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욕을 너무 많이 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낮은 목소리로 거짓말했다.“욕한 적 없어요.”“욕을 안 했다고? 그래...?”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농담 섞인 말투로 한마디 덧붙였다.“너 되게 쉬운 여자네.”사실 첫 번째의 황당한 만남에서 안시연은 이미 연정훈의 진짜 모습이 그리 점잖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오늘 두 번째로 만나 보니 안시연의 이런 생각은 더욱 확실해졌다. 연정훈은 사람을 희롱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것 같다.안시연의 빨개진 얼굴을 본 연정훈은 그제야 조금 진지해지는 듯했다. “8천만 원, 빌려주면 어떻게 갚을 건데?”순간 희망이 보인다고 생각한 안시연은 바로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제가 차용증을 써드릴게요.”정말 순진하고 유치한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그녀가 갚지 않는다고 연정훈이 두려워하기는 할까?연정훈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도 이자가 붙어.”안시연은 연정훈의 말뜻을 단번에 깨닫고 그를 빤히 쳐다봤다.그에게 이자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을 안시연도 잘 알고 있었다.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연정훈의 표정은 그 어떤 것도 암시하는 기색이 없이 무덤덤하기만 했다.안시연의 머릿속에는 또다시 그날의 장면들이 떠올랐다.‘설마 그날 호텔처럼 갚으라는 건가?'여기까지 생각한 안시연의 얼굴은 저도 모르게 화끈 달아올랐다.설령 지난번에는 연정훈을 유혹할 용기가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럴 체면이 없다.그녀는 지금 오직 할머니의 근심걱정뿐이었다. 게다가 방금 링거까지 맞아 머리가 어지러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와 거리를 두려고 무의식적으로 반걸음 뒤로 물러난 안시연은 발뒤꿈치 뒤에 무언가 있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고개를 뒤로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앞에서 그녀를 잡아당겼다.안시연은 가까스로 몸을 지탱해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몸 절반은 이미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귀에서 울리던 이명
마치 순풍에 돛단 듯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연정훈은 안시연을 병상에 눕히더니 그녀의 허리를 잡고 키스하기 시작했다.잔잔한 키스 소리가 고즈넉한 공간 속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온 몸의 온도는 한껏 올라갔고 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연정훈의 목을 팔로 감쌌다.목을 위로 젖히고 하얀 천장을 바라본 안시연은 이 순간 수치심이 극에 달했다.환자복의 옷자락이 살짝 밀려 올라가자 안시연은 천천히 시선을 옮겨 연정훈의 까맣고 깊은 눈동자를 바라봤다.그녀와 눈이 마주친 연정훈은 다시 그녀와 입술을 맞춘 후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는 늘 그렇듯 진중하고 자제하는 모습이었다.“힘 빼...”“네...”남자의 훤칠하고 잘생긴 얼굴을 본 안시연은 온몸이 점점 나른해지고 두피가 저려났다.연정훈과 같은 피지컬을 가진 사람과는 굳이 돈 때문이 아니더라도 좋은 잠자리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그래서 연정훈과 관계를 맺어도 자기는 손해 볼 게 없다고 그녀는 스스로 위로했다.안시연은 자기최면에 성공한 듯 욕망이 불타올랐고 오감도 점점 마비되는 것 같았다.그때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더니 시선이 점점 또렷해졌다. 미세하게 숨을 몰아쉬던 안시연이 고개를 돌리자 연정훈의 맑은 눈동자와 마주쳤다.“교수님...”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본 연정훈은 흥분하던 감정이 조금 가라앉은 듯 몸을 약간 위로 올렸다.“힘들어?”안시연은 말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제야 그녀는 온몸에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조금...”“그럼 진작 말했어야지.”연정훈이 짐승도 아니고 어떻게 아픈 그녀의 몸을 탐할 수 있겠는가? 안시연은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 연정훈은 마치 그녀가 졸라서 이 관계를 하고 있는 듯 말했다.안시연은 입술을 꼭 깨물고 그의 움직임에 따라 몸을 위로 옮겼다.몸을 일으켜 그녀의 옆에 앉은 연정훈은 달팽이처럼 이불 속에 움츠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흥은 깨졌지만 기분이 그리 언짢은 것 같지 않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품에
