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내가 돕지 않길 바라?”“응.”“그래. 알겠어.”이승우는 핸드폰을 꺼내 직접 지은설의 번호를 차단하는 걸 보여줬다.부승희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그 행동을 막아섰다.“뭐하는 거야?”“앞으로 돕지도 않을 텐데 연락처 남길 필요도 없지.”“아깐 그렇게 미안해하더니 왜 지금은 의리 없이 바로 차단하는 건데?”이승우는 침착하게 말했다.“난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야. 내가 도우려고 했던 건 단순히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지만, 네가 싫다면 기꺼이 나쁜 사람 할래.”“오빠도 오빠가 나쁜 사람이라는 걸 알기나 해?”“그래. 많은 사람 눈엔 내가 그렇게 보이겠지. 그런데 난 상관없어. 다른 사람한테 어떻게 보이는지 몰라도 너한텐 좋은 사람 되고 싶어.”“나 때문에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차단하고 돕지 않는 행동 자체가 나쁜 사람인 거야.”“그럼 차단 풀고 네 말대로 그 아이 도울게.”“그만!”‘젠장. 하마터면 넘어갈 뻔 했네.”이승우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두 사람은 한참 문 앞에 서서 대치했다.부승희는 이상하게 짜증이 났다. 과거 찐 사랑이라 칭했던 그 사람과는 이제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는 게 확실했지만 왠지 모르게 계속 짜증이 났다.부승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등을 돌렸다.“오빠 마음대로 해!”“돕든지 말든지!”“어차피 우린 겨우 협력 파트너일 뿐이지 연인도 아니잖아. 내가 뭔 상관이야.”이승우는 하고 싶은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로 말을 삼켰다.부승희는 고개를 돌려 이렇게 말했다.“안 가고 뭐 해?”부승희는 이승우가 역병인 것처럼 내쫓았다.며칠 동안 사이가 겨우 풀어졌는데 전화 한 통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다.이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부승희의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술 많이 마셨으니 너무 뜨거운 물로 샤워하지 말고 일찍 쉬어.”그리고 대신 문까지 닫아줬다.문이 닫히는 소리에 부승희는 입을 삐죽거렸고 얼굴을 굳힌 채로 문에 기대앉았다.부승희는 샤워하지 않고 한참 문에 기대
지은설의 연락 한 번에 이승우는 지금까지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뻔했다.하지만 더 큰 불행이 찾아오고 있었는데... 배여진이 다시 돌아와 버렸다.결론적으로 두 사람은 아직 이혼하지 못했다. 배여진이 임신을 했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의 오랜 대치에 애꿎게 새우등이 터진 건 이승우였다.선기현은 계속 이혼을 고집했고 전주까지 찾아왔다.부승희는 배여진의 옆을 지켰고 이승우는 선기현을 만났다.“기현이는 그래도 이혼하고 싶어해. 아이도 지우길 바라고.”조금 티가 난 배여진의 배를 보며 부승희는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 부승희와 배여진은 꽤 오랜 인연이었으며 성격도 아주 비슷했다. 과거 배여진은 부승희보다도 한 성격을 했었는데 꽃다운 청춘을 선기현의 짝사랑하며 보냈고 선기현 한 사람에게만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드디어 선기현이 마음을 받아줘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는데 또 다른 막장의 시작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정말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룸안의 배여진은 술을 마실 수 없었으나 만취한 것보다도 더 심란해 보였다.배여진은 머리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고 그동안 선기현과의 아름답던 추억을 수도 없이 꺼냈다.“내가 만나주지 않는다고 몇천 자나 되는 장문을 보냈었어.”“나만 보이고 나만 좋아해 준다고 약속도 했는데.”“그렇게 하늘에 대고 맹세를 했는데 어떻게 그 약속을 이렇게 쉽게 저버릴 수 있어? 정말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야!”“...”‘젠장. 이 시나리오 왜 이렇게 익숙하지?’부승희는 이승우가 보낸 장문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몰래 인상을 찌푸렸다.이 세상 모든 남자는 결국 다 똑같은 걸까? 다들 생각하는 게 비슷한 것 같았다.그러나 이어진 배여진의 눈물 섞인 목소리에 부승희는 바로 생각을 접었다.“만약 기현이가 나에게 돌아와 버렸다 않았다면 난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어쩌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굳이 날 돌려세운 기현이 너무 미워.”“승희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해 주는 건 기적이라고 하잖아. 그
