사장님! 헤븐 뱅크에 있는 지전들 전부 다 주세요!”

여수당 사장은 뽀얀 얼굴의 앳된 여자를 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어린 나이에 장례를 치르러 온 것도 신기한데 슬픈 기색조차 찾아볼 수 없다니 정말 드문 일이었다.

사장은 느긋하게 담뱃재를 털며 물었다.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전부요!”

선하윤은 잠시 숨을 고르며 강조했다.

“헤븐 뱅크 로고가 찍힌 거라면 싹 다 주세요!”

“전부 다요?”

사장은 망설였다. 그의 가게는 정식으로 허가받은 곳이라 지전 품질이 보장될 뿐만 아니라 싸구려 물건만 취급하는 다른 가게들과 달리 지전의 미관을 위해 헤븐 뱅크 로고가 찍힌 제품만 들이기 때문이다.

헤븐 뱅크 지전은 상표 등록이 되어있고 지역 회사에서 일괄 생산하는 믿고 사는 제품이며 창고 전체가 다 그런 제품들뿐이었다.

사장은 담배를 끄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너무 많지 않을까요?”

“아니요, 있는 대로 다 주세요. 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

선하윤은 곧장 폰뱅킹을 열어 사장에게 잔액을 보여주었다.

9자리 숫자의 잔액을 확인한 사장은 눈이 번뜩였다.

‘돈 되는 일을 놓치면 바보지.’

사장은 즉시 직원들을 불러 선하윤에게 물건을 내주라고 지시했다.

그는 감탄을 연발했다.

“젊은 분이 효심도 깊네요. 그 돈이면 우리 가게 물건을 싹쓸이할 수 있겠어요.”

“카드에도 돈 있으니 다른 창고에서 가져올 수 있다면 얼마든 다 주세요.”

“있다마다요.”

사장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지금 바로 전화해서 재고 다 가져올게요.”

돈이 대수일까? 목숨이 더 중요한 법이지.

게다가 그녀는 지금 돈으로 더 많은 돈을 바꾸고 있는 셈이었다.

선하윤은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진열대에는 백중날 제사에 사용하는 각종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세련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맞춤형 물품들로 진열돼 있었다.

소설 속 묘사를 떠올린 그녀는 진열대에 놓인 공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장님, 이것들도 전부 주세요.”

사장은 내심 의아했다.

‘저걸 다? 과연 쓸 수 있을까?’

하지만 프로 정신을 발휘하여 그녀의 물건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한편 선하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지전과 공물들은 조상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얼마 전 그녀는 자신이 [호러 강림]이라는 소설 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엑스트라로.

이야기 전개에 따르면 사흘 뒤에 전 세계가 공포로 들끓는 지옥으로 변하게 된다.

평범한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공포가 가득한 던전에 발을 들여놓게 되며 룰을 잘 이용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에 오염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때 지전은 위어드 월드에서 유일하게 통용되는 화폐가 되며 헬로 머니로 불린다.

헬로 머니 사용 규칙은 다음과 같다.

[헬로 머니에는 반드시 헤븐 뱅크 로고가 찍혀 있어야 한다.]

[헬로 머니를 태우기 전에 자신을 위해 향 세 개를 피워야 한다.]

[공포라 불리는 위어드 강림 전, 백중날에만 자신에게 태울 수 있다.]

다행히 내일이 바로 백중날이라 그녀는 이 마지막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선하윤은 연달아 여러 장례용품 가게를 털어 지전을 싹쓸이했고 짐은 픽업트럭 수십 대에 가득 실릴 정도였다.

짐꾼들은 그녀의 짐을 트럭에 싣고는 혀를 끌끌 찼다.

‘살림하기엔 글렀네. 저런 여자는 어서 걸러야 해.’

아무리 지전라고는 하지만 저렇게 사재기하다가는 전 재산을 날릴 지경이었으니까.

그 시각, 선하윤은 코트 주머니 안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만약 사흘 뒤 위어드 월드가 강림하지 않는다면 남은 인생 동안 이 세상에서 빚이나 갚으며 살아야겠지...

백중날.

선하윤은 모든 트럭 기사에게 지전를 자정 전에 백석산으로 가져다 달라고 지시했다. 그곳은 인적 드문 외딴곳이었다.

기사들은 짐을 내리자마자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 했다.

검은 까마귀가 맴돌고 헐벗은 산봉우리와 산더미처럼 쌓인 지전과 장례용품들, 심지어 선하윤이 두 팔로 그 물품들을 꼭 안고 있으니 누구라도 속으로 재수 털린다고 구시렁댔을 것이다.

