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정은 처음에 양혁수를 보지 못했다. 최근 안시연의 엄마 역할에 몰입해 있던 터라 안시연을 보자마자 바로 웃으며 다가왔다.“시연아, 퇴근했는데 왜 집에 안 가고 있어?”안시연이 막 대답하려는 순간, 옆에서 양혁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둘이 무슨 사이야?”안시연은 순간 멍해졌다.이제야 기억났다. 양혁수는 소현정을 극도로 싫어했고, 양혁수의 반응을 보니 아직 소현정이 안시연의 엄마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소현정도 잠시 멈칫했다.양혁수를 보자 반가움이 가득했지만, 자신의 현재 신분이 떠올라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반우희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상황을 살피며 말없이 서 있었다.‘대체 무슨 상황이지?’양혁수는 다시 한번 안시연에게 물었다.“안시연, 소현정 씨와 무슨 관계야?”안시연은 한숨을 쉬며 머릿속을 정리한 후, 양혁수에게 설명하려 했다.그러나 아직 입을 떼기도 전에 맞은편에 서 있던 소현정이 갑자기 안시연 뒤쪽을 보며 무서운 표정으로 외쳤다.“조심해!”안시연이 반응할 새도 없이 소현정이 달려들었지만, 안시연에게 다가오지 못했다.안시연을 밀어낸 것은 바로 그녀 뒤에 있던 반우희였다.안시연과 반우희, 소현정과 양혁수는 각각 반대 방향으로 넘어졌고 그 사이로 작은 픽업트럭이 빠르게 지나갔다.사건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안시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땅바닥에 앉아 있었고, 손바닥이 뜨겁게 아파졌다.작은 픽업트럭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반우희는 안시연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안시연 언니, 괜찮아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맞은편에 있는 양혁수와 소현정을 바라보았다.양혁수는 땅에서 일어나 얼굴이 굳어 있었다.소현정은 잠시 얼어있다가 맞은편을 보더니 빠르게 반응해 안시연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안시연은 멍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소현정은 안시연의 손을 꼭 잡으며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아까 엄마가 너무 놀랐어. 원래 널 밀어내려고 했
‘소현정은 양혁수를 밀려고 한 거야!’양민아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차가 지나가던 순간, 소현정 역시 무의식적으로 양혁수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하마터면 그의 상태를 확인할 뻔했다.소현정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제야 안시연을 바라보았다.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들어와 양민아는 그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양민아의 머릿속에 평안 부적과 출생일이 떠올랐다. 그건 안시연의 것이 아니었지만, 안시연이 가지고 있었다.양민아는 눈동자를 굴리며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대담하고 황당한 가설이었지만, 어찌 보면 나름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쳤다.이건 너무 미친 생각이다.아니. 그럴 리가 없다.양민아는 자기 생각을 연이어 부정했지만, 곧바로 차 문을 열고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저녁 바람이 불어왔고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양민아의 머릿속은 한층 맑아졌다.양민아는 잘못 본 것이 아니었으니 양민아의 생각도 틀리지 않았다.양민아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더니 길 건너편을 향해 걸어갔다.그러나 양혁수는 이미 차가운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양혁수?”그는 양민아를 전혀 보지 않고 무심하게 지나치며 운전사에게 명령했다.“출발해.”양민아는 차에 오르며 반대편에 있는 안시연과 소현정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감정을 억누르며 조용히 다짐했다.‘서두를 필요는 없어. 시간은 충분히 있어.’길 건너편에서 안시연은 오랫동안 굳어 있었다.양혁수와 안시연의 관계는 목숨을 건 사이였다. 안시연은 양혁수를 진정한 친구로 여기며 부모 세대의 원한을 알면서도 여전히 희미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안시연은 문득 자신이 너무 많은 기대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양혁수는 화가 나서 떠났고 더 이상 안시연을 괴롭히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소현정은 안시연의 곁에 서서 양혁수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이 쓰렸다.친아들이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의 편을 들며 친엄마인 소현정을 쓰레기 보듯 바라봤다.
