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어요.”변여름의 단호한 거절이 들려오자 양혁수는 문을 열려던 손을 멈췄다.“왜?”“저를 데려다줄 친구가 있어요.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낸 진짜 친구예요.”그녀는 힘주어 말했지만 이내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아까 한 말 거짓이었어요...”그녀는 먼저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양혁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고 화가 난 기색도 없었다.어차피 그녀를 마중 나온 것이 아니라 변여름을 데리러 가야 했으니까.“알았어.”그가 짧게 대답했다.변여름은 그가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었다. 벽에 기대어 한 손을 뒤로 하고 조용히 다시 한번 말했다.“죄송해요.”양혁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무심한 듯 말했다.“앞으로 그런 장난은 치지 마. 재미없어.”“네.”그녀는 순순히 대답했다.잠시 뜸을 들인 후 변여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아까는 오빠가... 화낼지 궁금했어요.”“내가 화내길 바랐어?”“아니요. 오빠가 질투할까 봐 그랬어요.”양혁수는 아래층에서 걸음을 멈췄고반대편에서 변여름은 눈을 감고 조용히 말했다.“오빠는 질투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렇죠? 누가 저한테 고백했는데 왜 질투하지 않는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양혁수는 목이 약간 메마른 것을 느꼈다.휴대폰 너머로 그녀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없었고 머릿속에서도 완벽하게 그려지진 않았지만 마치 작은 깃털이 마음을 간질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는 목을 가다듬으며 밖으로 걸어 나가며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괜찮으면 빨리 집에 가.”“아직 대답 안 해줬잖아요.”변여름은 끈질기게 매달리며 중얼거렸다.“질투하지 않는 건 내가 싫어서 그런 거예요? 왜 저를 싫어하는 거예요? 제가 오빠를 위해 요리했는데 정말 맛있었잖아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마침내 그녀에게 대답할 말을 찾았다.“우리 집 아주머니가 해준 음식도 맛있는데 나도 아주머니를 좋아해야 해?”“그건 달라요.”마침내 변여름은 그가 처음 상상했던 것처럼 말끝을 늘이며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변여름은 복도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고백했던 선배가 여러 번 다가와 사과할 기회를 얻었지만 변여름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머릿속은 오로지 양혁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원래는 양혁수가 요양센터에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에게서 전화가 왔다.허예나에게 걸려 온 전화가 아니라 그녀에게 직접 온 전화였다.변여름은 물을 마시며 복도를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컨디션을 조절했다. 멀리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선배는 의아해했다.‘???’마침내 변여름은 컨디션이 회복되었음을 느끼고 미소를 지으며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다.“혁수 오빠.”양혁수는 물었다.“아직 연구실에 있어?”변여름은 잠시 생각했다.양혁수는 이어서 말했다.“내가 데리러 갈게. 일 끝났으면 문 앞으로 나와.”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변여름은 기뻤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그녀는 주변을 살피며 양혁수가 자신과 허예나를 연상할 가능성은 적지만 그래도 약간의 위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오빠, 저 일 끝났어요. 바로 갈게요.”“응.”양혁수가 대답했다.“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나와.”“네.”변여름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곧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재빨리 방으로 돌아가 모두의 놀란 시선 속에서 가방을 챙겼다.지도교수가 그녀를 불렀다.“여름아...”“선생님, 오빠가 데리러 와서 먼저 가볼게요.”지도교수는 당황스러웠다.‘?’“그럼...”“교수님, 선배님, 안녕히 계세요. 내일 뵙겠습니다.”그녀는 말을 마친 후 번개처럼 사라졌다. 모두 어리둥절했다.변여름은 연구실에 온 지 오래되었고 항상 말이 적었으며 마치 로봇처럼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기에 그들은 그녀의 얼굴에 이렇게 생생한 표정이 드러난 것을 본 적이 없었다.사람들은 그녀가 오빠가 데리러 왔다고 말하며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에 놀랐다.‘기뻐? 당연히 기쁘지.’변여름은 연구실
