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야. 아버님께서 어머님을 얼마나 아끼시는데 내가 어떻게 어머님께 밥해달라고 조르겠어? 내가 졸랐다고 하면 아버님이 나 혼내실지도 몰라.”“안 그럴 거야.”이승우는 단번에 부승희의 말을 잘랐다.“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네가 좋아한다면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셔서 밥 차려주실걸?”부승희는 웃음이 터졌다.“농담하지 마.”“농담 아니야. 오늘 밤에도 아버지가 네 얘기하셨어.”부승희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물었다.“나에 대해... 무슨 얘기를 했는데?”“네가 좋은 사람이라고, 똑똑하고 예쁜 널 나와 맺어준다면 가문의 영광이라고 했어.”“웃기지 마.”부승희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러나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아버님 눈이 얼마나 높으신지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버님 눈엔 어머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눈에 차지 않으실걸?”“어머니가 널 마음에 들어 하니까 아버지도 그러는 거지.”부승희는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심장이 콩닥거리는 걸 느꼈다.핸드폰 너머 이승우도 조용했고 부승희는 혹시 자신의 심장 소리가 이승우에게 들릴까 호흡 소리도 작게 했다. “내일엔 뭐해?”이승우가 물었다.“모르겠어. 오빠가 볼일이 많아서 내가 좀 거들어줘야 할 것 같아.”“그래도 오후 일정이지 않겠어? 그러니까 오전엔 푹 쉬고 내가 데리러 갈게. 같이 아침밥 먹자.”“별로 나가고 싶진 않은데.”“그럼 점심 같이 먹을래?”어찌 되었든 꼭 만나고자 하는 이승우의 의지가 느껴졌다.부승희도 크게 싫은 건 아니었지만 계속 툴툴거렸다.“뭘 또 같이 먹는다고 그래. 오빠도 오랜만에 돌아온 건데 친구나 거래처 사람들이나 만나. 나도 할 일이 산더미라고.”“거래처 만나기 전에 짧게 만나는 것도 안 돼?”왠지 이승우의 간절한 표정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그럼 내일 아침 만나자. 내가 도시락 챙겨서 너희 집으로 갈게.”이승우가 자꾸 보채자 부승희는 잠이 점점 가셨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직 해가 뜨려면
돌이 지난 양승윤은 이제 걸을 수도 있고 짧은 단어를 구사할 수도 있었다. 귀여운 멜빵바지에 예쁜 볼캡을 눌러쓴 모습에 언뜻 봐도 미모가 남달랐다. 게다가 방긋방긋 잘 웃기도 했는데 작고 소중한 아기 이발이 드러날 때마다 보는 이는 심장이 녹아내렸다.반우희의 거실엔 사람들로 빼곡했다. 반우희와 같이 일을 하던 동료들, 그리고 부승원 쪽 친척들까지 들어섰으며 신부 들러리들도 함께였다.양승윤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아이를 빙 둘러싸고 시선을 집중했다.양승윤은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잔뜩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저 멀리 엄마 양시연이 보이자 뒤뚱거리며 그곳으로 향해 달려갔다.사람들은 그 모습에 절로 엄마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가던 길에 부승희를 만난 양승윤이 발걸음을 뚝 멈춰 섰다.‘누구지? 전에 본 적이 없는데?’부승희는 허리를 숙여 보드라운 아기 볼을 슬쩍 매만졌다.“고모라고 불러.”“고고...”어눌한 발음에 사람들은 또 웃음이 터졌다.양시연도 미소를 지은 채로 아이를 제 옆으로 당겨 다시 발음을 교정해 줬다.“고모.”“고고!”“고모!”“고... 고고!”부승희는 웃음이 멈추지 않았고 양승윤을 품에 안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양시연이 그 옆으로 다가가 아이의 볼캡을 다시 고쳐 씌워줬다.그때, 마침 표세연이 도착했다.거실은 이제 사람들로 꽉 차버렸고 스타일링을 도와주시는 스태프들까지 들어서니 아예 이동하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게다가 승주마저 제 친구들을 한가득 초대를 해버렸다.부승희는 소란 속에서 자리 배정을 진행했고 양시연은 양승윤을 안아 들고 신부 방으로 숨어 들었다.반우희는 이제 막 메이크업을 시작했고 양승윤을 보자마자 두 팔을 활짝 벌렸다.“승윤아!”양승윤은 반우희와 아주 친했고 서둘러 양시연의 품에서 벗어나 뒤뚱거리며 반우희에게로 걸어갔다.양시연은 그 옆으로 다가가 양승윤의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승윤아, 우리 우희 고모한테 준비한 선물이 있잖아.”그리고 양승윤의 작은 주머니를 톡톡 두드렸다.그제야 떠오른 양승윤