안시연은 병원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아침 일찍 퇴원했다.퇴원한 후, 그녀는 연정훈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저 퇴원했어요. 고맙습니다, 교수님.”연정훈은 역시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외할머니가 있는 제일 병원으로 급히 돌아왔을 때는 이미 열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안시연은 병실 앞에서 눈시울이 시뻘게진 채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는 주지혁을 만났다.주지혁은 안시연을 보고 자리에 그대로 멈춰서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괜찮아요?”하...그녀가 불구덩이에 빠지는 것도 옆에 서서 구경하던 인간이 인제 와서 또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안시연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주 대표님의 생각에는요?”더운 날씨에도 긴 팔과 바지를 입은 안시연을 본 주지혁은 분명 그녀가 어제저녁 관계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주지혁은 유태호가 안시연의 위에 올라탄 장면만 떠올리면 온몸이 부르르 떨려 당장이라도 유태호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안시연의 이런 차가운 반응 또한 그녀가 유태호와 하룻밤을 보냈을 거라는 주지혁의 추측을 뒷받침했다.주지혁은 자책하면서도 안시연이 필사적으로 저항하지 않은 것을 원망했다. 이렇게 갈팡질팡했던 그의 마음은 안시연의 허약한 안색을 본 순간, 미안함이 먼저 앞섰다.“시연 씨, 죄송해요.”안시연은 그런 주지혁을 무시하고 바로 뒤돌아서 주치의 사무실로 향했다.“병원비는 내가 냈어요.”주지혁의 말에 안시연은 걸음을 멈췄다.물론 안시연의 가방 안에는 연정훈의 카드가 들어있었지만 사실 그녀도 병원비는 주지혁이 내길 바랐다. 어차피 그것은 안시연의 돈이니까!그녀 또한 자기 돈으로 외할머니의 병을 치료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었다.주지혁은 그녀가 멈춰 선 것을 보고 기분이 풀린 줄 알고 그녀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외할머니부터 먼저 가봐요. 다른 건 나중에 얘기하죠.”모르는 사람은 주지혁이 외할머니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줄 알 것이다.안시연은 이런 주지혁이 정말 징그럽다고 생각했다.할머니 수술을 앞둔 지금
“당분간 환자를 자극해서는 안 됩니다. 꼭 명심하세요!”주임 사무실에서 나온 안시연은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외할머니의 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휴식만 잘하면 큰 문제가 없다고 한다.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외할머니가 쉬고 있는 동안, 그녀는 새 옷을 사러 상가에 갔다. 조금 더 정갈한 모습으로 할머니가 눈치채지 못하게 말이다.그렇게 한참을 옷을 고르고 있는데 VIP 구역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그중 하는 다름 아닌... 조이현이었다!자세히 생각해보니 그날의 일은 그녀의 필력이 빠질 수 없다.VIP 구역.임유정은 조이현을 보고 말했다.“너희 지혁 씨 아직도 좀 그래?”“아니, 괜찮아. 그냥 나한테 집중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야. 그거 알아? 지혁 씨 사무실에 아주 예쁘게 생긴 여자가 있는데...”조이현은 낮은 목소리로 피식 웃더니 임유정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그 말을 들은 임유정은 일부러 충격을 받은 듯하며 말했다.“지혁 씨가 화낼까 봐 두렵지 않아?”“지혁 씨는 몰라. 회사 사람들 말하는 거 들어보니 그 여자 이틀 동안 출근도 안 했다 하더라고. 나중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보다는 낫지, 뭐.”안시연은 화가 나서 온몸을 떨었다.‘그깟 위기감 하나 때문에 남의 인생을 망친 거였어?!’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때, 또 조인현이 입을 열었다.“언니, 언니도 정훈 오빠하고 어떻게 할지 빨리 결정해. 나중에 안 좋은 일 생기게 하지 말고.”“내가 뭐가 무서워서?”임유정이 웃으며 말했다.“이 경인 시에서 누가 나랑 다툴 수 있겠어? 체면 같은 거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빼고는 말이야. 전에도 몇몇 있긴 했지만 결국 연씨 가문에 들어간 사람은 한 명도 없잖아?”임유정은 경멸에 찬 눈빛으로 말했고 안시연은 목제 선반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이 모든 것을 들었다.그때 고개를 돌리자 직원이 안시연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그녀는 서둘러 시선을 거두고는 옷도
안시연은 황급히 카드를 받고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부승원은 원래부터 냉담한 성격인 데다 그날 테니스 코트에서도 그녀와 별 얘기를 나누지 않았었다. 안시연은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계속 수속을 밟으러 갔다.얼마 안 지나,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부승원은 프런트 직원에게 물었다.“조금 전에 가신 분, 무슨 수속 하신 거예요?”그러자 프런트 직원은 상황을 한번 쭉 설명해주었다.말을 전해 들은 뒤, 부승원은 애매한 눈빛으로 안시연이 떠난 방향 쪽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안시연은 법률 사무소에서 나와 외할머니를 뵈러 병원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그곳에 주지혁이 또 있을 줄.외할머니가 깨어나자 그는 이전보다 더욱 정성스럽게 보살피는 척했다.외할머니는 주지혁이 가자마자 안시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지혁이 사람 정말 괜찮네. 지혁이가 있으니, 앞으로 이 할머니가 걱정하지 않아도되겠어.”안시연은 멋쩍은 미소만 지었다. 그러다 문득 침대맡에 있는 과일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엄마 아직도 전화 한 통 안 왔어요?”그 말을 듣자 외할머니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안시연은 이 느낌을 어떻게 말로 형용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자신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빛에 연민과 미안함이 가득할 뿐이라고 생각될 뿐이었다.