“여름아.”“네.”‘쯧.’“어지러우면 그렇게 크게 고개를 흔들지 마.”“네.”‘젠장, 다 소용없었군.’그는 속도를 조금 줄이며 변여름에게 의자를 더 낮추라고 말했다.변여름은 머리를 굴렸다. 버튼을 못 찾았다고 하면 차를 세워줄 테고 직접 조절해 달라고 부탁하면 그와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하지만 버튼이 너무 눈에 띄어 모른 척할 수 없었다.‘에휴. 디자이너가 너무 성실했네.’결국 그녀는 스스로 의자를 조절하고 얌전히 몸을 기댔다. 어차피 그가 잔소리할 거란 걸 알았고 아직 한 번도 혼난 적이 없어서 은근히 기대되기도 했다.“오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양혁수는 어이없다는 듯 숨을 들이마셨다.“...”왠지 변여름은 혼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그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네가 혼자 한강시에 왔으니 네 오빠가 널 내게 맡긴 이상 내가 책임져야 해.”변여름은 눈을 깜빡이며 듣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양혁수는 이어서 말했다.“교수님과 저녁을 먹는 건 괜찮지만 술을 마실 거라면 미리 연락해서 데리러 오라고 하거나 어디로 와야 할지 알려줘야 해.”그는 운전대 위로 시선을 두며 덧붙였다.“네가 천재라는 건 알지만 머리가 좋다고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야.”변여름은 정신을 가다듬고 상체를 일으켜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는 그녀가 집중해서 듣는 듯한 모습에 피식 웃었다.“됐어. 그냥 누워 있어. 곧 도착할 거야.”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대답했다.최근 일이 많아 활력이 넘쳤지만 버거운 나날이 이어져 그녀는 피곤했다. 거기에 술까지 더해지니 몸이 더 무거워졌고, 깊은 피로가 스며들었다.그런데도 머리는 여전히 깨어 있었고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고 싶었다.양혁수는 동생을 타이르는 일에는 서툴렀고 할 말을 마친 뒤엔 조용히 운전에 집중했다.그러다 몇 번 시간을 확인했다. 허예나가 요양센터에 도착했을 것 같았지만 그녀에게선 아무런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겉으로는 아무렇지
변여름은 정답을 맞힌 것처럼 자신감 있게 문제를 풀었다.양혁수는 속으로 의아해하며 변여름이 너무 영리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다.대화가 끝난 후 변여름은 모든 것을 간파한 듯 코웃음을 치며 말을 마무리했다.양혁수는 웃으며 변여름을 쳐다보았다.“나이도 어린데 생각이 참 많네.”변여름이 말했다.“제가 생각하는 건 거의 다 맞아요.”“됐어. 자. 더 이상 말하지 마. 너랑 얘기하면 머리 아파.”변여름은 침묵했다.‘...’‘흥. 얼굴도 못 본 사람이랑 얘기할 때는 머리 안 아픈가?’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심한 질투를 느꼈다. 전에는 스스로 위로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수 없었다. 양혁수가 너무 차별적으로 대하는 것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다.그 생각에 그녀는 가방을 꽉 끌어안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양혁수는 그녀를 쳐다보았고 그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이상하네. 참 드문 일이야. 이 꼬맹이도 짜증을 낼 때가 있네.’“집에 가면 아주머니께 부탁해서 수정과를 끓여 달라고 할게.”그가 말했다.“유 아주머니가 수정과를 정말 맛있게 만들어.”변여름은 고양이가 아니었고 만약 고양이라면 지금쯤 귀가 쫑긋 섰을 것이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마침내 대답했다.“네.”양혁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달래기 쉽네.’그는 에어컨 온도를 조절한 후 아무 말 없이 집까지 운전했다.차에서 내리려던 변여름은 원래 혼자 내리려고 했으나 고개를 돌려 보니 그가 휴대폰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그 자리에 그대로 다시 누웠다.양혁수는 역시나 그녀가 차에서 내리지 않자 다가가 문을 열어주고 몸을 숙여 차 안을 들여다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여름아, 몸이 안 좋아?”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좀 힘이 없어요.”속으로는 양혁수가 자신을 안아줄 거로 생각했지만 그는 몸을 돌려 허리를 굽혔다.“자, 내가 업어줄게.”변여름은 어이없었다.“...