안시연은 반우희와 함께 병원에 갔다. 다행히 여러 검사를 받은 결과 큰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언니, 나 상처만 금방 치료할 테니까 밖에서 기다려 줘요.”진료실 안에서 반우희가 고개를 내밀고 안시연에게 말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반우희는 안시연을 부르는 호칭부터 친근하게 변했다.안시연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요. 안 가요.”반우희는 웃으며 돌아서더니 의사에게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안시연은 복도에 앉아 연정훈에게 오늘 밤 집에 돌아오는지 물어보려고 문자를 보냈다.[곧 도착할 거야.]안시연은 그 몇 글자를 보고 마음속의 어둠이 절반 이상 가셔지는 것을 느꼈다.안시연은 전에 겪은 위험한 일은 굳이 말하지 않은 채 답장을 보냈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응.]답장을 받은 안시연은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연정훈이 좋아하는 음식을 몇 가지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밤 8시가 지났고 반우희의 상처는 깔끔하게 치료되었고 붕대가 감겨 있었다.안시연은 약을 챙기고 반우희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그들은 양원장을 마주쳤다.양원장은 안시연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반우희의 상처를 먼저 걱정한 뒤, 곧바로 말을 이었다.“재단 건은 안시연 씨 덕분이에요. 의료 사업에 대한 안시연 씨의 큰 지원에 제가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안시연은 의문스러웠다.“네?”양원장이 말했다.“덕분에 연정훈 대표님이 이미 저희와 연락을 취하셨어요. 이제 저는 이 회장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에요.”“네...”안시연은 예의상 간단하게 대답했다.연정훈이 이 재단에 투자한 것은 아마 안시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날 그녀가 제안했을 때 이미 연정훈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양원장은 적극적으로 제안했다.“이 회장님 일행이 이미 밖에 계십니다. 안시연 씨도 시간이 있으시면 같이 가서 차 한잔하시는 게 어떨까요?”안시연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8시가 넘어가고 있는데 차를 같이 마시고 싶지 않았다.
안시연은 연정훈이 어떻게 그토록 태연하게 자신을 속일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안시연이 연정훈에게 재단에 대해 말했을 때 연정훈은 안시연을 안아주며 그녀가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 휘말리는 것이 본인의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고 말했다.사실 연정훈은 진작에 재단 전체를 소현주에게 맡기겠다고 소현주와 약속한 상태였다.연정훈은 매일 집에 돌아가 밥을 먹고 안시연의 옆에서 잤다. 하지만 안시연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안시연이 애타게 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연정훈은 어쩌면 이미 소현주의 집을 드나들었을지도 모른다.과연 집이 맞긴 한 걸까? 어쩌면 호텔일지도 모르겠다.얼마나 친밀한 사이길래 소현주가 좋아하는 냄새까지 묻혀온단 말인가.“시연 씨,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원장은 복잡한 표정으로 안시연에게 말했다. 반짝이는 눈은 안시연을 속이 메스껍게 만들었다.소현주는 이미 몸을 돌렸지만 안시연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안시연은 표정 따위 없는 무념무상이었지만 소현주는 옅은 미소를 짓는 것도 모자라 안시연을 향해 살짝 고개도 끄덕였다.“웩!”안시연은 구역질을 하며 황급히 풀숲으로 달려갔다.반우희가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언니, 괜찮아요?”안시연은 저녁도 먹지 않아 공복이었으므로 아무것도 토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위는 여전히 경련이 일어나 진짜 토를 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반우희는 재빨리 물을 사다 안시연에게 주고 조심스레 등도 토닥여줬다.“위가 불편한 거예요? 지금이라도 병원에 갈까요?”반우희는 잔뜩 걱정하며 물었다.텅 빈 공허한 눈으로 풀숲을 바라보던 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잔뜩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요.”“그럼...”반우희가 보기에 안시연은 영혼이라도 빨린 것처럼 상태가 나빴다.안시연은 애써 진정하고는 반우희에게 말했다.“우리 경찰서도 가야 해요.”“오, 그러네요.”반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서는 저 혼자 가도 되니까 언니는 불편하면 안 가도 돼요.”“괜찮아요.”
