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찻집을 떠나면서 부승희에게만 메시지를 보냈다.부승희는 안시연을 붙잡으려 따라나섰지만, 안시연은 거절했다.이승우는 대나무집 위에서 망원경으로 상황을 살펴보며 혀를 차며 말했다.“아가씨, 정말 고집이 세네. 양 두 마리 데리고 길을 나서는 것이 마치 아이들 데리고 가출하는 것 같잖아.”부승원은 속으로 생각했다.‘아마 멀지 않아 아이를 안고 뛰게 될 것 같은데 지금 연정훈이 하는 짓을 보면 아무리 마음을 다 준 여자라도 떠나게 되었어.’안시연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지나고 있었다.안시연은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양 두 마리도 힘들 것 같았다. 영준이는 아직 한 달밖에 되지 않았고, 나비는 술이 깬 지 얼마 되지 않았다.연정훈이 없어도 괜찮지만, 이 사랑스러운 양 두 마리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안시연은 돌아갈 시간을 조금 미루기로 했다.하지만 침실로 들어가 핸드백 안에서 USB를 찾지 못했다.‘이게 무슨 일이야?’안시연은 방을 몇 번이나 뒤졌지만, 허탕이었다. 결국 연회를 주최한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다.“혹시 착오가 있었던 건가요? 말씀하신 USB를 찾지 못했어요.”프런트 직원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말했다.“아마 저희 쪽에서 실수한 것 같아요...”안시연은 어이없었다.전화를 끊고 안시연은 짐을 싸면서 연정훈의 물건을 모두 정리했다. 이렇게 해야 마음이 조금 가벼워질 것 같았다.안시연은 오후에 잠깐 눈을 붙였다.일어나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어 있었다.“우리 이제 집에 가자.”안시연은 나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나비는 머리로 안시연의 배를 살짝 밀었다.“착한 아기.”안시연의 마음이 따뜻해졌다.안시연은 룸서비스를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양혁수의 전화가 걸려 왔다.“여보세요?”“어디야?”안시연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왜요?”“나 양주에 도착했어. 너 보러 갈게.”안시연은 황당하면서도 무심하게 말했다.“저 이제 경인시로 가려고 차를 탈 준비 중이에요.”“
소현주는 성산시의 아파트에서 손목을 그었다. 소현주를 발견한 것은 맞은편 이웃이었고 그때 소현주는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 상태였다. 소현주는 믿을 만한 가족도 없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위급 상황을 알릴 사람조차 없었다.간호사에 따르면 소현주는 계속 휴대폰을 쥐고 있었지만 연락처 목록에는 몇 명뿐이었다. 그중 누구에게도 연락이 닿지 않았고 유일하게 최근 통화한 사람은 연정훈이었다. 그러나 그의 전화도 통하지 않아 경찰에게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원장은 연정훈의 신분을 고려해 연정훈이 일찍 도착한 것을 보고 소현주는 연정훈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연정훈은 부하에게 소현주에게 간병인을 붙여주라고 지시한 후, 떠날 준비를 했다. “소현주가 깨어나면 이렇게 전해줘요.”연정훈은 간병인에게 말했다. “정말 죽고 싶다면 다음번엔 커튼을 닫고 아무도 못 보게 해.”간병인은 당황했다.이 말은 너무도 차가웠다.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마치 선녀처럼 보였고 아직 의식을 잃은 상태인데 이 남자는 너무 냉정했다.연정훈은 간병인에게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모든 것을 정리한 후 병원을 떠났다. 소현주를 한 번 보러 온 것으로 연정훈은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했다.결국 한때 사랑했던 사람인데, 그녀의 생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만약 다음번에 소현주가 정말 죽는다면 연정훈은 돈을 내서 소현주의 시신을 수습해 줄 생각이었다. “이제 양주로 돌아가시겠습니까?”진수빈이 물었다.“그래.”연정훈은 짜증스럽게 숨을 내쉬며 몸을 뒤로 기대고 휴대폰을 꺼냈다. 안시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정훈 씨 일이 있어서 먼저 간 건가요?]안시연이 물었다.연정훈은 그때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했다. 마음이 가라앉은 후 연정훈은 신속하게 답장을 보냈다. “곧 양주로 돌아갈 거야. 찻집에서 기다려.” 메시지를 보내고 다른 알림을 확인해 보니 이승우가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네 여자 친
