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 씨, 가끔 말하는 게 사람을 정말 화나게 하는 거 알아요?”양시연이 갑자기 물었다.연정훈은 의아해했다.양시연은 턱을 괴고 말했다.“정훈 씨는 언제나 사람을 턱 끝으로 내리깔면서 보는 것 같아요. 모든 게 당신 손안에 있다는 듯이 말이죠.”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턱을 만져보더니 조금 내렸다. 그러나 편하지 않아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갔다.몇 초 사이에 연정훈은 머릿속에서 여러 자세를 떠올렸지만, 자세를 살짝 바꾸는 것만으로도 턱을 어디에 둬야 할지 난감해졌다.양시연은 연정훈이 머리를 숙였다 들었다 하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흘깃 보며 찡그렸다.그는 어려서부터 예의범절을 중시했고 항상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다는 말을 들어왔지 예절 문제로 지적받은 적은 없었다.잠시 생각한 연정훈은 말했다.“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일단 내 의견은 보류할게.”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그의 엉뚱함에 방심한 양시연은 경계를 조금 늦추고 물었다.“이제 본론 말해줄 거죠?”연정훈은 방금까지의 혼란을 잠시 접고 자신감을 되찾았다.“상회에서 고전 중이야?”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양시연은 짜증을 내며 말했다.“그 사람들 정말 까다로워요.”“당연히 까다롭지. 그들은 목숨 걸고 살아남은 사람들이야. 네가 양씨라고 해서 다들 널 공주처럼 대할 거로 생각하면 안 돼.”양시연은 말했다.“공주가 되려는 건 아니에요. 다만 하녀처럼 되고 싶지도 않아요.”“지금 너는 아직 인터참 프로젝트 하나만 맡아봤잖아. 하녀처럼 대우받는 것도 네가 양씨라서 그런 거야.”양시연은 입술을 삐죽였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작은 반응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한 번에 성공하고 싶은 거야?”양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솔직하게 말했다.“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요즘 상회 사람들과 접하면서 느낀 건 이 바닥에서 서열 문화가 너무 심각하게 있어요.”연정훈은 금방 이해했다.그녀는 하녀가 되는 게 두려운 게 아
“제게 인맥을 넓혀주려는 거예요?”“응.”양시연이 말했다.“우리 엄마도 사람들 소개해 줄 수 있어요.”연정훈은 대답했다.“둘 다 양씨라면 결국 나 혼자 싸우는 셈이지.”“그럼 양 씨랑 연씨인 정훈 씨와 같이 있으면요?”연정훈은 말했다.“그러면 일도 두 배로 잘 풀릴 수도 있지.”양시연은 어이없었다.“...”‘뭐. 그럴싸하긴 하네.’“정훈 씨, 그 사람들에게 저를 여자친구라고 소개하면서 저한테 함부로 하진 않을거죠?”계단을 오르며 양시연은 살짝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한 번 쳐다보았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은 가벼운 한숨을 쉬며 물었다.“네가 보기엔 내가 어떻게 소개하는 게 나을까?”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갑자기 그의 팔짱을 끌어안았다.연정훈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그때 양시연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연정훈 오빠? 이렇게 부르면 괜찮겠죠?”연정훈은 침묵했다.“...”그는 입꼬리를 떨면서 이를 악물었다.종업원이 이미 다가왔다. 연정훈은 손목을 뽑으며 차갑게 말했다.“양 아가씨, 가시죠.”‘이 호칭도 괜찮다. 합리적이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올라갔다.연정훈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양지원이 양시연을 데리고 사람들을 만나면 양시연은 한 사람씩 인사를 해야 했다. 하지만 연정훈이 양시연을 데리고 가면 강압적인 분위기가 형성됐다. 양시연이 입을 열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비즈니스 관계를 벗어난 것 같았다.물론 새로운 문제도 생겼다. 사람들은 그녀를 연정훈의 부속품처럼 취급하게 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오후부터 밤까지 계속 미팅이 진행되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데리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 대부분은 유명한 상품 업계를 이끄는 인물들이었다.이 사람들이 주로 논의하는 주제는 최근 화서시에서 있었던 큰 사건 즉 화서시와 해외 합자 기업 회신테크가 어떻게 노산 시티의 거대 기업인 일성 그룹을 위기에 처했는지에 관