놀랍게도 연정훈의 예상은 아주 정확했다.부승원이 신랑 들러리와 함께 집을 올라가는데 반우희가 침대 앉아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신랑 들러리들은 모두 반우희에게 집중을 기울였고 혹시나 해서 한 사람이 전담으로 반우희를 잡아두기도 했다.신부 들러리들은 모두 방문을 지키려 문 앞으로 모였고 양시연도 그 틈에 꼈으며 양승윤은 반우희에게 잠시 맡겨뒀다.준비한 대로 문밖 거실에서 부승희가 신랑 들러리들에게 어려운 퀴즈를 내고 있었다.반우희가 입을 벙긋거리자 눈만 깜빡이던 양승윤이 바로 입을 덥석 막았다.부승원은 어렵게 질문의 대답을 찾았고 드디어 방으로 움직이려는데 두 번째 미션도 이어졌다.양시연은 양승윤을 데리고 한쪽에 자리를 잡았고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예요?”“나야.”연정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양시연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양승윤도 제 아빠의 목소리를 알아채고 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부승희는 문에 몸을 기댄 채로 다른 신부 들러리들과 시선을 주고받았다.“정훈 오빠는 무슨 일로 왔어요?”“난 신랑 들러리가 아니라 승윤이 데리러 왔어.”반우희는 예쁜 드레스를 입은 채로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그래요. 승윤이가 많이 따분해하는 것 같은데 얼른 승윤이 데리고 가세요.”부승희는 반우희를 힐끗 노려보며 말했다.“정훈 오빠, 우릴 바보로 보는 거예요? 미션도 없이 신부 만나시려는 거죠?”“난 정말 승윤이 찾으러 온 거야.”“정훈 씨 괜찮아요!”양시연이 적당한 타이밍에 끼어들었다.“내가 승윤이 잘 보살피고 있어요!”양승윤은 작게 종알거렸다.“읍!”양시연은 양승윤에게 뽀뽀하며 아이의 입을 막았다.“미션 완성 못 하시면 신부 못 만나요! 이런 꾀를 쓰지 말고 얌전히 미션 완성하세요!”그러자 신랑 들러리들의 작은 탄식이 이어졌다.부승희는 양시연을 향해 엄지척했다.부승희는 이어서 또 어려운 문제를 투척했고 오답을 말한 자는 작은 벌칙도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또 문을 똑똑 두드렸다.“시연아.”“정훈 씨,
예비부부 주변으로 종이 폭죽이 터지고 예쁜 컨페티와 꽃송이가 사방에 떨어졌다.양시연은 한편으로 물러서서 두 사람의 행복한 순간을 함께 했다.미션은 어영부영 끝이 났고 부승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옆으로 물러섰다.반우희는 예쁘게 꾸민 장미꽃 사이에 앉았고 웨딩 베일에 가려진 얼굴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부승원은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직접 구두를 신겨줬다.그리고 두 사람이 눈을 마주했다.부승원은 조금 가슴이 먹먹했으나 반우희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이에 주변 사람들도 웃음이 터졌다.부승원은 잠시 행동을 멈추더니 농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이 상황에서 눈물 두 방울은 흘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반우희는 두 눈을 비비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글쎄요. 눈물이 나지 않는걸요?”‘이렇게 좋은 날에 왜 울지?’사람들은 평소 반우희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고 이게 정말 반우희다운 모습이라 생각했다.드디어 구두까지 착용하고 이제 차를 타고 예식장을 옮겨 가야 했다.누나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기원하며 승주가 반우희를 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승주는 1년 사이에 또 키가 껑충 껐고 아직도 어린 소년티가 났지만 반우희를 업는 건 무리가 아니었다.그런데 눈가가 조금 빨개진 승주를 보며 반우희가 이렇게 중얼거렸다.“너 정말 누나 안 떨어뜨릴 자신 있어?”“나 50킬로는 끄떡없어. 누나 50킬로 넘어?”“아니!”“그런데 왠지 요즘 살이 더 붙은 것 같은데?”“말이 되는 소리를 해!”남매가 작게 투덕거렸으나 말은 그렇게 해도 승주는 아주 든든하게 반우희를 안아 들었고 반우희 역시 행여나 승주가 다칠까 전전긍긍했다.그렇게 또 폭죽과 꽃잎이 흩날리는 축복을 받으며 승주는 반우희를 업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이번 결혼식을 위해 부승원은 전체 동네를 예쁘게 꾸몄고 주민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가 그동안 반우희와 동생들을 챙겨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결혼식 당일 소란에 미리 양해를 구했다.주변에는 예쁜 꽃잎과 컨