하지만 선하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휘발유를 붓고 조용히 기다렸다. 시곗바늘이 정확히 12시를 가리키자 그녀는 얼른 자신에게 향을 피웠다.

신성한 향로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윽한 향냄새는 마치 영혼 깊숙이 스며들 듯 선하윤에게 전에 없던 평온함을 선사했다.

백석산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온통 새하얀 바위투성이였다.

향이 모두 타들어 가자 선하윤은 빠르게 불을 지펴서 종이 더미에 던졌다.

작은 불씨가 순식간에 거대한 화염으로 번졌다.

그녀는 다치지 않도록 바람을 등지고 서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봤다.

녹색 빛을 뿜어내는 광경에 선하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굳이 지전를 뒤적여 불을 붙일 필요도 없이 활활 타올랐으니까.

거센 불씨에 얼른 다른 물품들도 모조리 불 속에 내던졌다.

이것들은 전부 공물이라 불린다.

소설 속 기억에 따르면 공물 사용 규칙은 다음과 같았다.

[공물은 오염되지 않지만 파괴될 수 있다.]

[위어드 강림 전 자신에게 바칠 수 있다.]

[위어드 강림 후에는 사고팔거나 선물할 수 있다.]

[공물은 소유자에게 충성한다.]

이는 곧 세상이 멸망한 후 선하윤이 태운 모든 것들이 실체화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 중요한 것은 공물이 오염되지 않기에 공포가 들끓는 세상에서 그녀에게 일시적인 휴식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밤새도록 모든 것을 태우고 난 후, 선하윤은 손가락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향냄새를 맡았다.

온통 엉망진창이 된 재투성이 바닥을 보며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청소 업체에 연락했다. 곧이어 업체에 부탁해 백석산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월세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멍한 얼굴로 컴퓨터를 켰다. 예전에 읽었던 [호러 강림]과 위어드 관련 내용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인터넷에는 온통 귀신 이야기뿐이었고 [위어드]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었다.

선하윤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머리를 뒤로 젖혔다.

만약 소설 속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타임머신이었다면 그녀는 팔아버린 캠핑카와 긁어 댄 신용카드 빚 때문에 인생을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왜 아무 흔적도 없지? 정말 아무런 사전 징후 없이 한순간에 멸망하는 거라고?”

천장의 형광등이 눈부시게 빛나는 가운데 전화벨이 울렸다.

“하윤아, 곧 기말고사인데 왜 학교에 안 나오는 거야?”

전화를 건 사람은 선하윤의 단짝 친구이자 룸메이트인 정리아였다.

선하윤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일부러 연약한 척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몸이 안 좋아서 며칠 휴가 내야 할 것 같아.”

어차피 내일이면 세상이 멸망할 텐데...

그때가 되면 아무도 학교에 가지 않을 것이고 선하윤이 정말로 휴가를 냈는지 아닌지 신경 쓸 사람도 없을 것이다.

단짝 친구가 아프다는 소식에 정리아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괜찮아? 나도 그럼 휴가 내고 너 보러 갈까?”

비록 빙의한 몸이지만 선하윤은 원래 주인이 가지고 있던 모든 기억을 물려받았기에 정리아에게도 애정이 있었다.

“아냐, 괜찮아. 공부가 우선이지. 나 금방이면 나을 거야.”

선하윤이 관심 조로 말했다.

“리아야, 내일 주말이니까 집에서 열심히 복습하고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 그리고... 주변 환경에 변화가 생기거나 이상한 쪽지를 발견하면 신중하게 판단하고 절대 장난으로 받아들이면 안 돼.”

정리아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왠지 섬뜩해지잖아.”

“우리 친구 맞지?”

정리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럼 날 믿고 종이로 만든 공예품을 미리 사 둬. 공물 같은 거로다가. 아, 그리고 향을 세 개 피우고 태워버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괴담 규칙   제100화 저 국에 문제 있어

