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성은 예정대로 교활을 완료했고 회신테크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두 회사 모두 막대한 손실을 보아 승패를 가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럼에도 이 혼란 속에서 유일한 승자는 양시연이었다.그녀는 연씨 가문과 양씨 가문이라는 두 강력한 배경의 지원을 등에 업고 사건 후반부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게다가 표씨 가문에서 업계에다 이 결과가 사실상 양시연의 작품이었다는 이야기를 흘렸다.건물 밖으로 나오자 가는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는 너무 미세해 안경 위로 방울이 맺히고 나서야 비로소 비 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양시연은 손에 가방을 든 채 차 옆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코 위에 얹힌 안경을 벗어 손에 쥐고 아릿한 콧대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하이힐을 신고 걸으니 숨이 가쁜 것이 느껴졌다.검은 셔츠를 입은 연정훈은 소매를 접어 올려 팔뚝을 드러내고 한 손은 정장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연정훈은 말없이 차 문을 열어주고 양시연에게 타라는 듯 조용히 눈짓했다.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몸을 숙여 차에 올라탔다.차 문이 닫히자 강하게 작동하는 히터의 온기가 그녀를 감쌌다. 양시연은 차가운 기운에 어깨를 움츠리며 자리에 앉았다. 발바닥에 따뜻한 공기가 스며들다 차갑게 식는 감각이 교차하며 간지러운 듯 아릿했다.연정훈은 자기 정장을 벗어 양시연에게 건넸다. 양시연은 잠깐 그것을 바라보다가 옆에 내려놓고는 입지 않았다.“거래소가 이런 결정을 내리면 더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양시연이 조심스레 물었다.거울 너머로 연정훈의 목이 살짝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무심한 듯 고개를 들어 양시연과 시선을 마주쳤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눈을 피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은 여전히 거울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며 차분히 대답했다.“부승원이 수습할 거야.”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아무리 변호사가 뛰어나도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만 움직일 수 있잖아요.”연정훈이 답했다.“
양시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차가 산장 입구에 멈추고 차창이 열리자 튜베로즈가 무더기로 활짝 피어 있었다.밖에서는 규칙적인 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옆에서는 연정훈의 고른 숨소리가 이어졌다.양시연은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연정훈의 평온한 옆모습을 바라보았다.‘피곤한 건가? 나도 밤새웠는데 정훈 씨도 함께 밤을 새운 걸까?’양시연은 장난기가 발동했다.‘정훈 씨의 코를 잡으면 깰까?’“연정훈 씨...?”양시연은 낮은 목소리로 연정훈을 불렀다.그러나 연정훈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미간조차 꿈쩍하지 않았다.양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돌리다 창문 틈으로 삐져나온 꽃을 발견했다.그녀는 팔을 뻗어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꽃 한 송이를 꺾었다.그 꽃을 손에 들고 연정훈의 코앞에서 흔들며 냄새를 맡게 했다.연정훈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어이없네. 돼지처럼 자네.’양시연은 꽃을 차창 밖으로 던져버렸다.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오면서 그녀의 배는 이미 몇 차례 소리를 냈다.그러자 양시연은 장난기가 발동해 갑자기 몸을 일으켜 옆으로 훌쩍 이동하며 기대 있던 연정훈의 머리를 빼냈다.연정훈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마치 꿈속에서 발을 헛디딘 것처럼 몸이 옆으로 쏠렸다.그는 찡그리며 눈을 뜨고 본능적으로 몸을 지탱했다.그리고 돌아보니 양시연의 무심한 눈빛과 마주쳤다.“무슨 일이에요? 악몽이라도 꾸셨어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양시연의 자세를 훑어보며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정말 매정하군. 내가 잠깐 기대는 것도 허락하지 않다니.’연정훈은 목이 타는 듯해 꿀꺽 침을 삼켰다.양시연은 친절한 척 물을 건네며 말했다.“여기요. 목마르죠? 물 좀 드세요.”연정훈은 차가운 시선으로 물을 받아들였다.마침 창밖으로 아는 사람의 차가 지나갔고 양시연은 차 문을 열고 그에게 내릴 것을 권했다.남산 저택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고 주차장에는 주차 자리가 부족했다. 고급 차들이