부승원은 평소 과시욕이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반우희와의 결혼식에는 디테일 하나하나 신경을 썼고 돈을 쏟아부어 준비했다.경인에 이름 좀 날린 사람이라면 모두 결혼식에 초대를 받았고 양석진도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례는 부승원의 할아버지와 연정훈의 아버지 두 사람이 맡았다.부승원은 반우희에게 가장 최고로 준비해 줬고 반 우희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게 느껴졌다. 부승원은 오직 반우희에게만 사랑을 쏟아부었고 이 세상 무엇보다도 반우희가 소중하다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고 있었다.그러니 반우희는 부승원의 옆에서 행복할 일만 남았다.부승희는 양시연의 옆자리에 앉아 처음 반우희를 만났던 시절을 떠올렸다.“그때, 오빠랑 우희 씨는 어떤 사이였을까요?”양시연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잘 몰라도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제 느낌상으로는.”양시연이 말을 한 마디 더 보탰고 부승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제 직감도 그래요.”요즘 들어 얼굴이 더 펴진 양시연을 보며 부승희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정훈 오빠랑은 잘 지내는 거죠?”양시연은 어젯밤에도 꼭 붙어 지냈던 기억이 떠올라 순식간에 얼굴이 뜨거워졌다.“뭐예요?”“왜 아직도 부끄러워하는 거예요?”양시연은 부승희의 장난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서둘러 질문을 돌렸다.“그럼 승희 씨는 승우 씨랑 진도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그냥 그래요.”“뭐가 그냥인데요?”“돼지 키우고, 소도 키우고, 양도 키우고 있죠 뭐.”양시연이 말을 한 마디 더 보탰다.“승우 씨도 키우고?”부승희는 팔짱을 척 끼며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이에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어느새 모두 자리에 착석하고 예식이 시작되었다.예식이 끝나고 부승원과 반우희가 자리로 인사를 드리러 왔다.부승희와 이승우가 앉은 테이블은 거리가 꽤 있었다.부승희는 그쪽을 힐끔거리다가 이승우가 술잔을 받아 들고 가짜로 마시는 척만 하고 바닥에 슬쩍 흘리는 걸 목격했다.부승희는 절대 놓치지 않
“뭐 하는 거야?”“너 기다리고 있지.”부승희는 등 뒤로 손을 모으고 불어오는 밤바람을 느꼈다.“왜 날 기다리고 있었는데?”“같이 전주로 돌아가려고.”부승희는 다시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아까 말했잖아. 안 갈 거라고.”“가자.”이승우가 한 발 더 다가갔고 두 손을 모은 채로 간절하게 비는 시늉을 했다.“나 너무 집에 돌아가고 싶어.”‘풉.’부승희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고 괜스레 모르는 척 먼저 앞장을 서서 걸었다.부승희는 저녁 연회에 기장이 짧은 까만 드레스를 입었고 뒤로 긴 나비매듭이 있었다. 동준은 이 긴 나비매듭을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이승우가 빠른 걸음으로 부승희의 뒤를 따랐다.“우리 지금 돌아가면 내일 아침밥도 같이 먹을 수 있어.”“누가 먹고 싶대?”“우리 동네 경비원 아저씨 손자가 태어났다고 선물도 준대.”“선물 못 받아봤어?”“그래도 좋은 의미가 담긴 선물이잖아.”“좀 저리 떨어져.”“같이 가자.”“싫어. 싫어.”“승희야...”두 사람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홀에서 사라졌다.창밖은 아주 조용하고 운치 좋은 밤경치가 보였다.부승희가 이승우와 함께 전주로 돌아간 지 얼마되지 않아 반우희가 갑자기 나타났다.신혼 생활 한 달 차인 반우희는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그런데 정장 차림의 반우희는 왠지 어색해하며 부승희와 이승우에게 말을 걸었다.“저기... 그게 제가 사법 고시 통과했는데 혹시 여기 법률 자문 필요하지 않아요?”“...”부승희는 반우희를 의아하다는 표정을 살피다가 제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왜 옆에 끼고 있지 않는 거야?”부승원은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아직 많이 서툴러 실수도 자주 하는데 내가 옆에서 혼내고 싶지 않아서 그래.”부승희는 표정이 차게 식었다.“그래서 우리한테 사고 치라고 보낸 거야?”“너희 쪽엔 크게 문제도 없고 팀도 있는데 무슨 일 있겠어?”부승희는 길게 심호흡했다.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난감해하는데 부승원은 벌써 통화를 종