    “그냥 글자 그대로의 의미야.”선하윤은 반장 규칙에 대해 말하지 않고 이렇게만 설명했다.“이건 담임선생님이 나한테 준 임무라서 무조건 완수해야 해.”“알았어.”백화는 망설임 없이 주머니에서 헬로 머니 20장을 꺼내 선하윤에게 건넸다. 그 태도에 선하윤은 약간 놀랐다.이틀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헬로 머니가 매우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우민아는 매점에서 힘들게 일해 겨우 헬로 머니를 벌었는데 선하윤의 말 한마디에 학급비를 내려니 저도 모르게 망설였다.“거짓말 아니지?”우민아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았다.‘만약 선하윤이 거짓말했다면? 이걸 핑계로 돈을 뜯어내려는 거라면 어떡해?’“단톡방에도 올렸잖아.”단톡방에는 학생들뿐 아니라 담임선생님과 각 과목 선생님들도 있었다. 선하윤이 이 정도 헬로 머니 때문에 단톡방에서 거짓말할 리 없었다.“알았어. 줄게.”우민아는 갈등 끝에 돈을 주기로 했다.담임선생님이 맡긴 임무라 학급비를 내지 않는다면 그녀에 대한 담임의 호감도가 떨어질 수 있고 학교 규칙을 위반할 가능성도 있었다.우민아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정리아는 헬로 머니가 없었다. 그녀의 학생카드에 있는 헬로 머니도 선하윤이 넣어준 것이었다.결국 그녀는 다시 한번 선하윤에게 빌붙기로 했다.정리아가 수줍게 선하윤을 쳐다봤다. 예전이었더라면 절친 자랑을 늘어놓았겠지만 아쉽게도 던전이라 조용히 있는 수밖에 없었다.어쨌거나 다들 근심에 빠져있는데 혼자 너무 좋아하는 건 미움을 살 수도 있으니까.우민아가 말했다.“점심시간이야. 같이 식당 가자.”선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교실을 나선 후 3학년 2반 앞을 지나가던 그때 한 남학생이 남아 있는 학생들에게 절망적으로 소리쳤다.“담임선생님이 학급비를 걷으라고 하는데 나라고 별수가 있겠어? 헬로 머니가 귀한 건 아는데 난 반장이야. 너희들이 내 일에 협조해 줘야지. 학급비를 걷지 못하면 담임선생님이 맡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거라 나 벌 받아. 내가 벌 받는 걸 가만히 보고만

  • 괴담 규칙   제99화 반장 규칙

    선하윤이 노트를 받아들었다. 반 규정에 학점 평가 방식이 빼곡히 적혀있었다.천여 개가 넘었는데 학생들의 의식주부터 학업까지 모든 면을 아우르고 있었다.그리고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에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반장 규칙.][반장이 된 걸 축하합니다. 담임선생님이 이 직책을 학생에게 맡겼다는 건 학생을 충분히 인정하고 신뢰한다는 뜻이고 학생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이 쪽지를 보는 순간 전 이미 이 학교를 졸업하고 떠났을 겁니다. 학생이 이 직책에 빨리 익숙해지도록 경험을 적어놓을 테니 참고 바랍니다.][1. 반장은 모든 학생이 수업 규율을 지키도록 통제해야 합니다. 주의를 분산시키거나 수업과 무관한 행동을 하는 학생이 있으면 반장은 즉시 제지하고 기록 노트에 그 학생의 이름을 적도록 합니다.][2. 반장은 다른 친구들을 잘 도와줘야 합니다. 친구의 요구가 반장의 도움 범위를 벗어나면 담임선생님에게 보고하세요. 담임선생님이 해결해줄 겁니다.][3. 반장은 매 시험에서 반에서 3등 안에 들거나 담임선생님의 호감을 얻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장 자격을 박탈당할 수 있습니다.][4. 반장은 언제나 학교 규정을 준수하는 행동을 보여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반장이 학교 규정을 위반할 경우 학점이 두 배로 감점됩니다.][5. 반장은 담임선생님이 맡긴 임무를 모두 완수해야 합니다. 담임선생님이 하는 모든 일은 반 전체의 이익을 위한 거라는 걸 명심하세요.]담임선생님은 선하윤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놀랍게도 근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반장이 되면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할 거야. 중요한 건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반 전체의 이익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선하윤이 반쯤 이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담임선생님이 첫 번째 지시를 내렸다.“학생들한테 학급비를 1인당 헬로 머니 20장씩 걷도록 해. 다 걷고 나면 방과 후에 선생님한테 가져와.”“알겠습니다.”헬로 머니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문제도 아니었다.선하윤이 교실로 돌아왔을 때 학생들은 거

  • 괴담 규칙   제98화 반장을 맡아줄래?