연정훈은 그저 한 번 손을 잡았을 뿐이었다. 양시연이 손을 빼자 그는 바로 놓아주었다.사람들 앞에서는 그녀와 특별한 관계를 드러내지 않았다.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뭔가 특별한 연결이 있음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그들은 천 회장과의 자리에서 두 시간을 보낸 뒤 앞뒤로 방을 나섰다. 그리고 바로 옆의 홍천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한우빈과 이승우 일행이 모임을 하고 있었고 양시연의 직원들도 옆방에서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술자리의 격식 있는 분위기와 달리 이승우 일행의 방은 한층 더 텐션 높은 축제 분위기였다. 문을 열자마자 어두운 방 안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독립된 클럽처럼 음악과 대화가 어우러져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방 안 공기에는 호르몬이 충돌하는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양시연은 그 안에 있으면서도 어지럼증을 느꼈다.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기에 취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양시연은 방 안에 퍼져 있는 독특한 향기가 평범하지 않음을 알아챘다.다행히 위험한 물질은 아니었고 차가운 물 한 잔을 마시자 금세 제정신이 돌아왔다.멀리 보이는 커다란 도박 테이블 위에는 높은 금액의 베팅이 오가는 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테이블의 숫자들을 바라보며 양시연의 머릿속에는 최근 며칠간 다룬 자금들이 스쳐 갔다.순간 피가 뜨겁게 끓는 기분이 들었다. 흥을 돋우는 향기보다도 돈과 권력의 유혹이 그녀를 더 강렬히 자극했다.소파에 기대앉아 있던 양시연은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연정훈을 바라보았다.그는 마치 하늘을 뒤집고 비를 내리는 듯 이 자리에 있는 다른 남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그가 도박 테이블에 앉아 능숙하게 판을 이끄는 모습은 운조차도 그의 편이라는 느낌을 주었다.그래서인지 방 안의 여성들은 그의 움직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양시연은 다시 차가운 물 한 잔을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그러나 실수로 손이 연정훈의 허벅지 위에 닿았다.얇은 옷감 너머로 전해지는 양시연의 손바닥이 차가움과
양시연은 깊게 숨을 내쉬며 연정훈을 바라봤다.“정훈 씨, 정말 능숙하네요. 여자들한테 이런 질문 많이 해봤나 봐요.”연정훈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답했다.“아니. 너한테만 물어봤어.”“...”연정훈은 여전히 양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양시연은 침을 삼키며 가로등 불빛 아래 또렷이 드러난 그의 입술에 시선이 멈췄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날 강남 시티에서 연정훈이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고 키스했던 순간이 떠올랐다.거칠고 강렬했던 그 키스는 마치 자신을 온전히 삼켜버리겠다는 듯한 감각을 남겼다.그런데도 지금 양시연은 자신이 그 강렬함을 다시 원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부드럽고 다정한 키스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바라지도 않았다.연정훈은 전 남자친구였고 관계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 충동이 단지 일시적인 생리적 반응일 뿐이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양시연은 더 이상 연정훈을 예전처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런 충동은 단지 생리적 욕구일 뿐이었다.‘안 돼. 이건 위험해.’양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아꼈다. 연정훈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잠시 후 그는 조용히 담배 한 갑을 사러 갔다.양시연은 이들이 재회한 이후 그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처음 목격했다.담배 끝에서 작은 불빛이 희미하게 빛났고 연정훈의 얇은 입술 사이에 담배가 물려 있었다. 연정훈이 연기를 내뿜을 때마다 보여주는 여유만만한 눈빛과는 달리 시선은 그녀에게 떠나지 않았다. 게다가 지속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연정훈은 담배를 더 깊이 빨아들였다. 연정훈의 미간은 점점 더 좁아졌고 마치 니코틴으로 양시연에 대한 억눌린 욕망을 진정시키려는 듯 보였다.양시연은 그 시선이 자신을 휘감는 기분에 숨이 막힐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그러나 연정훈은 담배의 마지막 한 모금을 깊이 들이마신 뒤 담배를 발로 비벼 끄고는 천천히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양시연은 여전히 느긋하게 앉아 있었지만, 반응할 새도 없이 연정훈은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 뒤를 감싸며 창문 밖으로 양
