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은 잠시뿐 송민재는 반우희가 하나씩 해낼 수 있도록 세심히 가르쳐주었다.이번에 법률 사무소에 새로 온 신입사원들은 대부분 송민재가 채용했지만, 유일하게 반우희만은 부승원이 직접 뽑은 인물이었다.재미있는 건 부승원이 반우희에게 한 번도 따뜻한 표정을 지어준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반우희는 여전히 부승원이 자신에게 특별히 기회를 주었다고 여겼다.‘쯧쯧.’“이거 복사하고 다과도 준비해 주세요. 잠시 후 메인 회의실에서 만나요.”반우희가 조심스레 물었다.“저도 함께 들어가도 되나요?”“물론이죠. 대단한 기밀은 아니니까요.”반우희는 득의양양해서는 서류를 인쇄하러 갔다.그들의 법률 사무소는 오랜 세월 정인 그룹과 긴밀히 협력해 왔으며 그 중심에는 부승원과 연 대표의 깊은 개인적 친분이 자리하고 있었다.‘맞다...’갑자기 생각난 듯 반우희는 고개를 돌려 송민재에게 물었다.“송 변호사님, 정인 그룹에서 오는 손님이 연 대표님이실까요?”송민재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답했다.“확실하진 않아요. 상황 봐야 합니다.”정인 그룹은 최근 몇 년간 요양 사업을 성공적으로 확장해 왔고 새로 시작한 요양 법무 프로젝트도 이 법률 사무소가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 규모가 워낙 크고 확장 속도도 빨라서 이번 프로젝트가 그들에게 반드시 중요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대표가 직접 올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연정훈 씨가 궁금한 거예요?”송민재이 물었다.반우희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함께 식사도 해봤기에 궁금한 건 없었다.반우희는 그저 연정훈이 지금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3년 전 안시연이 말없이 사라진 후 반우희는 연정훈을 다시 본 적이 없었다. 그와 마주하는 건 늘 경제 뉴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연정훈은 정인 그룹을 이끌며 다양한 신흥 산업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 내고 있었고 지금 경인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단연 연정훈일 것이다.“연 대표님과 부 변호사님이 친하시니까요. 반우희 씨도 법률 사무소에 들어온 이
대표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고 회의가 시작되었다.옆에 있는 보조들이 기록하고 있었고 반우희도 작은 공책을 꺼내 들었지만 한참을 들어도 무엇을 적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녀는 슬쩍 옆의 동료를 바라보았다.그 동료는 새 모양 이모지를 그리고 있었다.반우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그래. 다들 똑같군.’그녀는 집중하려 애쓰며 이해한 부분과 궁금한 점을 기록해 두고 회의가 끝나면 종 변호사에게 물어보려 했다.그러던 중 연정훈이 문서를 넘기던 손을 멈추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부승원은 무언가 문제가 있는 듯 감지하고 물었다.“문제가 있어?”연정훈은 들고 있던 문서를 조용히 부승원에게 건네주었다.부승원은 문서를 받아 확인하며 입꼬리를 살짝 내렸다.“이 부동산 소유권 양도서 누가 정리한 거죠?”반우희는 숨이 멎는 듯했다.모두 반우희가 정리한 것이었다...반우희는 간신히 용기를 내 손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부승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그 문서를 반우희에게 내던졌다.“페이지가 빠졌군.”‘뭐?’반우희는 당황한 채 앞으로 나가 문서를 받았다. 시간에 쫓겨 검토할 새도 없이 곧바로 사과부터 했다.반우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그녀는 긴장으로 몸이 굳었다.법률 사무소 내에서 부승원이 업무에 대한 높은 기준을 요구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특히 부하 직원이 저지르는 초보적인 실수는 그의 눈에 거슬리기 마련이다. 반우희가 저지른 이번 단순한 실수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송민재도 긴장한 채 속으로 ‘이 아이 끝났구나’라고 생각했다.그가 분위기를 풀어주려 입을 열려는 찰나 연정훈이 슬쩍 반우희를 흘깃 보았다.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연정훈은 잠시 놀란 듯한 눈빛을 보였으나 곧 평온한 표정을 되찾고 고개를 돌리며 차분하게 말했다.“다시 한번 인쇄해 오세요.”반우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급히 문서를 수정하러 나가면서도 속으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누구도 연정훈이 이렇게 너그럽게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부승