양혁수는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변여름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멍하니 있었고 그는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의사를 불러줄까?”“아니요.”변여름은 눈을 떴다.“숙취 해소제 한 잔만 마시면 돼요.”양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매우 불편해 보이자 그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옆 소파에 앉으려 했다. 그러나 변여름은 가방을 뒤지더니 무언가를 찾아 그에게 건넸다.“뭐야?”“먹는 거예요.”양혁수는 그녀의 침대 옆으로 다가가 앉았고 상자 안에 꽃 모양의 송편 네 개가 들어있는 것을 확인했다.변여름이 말했다.“녹두 송편이에요.”“그런데 왜 빨간색이야?”“색소를 넣었어요.”양혁수는 웃으며 송편을 받아 들었다.“어디서 난 거야?”변여름은 가방을 내려놓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연구실에 있는 언니 고향 특산품인데 두 상자나 받았어요.”“하나는 나 주려고 남겨둔 거야?”“아니요. 두 상자 다 제가 먹었고 이건 염치 불고하고 따로 얻어낸 거예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상자를 열고 웃으며 말했다.“어떤 녹두 송편이길래 그렇게 맛있어?”“자스민 향이 나고 속도 꽉 차 있어요.”양혁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를 입에 넣었다.달콤한 작은 송편 안에는 부드러운 크림이 가득 차 있었다.“정말 맛있네.”그는 감탄하며 고개를 들었다.“차 안에서 했던 말 취소할게. 네가 네 형보다 훨씬 낫네.”변여름은 그가 먹지 않은 송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행히 그와 대화했던 허예나는 가상의 인물이라 얼굴도 없지.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에게 준 것을 허예나에게 넘겼을지도 몰랐다.그녀는 조용히 안도하며 눈을 들었다.“오빠, 괜히 우리 오빠 얘기 꺼내지 말고 그냥 칭찬만 해주세요. 우리 오빠, 혁수 오빠한테 연락한 지 오래됐잖아요. 우애도 없는데 우리 오빠는 신경 쓰지 마세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집에서 너희 오빠한테 학대라도 받았어? 너 이간질하는 거 이번이 처음이 아니잖아.”변여름
변여름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홱 들었다.“오빠, 저는 괜찮아요. 오빠도 일찍 쉬세요.”“갑자기 로봇처럼 변했네?”변여름이 말했다.“네. 충전 완료됐어요.”양혁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가자. 일찍 자. 잘 자.”“잘 자요.”변여름은 그가 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천천히 베개에 기대앉았다.불편한 마음을 달래려 했지만 자고 싶지 않아서 참을 수 없었다. 결국 휴대폰을 꺼내 허예나와 양혁수의 통화 내용을 다시 확인하며 그들의 대화 하나하나를 떠올렸다.그녀는 생각에 잠기면서 한때는 기쁨을 느꼈고 그에게 더 가까워진 것 같았지만 곧 질투심에 휩싸였다. 만약 진실이 밝혀지면 그가 너무 화를 내서 영원히 자신을 무시할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그녀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가장 안전한 방법은 다른 모습을 보이며 그에게 계속 다가가는 것이라고 결심했다.진실이 밝혀지더라도 그가 아무리 화를 내더라도 그가 만난 적 없는 그 사람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을 것이며 그녀를 더 이상 여동생처럼 대할 수 없을 것이다.결심을 굳힌 변여름은 컴퓨터를 켜고 다시 불안한 생각에 잠겼다.계획표를 열고 양시연과 닮은 사진을 보자 잠시 멈칫하며 생각에 잠겼다.‘맞아. 방금 느꼈던 질투는 헛된 감정이었어. 허예나는 혁수 오빠와 아직 아무런 관계도 아니잖아. 시연 언니야말로 오빠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사람이야.’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몸을 곧게 펴고 머릿속으로 논리적인 해석을 하며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다음 날 아침 양혁수는 출장을 떠났고 변여름은 허현무의 생일 잔치에 차질이 없도록 특별히 휴가를 내어 그날 하루를 바짝 신경 써 보냈다.그녀는 길가의 카페에 앉아 심심풀이로 유치한 게임을 하고 있었다.노지혜가 추천한 게임이었고 변태가 정상인이 되려면 정상인의 게임에 참여해야 한다며 요즘 연구실 사람 중 절반이 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그 생각을 하며 변여름은 노지혜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변백호 씨가 어젯밤에 나한테 너에 대해 물