    선하윤이 정리한 노트를 정리아에게 건넸다.“신향이의 풀이 방법이니까 이거 보고 공부해.”노트를 받은 정리아는 감동한 듯 바로 필기하기 시작했다.마지막 수업은 국어였다.국어 선생님은 수업 중 선하윤에게 여러 번 질문을 던졌고 그 탓에 교실의 다른 테스터들이 그녀에게 뭔가 특별한 점이 있는지 살폈다.다행히 선생님이 던진 모든 질문에 백신향이 재빨리 종이에 답을 적어 선하윤이 읽을 수 있게 도와줬다.수업이 끝난 후에도 국어 선생님은 떠나지 않고 선하윤에게로 다가갔다.“내 사무실로 와.”“네.”선하윤이 선생님을 따라가자 정리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선하윤을 보면서 함께 가려 했다.선하윤은 손을 뒤로하고 따라오지 말라고 흔들었다.그 시각 백화가 교실 문 근처에 서 있었다. 선하윤이 스쳐 지나갈 때 그는 그녀의 손에 종이 뭉치를 슬쩍 쥐여주었다.선하윤이 놀란 얼굴로 백화를 힐끗거리자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로 돌아갔다.곁눈질로 손에 든 것을 살폈는데 뜻밖에도 노란 부적이었다.국어 선생님의 사무실은 강의동 1층의 맨 끝에 있었다. 선생님을 따라 들어가던 선하윤은 무거운 압박감을 느꼈다.사무실 커튼이 반쯤 처져 있었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도 잿빛처럼 어두웠다.벽에 음침한 단체 사진이 몇 장 걸려 있었다. 시간에 닳아버린 듯 선생님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국어 선생님이 사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화학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이랑 잘 어울리지 않아서 저 사진에 없어.”사진에 여섯 명이 있었는데 각각 국어, 수학, 외국어, 체육, 음악, 미술 선생님이었다.선하윤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선생님, 어느 분이 체육 선생님이에요?”이미 국어, 수학, 외국어 선생님을 만났다.수업 규칙 제2조 뒷부분.[학교는 우등생에게 음악 수업이나 미술 수업을 배정하지 않습니다. 만약 음악 선생님 또는 미술 선생님이라 자칭하는 사람을 만나면 즉시 멀리 피하세요.]음악 선생님과 미술 선생님을 피하려면 그들의 얼굴을 알아야 했다.사진에 화학 선

  • 괴담 규칙   제97화 경쟁자

    “선생님이 요즘 자꾸 사람을 잘못 알아봐...”외국어 선생님의 반응에 선하윤은 그가 위어드가 아니라 오염된 인간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했다.오염이 심해질수록 선생님은 우등생과 열등생을 헷갈렸다.우등생과 열등생의 규칙이 달랐다. 선생님이 헷갈리면 학생들이 규칙을 위반하도록 유도하기 쉬웠다.외국어 선생님은 선하윤에게 앉으라고 한 후 계속해서 질문에 답할 학생을 찾았다.그때 수업 종료 종소리가 울렸지만 외국어 선생님은 못 들은 듯했다.우민아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는데 외국어 선생님이 입을 열기도 전에 우민아가 먼저 일어섰다. 귀밑의 짧은 검은 머리가 흔들렸고 하얀 얼굴이 무덤덤하기만 했다.“선생님, 수업 끝났어요.”외국어 선생님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우민아를 빤히 보더니 책을 덮었다.“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선생님이 떠난 후 교실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학생들은 삼삼오오 일어나 화장실에 가거나 복도에서 몸을 풀었고 어떤 학생은 다음 수업을 예습했다.우민아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조금 전 아무래도 외국어 선생님을 화나게 한 것 같았다.정리아는 쉬는 시간에 백화에게 손금을 봐달라고 했다.세 번째 수업은 수학이었다.수학 선생님은 마른 체구의 노인이었는데 손에 자를 들고 있었고 눈빛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위어드 언어로 말했지만 수업 내용은 모두 고3 수학이었다.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주 열심히 들었다.이곳은 던전이지, 평범한 고3 생활이 아니었다.학생들은 학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교실 안의 사람들은 사실상 경쟁자였다. 왜냐하면 성적 순위가 학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니까.1점이라도 더 받으면 생존 기회가 늘어난다. 누구도 다른 이의 성공을 위한 디딤돌이 되고 싶지 않았다.오늘 수학 선생님의 수업 내용은 도함수를 이용한 함수의 단조성, 극값, 최댓값 연구였다.선하윤은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다행히 백신향이 선생님의 강의를 다시 설명해줬다. 예시까지 들면서 자세한 풀이 과

  • 괴담 규칙   제96화 곰돌이를 알아?

