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사랑은 누구나 시작하지만, 끝내는 법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결혼 직전, 이유도 모른 채 사라진 연인. 뒤늦게 알게 된 병의 진실, 그리고 남겨진 상처. 그 상처를 직업으로 바꾼 여자가 있다. 신나리. 그녀는 타인의 굿바이를 대신 설계하며, 아름답고 단호한 이별을 만들어준다. 하지만 누군가의 안녕을 돕는 순간마다 끝내 놓지 못한 자신의 사랑과 다시 마주한다. 열 번의 의뢰, 열 가지의 굿바이. 그리고 마지막에 찾아올, 나리 자신의 가장 아픈 이별. 사랑의 끝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 〈이별전문가! 신나리〉
Ver más유리창을 타고 내려온 빗줄기가 막 그친 뒤라 거리는 씻긴 듯 말갛고,
카페 문을 여는 순간 퍼지는 따뜻한 우유 냄새가 목울대를 가볍게 적셨다.
종소리가 한 번 흔들리고 고요가 제자리로 돌아오자,
창가에 앉은 여자가 나를 향해 몸을 반쯤 일으켰다.
얇은 손가락이 머그컵을 꼭 쥔 채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우산을 접어 문 옆에 세우고, 앞치마를 매는 바리스타를 스치듯 지나
그녀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
“그냥… 나리라고 부르면 돼요.”
이름을 짧게 건네자 여자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앉았다.
민하. 스물아홉.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기 힘든 이야기를 하기 위해,
표정을 평소보다 한 겹 더 단단하게 닫아둔 얼굴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한 번 눌러 다잡더니 문장을 한 톨씩 꺼냈다.
아버지 회사가 지난주에 무너졌고, 집안의 통장들이 동시에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으며, 예비신랑은 그 사실을 아직 모른다고.
“알면 분명히 말릴 거예요. 같이 갚자고 하겠죠.
그 사람은 늘 그런 식이에요. 먼저 손 내밀어 주는 사람.”
말끝에 미안함이 묻어 있었지만,
그게 사랑인지 죄책감인지 본인도 분간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메모장을 펼쳤다가 곧 덮었다.
적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있다.
오래 묵으면 스스로 모양을 갖추는 것들.
“그래서, 그만두고 싶다… 그 얘기죠?”
민하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나쁜 사람으로 남고 싶진 않아요.
그렇다고 착한 척하다 같이 가라앉고 싶지도 않고요.
어떻게 해야 덜 망가질 수 있을까요? 저도, 그 사람도.”
“두 사람 모두 살아남는 길을 찾는 게 제 일이에요.”
나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가 먼저 손을 놓도록 유도하되, 당신 손에는 흠집이 나지 않게.
그리고 그 말은 진실을 모두 숨기자는 뜻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만 보이자는 뜻이기도 해요. 괜찮겠어요?”
민하는 과감하지 않은 고개짓으로 천천히 동의했다.
그녀의 동의는 누군가의 허락을 기다리던 아이가 아닌,
스스로를 설득한 어른의 움직임이었다.
그 순간, 문이 다시 열리며 빗물이 묻은 신발이
나무 마루에 작게 소리를 남겼다. 검은 비니를 눈썹 위까지 눌러쓴
남자가 익숙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정제하.
내가 믿는 일의 반을 책임지는 사람.
그는 장갑을 벗으며 민하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정제하입니다. 듣기로는 결혼식이 한 달 남짓이네요.”
민하는 짧게 허리를 숙였다.
“루틴이 단단한 사람이라면 일주일이면 충분합니다.”
제하는 시계를 한 번 스치듯 보고 덧붙였다.
“관찰, 사실 확인, 그리고 마지막 장면 설계.
세 단계로 가죠.”
민하는 커피잔을 한 번 돌렸다.
그 작은 원을 여러 번 그리다 말고, 내 쪽으로 시선을 가져왔다.
“이 과정에… 거짓말이 많이 필요할까요?”
“거짓은 상처를 늦게 곪게 만들 뿐이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만드는 건 장면이에요.
사람은 말보다 장면을 오래 기억하거든요.
그 오래가는 기억이 흉터가 아니라 표정이 되게 하는 것,
그게 목표죠.”
합의서에 사인을 하는 동안 카페의 종소리가 한 번,
바깥에서 쏟아지는 자동차 물보라 소리가 한 번,
시간을 단정히 구획 지어 주었다.
계약서를 접어 봉투에 넣으며 민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사람… 상처받지 않게 해달라는 말은 욕심일까요?”
“상처는 생겨요.”
나는 단정했다.
“다만 흉터로 남지 않게 하는 게
우리의 기술이고, 당신의 용기예요.”
민하가 떠난 뒤, 우리는 짧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제하는 내 양손을 힐끗 보더니 장난스럽지 않은 농담을 던졌다.
