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설의 연락 한 번에 이승우는 지금까지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뻔했다.하지만 더 큰 불행이 찾아오고 있었는데... 배여진이 다시 돌아와 버렸다.결론적으로 두 사람은 아직 이혼하지 못했다. 배여진이 임신을 했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의 오랜 대치에 애꿎게 새우등이 터진 건 이승우였다.선기현은 계속 이혼을 고집했고 전주까지 찾아왔다.부승희는 배여진의 옆을 지켰고 이승우는 선기현을 만났다.“기현이는 그래도 이혼하고 싶어해. 아이도 지우길 바라고.”조금 티가 난 배여진의 배를 보며 부승희는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 부승희와 배여진은 꽤 오랜 인연이었으며 성격도 아주 비슷했다. 과거 배여진은 부승희보다도 한 성격을 했었는데 꽃다운 청춘을 선기현의 짝사랑하며 보냈고 선기현 한 사람에게만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드디어 선기현이 마음을 받아줘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는데 또 다른 막장의 시작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정말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룸안의 배여진은 술을 마실 수 없었으나 만취한 것보다도 더 심란해 보였다.배여진은 머리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고 그동안 선기현과의 아름답던 추억을 수도 없이 꺼냈다.“내가 만나주지 않는다고 몇천 자나 되는 장문을 보냈었어.”“나만 보이고 나만 좋아해 준다고 약속도 했는데.”“그렇게 하늘에 대고 맹세를 했는데 어떻게 그 약속을 이렇게 쉽게 저버릴 수 있어? 정말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야!”“...”‘젠장. 이 시나리오 왜 이렇게 익숙하지?’부승희는 이승우가 보낸 장문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몰래 인상을 찌푸렸다.이 세상 모든 남자는 결국 다 똑같은 걸까? 다들 생각하는 게 비슷한 것 같았다.그러나 이어진 배여진의 눈물 섞인 목소리에 부승희는 바로 생각을 접었다.“만약 기현이가 나에게 돌아와 버렸다 않았다면 난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어쩌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굳이 날 돌려세운 기현이 너무 미워.”“승희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해 주는 건 기적이라고 하잖아. 그
배여진은 깨진 유리 컵으로 손목을 그었다.깊게 파인 상처만큼 배여진은 삶의 미련이 없었다.마치 선기현을 위해 결혼식 당일 도망친 것처럼 배여진이 선기현을 향한 사랑은 나방이 불꽃을 날아드는 것처럼 무모했다.부승희는 많이 당황했지만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배여진의 심정이 많이 이해가 갔다.그리고 배여진이 했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승희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해 주는 건 기적이라고 하잖아. 그런데 그 마음이 변하는 걸 지켜보는 게 얼마나 지옥인지 알아?”이승우와 선기현도 빠르게 병원으로 움직였다. 의사는 배여진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수혈을 하고 있었다.부승희는 선기현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대신 주먹부터 날리려 했다.“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야! 여진 언니 배신하면 천벌 받을 거라고 맹세했다면서! 그럼 천벌 받아!”선기현은 몰아치는 주먹에도 막아서지 않았고 잔뜩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부승희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자 이승우가 막아서며 말했다.“먼저 여진이부터 만나게 해줘.”“만나긴 뭘 만나? 여진 언니가 기현 오빠 만나고 더 흥분하면 어떡하라고.”부승희는 한참 생각하다가 선기현의 팔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더는 여진 언니 자극하지 마. 벌써 나이가 서른셋인데 책임져야 할 일은 책임져야 하지 않겠어? 언니 지금 아이도 임신 중인데!”선기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부승희는 병실 앞을 지켰고 안쪽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몰라도 수혈 중인 배여진이 선기현의 품에 안겨 엉엉 우는 게 보였다.만약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정말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면 배여진은 정말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다 버릴 것 같았다.부승희는 그 광경을 보며 점점 손발이 차가워졌고 지금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몰랐다.이승우는 이런 부승희를 이끌고 복도에 있는 좌석에 앉혔고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두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고 잘 지내보려고 해도, 배여진이 피를 흘리는 결과가