부승원의 시선이 ‘양시연’이라는 이름에 잠시 머물렀다. 몇 초 후 그는 서류를 담담히 닫아 왼쪽에 내려놓았다. 그는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고 연정훈을 바라보았다.“묘지를 짓겠다고?”연정훈이 말했다.“문제 있어?”그저 상업적 수단일 뿐이다.부승원이 대답했다.“...문제없어.”그는 몸을 뒤로 젖히며 말했다.“하지만 손해를 감수하고 이득을 기대할 수 없는 일은 의미가 없지. 협력하는 게 낫지. 땅도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면서.”연정훈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상대방을 무너뜨리고 나면 저렴하게 사용권을 사들여 고급 묘지를 짓는 거지. 땅은 여전히 쓸 수 있을 테야.”부승원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반우희는 겉으론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연정훈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천재다.돈을 벌 줄 아는 천재란 이런 사람인가 싶었다.부승원은 잠시 생각한 후 다시 말했다.“이 땅에는 작게나마 문제가 많아. 이번 기회에 다 해결해 버리자.”연정훈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네가 전적으로 처리해도 좋아.”정인과 JX는 지난 몇 년간 다양한 협력을 이어왔고 양사의 고위층과 변호사들은 이제 서로에게 오랜 친구나 다름없었다. 업무가 끝난 후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연 대표님, 저녁 시간 괜찮으신가요?”연정훈은 말을 건 변호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저녁에 개인적인 약속이 있어 함께할 수 없어요.”“네. 유감입니다.”변호사가 웃으며 말했다.사실 정인 쪽 고위 임원은 연정훈의 대답을 어느 정도 예측하였다. 몇 년 사이 연정훈이 참석하는 자리는 점점 줄어들었고 그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만 직접 대접받곤 했다.30대 초반의 그는 업계의 노련한 전문가처럼 보였다.다른 이들이 모두 흩어진 후 연정훈은 부승원의 사무실로 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결국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오자 부승원이 상징적으로 물었다.“같이 저녁 먹으러 갈까?”“아니. 다른 일이 있어”부승원은 속으로 비웃었다.‘무슨 할 일이 있겠어.
강남시티에서.연정훈이 집에 도착하자 아주머니가 나비를 데리고 나왔다.아주머니는 그가 돌아온 걸 보고 웃으며 말했다.“늦으셔서 제가 산책을 대신 나갈까 했어요.”연정훈은 목줄을 받아들며 말했다.“제가 데리고 갈게요.”“네.”아주머니가 물었다.“저녁 드시고 나서 산책하시는 게 어떠세요?”“괜찮아요. 한 바퀴 돌고 나서 먹을게요.”“알겠습니다.”최근 한 달 동안 연정훈이 매일 나비와 산책을 나서는 모습이 이제 아주머니에게 익숙해졌다. 나비는 체중이 많이 나가 의사가 다이어트를 권했던 참이었다.수천억 자산을 가진 회장이 양을 이렇게 세심하게 챙긴다고 해도 믿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나비는 다소 게으른 편이라 영준이와 비교하면 훨씬 더 몸집이 크다.연정훈이 산책을 시키려고 목줄을 잡으니 나비는 가기 싫다는 눈치였다.“안 가면 내일 저녁밥 못 먹는다.”길가에서 사람과 양의 익숙한 실랑이가 시작되었다.나비는 고집스럽게 꿈쩍도 안 했고 연정훈은 목줄을 살짝 당기며 나비에게 말했다.“빨리 앞으로 걸어가.”나비는 자리에서 걷는 시늉만 하며 연정훈의 말을 흘려들었다.연정훈이 나비를 냉랭하게 보며 힘주어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그러자 고집 센 나비는 걸어가다 멈춰 서서 심통을 부리는 듯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초여름 밤의 공기는 적당히 서늘해 산책하기 좋았다. 그렇게 둘은 빌라 주변을 몇 번 돌아본 후 집으로 향했다.집에 들어서자 검은색 털 뭉치가 소파 옆에서 졸고 있었다.나비는 즐겁게 집 안을 뛰어다니며 아들을 깨우고 연정훈 곁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연정훈이 저녁을 먹으려 하자 나비는 끊임없이 머리로 그의 다리를 밀어댔다.아주머니가 말했다.“아마 간식을 먹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저녁을 덜 먹었나 봐요.”연정훈은 손으로 나비의 머리를 그의 다리에서 떼어냈다.나비는 다시 머리를 올리며 끈질기게 매달렸다.그는 어이없다는 듯 아주머니에게 물었다.“이틀 사이에 체중이 좀 줄었나요?”“네. 계속 줄고 있어요.”연정훈은 고
토요일 저녁.반우희는 단정하게 차려입고 길가에서 부승원의 차에 올랐다.부승원은 반우희의 A라인 치마와 흰 셔츠를 힐끗 보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반우희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부 변호사님, 이거 정장 맞죠?”“응.”반우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부승원이 차를 출발시키자 반우희는 거울을 열어 머리와 옷매무새를 점검했다.이번 달 월급이 들어오면 새 셔츠를 하나 꼭 사야겠다.최근 온몸에 고르게 살이 많이 쪘다. 가슴까지 살이 붙어버려 셔츠가 조금 작게 느껴졌다.에휴.지난 몇 년간 안시연이 준 4천만과 부승희 씨가 준 금괴가 없었다면 지금쯤 정말 바쁘게 일하면서도 돈을 제대로 벌지 못했을 것이다.승주와 다른 두 아이의 학비 그리고 그녀의 학위 취득 비용까지 모두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부 변호사님, 안시연 언니 다시 돌아올까요?”반우희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모르지.”‘조금 후면 알게 될 거야.’반우희는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부승희 씨도 오랫동안 못 봤네요.”“승희는 새해에 돌아왔었어.”“정말이에요?”“그런데 친구가 너무 많아서 너를 챙길 시간이 없었어.”반우희는 침묵했다.“...”정말 짜증이 난다.레스토랑 주차장에 도착하자 부승원이 갑자기 반우희에게 경고했다.“잠시 후 사람을 만나면 좀 자제해.”반우희의 호기심이 더 커졌다.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자신이 아는 사람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레스토랑으로 들어가니 다른 몇 명의 변호사를 만나게 되었고 반우희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뒤를 따랐다.