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변호사께서 원래 우희 씨와 함께 병원에 가려고 했어요?”양시연이 시험 삼아 물었다.반우희는 ‘아이구’하며 한숨을 쉬고 답했다.“승주가 어떻게 부 변호사랑... 아니 부 대표님과 친해는지 모르겠어요. 승주가 꼭 대표님을 자신의 축구 경기 보러 오라고 하더라고요. 경기는 오후에 있고 저는 동준 데리고 병원에 가야 하는데 승주가 부 대표님을 일찍 오시라고 고집을 부려서요.”양시연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승주는 날씨가 추워서 부대표님이 우희 씨랑 동준이를 병원에 데려가 주길 바랐던 거네요?”반우희는 어깨를 축 처뜨리며 한숨을 쉬었고 양시연은 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반우희를 바라보았다.“그래서 부 대표님이 응답했어요?”이 말이 나오자 반우희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께서 승주를 꽤 좋아하는 것 같아요.”양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아마 그건 아닐 거야.’“제가 부 대표님한테 말해 볼게요.”반우희는 준비하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양시연은 급히 그녀를 불렀다.“왜 그래요?”반우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갑자기 생각났는데 토요일에 일이 생겨서 병원에 갈 수 없겠어요. 우희 씨는 부승원 씨과 같이 가는 게 좋겠어요.”“네?”반우희는 실망한 듯 말했다.“알겠어요...”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잘 다녀와요. 힘내요.”반우희는 팔을 늘어뜨리며 마치 좀비처럼 걸어갔고 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야 큰일 날 뻔했다.’양시연은 자리에 앉아 부승원은 아이에게는 친절한데 반우희에게만 까칠한 성격이 이상하다고 불평했다.‘쳇. 이러고도 자기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다니.’...토요일 오전 연정훈은 갑자기 일이 생겨 병원에 먼저 가기로 했지만 양시연은 그에게 나중에 오라고 말했다.양시연이 선택한 병원은 경인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 개인 병원으로 정인의 기업에 속한 곳이었다. 병원에 가기 전에 비서만 예약을 맡기고 원장에게는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이미 병원의 서비스가 뛰어나
‘연 사모님?’조이현은 놀란 표정을 짓고 믿기 힘들어했으며 주지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양시연은 그들의 반응이 우스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는 ‘연 사모님’이라는 호칭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고 ‘양 아가씨’나 ‘양 대표님’이 더 마음에 들었지만 누군가의 심리적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데서 느껴지는 쾌감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양시연은 시계를 확인하며 연정훈이 당장 도착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하고 박사에게 요청했다.“먼저 검사를 시작해 주세요.”“알겠습니다.”여자 박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몸을 살짝 숙이고 양시연에게 길을 안내했고 조이현이 반응하기도 전에 양시연이 일행에 이끌려 떠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양시연의 우아한 뒷모습과 고급스러운 옷차림이 눈에 들어오자 조이현은 순간 정신을 차렸지만 질투와 분노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불길처럼 타올랐다.조이현은 양시연과 주지혁의 과거를 떠올렸다. 그 기억은 그녀를 지독한 슬픔과 상실감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그녀는 첫 아이를 잃고 깊은 우울함에 빠졌다. 3년간의 고통 속에서도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양시연을 쫓아가려 했지만 주지혁이 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뭐 하는 거야?!”조이현은 주지혁의 다급한 표정을 보고 예민한 목소리로 되물었다.“내가 뭐 하겠어? 난 오히려 지혁 씨야말로 묻고 싶어. 당신 아직도 양시연 씨를 잊지 못하는 거야? 예전처럼 다시 엮이려는 거야? 꿈 깨. 양시연 씨는 이미 부자집 가문의 사람이야.”조이현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고 주지혁은 당황한 듯 낮은 목소리로 조이현을 나무랐다.조이현은 분노에 가득 차 숨을 고르며 주먹을 꽉 쥐었고 주지혁은 한숨을 내쉬며 다독이려 했다.“진정 좀 해. 이런 감정이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걸 너도 알고 있잖아. 우리가 이 아이를 갖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기억해.”그 말에 조이현은 순간적으로 진정했고 조이현은 그제야 두려움을 느끼며
“아이고.”조이현은 능청스럽게 입을 다물며 일부러 미안한 척했다.“양시연 씨, 미안해요. 제가 당신 얘길 한 건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괜찮아요.”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조이현 씨는 건강검진 받으러 오셨나요?”조이현은 뻔뻔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산부인과에 왔어요.”양시연은 일부러 놀란 척 물었다.“임신하셨군요?”“...”양시연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마치 친근하게 묻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둘째인가요?”조이현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양시연은 모르는 척 자연스럽게 이어갔다.“전에 한 번 임신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 딸이었나요? 아니면 아들이었나요?”이 주제는 조이현에게 금기였다. 누군가 이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그녀는 분노로 이성을 잃곤 했고 더구나 그 일이 있던 당시 양시연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이현이 유산의 충격과 분노로 양시연의 외할머니가 입원해 있던 병원까지 찾아가 난동을 부렸었다. 양시연은 그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 주제를 꺼내 조이현을 노골적으로 자극했다.조이현은 온몸에 긴장이 감돌았고 무심코 눈에 들어온 찻잔을 집으려 했지만 양시연이 먼저 찻잔을 들어 올렸다.두 사람의 눈빛이 교차했고 양시연은 차분하지만 냉랭한 표정을 지었고 조이현의 눈은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조이현 씨 내가 당신과 어떤 원한으로 얽힌 적 있던가요?”양시연이 침착하게 물었다.조이현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더 이상 가식적인 태도를 유지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응수했다.“당신이 나한테 원한이 없다고? 당신 때문에 내 첫 아이가...”조이현이 울컥하며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양시연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조이현 씨의 불행은 당신이 사람을 잘못 본 탓이에요.”양시연이 조이현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솔직히 말해서 당신 같은 사람이 겪는 불행은 모두 당신이 자초한 거라고 봐요.”양시연은 과거를 떠올렸다. 조이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녀를 고위층 남성의 차에 태우려 했던 일 그리고 그