“오후에 얘기를 끝내고 곧 헤어졌어.”양시연이 담담하게 말했다.양혁수는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연정훈 씨와 공적인 얘기를 할 일이 있어?”양시연은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어차피 나랑 연정훈 씨는 공적인 얘기밖에 할 게 없으니까.”“...”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옆에 있던 연정훈도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잠시 후 양혁수가 조용히 말했다.“밖에서 조심하고 내일 일 끝나면 바로 집에 와서 자.”“알았어.”이 짧은 대화는 겉으로 보면 평범한 남매 사이의 대화처럼 들렸다.전화를 끊고 난 뒤 양시연은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일성 그룹의 일이 바로 정훈 씨가 말했던 기회인가요?”연정훈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본 채 대답했다.“맞아.”양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일성 그룹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형 기업으로 C150 시장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최근 C150의 가격이 급등하던 시점에서 일성은 가격이 정점에 도달했다고 판단해 재고를 매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 달리 국제적 사건으로 인해 가격은 더더욱 상승했고 일성은 손실을 보았지만, 매수 청산을 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문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고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회신테크는 이 기회를 노리고 가격을 더 끌어올리며 일성을 압박하기 시작했다.“지금 상황을 보면 회신테크는 처음부터 일성을 겨냥한 거예요. 일성이 재고 부족으로 대응하지 못할 걸 알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가격을 계속 끌어올려 일성을 완전히 무너뜨릴 준비를 한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계산을 해본 뒤 다소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만약 천 회장이 기한 내에 C150을 충분히 납품하지 못하면 일성의 손실은 몇백조 원을 넘어설 거예요.”수년간 업계를 주름잡았던 거대 기업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정인도 중공업 회사인데 혹시...”“없어.”연정훈의 단호한 대답에 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
“정훈 씨, 저를 데리고 선물 계약을 할 거예요?”“응.”양시연은 머리를 말리며 말했다.“전에 잠깐 해본 적은 있어요. 그런데 심오하게는 하지 않았어요.”“얼마 벌었어?”“못 벌었어요. 그냥 시뮬레이션 시스템에서 해본 거라서요.”“그럼 실전 경험은 없다는 얘기네.”“...”‘응.’연정훈은 살짝 오른 술기운에 얼굴이 붉어진 채 옷깃을 풀며 소파에 몸을 편히 기대었다.조명 아래서 그의 팔목에 찬 검은 파텍 필립 시계가 연정훈의 차분하고 깊은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연정훈은 목젖을 한 번 넘기며 양시연 쪽을 조용히 두 번 바라봤다.“머리 말리고 우리 얘기 좀 하자.”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서둘러 머리를 말리고 드라이어를 내려놓으며 문득 물었다.“혼자 왔어요?”연정훈이 말했다.“기사님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이야기 다 끝나면 바로 갈 거야.”그는 양시연을 째려보면서 말했다.“걱정 마. 여기서 밤새울 생각은 없어.”“...”둘은 마주 앉았고 그사이에 포근한 카펫이 놓여 있었다.이제 양시연은 예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지식을 쌓아 더 이상 듣기만 하는 청취자가 아니었다.하지만 연정훈의 이론과 실전 경험은 여전히 그녀의 한 발 앞에 있었다. 조금이라도 심오한 대화로 넘어가면 양시연은 온전히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지식이 너무 빨리 쏟아져 나오자 양시연의 술기운은 조금 가라앉았다. 양시연은 자주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뒤로 넘겼다.어쩌면 양시연은 지적 매력에 끌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고지식한 남성에게 자연스러운 호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연정훈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갈 때 양시연은 그의 매력에 빠져들며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한참 후.“아츄.”갑자기 양시연이 갑자기 크게 재채기했다.연정훈은 말을 멈추고 그녀를 찬찬히 쳐다보며 물었다.“몸이 안 좋아?”양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눈을 비볐다.“괜찮아요...”그러나 연정훈은 양시연의 풀린 눈과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보고는 단호하게 말했다.“피곤하면 자