안시연은 알파카 두 마리와 함께 호텔 로비에서 양혁수를 만났다.오늘 식사는 안시연이 쏘기로 했고 둘은 근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들어선 지 얼마되지 않아 부승희 일행도 도착했다.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를 주고받은 뒤 각자 주문했다.양혁수는 스스럼없이 한 상 가득 주문했다.“우리 둘만 먹을 거예요.”하지만 양혁수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어차피 연정훈 돈인데 뭣 하러 아껴.”“...”식사 도중 양혁수가 갑자기 물었다.“연정훈은 어디 간 거야?”안시연은 당황하며 대답했다.“급한 일이 생겨 경인을 떠났어요.”양혁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른 여자 만나러 간 건 아니고?”안시연의 손이 뚝 멈췄다. 그러자 양혁수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진짜인가 보지?”안시연은 양혁수를 힐끗 노려보았다.“밥 먹을 때 조용히 밥만 먹는 게 어때요?”“방금까진 그럴 생각이었는데 지금부터는 말 좀 하려고.”“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요?”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겨우 연정훈의 카드를 손에 쥐게 되었는데 계속 놀려먹어야지.”“...”안시연이 한 입 크게 입에 넣으며 말했다.“연정훈 씨가 누굴 만나든 그 사람 자유니까 나와 아무런 상관없어요.”“그런데 뭔가 심통 난 것 같은데?”양혁수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속은 말이 아니었다.“선배 연정훈한테 진심이지?”“아니요? 저도 지금까지 연기한 거예요.”양혁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상관없어. 연정훈한테 진심이 아니라면 차라리 나한테 와. 난 진심이거든.”또 시작된 양혁수의 플러팅.“그쪽 어머니를 설득할 자신이 없으니 우리의 인연은 딱 이 정도예요. 그러니까 포기하세요.”“누가 그래? 우리 엄마가 반대한다고?”양혁수가 수저를 내려놓았다.“선배만 좋다면 우리 엄마는 내가 바로 해결할 수 있어.”안시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도련님, 지금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프니까 제발 저 숨 쉴 틈은 주세요.”“내가 숨통이 되어줄게.”안시연은 더 이상 얘기를 이어가
“읍읍”‘조심해!’안시연은 몸부림치며 양혁수에게 알려주려고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칼이 몸을 찌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귓가에 들려왔다.양혁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칼을 휘두른 상대는 한 번으로 부족했는지 칼을 빼 들고 또 한 번 더 찌르려 했다.양혁수는 고통을 참으며 상대의 손을 내리쳤고 다시 몸 다툼이 생겼으나 양혁수는 힘에 부쳤다.그렇게 칼이 다시 그의 복부를 찌르려는 순간 안시연은 끝내 차로 끌려갔다.“가자!”“빨리 가!”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도록 차 문이 굳게 닫혔다.안시연은 문을 열려고 몸통으로 들이박았으나 맞은편의 남자에 뺨을 맞고 말았다.입가가 찢어지고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으나 안시연은 바로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양혁수를 바라봤다.바닥에 쓰러진 양혁수를 내버려두고 방금까지 몸 다툼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몰려와 양혁수 주변을 둘러쌌다.흐릿한 시야에서 왠지 이승우의 모습이 보인 것 같았다.그리고 차량은 주차장을 벗어났다.안시연의 코를 막은 수건에 약물이 묻어 있었고 약효가 올라오자 그녀는 점점 정신을 잃어갔다.눈이 감기고 그녀는 오직 단 한 사람만 떠올랐다.연정훈.살려줘.세상이 온통 하얀색이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안시연이 눈을 번쩍 떴다.눈을 떠보니 온몸이 푹 젖어 있었다.사납게 생긴 어느 사내가 깨어난 안시연을 보며 손에 쥔 물컵을 내려놓았다.“빨리 철수 형님 모시고 와.”안시연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고 철수 형님이라는 지칭에도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주변을 천천히 돌아보자 텅 빈 방에는 안시연이 묶여있는 의자와 그녀 맞은편의 소파밖에 없었다. 창밖으로는 오직 나무 한 그루만 보였다.쓰러지기 직전의 기억이 파편이 되어 떠오르고 안시연은 점점 두려움을 자각하기 시작했다.‘내가 납치된 건가?’방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한 안시연이 깜짝 놀라 얼어붙