배여진은 깨진 유리 컵으로 손목을 그었다.깊게 파인 상처만큼 배여진은 삶의 미련이 없었다.마치 선기현을 위해 결혼식 당일 도망친 것처럼 배여진이 선기현을 향한 사랑은 나방이 불꽃을 날아드는 것처럼 무모했다.부승희는 많이 당황했지만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배여진의 심정이 많이 이해가 갔다.그리고 배여진이 했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승희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해 주는 건 기적이라고 하잖아. 그런데 그 마음이 변하는 걸 지켜보는 게 얼마나 지옥인지 알아?”이승우와 선기현도 빠르게 병원으로 움직였다. 의사는 배여진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수혈을 하고 있었다.부승희는 선기현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대신 주먹부터 날리려 했다.“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야! 여진 언니 배신하면 천벌 받을 거라고 맹세했다면서! 그럼 천벌 받아!”선기현은 몰아치는 주먹에도 막아서지 않았고 잔뜩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부승희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자 이승우가 막아서며 말했다.“먼저 여진이부터 만나게 해줘.”“만나긴 뭘 만나? 여진 언니가 기현 오빠 만나고 더 흥분하면 어떡하라고.”부승희는 한참 생각하다가 선기현의 팔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더는 여진 언니 자극하지 마. 벌써 나이가 서른셋인데 책임져야 할 일은 책임져야 하지 않겠어? 언니 지금 아이도 임신 중인데!”선기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부승희는 병실 앞을 지켰고 안쪽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몰라도 수혈 중인 배여진이 선기현의 품에 안겨 엉엉 우는 게 보였다.만약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정말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면 배여진은 정말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다 버릴 것 같았다.부승희는 그 광경을 보며 점점 손발이 차가워졌고 지금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몰랐다.이승우는 이런 부승희를 이끌고 복도에 있는 좌석에 앉혔고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두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고 잘 지내보려고 해도, 배여진이 피를 흘리는 결과가
끝내 피를 보고 배여진은 점점 흥분을 가라앉혔다.의사가 병실 안으로 들어와 이승우를 데리고 나갔다.부승희는 바닥에 흩뿌려진 피를 보며 머릿속이 텅 비었고 다급하게 의사의 뒤를 따랐다.불행 중 다행인 건, 칼날이 이승우의 왼쪽 볼을 스쳤고 피가 많이 흐르긴 했으나 눈이나 코가 다친 건 아니었으며 상처가 깊은 편도 아니었다.의사의 설명을 들으며 부승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몇 바늘 꿔매야 하나요? 회복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요?”의사는 정확하게 대답을 하지 않고 더 검사를 받아봐야 알 것 같다고 답했다.부승희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그럼 빨리 검사부터 받게 해주세요.”주변에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모여 있었고 부승희는 이승우와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없었다.이승우가 잠시 말을 할 수 없는 것도 대화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잠시 밖에서 기다리니 간호사가 밖으로 나와 상처 봉합을 마쳤다고 말해줬다.“입원할 필요는 없을까요?”“네. 집으로 돌아가셔서 조심하시면 문제없을 거예요.”부승희는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부승희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승우가 먼저 밖으로 나왔고 깜짝 놀란 부승희가 말했다.“왜 벌써 나온 거야?”이승우의 왼쪽 얼굴엔 거즈로 덮여 있었다. 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였는데 거즈가 이승우의 미모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이승우가 입을 열려는데 부승희가 빠르게 말렸다.“말 하지 마. 상처가 땅겨지면 어떡해?”이승우는 부승희가 많이 놀란 걸 알아차렸고 말없이 부승희를 바라만 봤다.그리고 속으로 배여진 부부를 실컷 욕했으며 기분은 저기압으로 가라앉았다. 이승우는 본인이 가장 내세울 수 있는 걸로 얼굴을 꼽았고 그딴 사람들 때문에 얼굴을 망쳤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잡쳤다.그러나 잔뜩 긴장한 부승희를 보는 것도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이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분위기를 띄워보려 입을 열었다.“저기...”“말하지 마라니까!”부승희는 혀를 쯧 하고 찼다.“안 아파?”“아파.”“아프면 조용히 있어!”“...