끝내 피를 보고 배여진은 점점 흥분을 가라앉혔다.의사가 병실 안으로 들어와 이승우를 데리고 나갔다.부승희는 바닥에 흩뿌려진 피를 보며 머릿속이 텅 비었고 다급하게 의사의 뒤를 따랐다.불행 중 다행인 건, 칼날이 이승우의 왼쪽 볼을 스쳤고 피가 많이 흐르긴 했으나 눈이나 코가 다친 건 아니었으며 상처가 깊은 편도 아니었다.의사의 설명을 들으며 부승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몇 바늘 꿔매야 하나요? 회복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요?”의사는 정확하게 대답을 하지 않고 더 검사를 받아봐야 알 것 같다고 답했다.부승희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그럼 빨리 검사부터 받게 해주세요.”주변에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모여 있었고 부승희는 이승우와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없었다.이승우가 잠시 말을 할 수 없는 것도 대화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잠시 밖에서 기다리니 간호사가 밖으로 나와 상처 봉합을 마쳤다고 말해줬다.“입원할 필요는 없을까요?”“네. 집으로 돌아가셔서 조심하시면 문제없을 거예요.”부승희는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부승희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승우가 먼저 밖으로 나왔고 깜짝 놀란 부승희가 말했다.“왜 벌써 나온 거야?”이승우의 왼쪽 얼굴엔 거즈로 덮여 있었다. 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였는데 거즈가 이승우의 미모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이승우가 입을 열려는데 부승희가 빠르게 말렸다.“말 하지 마. 상처가 땅겨지면 어떡해?”이승우는 부승희가 많이 놀란 걸 알아차렸고 말없이 부승희를 바라만 봤다.그리고 속으로 배여진 부부를 실컷 욕했으며 기분은 저기압으로 가라앉았다. 이승우는 본인이 가장 내세울 수 있는 걸로 얼굴을 꼽았고 그딴 사람들 때문에 얼굴을 망쳤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잡쳤다.그러나 잔뜩 긴장한 부승희를 보는 것도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이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분위기를 띄워보려 입을 열었다.“저기...”“말하지 마라니까!”부승희는 혀를 쯧 하고 찼다.“안 아파?”“아파.”“아프면 조용히 있어!”“...
부승희는 조금 다친 ‘경호원’을 옆에 끼고 배여진을 찾아갔다. 병실 밖엔 잔뜩 피곤해 보이는 선기현이 먼저 보였고 배여진은 선기현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쓰레기 같은 사람.’배여진은 부승희를 보고 한참 침묵하더니 눈을 붉히며 사과를 했다.“아니야. 승우 오빠 멀쩡하니까 언니 몸이나 잘 챙겨. 그리고 언니, 내가 오지랖이라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세상엔 본인 목숨과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어. 그리고 언니 지금 상태가 조금 안 좋아 보이는데 제대로 검사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배여진은 이불 끝을 꽉 잡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부승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두 사람 병실에 붙여둘 테니까 입원해서 몸 잘 추스르고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퇴근하면 언니 보러 올게.”그 말에 배여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친구로서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다.병실을 나서고 배여진은 선기현을 지나쳐 이승우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배여진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이승우를 집에 바래다주고 보니 밥때를 놓친 게 생각났다.이승우는 소파에 앉아 메시지를 보냈다.[혹시 밥도 챙겨주나?]“입을 벌릴 수는 있겠어? 안 아파?”[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잖아.]“...”부승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하룻밤 굶는 건 큰일 아니잖아. 상처가 좀 아물려면 내일 아침 먹는 게 좋겠어.”이승우는 고개를 돌려 조용히 부승희를 바라봤다.‘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부승희는 웃음을 꾹 참다가 말했다.“죽 끓여주면 빨대로 먹을래?”[고깃국, 계란찜, 각종 죽 다 먹을 수 있어.]부승희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먹고 싶은 것도 많네.”이승우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문자를 보냈다.[여진이는 네 친구잖아.]‘그러니까 네가 책임져.’“선기현 그 개자식은 오빠 친구잖아!”이승우는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지난번에 벌써 절교했어. 이번엔 네가 부탁해서 만난 거라고.]그 말인즉슨 부승희가 책임을 돌릴 수 없