양혁수는 오후에 세운에 도착했다. 거래처 대표와 함께 점심을 나눈 뒤 저녁에는 테니스 약속이 있었다.아직 시간이 남아 그는 양지원에게 전화를 걸어 만남을 청했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자주 통화했지만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반년 전이었다. 두 사람 모두 바빴고 최근 두 달간 양석진이 중요한 업무를 맡으면서 양지원 역시 여러 차례 귀빈을 접대하느라 자식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네가 올 수는 없어? 꼭 내가 네 사무실까지 가야 해?”“양지원이 전화 너머로 투덜거리자 양혁수는 의자에 기대어 느긋하게 말했다.”“내가 거기로 가서 양석진 씨를 만나면 어떻게 해요?”“뭐가?”“양석진 씨를 삼촌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니면 아빠라고 해야 하나요?”양지원이 말했다.“...아빠라고 부르면 뭐 어때?”“내가 낯가려서 못 부르겠어요.”“그냥 핑계 대는 거잖아.”양지원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그만 해요. 할머니도 됐고 엄마도 이제 성격을 좀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변해야죠. 좀 더 성숙해지고 혼자 운전해서 나를 만나러 와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내가 신선한 코코넛 두 개도 가져왔어요.”양지원은 다시 한번 황당하다는 듯 침묵했다.“...정말 효자네.”‘그 먼 곳에서 코코넛을 가져오다니.’양혁수가 웃으며 덧붙였다.“감동이죠? 감동했으면 빨리 와요. 늦으면 난 집에 갈 거예요.”“집에 가. 몇 달만 더 안 보면 넌 다른 사람 아들 될 거야. 어차피 내게는 아들이 있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양혁수는 피식 웃었다.결혼 후 오히려 더 어려지고 젊어진 듯한 양지원을 보며 그는 새삼 그녀가 마음 편히 잘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예전보다 말투는 부드러워졌고 차가운 기운 대신 애교스러움이 묻어났다.‘참 좋네.’가벼운 대화가 이어졌고 자연스럽게 양시연이 둘째를 임신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다 문득 양혁수는 양시연과 닮은 그 얼굴을 떠올렸다. 순간적으로 입을 열었지만 허예나에 대한 질문이 튀어나올 뻔한 걸 깨닫고 곧바로
변여름은 병원에서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변백호와 먼저 한바탕 말싸움을 벌여야 했다. 이전까지는 변백호가 설령 자신이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알더라도 양혁수에게 알리지는 않을 거라 확신했지만, 지금 보니 변백호는 확실히 양혁수를 남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번엔 정말로 변여름의 만행을 폭로할 태세였다.일이 틀어지려는 순간, 허예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여름 씨,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변여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허현무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러워 변여름의 계획에 변수가 생겼다.양혁수가 ‘허예나’에게 얼마나 빠져든 건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장례식에 직접 조문을 가지 않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허예나와 마주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게다가 이 시점에서 허현무의 아내는 아마 유산을 독차지하는 데만 신경을 쏟고 있을 것이며 허예나 모녀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게 뻔했다.그러니 양혁수가 허예나를 위해 나선다면, 두 사람이 만나는 건 필연적이었다.변여름은 여러 상황을 저울질하며 물었다.[집에서 장례는 어떻게 치른대요?][큰어머니가 한강시에서 장례식하고, 유골은 화서시에 있는 선산에 묻겠다고 하세요.][그럼 큰어머니는 예나 씨와 어머님께 어떤 태도인가요? 허씨 가문에 와도 좋다고 하셨나요?]이 질문이야말로 허예나가 가장 많이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었다. 양혁수와의 만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고 오직 변여름의 계획이 중요했다.[병원에 있을 때부터 큰어머니가 우릴 대하는 태도는 별로 좋지 않았어요. 원래부터 우리 모녀를 경계했으니 이번엔 재산 문제로 저를 집에 못 들어오게 막을 겁니다.]변여름은 단번에 결정을 내렸다.[짐 챙기세요. 어머니 짐도 챙기시고 두 시간 후에 데리러 갈 테니까 직접 가서 조문하세요.][그래도...][예나 씨 몫의 재산은 제가 챙겨줄게요. 그리고 따로 100억 더 챙겨줄 테니까 수고비라고 생각하세요.]허예나는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어 바로 승낙했다.다시 핸드폰을 확인하니 변백호가 계속 메시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