승가 농목도 벌써 4년 차가 되었고 부승희의 사업은 승승장구를 해 최고점을 찍었다.그리고 부승희가 서른둘, 이승우가 서른넷이던 해에 배여진이 청첩장을 보내왔다.배여진의 재혼 결심에 부승희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 줬다.2년 동안 배여진은 공부도 하고 자기 계발도 했으며 선기현을 떠나며 모든 액운을 털어버린 건지 손을 대는 것마다 성공했다.재혼 상대는 한독 혼혈이었고 가정 배경과 성격 모두 배여진에게 걸맞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배여진보다 세 살이나 어렸다.결혼식은 해외에서 진행되었고 부승희는 초대장을 들고 직접 그곳으로 향했다.결혼식에서 배여진은 누구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배여진은 자주 부승희에게 손 편지와 이메일을 보냈고 편지와 이메일에 담긴 사진과 정성에 부승희는 배여진의 소식을 늘 기다려졌다.그리고 늦여름의 어느 날, 창가 자리에서 배여진의 편지를 읽고 있었는데 그 편지엔 선기현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었다.배여진이 재혼 준비를 할 때, 선기현은 배여진을 붙잡았었다고 한다. 그 개자식은 과거처럼 또 한 번 배여진을 결혼식에서 도망치게 하려고 했고 마치 배여진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고 했다.배여진은 선기현을 몰래 바셀라로 불렀고 어둡고 추운 날 밤, 사람을 시켜 된통 때리게 했다고 전했다.[개자식, 뻔뻔하게 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야? 참 나 급에 맞아야 놀아주지.][젠장. 과거의 난 정말 눈이 어떻게 됐나 봐!]부승희는 그 문장을 읽으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어진 문장은 부승희와 이승우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내용이었다.부승희는 고개를 돌려 목장을 슬쩍 둘러봤고 이승우는 도망친 어린 소를 잡으려 허겁지겁 달려가고 있었다. 바람에 머리는 마음대로 흩날리고 있었고 급하게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빨리 잡아!”“...”이젠 부승희가 답장을 쓸 차례였다. 일단 선기현에 대한 욕부터 늘여놓고 차차 본인의 사업에 대한 근황을 적었다.이메일을 보낸 지 얼마되지 않아 배여진이 짤막하게 답장을 보내왔
부예지의 돌잔치 날, 부승희는 이승우에게 팔짱을 낀 채로 식장에 나타나 아이의 선물을 건넸다. 꼭 붙어 등장한 두 사람을 보며 사람들은 드디어 좋은 소식이 들려오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기저귀 차던 시절부터 알고 지낸 두 사람이 이렇게 먼 길을 돌아오기까지 정말 쉽지 않았다. 몇 해 동안 이승우와 부승희는 공식 석상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전주 목장에 모든 정성을 쏟아부었으며 그곳에 뿌리를 박을 생각처럼 보였다.부승희는 집으로 돌아가 슬쩍 소식을 흘렸고 채애정은 드디어 그날이 왔구나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른 한편, 이승우네 집은 너무 좋아 잔치를 벌일 지경이었다.부승원의 결혼은 온 세상이 떠들썩했던 것과는 달리, 늘 화려한 것을 쫓던 두 사람의 결혼 준비는 되려 차분하고 검소했다.두 사람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 결혼 의사를 밝히고 상견례를 했으며 예식장까지 예약을 마치고 모든 절차를 두 사람이 스스로 해나갔다. 이건 부승희의 제안이었는데 결혼 준비도 여행처럼 두 사람이 정말 어울리는 사람이 맞는지 최종으로 알아볼 수 있는 테스트이기 때문이었다.이승우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돼지 농사도 기꺼이 하는데 직접 결혼 준비를 하는 게 뭐가 어렵겠는가?두 사람은 경인과 전주를 바삐 돌아다녔고 가끔 해외로 출장도 다녀왔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 모두 여유가 생기면 사무실에 모여 차근차근 결혼 준비를 했다.