그렇게 한참을 서로 눈만 바라보다 안시연이 연정훈에게 팔을 내밀었다.그 행동의 의미를 알아챈 남자는 안시연의 허리를 감싸고 품에 소중히 안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안시연과 이마를 맞대고 물었다.“갑자기 술은 왜 마신 거야?”안시연은 나른하게 풀린 눈을 하고 연정훈의 목을 감싸며 가볍게 속삭였다.“정훈 씨가 하도 안 와서 기다리다 짜증이 나서 그랬어요.”“이런 식으로 성질을 부린다고?”남자는 안시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조금 늦은 것뿐이잖아.”안시연은 입꼬리를 당겨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안시연은 눈을 감고 연정훈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했다. 그리고는 살며시 떨어지며 팔로 그의 목을 감싸고 목에도 키스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이 가끔 보여주는 주동적인 모습을 좋아했다. 술을 마신 후의 나른하고 매력적인 모습은 연정훈을 금방 달아오르게 했다.연정훈은 셔츠 단추를 풀면서도 안시연의 옆모습을 감상하면서 그녀를 달랬다.“조금만 기다려 줄래? 금방 씻고 올게.”안시연은 대답 대신 조용히 연정훈의 목 부근에 코를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남자는 실소를 터뜨렸다.“무슨 냄새 맡는 거야? 나 오늘 담배 안 피웠어. 요즘은 담배를 가지고 다니지도 않아.”안시연은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아까의 온화함은 온데간데없고 차디찬 냉담함만 남았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어깨에 기대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정훈 씨 몸에서 다른 여자 냄새가 나는지 맡아보던 중이었어요.”안시연의 목소리는 잔잔하고 어딘가 가라앉아 있었다. 어떤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했다고 보기엔 어려운 정도였다.연정훈은 안시연의 귀를 작게 꼬집고는 말했다.“또 멋대로 생각한 거야?”안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연정훈은 어딘가 잘못됐음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려 안시연을 바라보았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안시연의 눈동자를 마주한 연정훈은 말없이 눈썹만 꿈틀거렸다.둘을 감싸던 묘한 흥분감은 모두 사라졌다.“왜 그래?”연정훈
하나의 거짓말은 무수한 거짓말을 낳는다.연정훈은 한치의 후회도 없이 안시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소현주를 보러 갔어.”안시연은 순간 숨이 턱 막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잠시 후에야 안시연은 겨우 입을 뗐다.“그때 한 번뿐만이 아니죠?”“...”“우리가 병원에서 그분을 만났던 날, 아, 두 분이 다시 만난 날이기도 하겠네요. 그날도 정훈 씨는 소현주 씨를 만나러 갔어요.”연정훈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하며 말했다.“그때는 얘기할 게 있어서 만난 거야.”“무슨 얘기 했는데요?”안시연은 한 걸음 한 걸음 연정훈에게 다가가며 몰아붙였다.“정훈 씨가 얼마나 소현주 씨를 그리워했는지, 아니면 소현주 씨가 정훈 씨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나요?”연정훈의 미간은 더욱 일그러졌다.연정훈은 잘못한 것도 맞고 그것 때문에 안시연에게 미안한 것도 맞았지만 무엇보다도 안시연을 좋아했다. 하지만 뼛속에 새겨진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만은 꺾이지 않았기에 사형 선고 같은 안시연의 촘촘한 의심에 반감이 들었다.안시연은 술을 마셨지만 머리와 발음은 오히려 평소보다 더 또렷해졌다.안시연은 입술을 한번 축이고 잔뜩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몸을 돌려 찬물 한잔을 따라서는 선 자리에서 벌컥벌컥 들이켰다.“그 두 번 말고도 만나 적이 있나요?”“없어.”“아직도 절 속일 건가요?”안시연은 소파에 기대앉은 채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재단을 그 사람에게 주는 게 얼마나 큰일인데 어떻게 사적으로 몇 번 만나서 소통도 하지 않고 결정할 수 있나요?”‘그래서 그랬던 거구나.’연정훈은 그제야 알아챘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연약함을 보아냈고 사태가 더는 악화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재단에 관한 일이라면 이해해.”“말해보세요, 듣고 있잖아요.”안시연은 옅은 웃음으로 회답했다.하지만 안시연이 침착할수록 상황은 더 심각하다는 것을 연정훈은 알아챌 수 있었다.연정훈은 생애 처음으로 범죄자처럼 심문을 당했지만 하나하나