손끝으로부터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에 연정훈의 몸은 조각상처럼 굳어졌다.아직 정신이 해롱해롱한 양시연은 아무런 생각 없이 혀를 내밀어 그의 손끝을 핥고 또 핥았다. 연정훈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내밀었던 손을 뒤로 감추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침을 삼키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자는 거야?”낮은 소리로 뭐라 중얼거리는 양시연은 잠이 든 것 같지 않았다. 연정훈은 몸을 돌려 누워 뒷모습만 남긴 양시연에게 이불을 살포시 덮어주고 그녀 곁을 지켰다. 몇 분 뒤 드디어 꿈나라로 떠난듯한 평온한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침대 옆에 있던 연정훈은 방을 떠나지 않고 소파에 앉아 그녀 곁을 지켰다.얼마나 지났을까 연정훈이 비몽 사몽하게 눈을 떠보니 양시연이 침대에 누운 채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무슨 일이야?”연정훈이 물었다.“정훈 씨.”“응. 무슨 일 있어?”양시연은 입술을 오므리더니 잠깐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저 배고파요.”“너 방금 토했잖아. 먹을 수 있겠어?”“네. 아까 위를 비워서 그런지 배고파요.”말을 하는 내내 양시연의 눈길은 그가 가져온 도시락에 꽂혀있었다.“찹쌀죽이랑 만두네?”연정훈이 도시락에 들어있는 음식을 하나하나 알려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양시연은 도시락을 바라보며 군침을 꼴깍꼴깍 삼켰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연정훈은 그런 양시연의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 웃음을 터뜨렸다.“먹고 싶어?”양시연은 연정훈을 경계하며 대답했다.“다 먹고 나면 또 저랑 결혼하자고 할거예요?”연정훈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쯧. 완전히 취한 건 아니었네.’“나랑 결혼하는 게 그렇게 싫어?”양시연은 눈을 감고 엎드렸다가 연정훈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양시연은 어느 정도 술이 깬 상태라 정신은 맑았지만 생각나는 대로 입을 여는 것이 문제였다.“정훈 씨는 결혼하고 싶지 않으시다면서요. 예전에 독신주의셨잖아요. 평생 결혼하지 않으실거라고 하셨잖아요.”“그건 예전이고.”“정훈 씨, 지금 나이 드셔서 결혼
연정훈은 양시연의 신분을 추측해 보았었다.그는 양혁수와 양지원이 3년 동안이나 떨어져 지낸 사실과 현재 오성호의 처지를 통해 뭔가 눈치채고 있었다.하지만 양시연의 친아버지가 양석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양시연은 아직도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그녀는 연정훈과 아버지에 관한 얘기를 나누려고 몸을 일으켰다.이때 연정훈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마침 얘기를 하려는 양시연의 입을 막았다.갑자기 입 막힘을 당한 양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연정훈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눈을 깜박이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연정훈의 손을 홱 뿌리쳤다.‘정훈 씨 뭐 하는 거야?’연정훈은 잔뜩 성이 난 양시연을 달래려 입을 열었다.“너희 아버지가 양석진 씨라는 걸 절대로 말하면 안 돼. 알았지.”그의 말에 양시연은 어리벙벙해졌다.물론 그녀도 이 일은 비밀이어서 함부로 말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알겠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말하고는 잠깐의 고민 뒤에 다시 드러누우려 했다.“말 안 할 거예요.”연정훈을 그녀 허리에 감겨있는 두 팔에 힘들 넣어 드러누우려는 양시연을 일으키고 물었다.“이 일은 또 누가 알고 있어?”“무슨 일 말씀이세요?”양시연이 정색하며 물었다.“...네 아버지가 양석진 씨라는 거 말이야.”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시연이 소스라치게 놀라서 물었다.“정훈 씨가 어떻게 아셨어요?”연정훈은 어이가 없어서 침묵을 지켰다.양시연은 머리카락을 쥐어 잡으며 잔뜩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입술을 핥으며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찾아 가족들에게 비밀이 유출되었다고 보고하려던 참이었다.“괜찮아. 말 안 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마.”“제 핸드폰 어디 있어요?”양시연은 벌써 핸드폰에 주의를 돌렸다.연정훈의 입꼬리가 가볍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베게 옆에 놓인 핸드폰을 발견하고 그녀 손에 직접 쥐여주었다.양시연은 무거운 집을 벗어버린 듯 홀가분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손에 꼭 잡고 드러누웠다.