대부분 상황에서 부승희는 펜 끝을 질근질근 물며 준비해야 할 리스트를 체크했고, 이승우는 다리를 꼰 채로 여유롭게 태블릿에 식장 설계를 했다.그러다가 배가 고파진 부승희는 간식장에서 소시지 두 개를 꺼내 하나는 입에 물고 하나는 이승우에게 휙 던졌다.“이거만 먹으면 아쉽잖아.”“음료수라도 시킬까?”이승우는 핸드폰을 꺼내고 익숙하게 부승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소시지를 질근질근 씹으며 배달 앱을 같이 확인했다.두 사람은 천천히, 또 차근차근 준비했고 드디어 늦가을에 청첩장을 완성해 지인들에게 보냈다.결혼식장은 현재 개발 중인 경인 목장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
새벽이 되도록 양혁수의 방에는 열기가 뜨거웠다.딸깍.헤드 등을 켜고 변여름이 이불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연스레 변여름의 몸을 닦아줬다.변여름은 자꾸 양혁수를 훔쳐봤고 양혁수는 손을 뻗어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꾹 눌렀다.그러자 변여름은 양혁수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비며 입꼬리를 올렸다.이어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려오자 왠지 양혁수가 만족하지 못해 홀로 해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 옆 서랍을 열어보니 손목시계 따위만 있을 뿐 남은 콘돔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양혁수가 많이 자제한 것 같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있는 걸 통째로 갖고 오는 건데.’그리고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양혁수가 돌아왔다.변여름은 얌전히 누워있다가 양혁수의 품에 꼭 안겼다.양혁수의 체향을 느끼며 변여름은 두 눈을 감고 얼굴을 비볐고 목 언저리에 뽀뽀하려 했다.그러나 양혁수가 변여름을 제지했다.“지금 뭐 해?”“왜요?”양혁수는 제 목에 있는 흔적을 가리켰고 새길 때는 몰랐지만 샤워하고 나니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변여름이 지난번처럼 또 정도 없이 세게 흔적을 남긴 모양이었다.하지만 이번 모양과 색깔이 너무 마음에 들어 변여름은 미안한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오빠 다음엔 반대편도 해줄게요.”“...”양혁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취조하듯 방금 잠자리가 만족스러웠냐고 물었다.“오빠, 나 다른 것도 배웠는데 오빠만 좋다면... 읍!”양혁수는 바로 변여름의 입을 막았다.“...”‘풉. 부끄러워하긴.’양혁수는 본인이 오빠로서 리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 꼬맹이한테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잠이나 자!”그래서 고작 이런 일로 무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흥. 오늘은 이만 물러선다.’변여름은 얌전히 몸을 돌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자꾸 치근덕거렸다.“오빠가 많이 보수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요
변여름은 말재주가 뛰어났고 그대로 두면 분명 더 큰 소동을 일으킬 기세였다.양혁수는 그녀를 다잡아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변여름은 밀고 당기기에 능했고 결국 늘 그가 그녀를 달래는 쪽이었다. 변여름을 제압하려면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유혹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서로가 진심을 담기 시작하면 결국 누가 누구를 먼저 유혹한 건지조차 흐려진다.어느새 그녀는 그에게 기대어 그를 천천히 침대로 이끌었다.양혁수는 조용히 누워 있었고 변여름은 이불 속에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표정은 잔잔했지만 눈동자에는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는 익숙한 듯 그의 팔을 벌리고 조용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내 그의 온기를 안은 채 잠이 들었다.