연명걸은 이철수를 죽이지 못해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연명걸은 예전과는 달리 괴팍해진 모습으로 소리쳤다.“미쳤어? 안시연을 납치하려고 양혁수를 칼로 찔러?”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양혁수는 양석진 의원의 조카였다!이철수도 사건의 심각성을 눈치채고 표정을 구겼다.“그 녀석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먼저 덤벼들었어요!”그러자 연명걸이 신경질적으로 안경을 벗어 던졌다.젠장! 젠장!이철수와 한 배를 탔으니 연명걸도 같이 연루될 가능성이 컸다.“정보는 이미 연정훈에게 흘렸으니 저 여자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려면 제가 시킨 대로 할 겁니다.”이철수의 말에 연명걸이 냉소를 터뜨렸다.‘멍청한 녀석. 안시연만 잡고 있으면 뭐든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양혁수를 칼로 찔렀으니 하느님에게 빌어도 내버릴 목숨이었다.연명걸이 차가운 얼굴로 이철수에게 물었다.“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연정훈에게 딜을 할겁니다. 조건은 날이 밝기 전까지 주식을 모두 넘기는 것입니다.”연명걸은 이철수의 멍청한 생각에 헛웃음만 나왔다.“넌 네 목숨보다 주식이 더 중요해?”이철수는 야비한 얼굴로 말했다.“양혁수를 찔렀으니 당연히 한국에서는 지낼 수 없겠지요. 그러니 도망갈 퇴로를 미리 준비해 뒀습니다. 주식만 넘어오면 제가 저가로 대표님께 되팔겠습니다.”연명걸이 침묵했다.이철수도 완전히 멍청한 건 아니었다.하지만 그는 너무 순진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30분 안으로 이 별장은 벌써 표적이 되었다!연명걸이 찾아온 것도 미리 계획된 것이었으며 사건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안으로 들여보낸 것이었다.그러니 이철수가 빠져나갈 구멍은 존재하지 않았다!연명걸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이철수는 시한폭탄이 되었으니 이철수의 손을 빌려 주식을 쥐고 연정훈과 양석진의 손을 잡고 다시 이철수를 처리하면 되었다!두 눈을 감고 고민하다가 결정한 연명걸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넌 안시연에게 손 떼. 내가 직접 연정훈이랑 딜 할 테니!”“빨리!”안시연은 1분 1초가
“안시연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마.”“20분 안으로 주식 넘겨줄 테니까.”“이철수한테 전해. 양혁수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살고 싶으면 안시연 건드리지 말라고!”연명걸은 연정훈의 흥분한 목소리에 안심할 수 있었다.역시 안시연은 연정훈에게 꽤 중요한 사람이었다.연명걸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요. 나와 이철수가 어떤 사이인데 그건 해줄 수 있죠. 이철수는 그쪽이 체면을 구긴 것에 화가나 안시연에게 화풀이하려고 했을 뿐이에요. 양혁수를 다치게 할 계획은 없었는데 지금은 양씨 가문의 보복이 두려워 빨리 현금 챙겨 해외로 도망가려고 생각하고 있어요.”주식 얘기를 꺼내지 않았던 건 자신의 리스크를 덜기 위해서였다.연정훈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겼다.“안시연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쪽과 이철수는 똑같은 결말을 맞을 겁니다.”연명걸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뭐라고 변명하고 싶었으나 통화는 종료되었다.그 통화는 양주시의 어느 경찰국에서 이뤄졌다.핸드폰을 내려놓은 연정훈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연정훈이 양주시로 막 도착했는데 이승우의 연락을 받았고 바로 안시연의 일을 전해 들었다.그래서 경찰국으로 달려가 상황을 진두지휘했다.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경찰서 서장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전투복 차림인 주정민이 합계였다.양주시에서 벌어진 사건에 서장은 잔뜩 당황한 얼굴이었으며 연정훈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연정훈의 시선은 오직 주정민에게 닿았다.“언제쯤 구할 수 있어요?”주정민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이미 주변을 포위했고 1시간을 넘긴다면 이 옷 벗겠습니다”!연정훈은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한시 빨리 안시연이 무사한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같이 가시죠.”연정훈의 말에 주정민이 고개를 돌렸다. 이런 그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은 아니었다.“네, 알겠습니다.”주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피해자를 구하고 옆을 지킬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희가 그렇게 다정하게 챙길 시간은 없습니다.”별