부승희는 조금 다친 ‘경호원’을 옆에 끼고 배여진을 찾아갔다. 병실 밖엔 잔뜩 피곤해 보이는 선기현이 먼저 보였고 배여진은 선기현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쓰레기 같은 사람.’배여진은 부승희를 보고 한참 침묵하더니 눈을 붉히며 사과를 했다.“아니야. 승우 오빠 멀쩡하니까 언니 몸이나 잘 챙겨. 그리고 언니, 내가 오지랖이라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세상엔 본인 목숨과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어. 그리고 언니 지금 상태가 조금 안 좋아 보이는데 제대로 검사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배여진은 이불 끝을 꽉 잡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부승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두 사람 병실에 붙여둘 테니까 입원해서 몸 잘 추스르고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퇴근하면 언니 보러 올게.”그 말에 배여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친구로서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다.병실을 나서고 배여진은 선기현을 지나쳐 이승우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배여진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이승우를 집에 바래다주고 보니 밥때를 놓친 게 생각났다.이승우는 소파에 앉아 메시지를 보냈다.[혹시 밥도 챙겨주나?]“입을 벌릴 수는 있겠어? 안 아파?”[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잖아.]“...”부승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하룻밤 굶는 건 큰일 아니잖아. 상처가 좀 아물려면 내일 아침 먹는 게 좋겠어.”이승우는 고개를 돌려 조용히 부승희를 바라봤다.‘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부승희는 웃음을 꾹 참다가 말했다.“죽 끓여주면 빨대로 먹을래?”[고깃국, 계란찜, 각종 죽 다 먹을 수 있어.]부승희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먹고 싶은 것도 많네.”이승우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문자를 보냈다.[여진이는 네 친구잖아.]‘그러니까 네가 책임져.’“선기현 그 개자식은 오빠 친구잖아!”이승우는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지난번에 벌써 절교했어. 이번엔 네가 부탁해서 만난 거라고.]그 말인즉슨 부승희가 책임을 돌릴 수 없
부승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어쩌면 부처님이 정말 오빠 천벌 주시려다가 한번 봐주신 걸 수도 있어. 그러니까 몸 좀 사리는 게 좋을 거야. 이게 마지막 경고일지도 몰라.”이승우는 마음이 급해 입을 열었다.“그건 안돼.”그리고 상처가 땅겨져 또 앓는 소리를 냈고 무의식적으로 상처를 향해 손을 뻗었다.다행히 부승희가 재빠르게 이승우의 손을 낚아채 상처에 닿지 못하게 했다.이승우는 고개를 들어 부승희와 눈을 마주했다.부승희는 바로 이승우에게 뺨을 날리려 했으나 지금 얼굴 어딜 건드려도 위험할 거라는 생각에 허공에서 멈칫하다가 오른쪽 귀를 잡아당겼다.“아직 덜 아픈 거지?”이승우는 감히 크게 움직이지 못하고 조심스레 부승희의 옆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그리고 입술을 최소한도로 열어 말했으며 목소리도 아주 낮았다.“아파. 엄청 아파.”부승희는 이승우의 작은 숨결이 입가 주변에 떨어지는 게 느껴졌고 이승우에게서 병원 소독수 향이 느껴지자 손의 힘이 점점 줄어들었다.“아프면 가만히 좀 있어. 다 먹었으면 빨리 잠이나 자든지. 나랑 실랑이를 벌이는 걸 보면 아직도 힘이 넘치는 것 같아.”이승우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부승희의 옆으로 조금 더 붙었다.‘너랑 좀 더 있고 싶어서 그러지.’“...”부승희는 이승우의 오른쪽 귀를 더 세게 잡아당기려 했으나 힘을 주기도 전에 이승우는 상처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척 보아도 연기인 게 보여 부승희는 이를 악물고 귀를 꽉 잡아당기며 등이라도 내리치려 했다.이승우는 본능에 따라 몸을 작게 말았다.‘뭐야. 진짜 때리게?’부승희는 겁에 질린 이승우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다시 꾀병 부리기만 해봐? 오빠 나이가 서른이 넘어. 아직도 어린 아이인 줄 알아?”‘세상에. 나이 공격이라니.’이승우는 문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두 눈을 질끈 감고 손을 휘휘 저었다.‘그만해.’부승희는 입꼬리를 올렸다.“이건 듣고 싶지 않아? 그럼 빨리 얌전히 침대로 가.”‘가라고 하면 못 갈 줄 알고?’