그녀의 기억에 의하면, 부모님은 단지 하나의 개념이었고 항상 외할머니가 그녀를 데리고 다녔다.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단 한 번 얼굴을 내비친 적이 있다. 때문에 안시연의 기억 속에 그녀의 얼굴은 이미 희미해졌다.안시연은 친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별로 없었으나 연세 많은 외할머니가 이렇게 큰 수술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전화 한 통 없으니 할머니가 섭섭해하실까 걱정이었다.“걔한테 알릴 필요 없어.”여기까지 말한 할머니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깊어졌다.안시연은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오늘은 할머니와 함께 자기로 했다. 잠들기 전, 할머니가 한마디 물었다.“지혁이랑은 언제 결혼할 생각이
부엌의 냄비에서 보글보글 거품이 피어올랐다.안시연은 마음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잠시도 편히 있을 수 없었다.그때,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안시연이 고개를 돌려 보니 연정훈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단추가 잠기지 않은 셔츠 깃 사이로 목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안시연을 조용하게 바라보았다.그 눈빛에 안시연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알코올 알레르기 있으세요?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해산물 알레르기가 있어.”“실수로 먹은 거에요?”“오랫동안 먹지 않아서, 두 입만 먹어봤어.”“아...”냄비에서는 계속 거품이 올라왔다.‘아 참, 아까 올라올 때 운전 기사님이 바로 차를 몰고 가셨지? 설마... 교수님이 여기 남아서 나랑 같이 밤을 보낼 거라 생각한 건가?’사방은 고요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고지식한 행동을 보고 입꼬리를 약간 올렸다.“내 카드 안 썼어?”안시연은 잠시 의아해하다가, 연정훈이 그 블랙카드를 자주 쓰는 모양이니 결제내역을 보는 것쯤이야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문득 떠올렸다.“안 썼어요.”“외할머니 수술은 다 끝났어?”그 말에 안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 사람이 저한테 돈을 돌려줬어요.”연정훈은 침묵했다. 그러고는 얼마 안 지나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화해했어?”“...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요.”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투에 담담한 조롱을 섞어 말했다.“표면적으로만 관계를 정리했을 뿐, 아직 남아있긴 한다는 거네.”안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녀는 일부러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연정훈의 신분으로는 아마 다시는 그녀를 보지 않을 테니.연정훈이 그녀에게 물었다.“이럴 거면, 왜 감히 나를 데리고 올라왔어?”“... 그 사람이랑 마주치는 게 두렵지 않아서요.”안시연은 그의 말에 농담과 조롱이 섞여 있다고 느꼈다.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니, 노란 불빛아래 남자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안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그 1초 동안, 안시연은 혼이 날아갈 것 같았다.연정훈도 그녀의 몸에 누워 잠시 동작을 멈췄다.그러나 문은 예상과 달리 열리지 않았고 안시연은 그제서야 자신이 이미 자물쇠를 바꿨다는 사실을 떠올렸다.마치 영혼이 본체에 돌아온 것처럼, 이성을 되찾은 그녀는 연정훈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가 일어서기를 바랐다.그러나 연정훈은 서두르지 않으며 오히려 그녀의 입술을 깨물더니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오늘 저녁에 손님 온다고 알려주지 않았어?”안시연은 난감함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시연 씨, 문 열어요.”안시연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그러나 연정훈은 그녀의 허리를 더욱 세게 움켜잡은 채 당황하지 않고 움직임을 이어갔다.안시연은 다리를 조이며 그의 움직임을 거절했다.문밖의 인기척이 커질수록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안시연과는 달리 연정훈은 더욱 여유가 넘쳤다.그녀는 갑자기 이해가 되었다. 왜 자신이 주지혁과 헤어지지 못하는 것을 개의치 않고 연정훈이 계속해서 찾아오는지.연정훈은 주로 그녀의 몸만을 사랑하는 것이지 순애보 같은 스타일이 아니다.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현재의 안시연은 그저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얼마쯤 지났을까, 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멈추고 거실의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가자 연정훈은 더이상 안시연을 놀리지 않고 본격적인 주제를 향해 달려갔다.안시연은 미칠 지경이었다.그렇게 얼마 뒤, 남자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자 안시연은 흐느끼며 엉겁결에 자신을 꼭 안았다.연정훈이 고개를 들고 눈썹을 찡그리며 그녀를 바라보니 안시연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있었다.연정훈은 눈을 감더니 이내 냉정함을 되찾았고, 다시 무력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안시연을 바라보았다.잠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손을 보여주었다.뼈가 두드러지게 보이는 손가락 앞부분에는 검붉은 색이 묻어있었다.안시연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너무 긴장해서 아랫배 통증조차 못 느끼고 있었어...’그렇다, 생리