    백화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회색 눈동자는 짙은 안개처럼 걷히지 않은 신비로움을 띠었고 곧은 자세로 서서 외국어 선생님을 차분하게 쳐다봤다. 그리고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외국어 선생님이 교단에서 내려왔다. 그의 시선이 닿을 때면 학생들은 고개를 숙였고 그러다가 백화 앞에 멈춰 서서 말했다.“학생, 내가 방금 뭐라고 했는지 다시 말해봐.”교실 안의 학생들은 학점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인간 언어와 위어드 언어가 뒤섞인 수업이 너무 혼란스러워 머리가 터질 듯 아팠다.노트에 적는 것도 벅찬데 선생님이 방금 한 말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겠는가?하지만 백화는 행동 하나하나에 고귀함이 묻어났다. 지목당해도 당황하지 않고 외국어 선생님이 방금 했던 말을 정확히 되풀이했다.놀랍게도 그는 위어드 언어를 할 줄 알았다.외국어 선생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백화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학생들을 훑어보더니 선하윤 쪽으로 걸어갔다.선하윤의 옆으로 다가간 그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학생, 일어나서 선생님 질문에 답해봐.”선하윤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백신향을 힐끗 쳐다봤다. 백신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하지만 선하윤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시선을 늘어뜨렸다.위어드끼리는 일반적으로 서로를 그냥 무시하지만 이런 노골적인 부정행위를 하면 그녀에 대한 외국어 선생님의 호감도가 떨어질지도 모른다.외국어 선생님이 활짝 웃었다. 웃을 때 붉은 잇몸이 드러났고 누가 뒤에서 피부를 당기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학생, 곰돌이를 알아?”‘곰돌이!’스위트홈 던전의 블랙캣의 이름이자, 딸의 남자친구 이름, 그리고 몰래 사진을 찍던 자의 이름이었다.교실에 있는 모두가 이 이름에 익숙했다.선하윤은 스위트홈 던전에서 딸과 곰돌이가 다녔던 학교가 바로 계명 고등학교였음을 떠올렸다.“몰라요.”외국어 선생님의 미소가 옅어졌다.“이 질문에

  • 괴담 규칙   제95화 우등생 규칙

    [2. 우등생의 수업은 국어, 수학, 외국어, 체육, 화학 총 다섯 과목입니다. 학교는 우등생에게 음악 수업이나 미술 수업을 배정하지 않습니다. 만약 음악 선생님 또는 미술 선생님이라 자칭하는 사람을 만나면 즉시 멀리 피하세요.][3. 각 과목은 주간 시험과 월간 시험이 있고 시험 날짜는 매주 금요일입니다. 학교는 종이 시험지를 제공하지 않으며 학생들은 태블릿 PC로만 시험이 가능하니 태블릿 PC를 잘 보관하세요.][4. 국어, 수학, 외국어 수업은 3학년 1반 교실에서, 체육 수업은 운동장에서, 화학 수업은 실험실에서 진행됩니다. 지각하지 말고 교실에 잘못 들어가선 절대 안 됩니다.][5. 체육 선생님은 아프거나 휴가를 내지 않습니다. 체육 선생님은 학생의 성적뿐만 아니라 건강도 신경 쓰니 가능한 한 체육 수업에 빠지지 마세요.][6. 화학 선생님의 말씀을 믿지 마세요. 화학 기구 보관실에 들어가지 말고 화학 선생님과 단둘이 있지 마세요.][우등생 규칙.][계명 고등학교는 우수한 인재 양성에 전념합니다. 학교는 지식을 가르치고 인성을 길러주는 훌륭한 덕목을 바탕으로 중요한 자원을 우등생에게 아낌없이 제공합니다. 우등생은 아래 규칙을 준수해 주세요.][1. 화학 선생님을 제외한 모든 선생님은 우등생을 좋아합니다. 선생님의 호감을 유지하도록 노력하세요. 호감을 얻지 못하면 선생님은 학생을 우등생에서 열등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2. 선생님은 우등생에게 사적인 일을 도와달라고 요구할 수 있고 우등생은 이를 거절할 권리가 있습니다.][3. 우등생은 학교 내에서 커닝과 같은 부정행위를 해서는 안 되고 유언비어를 퍼뜨려서도 안 됩니다.][4. 우등생은 수업 중 규율을 준수해야 하며 졸거나 정신을 딴 데 팔아서는 안 됩니다.][5. 학교 의무실에서는 매일 아침 자습 시간에 우등생에게 빨간 음료를 제공합니다. 만약 의사가 파란 음료를 준다면 즉시 거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선생님에게 알리세요.]기다란 규칙이 단톡방 화면을 가득 채웠다.우등생 규칙과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