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사랑은 누구나 시작하지만, 끝내는 법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결혼 직전, 이유도 모른 채 사라진 연인. 뒤늦게 알게 된 병의 진실, 그리고 남겨진 상처. 그 상처를 직업으로 바꾼 여자가 있다. 신나리. 그녀는 타인의 굿바이를 대신 설계하며, 아름답고 단호한 이별을 만들어준다. 하지만 누군가의 안녕을 돕는 순간마다 끝내 놓지 못한 자신의 사랑과 다시 마주한다. 열 번의 의뢰, 열 가지의 굿바이. 그리고 마지막에 찾아올, 나리 자신의 가장 아픈 이별. 사랑의 끝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 〈이별전문가! 신나리〉
View More아침시간. 센터 문 앞엔 아무도 없었다.그런데 바닥 위엔 낡은 열쇠 하나와 짧은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잠시, 숨 좀 고를게.' - 나리그 두 줄이 전부였다.수경은 한참 동안 그 글을 읽었다.글씨는 익숙했지만, 그 문장이 낯설게 느껴졌다.‘숨 좀 고른다는 게… 얼마나 긴 건데요, 선배.’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선배가 떠난 게 아니라… 잠시인 거죠.”스스로에게 반복해서 말했다.하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때마다 점점 그 확신이 희미해졌다.그날 오후, 수경은 평소처럼 상담 일정을 진행했다.하지만 대화의 흐름이 자꾸 어긋났다.“그 사람과의 관계가 이제 끝났다는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요.”의뢰인의 말에, 수경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그 마음, 잘 알아요.”“정말요?”“네. 누군가가 떠났다는 사실보다 그 사람이 더 이상 내게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더 괴로우니까요.”의뢰인은 잠시 멈췄다.“그 말… 선생님 이야기 같아요.”그녀는 미소 지었다.“그럴 수도 있죠.”상담이 끝나자, 하연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수경 선배… 오늘, 말투가 조금 다르셨어요.”“다르게 들렸어?”“네. 예전엔 ‘정리’하던 말투였는데, 오늘은… ‘기억’하는 말투였어요.”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박혔다.‘기억하는 말투… 그건 나리 선배가 늘 하던 방식이었는데.’저녁, 센터 불이 꺼지고, 수경은 나리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그녀의 손끝이 책상 표면을 천천히 더듬었다.서류의 각, 컵 자국의 흔적, 메모지 위의 희미한 글씨 자국.“이게 다 선배가 있었던 증거네요.”그녀는 낮게 말했다.책상 위에 놓인 작은 수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수첩 표지엔 볼펜으로 꾹 눌러 쓴 글자가 있었다.“이별은 늘 사람의 목소리로 남는다.”그 문장을 읽는 순간, 수경의 눈이 흔들렸다.‘이건… 나한테 남긴 말 같아요.’그녀는 천천히 책을 덮었다.그리고 손끝으로 그 문장을 쓰다듬듯 쥐었다.그 순간, 문이 열렸다. 제하였다.“아직 있었네.”“그
센터의 오후는 유난히 조용했다.비도, 바람도, 소음도 없었다.그런데 그 정적이 오히려 불안했다.나리는 창문 쪽 책상에 앉아 손에 든 펜을 돌리고 있었다.펜촉이 종이 위를 긁을 때마다 짧고 건조한 마찰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책상 위에는 그녀가 직접 쓴 서류 한 장이 놓여 있었다.[운영 위임서]서류 상단에는 수경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녀는 그 글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됐다.”그 목소리는 무언가를 끝내려는 사람의 어조였다.문이 열렸다. 수경이 들어왔다.손에는 의뢰인 리스트가 들려 있었다.“선배, 이번 주 일정 정리했어요.다음 주부터는 심리치료 협력팀도 같이 붙을 예정이에요.”“그래? 잘 됐다.”“네. 이제 시스템이 완전히 자리 잡은 것 같아요.”그녀는 종이를 내려놓고 미소 지었다.하지만 나리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수경아.”“네?”“잠깐 앉을래?”“왜요?”“할 얘기가 있어.”수경은 잠시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나리는 펜을 내려놓았다.“이건… 내가 써둔 서류야.”“무슨 서류요?”“센터 운영 위임서. 앞으로 네가 이 팀을 맡는 게 맞을 것 같아서.”순간, 공기가 멎었다.수경의 얼굴이 단단히 굳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난 잠시 내려놓으려 해.”“왜요?”“이젠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잖아.”“그게 이유예요?”“그래.”수경은 손으로 서류를 집어 들었다.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이걸로 끝이에요?”“끝이라기보단… 잠시 멈춤.”“선배는 늘 그 말을 하죠. 잠시 멈춘다, 쉬겠다 근데 선배한테 잠시는 결국 끝이잖아요.”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수경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선배, 이 팀… 선배가 만든 거잖아요. 근데 왜 아무 말도 없이 내려놔요?”“내려놓는 게 아니라, 넘기는 거야.”“같은 말이에요.”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왜 항상 혼자 결정해요? 우린 팀인데, 늘 마지막 순간엔 선배 혼자였어요.”“누군가는 책임져야 하잖아.