방음이 되지 않는 복도에 있어 안시연은 연정훈을 꼭 끌어당긴 채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얼마나 지났을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주지혁이 핸드폰을 꺼내는 것을 보고 안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허둥지둥하다가 연정훈을 끌고 아래층으로 뛰어갈 뻔하기도 했다.‘아 참, 나 핸드폰 집에 두고 왔지.’한숨을 돌리며 고개를 든 그녀는 연정훈의 아련한 눈동자와 마주쳤고 그 바람에 귀가 뜨거워졌다.밖에서 주지혁은 아직도 전화를 걸고 있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연정훈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그가 자신과 함께 조심히 아래층으로 내려가기를 바랐다.하지만 벽에 기대어 지긋이 그녀를 바라보는 연정훈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혀 협조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안시연은 다시 한번 그의 악랄함을 목격했다.그녀는 한때 그가 이전에 이런 무자비한 일을 자주 하지 않았는지 의심했다.주지혁은 언제든 이쪽으로 올 수 있었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이 쿵쾅대는 심장을 뒤로 한 채 애원하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오늘 저녁 술을 많이 마신 탓에 연정훈은 행동이 더욱 자유롭지 못했다.애원 가득한 안시연의 눈빛은 연정훈의 욕구를 더 불러일으켰다. 만약 주지혁이 갑자기 나타나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안시연이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그들은 다른 걸 했을 것이다.호텔에서 그랬던 것처럼 연정훈에게 반항하지도 못한 채 불쌍한 눈빛을 하며 말이다.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주지혁이 있는 방향을 흘겨보다가 다시 안시연을 바라보았다.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강해졌다.안시연도 바보는 아니었다.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두 팔을 들어 연정훈의 목을 잡고 힘껏 까치발을 들며 키스를 했다.작은 남자의 입술은 한없이 차가웠고,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간청했다.“교수님, 제발 내려가세요.”연정훈은 기쁜 나머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입을 꼭 맞췄다.키스보다는 연정훈의 일방적인 약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서로의 입술이 떨어질 때, 안시연의 눈에는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
새벽이 되도록 양혁수의 방에는 열기가 뜨거웠다.딸깍.헤드 등을 켜고 변여름이 이불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연스레 변여름의 몸을 닦아줬다.변여름은 자꾸 양혁수를 훔쳐봤고 양혁수는 손을 뻗어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꾹 눌렀다.그러자 변여름은 양혁수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비며 입꼬리를 올렸다.이어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려오자 왠지 양혁수가 만족하지 못해 홀로 해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 옆 서랍을 열어보니 손목시계 따위만 있을 뿐 남은 콘돔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양혁수가 많이 자제한 것 같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있는 걸 통째로 갖고 오는 건데.’그리고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양혁수가 돌아왔다.변여름은 얌전히 누워있다가 양혁수의 품에 꼭 안겼다.양혁수의 체향을 느끼며 변여름은 두 눈을 감고 얼굴을 비볐고 목 언저리에 뽀뽀하려 했다.그러나 양혁수가 변여름을 제지했다.“지금 뭐 해?”“왜요?”양혁수는 제 목에 있는 흔적을 가리켰고 새길 때는 몰랐지만 샤워하고 나니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변여름이 지난번처럼 또 정도 없이 세게 흔적을 남긴 모양이었다.하지만 이번 모양과 색깔이 너무 마음에 들어 변여름은 미안한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오빠 다음엔 반대편도 해줄게요.”“...”양혁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취조하듯 방금 잠자리가 만족스러웠냐고 물었다.“오빠, 나 다른 것도 배웠는데 오빠만 좋다면... 읍!”양혁수는 바로 변여름의 입을 막았다.“...”‘풉. 부끄러워하긴.’양혁수는 본인이 오빠로서 리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 꼬맹이한테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잠이나 자!”그래서 고작 이런 일로 무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흥. 오늘은 이만 물러선다.’변여름은 얌전히 몸을 돌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자꾸 치근덕거렸다.“오빠가 많이 보수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요