역겹다.안시연은 결국 그 말을 뱉어버렸다.연정훈의 낯빛은 여간 어두운 게 아니었다.거실에는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안시연은 상처 입은 눈을 하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정훈 씨가 약속했잖아요, 더는 절 속이지 않겠다고요.”연정훈은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해 반박하지 못했다.연정훈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시연에게 사과했다.“너한테 숨긴 건 내 잘못이 맞아. 근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절대 아니야. 난 정말 소현주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너한테 약속한 그 날부터 내 마음속은 온통 너였어.”안시연이 조금 진정된 것으로 보이자 연정훈의 안시연의 손목을 끌어당겼다.하지만 안시연은 감전이라도 당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 연정훈의 손을 뿌리쳤다.그 동작이 하도 컸던 탓에 손에 쥐고 있던 반지도 날아가 버렸다.안시연의 손에서 탈출한 반지는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녔다.안시연은 잔뜩 흔들리는 눈빛으로 얼른 허리를 숙여 반지를 찾았다.연정훈도 잠시 감정을 뒤로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한참을 두리번거린 끝에 둘은 마침내 발견했다.반지는 테이블 모서리에 있었다.연정훈은 걸음을 옮겼고 안시연도 마찬가지였다.동시에 손을 뻗었지만 안시연이 조금 더 빨랐다. 안시연은 손끝에 닿는 느낌을 확인하고는 반지를 가져갔다.고개를 들자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얽혔다.안시연은 반지를 들어 올리며 쓸쓸하게 웃었다.“이게 바로 정훈 씨가 말한 온통 저밖에 없다던 그 마음인가요?”“저희 외할머니께서 주신 반지를 정훈 씨는 떳떳하게 끼고 싶지 않아 하네요. 제가 주제넘은 생각이라도 할까 봐 그래요? 외할머니를 위해 주문한 목걸이는 정훈 씨 서재 서랍 안에서 고스란히 모셔져 있잖아요!”연정훈은 분명 목걸이에 대한 해결책을 말해줬지만 안시연은 지금 이런 순간에 그 일을 다시 입에 올렸다.연정훈은 머리가 지끈거려 눈썹을 마구 찌푸리고 말했다.“넌 지금 쓸모없는 것에 집착하고 있어.”안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연정훈을 노려보았다. 눈에는 그 어떤 해석도 듣고 싶지 않아
안시연은 더는 다툴 힘이 없었고 알코올에 잠식된 신경은 언제든지 그녀를 쓰러뜨리기에 충분했다.머리는 터질 것처럼 아팠지만 그보다도 마음이 더 아팠다.안시연은 연정훈을 한 번 더 보고는 눈을 내리깐 채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연정훈은 지금 이런 상태의 안시연을 나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연정훈은 재빨리 다가가 안시연을 끌어안았다.“놔줘요!”안시연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힘으로 뒤에서 끌어안은 연정훈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연정훈에 의해 몸이 돌려졌고 안시연은 그런 연정훈을 밀어내는 동시에 참지 못하고 그를 때려버렸다.혼란한 틈 속에서 손이 주제를 모르고 나댔다.짝!뺨이 얼얼했다.안시연은 선체로 굳어버렸다.옆으로 돌아간 연정훈의 뺨에는 빨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둘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안시연의 손은 덜덜 떨렸고 한동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연정훈은 턱에 힘을 주고 2초간의 침묵 끝에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안시연을 바라봤다.“너 지금 제정신 아니니까 밖에 나가지 마. 화를 내더라도 집에서 내.”안시연은 자신의 손톱에 긁혀 상처가 난 연정훈의 눈가를 보았다.안시연은 멍하니 넋이 나간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안시연이 방심한 틈을 타 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아끌고 위층으로 향했다.침실에 들어선 후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침대에 앉혔다.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옷장을 열어 옷을 꺼냈다. 샤워하려는 것 같았다.안시연은 그렇게 다투고 난 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태평하게 앉아있을 수 없었다. 다시 정신을 차린 안시연은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연정훈은 안시연보다 먼저 문 앞으로 가서 문을 손으로 누르고는 시선을 내려 안시연을 바라보았다.“날 보고 싶지 않은 거면 오늘 밤은 내가 서재에서 잘게. 넌 여기 있어. 술 좀 깨고 나서 다시 얘기해.”“저 정신 멀쩡해요.”“너 취했어.”연정훈은 담담하게 말했다.하지만 그런 연정훈의 평온함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