부승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어쩌면 부처님이 정말 오빠 천벌 주시려다가 한번 봐주신 걸 수도 있어. 그러니까 몸 좀 사리는 게 좋을 거야. 이게 마지막 경고일지도 몰라.”이승우는 마음이 급해 입을 열었다.“그건 안돼.”그리고 상처가 땅겨져 또 앓는 소리를 냈고 무의식적으로 상처를 향해 손을 뻗었다.다행히 부승희가 재빠르게 이승우의 손을 낚아채 상처에 닿지 못하게 했다.이승우는 고개를 들어 부승희와 눈을 마주했다.부승희는 바로 이승우에게 뺨을 날리려 했으나 지금 얼굴 어딜 건드려도 위험할 거라는 생각에 허공에서 멈칫하다가 오른쪽 귀를 잡아당겼다.“아직 덜 아픈 거지?”이승우는 감히 크게 움직이지 못하고 조심스레 부승희의 옆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그리고 입술을 최소한도로 열어 말했으며 목소리도 아주 낮았다.“아파. 엄청 아파.”부승희는 이승우의 작은 숨결이 입가 주변에 떨어지는 게 느껴졌고 이승우에게서 병원 소독수 향이 느껴지자 손의 힘이 점점 줄어들었다.“아프면 가만히 좀 있어. 다 먹었으면 빨리 잠이나 자든지. 나랑 실랑이를 벌이는 걸 보면 아직도 힘이 넘치는 것 같아.”이승우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부승희의 옆으로 조금 더 붙었다.‘너랑 좀 더 있고 싶어서 그러지.’“...”부승희는 이승우의 오른쪽 귀를 더 세게 잡아당기려 했으나 힘을 주기도 전에 이승우는 상처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척 보아도 연기인 게 보여 부승희는 이를 악물고 귀를 꽉 잡아당기며 등이라도 내리치려 했다.이승우는 본능에 따라 몸을 작게 말았다.‘뭐야. 진짜 때리게?’부승희는 겁에 질린 이승우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다시 꾀병 부리기만 해봐? 오빠 나이가 서른이 넘어. 아직도 어린 아이인 줄 알아?”‘세상에. 나이 공격이라니.’이승우는 문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두 눈을 질끈 감고 손을 휘휘 저었다.‘그만해.’부승희는 입꼬리를 올렸다.“이건 듣고 싶지 않아? 그럼 빨리 얌전히 침대로 가.”‘가라고 하면 못 갈 줄 알고?’
이승우는 배여진이 하루빨리 경인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지금 배여진의 상태를 보아 앞으로 또 언제 미친 짓을 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배씨 가문과 선씨 가문 부모님께서 전주를 찾았다. 선기혁의 마음을 돌려세우고 배여진을 위로하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였다. 두 가문 모두 배여진을 재촉하는 대신 전주의 병원에서 배여진의 옆을 지켰다.그 소식에 이승우는 어이가 없어졌다.“전주가 뭐가 좋다고 여기 죽치고 있는 거래?”이승우는 부승희에게 투덜거렸다.부승희는 문서를 뒤척이며 고개도 들지 않고 비꼬듯 말했다.“오빠 구사일생의 아홉 번 채워야 하잖아. 두 사람이 옆에 있으면 기회도 많아지고 얼마나 좋아. 기회가 없어지면 오빤 손톱 작게 갈라진 것도 한 번으로 쳐달라고 하며 어영부영 넘어갈 사람이야.”이승우의 논리대로면 며칠 안으로 아홉 번을 다 채울 기세였다.이승우는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말했다.“그거 약지 손톱이었어.”“오빠 동맥은 약지 손톱에 있나 봐?”“우리 앞으로 결혼하면 결혼반지 약지에 껴야 하는 건데 손톱이 갈라지는 건 큰일이잖아.”“...”‘멍청하긴.’두 사람은 별 같지도 않은 일로 한참 티격태격했고, 그러다가 요즘 거래 유도 중인 업체에서 연락이 와 빠르게 회의실로 향했다.열심히 일하는 이승우의 모습은 꽤 봐줄 만 했다.점심 기간이 되고 부승희는 아래층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 부승희의 테이블을 작게 두드렸다.“부승희 씨?”여자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고 부승희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하얗고 청순하게 생긴 그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부승희는 그제야 누구인지 알아봤다.‘아, 하루빨리 씨네.’바로 지은설이었다.“무슨 일이시죠?”지은설은 부승희의 맞은 편 자리를 살펴보더니 예의를 차려 물었다.“자리에 좀 앉아도 될까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부승희는 지은설이 자신을 찾아온 의도가 뭔지 확신이 서지는 않았지만, 이마에 땀이 맺힌 지은설을 보며 며칠 전 이승우가 지은설의 아이가
지은설이 말했다.“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전에 전화를 걸었을 때 급하게 끊는 걸 보며 나와 엮이는 게 곤란한 상황인 걸 눈치챘어요. 아마도... 두 사람은 아직 만나는 건 아닌가 보네요.”“그게 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신경이 쓰인다면 그냥 제가 넋두리한다고 생각하고 들어주세요.”부승희는 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지은설은 향 주머니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이건 아마도 승희 씨가 승우 씨에게 선물한 거겠죠? 그때 제가 처음 운전을 시작하고 승우 씨 차량을 우연히 운전하게 됐는데 장식된 구슬이 너무 특이해 보여 손에 쥐고 보다가 실수로 구슬을 다 떨어뜨리게 됐어요.”“그 안에 든 구슬을 확인하고 너무 마음이 불편해서 제가 따로 가져가 버렸죠.”“그리고 승우 씨한테 차량을 돌려줬는데 승우 씨는 한참이 지나서 나한테 차량 장식품을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물어보더라고요.”“그래서 그냥 세차하던 직원이 실수로 망가뜨렸고 버렸다고 말했었죠.”여기까지 말하던 지은설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승우 씨는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안 좋은 게 느껴졌어요.”부승희는 기분이 착잡해졌다.“승우 오빠가 은설 씨한테는 많이 너그러운 사람이었나 보네요.”지은설은 부승희의 말에 아차 싶은 표정을 짓더니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그게 아니라...”지은설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때의 승우 씨는 늘 기분이 저기압이었어요. 나와 대화하는 것조차 지쳐 했죠.”부승희는 묵묵히 얘기를 들었다.상황인 부승희가 화를 내지 않는 걸 확인하고 말을 계속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한테 헤어짐을 고했어요.”‘그렇게 빨리?’부승희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상황인 쓴웃음을 지었다.“사실, 승우 씨는 소문처럼 저를 많이 좋아했던 게 아니에요.”“결혼까지 생각했었는데 좋아한 게 아니라니요.”“결혼하고 싶다는 말만 했지, 결혼한 것도 아니잖아요.”상황인 말을 고쳤다.부승희는 입