양혁수는 차갑게 굴어보려 했지만 몸은 정직하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자 그는 스스로의 입을 때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왔다.저녁이 되면 변여름은 양혁수 곁에서 말이 많아졌다. 그녀는 그와 감정을 나누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전부 들려주었다. 작은 머릿속은 놀라울 만큼 명확했고 양혁수가 확신하지 못하던 일들을 종종 먼저 짚어내곤 했다.그러다 보면 두 사람의 입술은 자석처럼 끌려붙었고 전에는 양혁수가 불씨를 조심스럽게 다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변여름을 집에 데려온 첫날 밤 양지원을 마주친 이후의 느낌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녀를 몸 아래에 눕히고 얼굴을 감싸안은 채 키스하자 변여름은 그의 몸에 다리를 스치듯 비볐고 그는 순간적으로 치솟는 충동을 느꼈다.자신의 반응을 깨달은 그는 재빨리 움직임을 멈췄다.변여름에게 들킬까 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조명의 밝기를 낮추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막 눕자마자 변여름의 부드러운 몸이 다시 양혁수의 품에 파고들었고 변여름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으며 단 한 번의 눈 맞춤으로 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
양혁수의 ‘착하지’라는 한마디에 변여름의 입꼬리는 하늘까지 닿을 듯 환하게 올라갔다.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 능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밤 11시 30분이 넘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자 아마도 자신이 먼저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아이고.’변여름은 그의 장난에 넘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간질이는 마음을 안고 그녀는 문가에 서서 발끝을 들어 여러 번 밖을 내다보았다.밤이 깊어 12시가 다 되어도 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외투를 걸쳐 입은 채 문을 열고 나섰다.양씨 가문의 저택은 워낙 넓어서 그녀가 양혁수의 방에 닿기 위해선 한 층 아래로 내려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어야 했다.몰래 발걸음을 옮겨 문 앞에 선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예상대로 잠겨 있지 않았다.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은 숨 막힐 듯 어두웠다.침실은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녀는 익숙한 감각과 뛰어난 시력에 의지해 침대를 더듬어 앉았지만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변여름은 숨을 죽인 채 주변을 감지했고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혹시 오빠가 나를 찾으러 간 걸까?’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작은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녀는 즉시 멈춰 섰다.달빛이 비추는 거실 그 한쪽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침실 문을 빠져나온 그녀가 멈추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았고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그의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것을 가볍게 던지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변여름은 품에 안긴 이가 양혁수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갑작스레 뒤에서 안아오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이어진 그의 키스가 그녀의 옆얼굴에 가볍게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양혁수는 평소 그녀가 마음껏 표현하게 두었지만 자신이 먼저 유혹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