강남시티의 정원 계단 아래 양시연은 문을 여는 연정훈을 바라보며 머릿속에서 끊임없는 갈등을 벌이고 있었다.“들어와.”연정훈은 문턱에 서서 짧게 말했다.양시연은 입술을 살짝 적시며 그의 깊고 무거운 시선을 마주했다.“내일 다시 올게요. 저는 먼저 가볼게요.”연정훈은 문을 약간 열어 둔 채 말없이 양시연을 바라보았다.양시연은 손에 든 가방끈을 꽉 쥐었다. 머릿속이 점점 더 흐릿해졌다. 술기운도 거의 사라졌고 강렬한 향도 없었는데 왜인지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그녀는 계단을 몇 걸음 올라갔다. 연정훈의 시선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듯 눈길을 떼지 않았다.문턱을 넘는 순간 양시연은 작게 말했다.“나비를 불러 주세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시연은 문 안으로 들어섰고 연정훈과 다시 마주쳤다. 연정훈의 눈빛은 더 이상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눈빛 속엔 포식자가 덫에 걸린 사냥감을 응시하는 듯한 냉정한 기세가 담겨 있었다.양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연정훈의 공격 기세가 느껴지자 양시연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도망가려 했다.그러나 이미 늦었다.연정훈은 단숨에 그녀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그리고 한 손으로 문을 거칠게 닫았다. ‘쿵’하고 닫힌 문이 내는 소리와 함께 양시연은 대문에 등을 기댔고 옆에는 연정훈의 강한 팔이 벽처럼 양시연을 가로막았다.그 순간 호숫가에서 키스가 생생하게 떠올랐다.연정훈의 몸에서 풍기는 담배 향이 은은히 코끝을 파고들었다. 그 향기는 양시연의 신경을 일깨우며 온몸 깊숙이 파고들어 짜릿한 전율을 일으켰다.양시연은 그제야 그 향기가 만들어낸 치명적인 효과를 깨달았다.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연정훈은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왔다.단 한 번의 눈빛 교환만으로도 양시연은 그가 자신을 향한 욕망에 불을 지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연정훈은 겉으로는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연정훈의 키스는 모든 자제심을 잃은 것처럼 뜨겁고 거칠었다.양시연은 온몸이 긴장
양시연의 손은 제압당한 채 연정훈의 장난스러운 손길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가 부드럽게 양시연의 몸속을 파고들어 결국 심장까지 전해졌다.심장은 겁날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귓가에는 연정훈의 짜증 나는 위협의 목소리가 압박하듯 들려왔다.“대답해.”‘대답은 무슨!’양시연은 짧게 신음을 흘리며 연정훈의 품 안에서 몸을 두 번 비틀었다.“일단 날 놓아줘요.”연정훈은 양시연의 귓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놓아주는 대신 한 손을 자유롭게 풀어 양시연의 셔츠 단추를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하나, 둘. 연정훈의 손가락이 양시연의 쇄골을 스치자 양시연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결국 연정훈의 품 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한여름에 거실엔 에어컨이 켜져 있었지만, 두 사람의 격렬한 분위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미 땀이 흘러내렸고 양시연의 등은 연정훈의 가슴에 밀착되어 있었다. 그 접촉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연정훈은 건조한 침을 삼키며 목젖이 미세하게 떨렸다. 세 번째 단추를 풀고 나서 양시연의 가슴에 맺힌 땀을 느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손가락을 살짝 구부려 양시연의 가슴골에 맺힌 땀방울을 부드럽게 닦아냈다.미끄러운 느낌과 미세한 마찰감에 양시연은 가늘게 숨을 들이켰다.연정훈은 손을 들어 은은한 불빛 아래에서 손가락에 맺힌 물방울을 양시연에게 보여주며 일부러 과시하듯 행동했다.양시연은 그를 욕하고 싶었지만, 숨조차 쉴 틈이 없었다.연정훈은 천천히 손을 양시연의 셔츠에 문지르며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양시연의 속옷 주위를 서서히 따라가며 위협적으로 다가갔다.“네가 말했지. 정인을 너에게 줄 테니 나랑 결혼하자고. 기억나?”연정훈이 오래된 얘기를 꺼내자 양시연은 깊게 숨을 두 번 들이쉬며 얼굴을 돌리고 이를 악물었다.“필요 없어요. 놓아줘요!”“필요 없다 하면 끝이야?”연정훈은 양시연의 가슴을 밀치고 한 손을 두 사람 사이로 넣어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양시연의 속옷 고리