월요일 아침, 센터의 유리문이 열렸다.그 문을 밀고 들어온 나리는 잠시 멈춰 섰다.익숙한 공간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딘가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책상 배치가 바뀌었고, 하연의 자리 옆엔 새 화분이 있었다.벽에는 새 문구가 붙어 있었다.“이별은 관계의 끝이 아니라, 나의 회복의 시작이다.”그 문장은 나리의 말이었다.그녀가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그 말이 인용되어, 이제는 팀의 좌우명처럼 벽에 걸려 있었다.그녀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내 말인데, 이젠 내 말 같지가 않네.’“선배!”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수경이었다.활기찬 얼굴, 단정히 묶은 머리, 단정한 셔츠. 그녀의 손에는 스케줄표가 들려 있었다.“돌아왔어요?”“응.”“정말요?”“그렇게 놀랄 일이야?”“아니요. 그냥… 조금 더 쉬실 줄 알았어요.”“쉬는 게 체질에 안 맞더라.”둘은 짧게 웃었다.그 웃음은 따뜻했지만, 묘하게 낯설었다.오전 회의가 열렸다.회의 테이블엔 수경, 하연, 그리고 제하가 앉아 있었다.나리가 오랜만에 그 자리에 앉자, 공기 속에 살짝 긴장감이 감돌았다.“그동안 내가 없을 때 많이 바빴지?”나리가 조용히 물었다.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방송 나가고 나서 문의가 폭주했어요. 상담은 예약제로 돌렸고, 의뢰인 선정 기준도 새로 세웠어요.”“어떤 기준?”“긴급성, 지속 기간, 감정 회복 가능성 세 가지를요.”“그건 나한테도 말해줬어야지.”“보고는 드리려 했는데, 선배가 휴식 중이었으니까요.”나리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말보다 묘한 정적이 먼저 흘렀다.그 정적 속에서, 제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좋은 시스템이네. 효율도 생겼고, 팀의 밸런스도 맞아가고.”“고마워요.”수경이 미소 지었다.그 미소가 나리의 눈에 스쳤다.낯설 만큼 자신감이 있었다.나리는 자료를 넘기며 말했다.“효율이 나쁜 건 아니지만, 우린 효율을 위해 일하는 팀은 아니야.”“알아요. 그래서 상담 시간을 줄이지 않았어요. 대
하루 종일 흐린 날이었다.햇빛 대신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고, 잔잔한 먼지가 공기 중을 떠다녔다.나리는 카페 창가 자리에서 커피를 식혀가며 앉아 있었다.한 모금 마실 때마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며칠째 휴식 중이었다.일정표엔 아무 일정도 없었다.대신 마음속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이제는 정말…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은데.”그녀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익숙한 발소리, 하지만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혹시… 신나리 씨 맞으시죠?”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그녀는 고개를 들었다.마주 선 얼굴은 너무 익숙했다.“저… 기억하시겠어요?”“혹시…”“3년 전, 남편과의 이별을 의뢰했던… 정윤서예요.”시간이 멈춘 듯했다.그 이름은 오래된 상자 안에 묻어둔 기억 같았다.“윤서 씨…”“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그녀의 미소는 어딘가 밝고, 또 어딘가 슬퍼 보였다.둘은 카페 구석자리에 앉았다.창밖엔 흐린 빛이 퍼져 있었다.“그날 이후, 저 많이 달라졌어요.”“그래요?”“처음엔… 아무것도 못 했어요. 숨 쉬는 것도 버거웠고,당신이 해준 말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어요.”