펑!안시연은 의자가 뒤로 넘어가도록 발버둥 쳤다.허리가 부서질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그녀는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가 버렸고 입이 막혀 있는 탓에 소리 지를 기회도 없었다.이철수는 욕을 지껄이며 그녀의 옆으로 주저앉으려 했다.그때 소란을 들은 연명걸이 빠르게 달려와 방문을 열었다.현장을 목격한 연명걸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이철수를 발로 뻥 차버렸다.이철수는 바닥으로 쓰러졌고 몸을 일으켜 세운 후 바로 달려들었다.연명걸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와 몸 다툼을 이어갔다.쓰러진 안시연은 절망과 공포에 휩싸여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지금 대체 무슨 상황인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보이지 않는 어둠이 그녀를 잡아먹고 있었다.그때.펑!갑자기 여러 차례 굉음이 들려오더니 뜨거운 액체가 안시연의 목 언저리와 옆선에 튀었으며 시야를 흐리게 했다.숨을 들이쉬면 온통 피비린내가 느껴졌다.안시연은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그리고 누군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은 수건을 꺼냈다.정신을 차리자, 자기 얼굴에 튄 액체가 피였다는 걸 깨달았고 안시연은 온몸이 덜덜 떨렸다.“시연아!”“나야, 연정훈!”연정훈...안시연은 얼마 남지 않는 이성을 되찾고 흐려진 눈을 비벼 앞에 선 사람을 쳐다봤다.연정훈.정말 연정훈이었다!안시연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으며 그의 목을 꽉 껴안았다.그녀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나 연정훈은 누구보다도 이성적이었다.못 본 사이 핼쑥해진 그녀의 얼굴과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며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주정민이 달려왔을 때 연정훈은 한 손으로 안시연을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 권총을 이철수의 몸으로 겨누고 있었다.“형!”주정민이 빠르게 다가와 총을 빼앗아 들었다.“형, 손 더럽히지 마요!”“제가 할게요!”주정민은 연정훈 눈의 살기를 보며 절로 소름이 돋았다.다행히 주정민이 제시간에 도착했다.그는 연정훈의 실제 신분을 알고 있었기에 절대 연정훈이 잘못된 행동을 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래서 안시연을 보며 머리를 굴렸
주삿바늘이 안시연의 팔을 찌르고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도저히 진정할 수 없는 안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가슴이 찢겼다. 그래서 그녀를 꽉 껴안아 그녀가 몸부림치다가 자신을 다치지 못하게 했다.진정제가 투여되고 의사는 작은 소리로 약효가 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린다고 언질을 주고 병실을 나섰다.안시연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흐릿한 시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가에 물린 듯한 상처를 발견했다.손을 뻗어 그의 입가를 어루만지고 싶었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제 몸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에 안시연이 또 공포를 느꼈다.연정훈은 점차 진정되고 있던 안시연이 또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두려워하자 손등을 토닥였다.“무서워하지 마. 지금 진정제 투여 중이고 내가 있으니,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해.”그의 목소리에 안시연은 점차 마음을 가라앉혔다.그리고 두 눈이 감길 때까지 연정훈을 눈에 담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이 깊은 잠이 들 때까지 다독였고 쌕쌕 숨을 쉬는 그녀를 보며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어 간호사를 불러 검사를 이어가도 된다고 전했다. 그는 안시연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여러 검사실을 오갔다.모든 검사를 마치고 나니 벌써 세 시간이 지나갔다.연정훈은 그녀를 병실에 눕히고 직접 옷을 갈아입히고 몸을 닦았다.옷은 얼룩지고 피부는 긁히고 멍들었으며 연정훈은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빨갛게 부어오른 그녀의 얼굴을 매만지며 연정훈은 분노가 들끓었다. 아까 그렇게 쉽게 이철수의 목숨을 앗아가는 게 아니었다!안시연이 잠에 들었음에도 연정훈의 손길은 아주 조심스러웠다.몸을 닦고 나니 어느새 아침이 밝아왔다.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연정훈은 그녀 혼자 두고 떠난 게 후회되어 피곤함도 느껴지지 않았다.성산에 가지 않았다면, 아니 그녀를 홀로 양주에 두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연정훈...”침대에 누워있던 안시연은 꿈속에서도 그의 이름을 외쳤다.연정훈은 침대에 앉아 그녀를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