양시연은 몸을 일으켜 삼키며 계속해서 침을 삼켰고 도망가려고 했지만 연정훈은 양시연의 길을 막았다. 연정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며 벨트를 천천히 풀어냈다.양시연이 몸을 틀어 피하려 하자 연정훈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잡아 침대 중앙으로 밀어 눕혔다.양시연이 고개를 들자 그의 무릎이 침대에 눌려 두 다리가 양시연의 몸 양옆으로 벌어져 있었고 연정훈은 몸을 구부려 한 손은 양시연의 얼굴 옆에 댔다.고개를 돌린 양시연의 시선 끝에 떨어진 벨트가 보였다. 금속 버클이 코끝 가까이서 반짝였다.양시연은 가죽 특유의 미세한 냄새와 연정훈 옷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이 어우러져 코끝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익숙하면서도 강렬한 그의 향기였다.양시연은 눈을 꽉 감고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양시연이 저항을 멈추자 연정훈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연정훈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옆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너를 웃게 하려고 삼촌한테 큰소리도 들었어. 아직 부족해?”양시연은 이를 악물며 눈을 떴다.“내가 도와줄 때 이미 말했잖아요. 이 일로 결혼 문제를 거래할 생각 없다고요.”“나는 거래하려는 게 아니야.”“그러면 지금 뭐 하는 거예요?”양시연은 화가 나서 얼굴을 돌렸다.그녀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두 사람의 코끝이 가볍게 스쳤다.두 사람의 호흡이 엉키며 공기마저 희미해진 듯했다.연정훈은 미소를 띠며 몸을 살짝 들어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난기 어린 눈빛이 스쳐 갔다.“내가 지금 뭐 하는 것 같아?”“정훈 씨는...”“너를 기쁘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연정훈이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양시연은 어이없었다.“...”양시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자존심 때문에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날 놔달라니까요!”말이 끝나자 양시연은 연정훈의 입술을 조심스레 깨물었다.연정훈은 여유롭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널 풀어주면 네가 날 더
연정훈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양시연을 침대에 기대도록 손짓하며 양시연을 편히 눕혔다.하지만 양시연은 몸을 움츠린 채 경계하듯 그를 노려보았다.연정훈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불을 가져와 덮어주었다.양시연은 이불을 확 던져 다시 그의 손에 돌려주며 속으로 생각했다.‘누가 이걸 달랬다고.’연정훈은 잠깐 침묵했다.“...”‘이 고집. 지원 이모랑 똑같네.’“왜 말을 멈췄요?”양시연이 먼저 날카롭게 그를 몰아붙였다.연정훈은 침대의 반대편에 조용히 앉았다. 그녀와 너무 가까이 있으면 자칫 또 화를 낼까 싶어서였다.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소현주는 정신병원에 있어.”양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정훈 씨, 참 대단하네요. 전 여자친구가 정신병원에 갔는데도 이렇게 신경 써주는 남자라니.”“내가 신경 쓴 거 아니야. 소현주는 그냥 일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어. 관리도 다른 환자들과 다를 게 없고 보호자는 소현주의 친척이야.”하지만 양시연은 그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흘겨보며 믿지 않았다.연정훈은 잠시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사실 소현주가 지금도 신주병원에 있는지조차 난 몰라.”양시연은 비웃으며 쏘아붙였다.“그럼 알아보면 되겠네요. 이제 아무도 정훈 씨가 소현주 씨 걱정하는 걸 막을 사람 없잖아요. 찾아가서 확인해 보세요. 아니면 아예 같이 병원에 입원해도 되고요.”연정훈은 침묵했다.“...”연정훈은 이마를 짚으며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양시연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은 정도였다. 이 몇 년간 어떻게 수련했는지 궁금했다.양시연은 그가 다가오려 하자 병아리처럼 몸을 움츠렸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연정훈은 그 모습에 어이없어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굳이 소현주랑 함께 입원할 필요는 없어. 난 소현주와 헤어진 순간부터 다시 얽힐 생각이 없었으니까.”양시연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작게 중얼거렸다.“...쳇.”양시연은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연정훈은 화를 내는 대신 차분하게 말을 이어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