방의 문을 열기 전 묘한 긴장감이 스쳤다.스크린을 지나가자 앞사람들이 키가 커 테이블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지만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부 변호사님, 오랜만이에요.”응???반우희는 즉시 눈이 반짝였다.익숙한 목소리였다.다만 기억 속의 온화함에 여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이 더해져 있었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부승원이 말했다.“제 예상이 맞았네요.”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경
안시연은 테이블을 돌며 차례로 술을 권했지만, 얼굴에 변화가 없었다.정인과 부승원 측 사람들은 노련한 이들이라 처음엔 안시연을 그저 젊고 예쁜 여자로만 보며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몇 잔의 술을 주고받은 후 그들은 진지하게 대응하며 적당히 웃어넘기기 시작했다.안시연도 그들이 처음부터 사용권을 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럼에도 이 사용권은 반드시 따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보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안시연의 목표는 정인의 지분 참여를 끌어내 쌍방이 협력하는 구도를 만드는 것이었다.하지만 이 자리에 오기 전부터 상대방이 이미 자신의 의중을 꿰뚫고 있을 거라 예상했다. 너무 약한 모습을 보이면 더욱 불리해질 뿐이었다.이것이 바로 상대가 부승원임을 알면서도 안시연이 이 자리에 나온 이유였다.최소한 벽처럼 완고한 상대는 아닐 거로 생각했다.담소 중 안시연은 술기운을 빌려 조심스럽게 하소연을 시작했다.새롭게 맡은 자리에서 몹시 어려운 상황을 물려받았다는 얘기는 듣는 이 누구에게도 연민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었다.더구나 그녀처럼 눈에 띄는 미녀가 공격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니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분위기는 저절로 부드러워졌다.하지만 이내 그들은 다시 주도권을 잡으며 안시연의 배경을 파헤치기 시작했다.안시연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집을 나서기 전 양지원이 해준 말이 생각났다.즐거우면 일하고 싫어지면 다 팔아버리고 땅을 다시 사서 새로 시작하라는 것이었다.하지만 그렇게 해버리면 자존심이 상할 뿐 아니라 돌아가면 선생님들에게 엄청난 놀림을 받을 게 뻔했다.‘아니. 그건 싫어. 그만두면 안되.’안시연은 포기하려는 마음을 떨쳐내고 다시 의욕을 다잡으며 협상에 집중했다.그때 중간에 반우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언니, 저쪽이 땅을 안 팔 생각인가 봐요. 게다가 언니 땅에 묘지를 짓겠다고 하네요!]안시연은 어이없었다.“...”곧 반우희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연 대표님께서 그렇게 말씀하
부승원 앞에서는 쉽게 인사말을 건넬 수 있었지만, 연정훈 앞에 서니 그 말이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귀국 전에 안시연은 언젠가 연정훈을 마주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여러 번 상상해 보았다.그런데 아무리 예행연습을 해봐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막상 실전에서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연정훈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안시연을 깊숙이 응시했다.안시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 대표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연정훈은 순간 어이없었다.“...”연정훈은 미소를 살짝 지으며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고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른 것입니다.”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말했다.“지나가는 길에 뵙게 된 것도 저희에게는 기회입니다.”그러고는 카드를 비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사장님께 가서 제가 보관해 둔 술을 가져와 주시겠어요?”“네. 알겠습니다.”비서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양쪽 사람들은 정중히 연정훈에게 앉아 달라고 요청했고 안시연은 자리에서 가방을 들어 그에게 상석을 양보하려 했다.그러나 연정훈은 냉정한 표정으로 바깥쪽 의자를 당겨 편안하게 앉으며 마치 이 자리를 자기 주도 아래에 두고 행동했다.사실 연정훈이 입장한 순간부터 이 방의 분위기는 이미 그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었다.그가 앉자 모두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조정했고 출입문 맞은편 자리가 상석처럼 변했다.하지만 연정훈의 왼쪽 자리는 안시연 측 사람들에 의해 깔끔하게 비워졌다.안시연은 상황을 파악하고 비서가 술을 가져오는 동안 자리로 다가가 연정훈에게 술을 따르고 자신의 잔에도 한 잔을 채웠다.“연 대표님, 이 잔은 감사의 마음으로 올리겠습니다. 오늘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안시연은 자연스럽고 유창하게 말을 이어갔다. 연정훈뿐만 아니라 반우희와 부승원도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안시연이 연정훈을 정말 처음 보는 줄 알 정도였다.연정훈은