“손이 차네. 오늘도 뜨거운 거 하나 마셔.”
“바리스타한테 주문해보든가.”
“사장님이 오늘은 주방도 보시는데?”
시답잖은 대화로 숨을 고르며 우리는 바로 일정을 짰다.
아침엔 강변 러닝 코스, 점심은 회사 근처 카페 잠입,
저녁엔 의뢰인 집에서 ‘미래 설계’ 상담.
익숙한 패턴이면서도 매번 달라지는 사람 때문에 늘 낯선 일.
퇴근길 지하철 창에는 축축한 도시의 피부가 흐르고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어깨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손바닥이 작은 진동을 전해 왔다. 미확인 번호.
화면에는 단 네 글자. 나리야.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따라붙었다.
다음 줄에 짧은 문장이 덧붙었다.
잘 지내지? 미안해. 진짜 미안해. 거기서 끝.
발신자 정보는 곧장 사라졌다.
공중으로 내던져진 돌멩이처럼,
설명 없이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이름 석 자가 내 안에서 오래 울렸다. 온유.
결혼식 이주 전, 우리의 시간표를 한 번에 지워버리고 사라졌던 사람.
그가 놓고 간 말들은 칼이 아니었지만 칼보다 깊게 스며들어 오래 아팠다.
결혼은 버겁다. 설레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다.
나를 보호하려고 던진 거짓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짐작하게 했던, 좋은 사람의 잔인함.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도 화면이 내 눈꺼풀 안쪽에서 계속 반짝였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다시 내 일의 목록으로 돌아왔다.
누군가의 이별을 안전하게 데려다주기 위해 만든 삶.
아직 끝내지 못한 나의 이별은 그 안에서 조용히 식어가거나,
반대로 아주 천천히 식지 않는 중이었다.
다음 날 아침, 강변을 따라 바람이 길을 냈다.
러닝 코스 위에서 땀방울이 햇빛을 만나 반짝였다
사라지는 사이, 제하는 카메라 셔터를 거의 누르지 않았다.
보는 일이 기록보다 중요할 때가 있다.
멀리서 달려오는 남자 하나. 등선이 반듯하고 보폭이 일정했다.
민하의 예비신랑, 도윤.
첫 번째 랩, 물 한 모금, 두 번째 랩, 스트레칭.
시작과 끝이 딱 맞는 사람의 리듬.
“성실형.”
제하가 낮게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결심의 순간도 정직하겠지.”
나는 모자를 고쳐 쓰며 속으로 계획표를 덧칠했다.
첫째, 변화가 안전하다는 인상을 심는다.
둘째, 의뢰인의 선택이 희생이 아니라 결정임을 보여준다.
셋째, 마지막 문장은 그의 입에서 나오게 한다.
“나리야, 이거 진짜 올릴 거야?”제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카페 안은 조용했고, 커피머신 소리조차 멈춰 있었다.화면 위엔 정지된 영상, ‘온유의 마지막 메시지’라는 파일명이 깜빡이고 있었다.“응.”나리는 단호했다.“이건 숨기면 안 돼.”“세상은 이걸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그래도 보여줘야 해.”“그럼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야. 전쟁이야.”“알아.”그녀의 눈빛엔 두려움보다 확신이 있었다.제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그럼… 나도 같이 싸울게.”“아니.”“왜.”“이번엔 나 혼자 해야 해.”“또 그 말이야?”“응. 이번엔 진짜 혼자여야 해.”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단했다.“온유는 마지막에 나한테 살라고 했어. 근데 그 말은, 숨 쉬라는 뜻이 아니라,살아 있다는 걸 증명하라는 뜻이었어. 그 증명이 바로 이거야.”그녀는 마우스를 잡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업로드’ 버튼 위에서,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온유야, 이제 나도 너처럼 용기 내볼게.”그녀의 손이 클릭됐다.화면에 '업로드 중…'이라는 문구가 떴다.그리고, ‘공유 완료’.그 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커피향조차 멈춘 것 같았다.그녀는 마치 세상과 숨을 맞바꾼 사람처럼,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한 시간 뒤, 세상은 폭발했다.뉴스 속보. SNS 실시간 트렌드.‘#이별전문가_신나리’,‘#온유의_진심’.수백 개의 게시물이 동시에 올라왔다.“감정의 직업인, 진심을 내보이다.”“사랑을 남긴 이별전문가의 고백.”“감정 개입인가, 인간적 선택인가.”그녀의 이름이 다시 세상의 중심으로 돌아왔다.하지만 이번엔 '비난'보다 '침묵'이 많았다.사람들은 쉽게 판단하지 못했다.그 영상 속 온유의 눈빛이 너무나 평온했기 때문이다.협회 건물 6층. 수경은 회의실에 불려가 있었다.문이 닫히자마자 누군가가 소리쳤다.“오수경 씨, 이건 뭐죠?”책상 위에 프린트된 신문 기사.‘온유 영상 유출, 협회 내부인 개입 정황.’“저 아니에