지은설은 잠시 고민하다가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건... 좋은 일을 베풀면 그만큼의 보답을 받는다고 하잖아요.”부승희는 본인도 이승우에게 같은 말을 했던 게 떠올라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나 생각할수록 왠지 분하고 불공평하게 느껴졌다.이승우는 대체 전생에 얼마나 큰 공을 세웠기에 주변에 이렇게 많은 좋은 사람이 있는 걸까?이곳저곳 마음을 준 바람둥이를 위해 전 애인이 이런 말을 해줄 사람이 몇 있겠는가?무엇보다도 지은설은 이승우가 보낸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찾아온 게 분명했다.아이가 아픈데도 이렇게 찾아올 정도면 이승우를 많이 소중하게 여긴다는 게 느껴졌다.부승희는 지은설을 슬쩍 보다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이런 사소한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운다고 남편이 뭐라고 하지 않던가요?”지은설은 미소를 지었다.“돌려줄 물건이 있고, 앞으로 다시 승우 씨한테 부탁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니 직접 이곳까지 바래다줬어요.”남편 얘기를 꺼낸 지은설은 방금까지 이승우 얘기를 하며 쓸쓸한 표정을 짓던 것과는 딴판이었다.부승희가 말했다.“남편분이 참 좋은 사람인가 봐요.”“네. 착하고 온순한 사람이에요.”부승희와 지은설은 처음부터 친구가 아니었고 이승우 때문에 엮기에 된 사이다 보니 더는 할 얘기가 없었다.지은설은 자신이 제대로 말을 전하게 맞는지 고민이 되었지만 어떤 일은 설명을 한다고 해서 다 이해가 가는 건 아니었다.이승우가 부승희를 향한 마음은 아마 본인도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겨우 방관자에 불과한 지은설은 이 정도밖에 말을 꺼낼 수 없었다.“승희 씨, 제가 괜한 소리를 건넨 건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드네요.”부승희는 창밖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지은설은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뒤 가방을 챙겨 떠났다.부승희는 한참 그 자리에서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향했다.그런데 회의실 입구에서 바로 이승우를 마주쳐 버렸다.부승희는 이승우를 무시하고 걸었고 이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
새벽이 되도록 양혁수의 방에는 열기가 뜨거웠다.딸깍.헤드 등을 켜고 변여름이 이불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연스레 변여름의 몸을 닦아줬다.변여름은 자꾸 양혁수를 훔쳐봤고 양혁수는 손을 뻗어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꾹 눌렀다.그러자 변여름은 양혁수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비며 입꼬리를 올렸다.이어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려오자 왠지 양혁수가 만족하지 못해 홀로 해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 옆 서랍을 열어보니 손목시계 따위만 있을 뿐 남은 콘돔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양혁수가 많이 자제한 것 같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있는 걸 통째로 갖고 오는 건데.’그리고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양혁수가 돌아왔다.변여름은 얌전히 누워있다가 양혁수의 품에 꼭 안겼다.양혁수의 체향을 느끼며 변여름은 두 눈을 감고 얼굴을 비볐고 목 언저리에 뽀뽀하려 했다.그러나 양혁수가 변여름을 제지했다.“지금 뭐 해?”“왜요?”양혁수는 제 목에 있는 흔적을 가리켰고 새길 때는 몰랐지만 샤워하고 나니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변여름이 지난번처럼 또 정도 없이 세게 흔적을 남긴 모양이었다.하지만 이번 모양과 색깔이 너무 마음에 들어 변여름은 미안한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오빠 다음엔 반대편도 해줄게요.”“...”양혁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취조하듯 방금 잠자리가 만족스러웠냐고 물었다.“오빠, 나 다른 것도 배웠는데 오빠만 좋다면... 읍!”양혁수는 바로 변여름의 입을 막았다.“...”‘풉. 부끄러워하긴.’양혁수는 본인이 오빠로서 리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 꼬맹이한테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잠이나 자!”그래서 고작 이런 일로 무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흥. 오늘은 이만 물러선다.’변여름은 얌전히 몸을 돌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자꾸 치근덕거렸다.“오빠가 많이 보수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요