용도?여기에 추모 공원을 짓는다고?양시연은 속으로 툴툴거렸다.‘이렇게 큰 공간에 왕릉이라도 지으려는 거야?’그러나 양시연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알겠어요. 정인 그룹이 봐 둔 곳이라면 풍수지리적으로 아주 좋은 것이겠죠. 덕분에 좋은 곳을 알게 되어서 감사해요.”“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시연 씨.”“...”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데 자신이 성을 바꾼 사실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하지만 옆자리에서 덤덤하게 음식을 먹고 있는 부승원을 보는 순간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부! 승! 원!’‘정말 겉보기랑 다르게 가십에 빠른 변호사라니까!’양시연은 고개를 돌려 연정훈에게 말했다.“실례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정인 그룹은 이 땅을 어떻게 사용하실 생각인가요?”“아직 생각해 둔 바가 없어요.”‘생각해 두지 않았으면서 따로 용도가 있다고 말하다니.’차라리 ‘상업 기밀’이라고 말했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이건 분명 태클이 분명했다.하지만 양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최악의 상황이 오면 발을 빼면 되었다.그러니 두려울 게 없었다.양시연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정인 그룹은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면 연 대표님은 협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연정훈은 덤덤하게 양시연을 바라보며 대답했다.“협력이요?”“네.”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눈치가 빠르기로 둘째라면 섭섭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정인 그룹 사람은 아무리 두루뭉술하게 말해도 바로 알아차렸다.느닷없이 나타난 연정훈은 양시연과 모르는 사이 같아 보여도 행동에서 보면 양시연을 노리고 온 게 분명했다.그리고 늘 깔끔하고 정돈된 모습만 보이던 연정훈이 오늘엔... 시계를 차지 않았다.급하게 달려왔다는 의미였다.어느 높은 자리의 사람이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가 말하는 협력은 어떤 의미인가요?”양시연이 입을 열려는데 연정훈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더니 옆에 놓인 담배를 힐끗 바라봤다.그러자 양시연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담배를 뜯어 다른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
새벽이 되도록 양혁수의 방에는 열기가 뜨거웠다.딸깍.헤드 등을 켜고 변여름이 이불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연스레 변여름의 몸을 닦아줬다.변여름은 자꾸 양혁수를 훔쳐봤고 양혁수는 손을 뻗어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꾹 눌렀다.그러자 변여름은 양혁수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비며 입꼬리를 올렸다.이어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려오자 왠지 양혁수가 만족하지 못해 홀로 해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 옆 서랍을 열어보니 손목시계 따위만 있을 뿐 남은 콘돔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양혁수가 많이 자제한 것 같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있는 걸 통째로 갖고 오는 건데.’그리고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양혁수가 돌아왔다.변여름은 얌전히 누워있다가 양혁수의 품에 꼭 안겼다.양혁수의 체향을 느끼며 변여름은 두 눈을 감고 얼굴을 비볐고 목 언저리에 뽀뽀하려 했다.그러나 양혁수가 변여름을 제지했다.“지금 뭐 해?”“왜요?”양혁수는 제 목에 있는 흔적을 가리켰고 새길 때는 몰랐지만 샤워하고 나니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변여름이 지난번처럼 또 정도 없이 세게 흔적을 남긴 모양이었다.하지만 이번 모양과 색깔이 너무 마음에 들어 변여름은 미안한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오빠 다음엔 반대편도 해줄게요.”“...”양혁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취조하듯 방금 잠자리가 만족스러웠냐고 물었다.“오빠, 나 다른 것도 배웠는데 오빠만 좋다면... 읍!”양혁수는 바로 변여름의 입을 막았다.“...”‘풉. 부끄러워하긴.’양혁수는 본인이 오빠로서 리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 꼬맹이한테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잠이나 자!”그래서 고작 이런 일로 무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흥. 오늘은 이만 물러선다.’변여름은 얌전히 몸을 돌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자꾸 치근덕거렸다.“오빠가 많이 보수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요