늦은 밤이었다. 카페의 불은 꺼졌고,한쪽 코너에 작은 스탠드만이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제하는 책상 위에 놓인 USB를 손가락으로 굴렸다.조그만 금속 조각 하나가 이렇게 많은 비밀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다.“이걸 버리면, 모든 게 조용해질까.”그는 낮게 중얼거렸다.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아니. 조용해지는 건, 진실이 묻힐 때가 아니라, 진심이 사라질 때겠지.”그는 USB를 손에 쥐었다.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이 마치 온유의 마지막 숨결처럼 느껴졌다.‘이걸 나리한테 말해야 하나… 아니면 숨겨야 하나.’그 고민이 밤의 공기만큼이나 묵직했다.그때 문이 열렸다.“아직 있었네.”나리였다.그녀는 긴 코트를 걸친 채 들어왔다.“오늘은 좀 늦었네.”“생각 좀 하느라.”“무슨 생각.”“우리, 잘하고 있는 걸까.”그녀는 잠시 멈췄다.“또 그 말.”“왜, 이제는 그 말도 하면 안 돼?”“아니. 근데 그 말이 나올 때마다, 뭔가 달라지는 기분이 들어.”“어떻게.”“우리 둘 다 점점… 사람 같아진다는 거.”그녀의 말에 제하는 잠시 웃었다.“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나쁜 건 아닌데, 이 일은 사람 같으면 안 되는 일이잖아.”“그럼 넌 뭐야.”“글쎄.”“나리야.”“응.”“너는 언제부터 네 이름으로 일하는 게 아니라, 이별전문가로 살아온 거야.”그녀가 커피잔을 들었다.“그거, 아직 모르겠어. 근데 이제 조금씩… 나로 돌아오고 있는 것 같긴 해.”그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제하는 그 눈빛 속에 자신이 아닌 다른 그림자를 봤다.‘온유.’그 이름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사이에 있었다.같은 시각, 수경은 협회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밤 11시가 넘었지만, 컴퓨터 화면은 여전히 환했다.‘내부 기록 접근 금지.’화면에 빨간 글씨가 떴다.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손가락을 키보드에 올렸다.“죄송합니다, 선배…”그녀는 보안 코드를 입력했다.잠시 후, 폴더 하나가 열렸다.[CONFIDENTIAL]그 안
아침 공기가 차가웠다.비가 멈춘 지 하루가 지났는데도 공기 속에는 여전히 습기가 남아 있었다.창문을 여는 순간, 나리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움찔했다.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고, 그 냄새가 마치 오래된 기억의 먼지처럼 느껴졌다.테이블 위엔 수많은 의뢰 파일이 쌓여 있었다.그녀는 손가락으로 하나씩 넘겼다.‘이별의 이유’, ‘대상’, ‘기대 효과’ 그 단어들이 이제는 너무 익숙해, 오히려 낯설었다.“선배.”수경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오늘따라 표정이 단단했다.손에는 USB 하나가 들려 있었다.“이거 협회 보고용이에요.”“보고?”“지난 의뢰 기록이요. 그날 병원에서 있었던 일.”“벌써 제출했어?”“아직요. 검토받기 전에 선배가 먼저 봐야 할 것 같아서요.”그녀가 USB를 건넸다.나리는 조용히 노트북에 꽂았다.화면에 익숙한 글씨체가 떴다.‘신나리 팀 – 감정 개입 정도 중간 보고서.’파일 안엔 수경의 기록이 정리되어 있었다.‘의뢰인은 감정 조정 중 예상치 못한 후유증을 겪음.이는 이별 과정에서의 감정 해소 부족이 원인으로 추정됨.신나리의 개입은 단기적 효과를 보였으나, 장기적 관점에서 심리적 흔적을 남김.’나리는 아무 말 없이 화면을 내려봤다.“이거… 네가 쓴 거야?”“네.”“그럼 협회가 원하는 건 뭐야?”“선배의 책임을 명확히 하는 거요.”“그럼 이건…”“네. 사실상 선배를 희생양으로 만들겠다는 거예요.”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나리는 천천히 말했다.“그럼 너는 왜 나한테 보여준 거야.”“이건 제가 고쳐야 할 보고서니까요.”“고쳐?”“네. 제가 본 건 그 환자의 병이 아니라, 선배의 진심이었어요. 그걸 적지 않으면 제가 선배를 배신하는 거잖아요.”그녀의 눈이 떨렸다.나리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조용히 수경의 손을 잡았다.“고맙다.”“저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그게 고마워.”“선배…”“수경아, 이 일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거잖아. 그럼 우리도 마음으로 책임져야지.”“근데