이승우는 배여진이 하루빨리 경인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지금 배여진의 상태를 보아 앞으로 또 언제 미친 짓을 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배씨 가문과 선씨 가문 부모님께서 전주를 찾았다. 선기혁의 마음을 돌려세우고 배여진을 위로하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였다. 두 가문 모두 배여진을 재촉하는 대신 전주의 병원에서 배여진의 옆을 지켰다.그 소식에 이승우는 어이가 없어졌다.“전주가 뭐가 좋다고 여기 죽치고 있는 거래?”이승우는 부승희에게 투덜거렸다.부승희는 문서를 뒤척이며 고개도 들지 않고 비꼬듯 말했다.“오빠 구사일생의 아홉 번 채워야 하잖아. 두 사람이 옆에 있으면 기회도 많아지고 얼마나 좋아. 기회가 없어지면 오빤 손톱 작게 갈라진 것도 한 번으로 쳐달라고 하며 어영부영 넘어갈 사람이야.”이승우의 논리대로면 며칠 안으로 아홉 번을 다 채울 기세였다.이승우는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말했다.“그거 약지 손톱이었어.”“오빠 동맥은 약지 손톱에 있나 봐?”“우리 앞으로 결혼하면 결혼반지 약지에 껴야 하는 건데 손톱이 갈라지는 건 큰일이잖아.”“...”‘멍청하긴.’두 사람은 별 같지도 않은 일로 한참 티격태격했고, 그러다가 요즘 거래 유도 중인 업체에서 연락이 와 빠르게 회의실로 향했다.열심히 일하는 이승우의 모습은 꽤 봐줄 만 했다.점심 기간이 되고 부승희는 아래층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 부승희의 테이블을 작게 두드렸다.“부승희 씨?”여자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고 부승희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하얗고 청순하게 생긴 그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부승희는 그제야 누구인지 알아봤다.‘아, 하루빨리 씨네.’바로 지은설이었다.“무슨 일이시죠?”지은설은 부승희의 맞은 편 자리를 살펴보더니 예의를 차려 물었다.“자리에 좀 앉아도 될까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부승희는 지은설이 자신을 찾아온 의도가 뭔지 확신이 서지는 않았지만, 이마에 땀이 맺힌 지은설을 보며 며칠 전 이승우가 지은설의 아이가
지은설이 말했다.“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전에 전화를 걸었을 때 급하게 끊는 걸 보며 나와 엮이는 게 곤란한 상황인 걸 눈치챘어요. 아마도... 두 사람은 아직 만나는 건 아닌가 보네요.”“그게 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신경이 쓰인다면 그냥 제가 넋두리한다고 생각하고 들어주세요.”부승희는 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지은설은 향 주머니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이건 아마도 승희 씨가 승우 씨에게 선물한 거겠죠? 그때 제가 처음 운전을 시작하고 승우 씨 차량을 우연히 운전하게 됐는데 장식된 구슬이 너무 특이해 보여 손에 쥐고 보다가 실수로 구슬을 다 떨어뜨리게 됐어요.”“그 안에 든 구슬을 확인하고 너무 마음이 불편해서 제가 따로 가져가 버렸죠.”“그리고 승우 씨한테 차량을 돌려줬는데 승우 씨는 한참이 지나서 나한테 차량 장식품을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물어보더라고요.”“그래서 그냥 세차하던 직원이 실수로 망가뜨렸고 버렸다고 말했었죠.”여기까지 말하던 지은설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승우 씨는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안 좋은 게 느껴졌어요.”부승희는 기분이 착잡해졌다.“승우 오빠가 은설 씨한테는 많이 너그러운 사람이었나 보네요.”지은설은 부승희의 말에 아차 싶은 표정을 짓더니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그게 아니라...”지은설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때의 승우 씨는 늘 기분이 저기압이었어요. 나와 대화하는 것조차 지쳐 했죠.”부승희는 묵묵히 얘기를 들었다.상황인 부승희가 화를 내지 않는 걸 확인하고 말을 계속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한테 헤어짐을 고했어요.”‘그렇게 빨리?’부승희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상황인 쓴웃음을 지었다.“사실, 승우 씨는 소문처럼 저를 많이 좋아했던 게 아니에요.”“결혼까지 생각했었는데 좋아한 게 아니라니요.”“결혼하고 싶다는 말만 했지, 결혼한 것도 아니잖아요.”상황인 말을 고쳤다.부승희는 입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