변여름은 말재주가 뛰어났고 그대로 두면 분명 더 큰 소동을 일으킬 기세였다.양혁수는 그녀를 다잡아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변여름은 밀고 당기기에 능했고 결국 늘 그가 그녀를 달래는 쪽이었다. 변여름을 제압하려면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유혹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서로가 진심을 담기 시작하면 결국 누가 누구를 먼저 유혹한 건지조차 흐려진다.어느새 그녀는 그에게 기대어 그를 천천히 침대로 이끌었다.양혁수는 조용히 누워 있었고 변여름은 이불 속에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표정은 잔잔했지만 눈동자에는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는 익숙한 듯 그의 팔을 벌리고 조용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내 그의 온기를 안은 채 잠이 들었다.양혁수는 차갑게 굴어보려 했지만 몸은 정직하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자 그는 스스로의 입을 때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왔다.저녁이 되면 변여름은 양혁수 곁에서 말이 많아졌다. 그녀는 그와 감정을 나누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전부 들려주었다. 작은 머릿속은 놀라울 만큼 명확했고 양혁수가 확신하지 못하던 일들을 종종 먼저 짚어내곤 했다.그러다 보면 두 사람의 입술은 자석처럼 끌려붙었고 전에는 양혁수가 불씨를 조심스럽게 다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변여름을 집에 데려온 첫날 밤 양지원을 마주친 이후의 느낌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녀를 몸 아래에 눕히고 얼굴을 감싸안은 채 키스하자 변여름은 그의 몸에 다리를 스치듯 비볐고 그는 순간적으로 치솟는 충동을 느꼈다.자신의 반응을 깨달은 그는 재빨리 움직임을 멈췄다.변여름에게 들킬까 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조명의 밝기를 낮추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막 눕자마자 변여름의 부드러운 몸이 다시 양혁수의 품에 파고들었고 변여름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으며 단 한 번의 눈 맞춤으로 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
양혁수의 ‘착하지’라는 한마디에 변여름의 입꼬리는 하늘까지 닿을 듯 환하게 올라갔다.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 능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밤 11시 30분이 넘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자 아마도 자신이 먼저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아이고.’변여름은 그의 장난에 넘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간질이는 마음을 안고 그녀는 문가에 서서 발끝을 들어 여러 번 밖을 내다보았다.밤이 깊어 12시가 다 되어도 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외투를 걸쳐 입은 채 문을 열고 나섰다.양씨 가문의 저택은 워낙 넓어서 그녀가 양혁수의 방에 닿기 위해선 한 층 아래로 내려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어야 했다.몰래 발걸음을 옮겨 문 앞에 선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예상대로 잠겨 있지 않았다.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은 숨 막힐 듯 어두웠다.침실은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녀는 익숙한 감각과 뛰어난 시력에 의지해 침대를 더듬어 앉았지만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변여름은 숨을 죽인 채 주변을 감지했고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혹시 오빠가 나를 찾으러 간 걸까?’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작은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녀는 즉시 멈춰 섰다.달빛이 비추는 거실 그 한쪽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침실 문을 빠져나온 그녀가 멈추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았고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그의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것을 가볍게 던지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변여름은 품에 안긴 이가 양혁수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갑작스레 뒤에서 안아오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이어진 그의 키스가 그녀의 옆얼굴에 가볍게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양혁수는 평소 그녀가 마음껏 표현하게 두었지만 자신이 먼저 유혹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