변여름은 말재주가 뛰어났고 그대로 두면 분명 더 큰 소동을 일으킬 기세였다.양혁수는 그녀를 다잡아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변여름은 밀고 당기기에 능했고 결국 늘 그가 그녀를 달래는 쪽이었다. 변여름을 제압하려면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유혹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서로가 진심을 담기 시작하면 결국 누가 누구를 먼저 유혹한 건지조차 흐려진다.어느새 그녀는 그에게 기대어 그를 천천히 침대로 이끌었다.양혁수는 조용히 누워 있었고 변여름은 이불 속에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표정은 잔잔했지만 눈동자에는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는 익숙한 듯 그의 팔을 벌리고 조용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내 그의 온기를 안은 채 잠이 들었다.양혁수는 차갑게 굴어보려 했지만 몸은 정직하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자 그는 스스로의 입을 때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왔다.저녁이 되면 변여름은 양혁수 곁에서 말이 많아졌다. 그녀는 그와 감정을 나누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전부 들려주었다. 작은 머릿속은 놀라울 만큼 명확했고 양혁수가 확신하지 못하던 일들을 종종 먼저 짚어내곤 했다.그러다 보면 두 사람의 입술은 자석처럼 끌려붙었고 전에는 양혁수가 불씨를 조심스럽게 다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변여름을 집에 데려온 첫날 밤 양지원을 마주친 이후의 느낌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녀를 몸 아래에 눕히고 얼굴을 감싸안은 채 키스하자 변여름은 그의 몸에 다리를 스치듯 비볐고 그는 순간적으로 치솟는 충동을 느꼈다.자신의 반응을 깨달은 그는 재빨리 움직임을 멈췄다.변여름에게 들킬까 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조명의 밝기를 낮추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막 눕자마자 변여름의 부드러운 몸이 다시 양혁수의 품에 파고들었고 변여름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으며 단 한 번의 눈 맞춤으로 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
양혁수의 ‘착하지’라는 한마디에 변여름의 입꼬리는 하늘까지 닿을 듯 환하게 올라갔다.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 능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밤 11시 30분이 넘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자 아마도 자신이 먼저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아이고.’변여름은 그의 장난에 넘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간질이는 마음을 안고 그녀는 문가에 서서 발끝을 들어 여러 번 밖을 내다보았다.밤이 깊어 12시가 다 되어도 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외투를 걸쳐 입은 채 문을 열고 나섰다.양씨 가문의 저택은 워낙 넓어서 그녀가 양혁수의 방에 닿기 위해선 한 층 아래로 내려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어야 했다.몰래 발걸음을 옮겨 문 앞에 선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예상대로 잠겨 있지 않았다.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은 숨 막힐 듯 어두웠다.침실은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녀는 익숙한 감각과 뛰어난 시력에 의지해 침대를 더듬어 앉았지만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변여름은 숨을 죽인 채 주변을 감지했고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혹시 오빠가 나를 찾으러 간 걸까?’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작은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녀는 즉시 멈춰 섰다.달빛이 비추는 거실 그 한쪽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침실 문을 빠져나온 그녀가 멈추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았고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그의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것을 가볍게 던지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변여름은 품에 안긴 이가 양혁수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갑작스레 뒤에서 안아오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이어진 그의 키스가 그녀의 옆얼굴에 가볍게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양혁수는 평소 그녀가 마음껏 표현하게 두었지만 자신이 먼저 유혹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