“제가 무슨 말을 했죠?”“사랑은 끝나도, 사람은 남아요. 그 말이요.”나리는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심장이 미세하게 움찔했다.그 말은, 그녀가 너무도 자주 꺼내던 문장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낯설었다.“그 말 덕분에… 제가 살아 있었던 것 같아요.”“그건 제 말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선택한 생이에요.”“아니에요. 그 말이 없었으면 저는… 그때 진짜로 끝났을지도 몰라요.”윤서의 목소리가 떨렸다.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그래서… 감사했어요. 근데 요즘엔 또 무서워요.”“무서워요?”“그 말이 저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어서요.이제는 그때의 이별조차 제 삶의 일부가 돼버린 것 같아요. 그래서 새로 시작이 안
“이별에도 이렇게 생활 매뉴얼이 있군요.”“안전이 연애보다 먼저라는 규칙이 있죠.”현관 앞에 다다랐을 때, 그녀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나리 씨.”“네.”“오늘 걷는 동안… 제 마음이 잠깐 멈춘 것 같았어요. 그 정지 버튼을 누른 사람이 저였으면 좋겠어요. 다른 누구도 아닌.”“지금 누르셨어요. 스스로.”그녀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고마워요.”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는 길가에 잠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은 희미했고, 구름은 얇았다. 히터도 켜지지 않은 바람이 목덜미를 비집었다. 그때 주머니
바람이 유리창 표면을 얇게 긁고 지나가던 오후, 카페 안쪽은 뜨거운 샷과 따뜻한 우유 냄새로 적셔져 있었다. 한쪽 벽면의 시계 초침이 분명한 소리로 나아갈 때마다, 내 머릿속 계획도 그와 같은 간격으로 정렬되었다. 오늘은 수경의 첫 관찰. 말끝이 매끄럽게 닫히는 사람일수록 행동의 기척이 더 느리게 드러난다. \그러니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길게 들어왔다. 갈색 코트의 여자가 스카프를 두 손으로 풀며 들어섰다. 수경은 어제와 같은 단정함이었지만, 눈동자의 결이 더 얇아져 있었다. 밤새 잠이
새벽 공기가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 방 안을 서늘하게 적셨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어젯밤 민하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였다. -부모님께 말씀드렸어요. 울지 않았어요.그 짧은 문장 안에 그녀의 결심과 눈물이 다 담겨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베개 옆에 내려놓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그녀가 스스로 마무리해야 하는 마지막 날. 내가 옆에서 할 수 있는 건 감시도, 조종도 아닌 단지 동행뿐이었다.아침 공기가 유난히 날카로웠다. 강변을 따라 걷는 사람들의 발자국은 얼어붙은 흙 위에 단단히 박혔다. 민하는
-왜 지금이냐?-다른 사람 생겼냐?-결혼식 취소에서 오는 비용은 어떻게 할 거냐?-그의 부모님께는 누가 연락하냐?“답은…”“지금이 아니면 더 늦어져요.” 민하가 스스로 정리해 나갔다. “다른 사람은 없고, 서로의 미래를 지키기 위한 결정이고, 비용은 제가 감당할 몫은 감당하고 최대한 정중히 협의할 거고, 그의 부모님께는 직접 연락드릴 거예요.”나는 마지막 줄을 굵게 밑줄 그었다. “좋아. 두 번째, 공통 지인. 단체 채팅방은 잠시 알림 꺼두고, 개인 연락만 정중히 응대. ‘우리 둘 다 괜찮다’는 메시지를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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