창문을 두드리는 비소리가 단조롭게 이어졌다.하루 종일 흐렸던 하늘은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한 듯했다.그 비 속에서, 나리는 조용히 병원 복도를 걸었다.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그 소리가 마치 마음속의 공명을 깨뜨리는 듯했다.“선배, 긴장돼요?”뒤따라오던 수경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아니. 근데 이상하지?”“뭐가요?”“이 일을 하면서, 이렇게 다시 찾아오는 건 처음이라서.”“선배는 항상 마무리를 잘했잖아요.”“그래서 더 무서워.”그녀는 잠시 멈췄다.복도 끝 창문 너머로, 환자들이 앉아 있는 휴게실이 보였다. 거기 그녀가 있었다.흰 원피스에 가느다란 팔.예전 의뢰인 윤다연.그녀는 나리를 보자마자 미묘하게 웃었다.그 웃음이 이상하게도 따뜻했다.“신나리 씨죠?”그녀의 목소리는 마른 종이처럼 가벼웠다.“기억해요.”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이후, 처음 뵙네요.”“그때 이후라…”다연은 허공을 바라봤다.“저한텐 그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어요.”그녀의 말에 수경이 고개를 들었다.“혹시, 그게 무슨 뜻이에요?”“그날 제가 이별하던 그 카페요. 그 장면이 계속 꿈에 나왔어요.그녀가 제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품위 있게 떠나라였거든요.”“그건…”나리가 말을 멈췄다.다연이 천천히 웃었다.“품위 있는 이별이라니… 그게 사람을 얼마나 부서지게 하는 말인지, 그땐 몰랐죠.”공기가 잠시 멎었다. 다연은 계속 말했다.“그날 집에 가는 길에 생각했어요. 이건 나를 위한 이별이 아니라,그를 위한 구원이구나.그날 이후로 전, 제 감정을 믿을 수 없게 됐어요. 사랑도, 미움도, 다 똑같이 공허해졌어요.”그녀의 눈이 나리를 바라봤다.“이런 말 하면 실례일지 모르지만, 신나리 씨, 당신은 사람을 치유하는 게 아니라, 조용히 망가뜨리더군요.”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나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가슴 한쪽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다연 씨.”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때… 당신이 웃었어요. 그래서 괜찮다고
밤새도록 눈꺼풀을 억지로 눌러보았지만, 잠은 단 한순간도 찾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떨구면 복도가 보였고, 고개를 들면 여전히 그 문이 떠올랐다. 낡고 무겁게 닫혀 있는 문, 그리고 내 손에 쥐어져 있던 열쇠의 차가운 감각. 마치 현실보다도 더 선명하게, 꿈속 풍경이 내 곁에 붙어 있었다.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지만, 그 빛은 따뜻하지 않았다. 피부 위로 내려앉는 순간,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불안에 떨며 거실로 나왔다. 제하는 소파 끝에 앉아 눈을 감은 채 깊게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고, 수경은 아직
아침 공기는 맑고 차가웠다. 유리창 너머로 햇살이 부서지며 방안을 환하게 밝혔지만, 내 마음은 오히려 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창가에 앉아 손에 쥔 머그컵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젯밤의 소리를 떠올렸다. 벽을 긁던 그 마찰음, 그리고 내 심장을 파고들던 속삭임. 아무리 고개를 흔들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피부 속에 새겨진 문신처럼, 지워낼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부엌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하가 커피를 내리고 있었고, 수경은 졸린 눈을 비비며 나와 마주쳤다. 그녀는 내 표정을 보자마자
아침이 오자 창밖은 분명히 환했지만, 내 눈에는 세상이 여전히 흐릿하고 무거워 보였다. 멀리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출근길의 발걸음이 분주히 이어졌지만, 그 모든 것이 유리 너머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나는 주방 의자에 앉아 멍하니 커피를 마셨다. 잔을 손에 쥐고 있어도 따뜻함이 손끝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새벽에 들었던 그 꿈의 한마디가 자꾸만 반복되었다. “곧, 문을 열어야 해. 그때 알게 될 거야.”그 말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다. 너무도 구체적이었고, 내 마음 깊은 곳을 겨냥하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지만, 그 빛조차 차갑게만 느껴졌다. 눈을 뜨자마자 밤새 귓가를 맴돌던 속삭임이 되살아났다. “아직도 날 기다리고 있잖아.” 그 말은 단순한 목소리가 아니라,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오래 묻어 있던 감정을 꺼내는 열쇠 같았다.나는 이불을 걷어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는 무겁고, 다리는 허공을 걷는 듯 흔들렸다.거실에는 제하와 수경이 여전히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잠을 이루지 못한 얼굴이었다. 제하는 창가에 기대 앉아 있었고, 수경은 소파에 웅크린 채 눈을 비비며 날 바라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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