변여름은 말재주가 뛰어났고 그대로 두면 분명 더 큰 소동을 일으킬 기세였다.양혁수는 그녀를 다잡아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변여름은 밀고 당기기에 능했고 결국 늘 그가 그녀를 달래는 쪽이었다. 변여름을 제압하려면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유혹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서로가 진심을 담기 시작하면 결국 누가 누구를 먼저 유혹한 건지조차 흐려진다.어느새 그녀는 그에게 기대어 그를 천천히 침대로 이끌었다.양혁수는 조용히 누워 있었고 변여름은 이불 속에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표정은 잔잔했지만 눈동자에는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는 익숙한 듯 그의 팔을 벌리고 조용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내 그의 온기를 안은 채 잠이 들었다.양혁수는 차갑게 굴어보려 했지만 몸은 정직하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자 그는 스스로의 입을 때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왔다.저녁이 되면 변여름은 양혁수 곁에서 말이 많아졌다. 그녀는 그와 감정을 나누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전부 들려주었다. 작은 머릿속은 놀라울 만큼 명확했고 양혁수가 확신하지 못하던 일들을 종종 먼저 짚어내곤 했다.그러다 보면 두 사람의 입술은 자석처럼 끌려붙었고 전에는 양혁수가 불씨를 조심스럽게 다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변여름을 집에 데려온 첫날 밤 양지원을 마주친 이후의 느낌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녀를 몸 아래에 눕히고 얼굴을 감싸안은 채 키스하자 변여름은 그의 몸에 다리를 스치듯 비볐고 그는 순간적으로 치솟는 충동을 느꼈다.자신의 반응을 깨달은 그는 재빨리 움직임을 멈췄다.변여름에게 들킬까 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조명의 밝기를 낮추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막 눕자마자 변여름의 부드러운 몸이 다시 양혁수의 품에 파고들었고 변여름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으며 단 한 번의 눈 맞춤으로 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
양혁수의 ‘착하지’라는 한마디에 변여름의 입꼬리는 하늘까지 닿을 듯 환하게 올라갔다.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 능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밤 11시 30분이 넘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자 아마도 자신이 먼저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아이고.’변여름은 그의 장난에 넘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간질이는 마음을 안고 그녀는 문가에 서서 발끝을 들어 여러 번 밖을 내다보았다.밤이 깊어 12시가 다 되어도 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외투를 걸쳐 입은 채 문을 열고 나섰다.양씨 가문의 저택은 워낙 넓어서 그녀가 양혁수의 방에 닿기 위해선 한 층 아래로 내려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어야 했다.몰래 발걸음을 옮겨 문 앞에 선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예상대로 잠겨 있지 않았다.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은 숨 막힐 듯 어두웠다.침실은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녀는 익숙한 감각과 뛰어난 시력에 의지해 침대를 더듬어 앉았지만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변여름은 숨을 죽인 채 주변을 감지했고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혹시 오빠가 나를 찾으러 간 걸까?’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작은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녀는 즉시 멈춰 섰다.달빛이 비추는 거실 그 한쪽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침실 문을 빠져나온 그녀가 멈추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았고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그의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것을 가볍게 던지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변여름은 품에 안긴 이가 양혁수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갑작스레 뒤에서 안아오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이어진 그의 키스가 그녀의 옆얼굴에 가볍게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양혁수는 평소 그녀가 마음껏 표현하게 두었지만 자신이 먼저 유혹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