양시연은 오랜만에 좋은 꿈을 꾸었다. 꿈속의 그녀는 아주 제멋대로였다.부드러운 입술, 녹아내리는 마음.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녀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내가 너랑 결혼하기 전까지 얌전하게 기다려줘.”‘음...뭐지? 머리도 아프고 허리도 좀 시큰시큰한 거 같은데.’양시연이 꿈나라에서 깨어날 때 방은 에어컨 바람 덕분에 아주 시원했고 커튼이 닫혀있어서 저녁처럼 어두컴컴했다.옆에 있는 시계를 보니 이미 열 시가 다되었다.소스라치게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자 양시연은 세상이 돌아가는 것처럼 어지러웠다.‘망했어.’급히 핸드폰을 열어보니 무음 모드 때문에 미처 받지 못한 부재중 전화 여러 통이 와있었다.양시연은 허탈하게 침대에서 2초 동안 멍해 있다가 전화를 다시 걸려고 했다.이때 손목에 차인 남성용 시계가 눈에 띄었다.‘누구 거지?’파텍필립 블랙 다이얼.순간 여러 가지 화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고 그녀는 시계의 주인을 찾았다. 양시연은 이마를 치며 생각했다.‘정훈 씨 거구나. 어젯밤이 미친 듯이 정보를 캐냈는데 이 시계가 어떻게 내 손에 있는 거지?’양시연은 생각을 그만하고 몸을 단장한 뒤 비서에게 연락했다.다행히도 비서가 양시연의 상황을 눈치채고 해야 할 일을 절차대로 마무리했다.양시연이 회의를 열어 인터참의 일을 알맞게 안배하자마자 연정훈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깼어?”연정훈이 자연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양시연은 잠깐의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제 몇 시에 떠나신 거예요? 떠나실 때 시계를 두고 가셨죠?”연정훈이 대답했다.“두고 간 거 아닌데. 네가 가져간 거야.”“네?”“너 이제부터 술 못 마시면 마시지 마. 그 정도 주량으로 마셨다간 큰일 나. 네가 만난 모든 사람이 좋은 사람일 수는 없잖아.”양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연정훈이 한마디 덧붙였다.“괜찮아. 난 먼저 떠나서 시계만 뺏겼어.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걱정하지마.”그 말에 양시연은 입을 삐죽거렸다.그녀가 뭐
이 사람들과 며칠 동안 일을 함께 해보니 양시연은 왜 돈과 포르노가 항상 엮여있는지 알 수 있었다.사람들은 흥분한 상태에서 더 심한 정신적인 자극을 받고 싶어한다.극도로 흥분한 상황에서 화끈한 밤을 보낼 수 있다면 마다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아까 금방 양시연은 한우빈이 비서를 품에 안고 휴식실로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이는 아주 흔한 일이었다.낮에 사람들 앞에서 화려한 모습을 보이는 엘리트들은 누구나 여자를 곁에 두고 있었다.오히려 부승원처럼 사생활이 깨끗한 남자가 고행승이라고 불리지. 연정훈은 뭐.아.이 사람들 모두 양시연이 연정훈과 그런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는 부승원과 함께 수행하는 행렬에 들지 못했다.의자에 앉아있는 양시연의 등 뒤에는 등불이 찬란했다. 양시연은 커피를 들고 서 있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대표님도 자주 저래요?”“무슨 말이야?”양시연은 휴식실 방향으로 턱을 치켜들어 짚었다.‘혹시 대표님도 흥이 나면 여자를 품에 안고 저러나?’연정훈은 시선을 이동하여 그녀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이런 말은 모호하게 하지 마, 내가 착각할지도 모르니까. 나는 네가 이상한뜻으로 눈치 주는 줄 알았어.”양시연은 그를 한 번 노려보고는 발을 의자의 페달에 올려놓고 한 바퀴 빙글 돌아 다시 그와 등지고 앉았다. 그녀는 나무 테이블에 엎드린 채 밖에서 달리고 있는 차들을 보며 넋을 놓았다.연정훈은 그녀가 커피를 별로 안 마시는 것을 보고 따뜻한 우유 한 잔으로 바꿔 주려 했다. 하지만 양시연이 잽싸게 커피를 가로채 앞으로 가져왔다.오전에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녀가 남긴 음료를 연정훈이 마셔버려 입이 열 개여도 설명할 수 없었다.연정훈은 한쪽 눈썹을 치켜든 채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양시연의 뒤에 서서 물었다.“요 며칠 어땠어?”“너무 쩌릿했어요.”요 며칠 돈에 발이 달린 듯 자기 절로 그녀의 주머니로 들어왔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안 올 거예요.”그녀가 말했다.연정훈은 일찍 감지 이를 예상하였다.애초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