다른 사람의 행복 앞에서 말하기 어려운 아픔은 더욱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다.지금의 주지혁이 딱 그랬다. 그는 과거에 원하던 명성과 지위를 모두 손에 넣었지만 같은 공간에서 벌어진 두 가지 대조적인 장면이 그의 마음을 휘저었다. 양시연은 환한 미소로 연정훈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조이현이 울부짖으며 따지고 있는 것을 보니 자신이 이룬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 느껴졌고 오히려 혐오감마저 들었다.더 큰 문제는 이 모든 상황이 결국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는 점이었다.주지혁은 자신을 다독이며 체면을 지키려 했고 감정적으로 폭발한 조이현을 간신히 진정시켜 그녀를 데리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연정훈이 양시연을 품에 안고 VIP 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조이현 씨가 또 귀찮게 했어?”양시연은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신경질적으로 굴면서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더라고요. 아직도 내가 주지혁 씨를 신경 쓴다고 생각하는지 와서 시위하러 온 것 같아요.”연정훈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정말 정신 못 차렸네.”양시연은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흘겨보며 장난스레 웃었다.“그러니까 말이에요. 우리 연 대표님이 이렇게 완벽한데 조이현 씨 남편이랑은 비교조차 안 되는데요. 대체 그녀는 어디서 그런 자신감을 얻는 걸까요?”연정훈은 그녀의 칭찬에 흡족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밖에서는 좀 겸손해야지. 재물은 밖으로 흘리는 게 아니니까.”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알겠어요.”두 사람은 나란히 VIP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예약된 의사들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고 박사가 검진 항목을 설명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똑똑똑.박사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한 간호사가 서 있었고 그녀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박사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이러다 조이현 씨가 병원 천장이라도 날려버리겠어요.”양시연은 그 말을 듣고 연정훈과 눈을 마주쳤다.그러나 둘 사
병원 밖 검은 벤츠 안에서 조이현은 겨우 조금 진정된 상태였다. 얼굴에는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선명했고 침묵만 지키고 있는 주지혁을 조심스레 바라보다 그의 얼굴에 난 상처를 살피기 위해 손을 뻗었다.그러나 주지혁은 이미 극도로 짜증이 난 상태였고 조이현의 손을 툭 쳐내며 짧게 말했다.“나 괜찮아.”조이현은 멍하니 주지혁을 바라보다가 곧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얼굴을 감싸 쥔 채 무너지듯 오열하며 외쳤다.“나도 어쩔 수 없었어...아이를 또 잃어서 나도 내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었어. 왜 하늘은 날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거야? 왜? 왜 천한 양시연은 아이가 생기는데.”주지혁은 아무 말 없이 차창을 열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그는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손을 창밖으로 뻗었다.얼굴에 스치는 싸늘한 바람 그리고 옆자리에서 멈추지 않는 조이현의 울음소리에 주지혁의 마음은 점점 더 차갑고 무감각해졌다.처음 조이현과 엮였을 때 주지혁이 그녀에게 전혀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이현은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면이 있었지만 적어도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다. 그런 부잣집 딸이 자신에게 마음을 준다는 사실에 흔들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그 흔들림은 배신으로 이어졌고 양시연을 희생하며 얻은 미래였다. 마치 하늘이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르게 하려는 듯 주지혁의 행보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3년 동안 주지혁은 조씨 가문의 지원을 받아 사업을 꾸준히 성장시켰다. 처음에는 그를 하찮게 보던 조이현의 아버지도 점차 그의 존재를 의식하며 경계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그를 회유하려는 태도로 바뀌었다.조이현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도 주지혁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매일 그에게는 고통의 연속일 뿐이었다.그는 밖에서 다른 여자를 두었고 조이현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집안은 싸움의 연속이 되었다. 싸움이 끝나면 마지못해 서로를 붙들고 살아가다가도 다시 다툼이 시작되기를 반
연정훈은 자신도 본인 말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맞아. 네가 해.”양시연은 그를 한 번 쏘아보며 일어나 박사에게 말했다.“검사 준비해 주세요.”“알겠습니다.”조이현이 난리를 피운 후 박사는 빠르게 일 처리를 마무리하고 양시연의 검사를 진행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양시연과 연정훈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연정훈은 차를 마시며 고의로 침착한 모습을 보였고 양시연도 손을 다리 위에 놓고 의식적으로 침착하려 애썼다.그때 연정훈이 갑자기 그녀를 쳐다보며 손을 뻗어 양시연의 손을 잡았고 양시연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쳤다.“너 손바닥에 땀 나.”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비웃었고 연정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한심하네.”양시연은 콧소리로 웃으며 손을 빼고 말했다.“방금까지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사람이 나를 한심하다고 말하다니요.”연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입술을 깨물며 양시연의 배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양시연은 뒤로 기댄 채 배를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정훈 씨, 설마 잘못된 거 아니겠죠?”연정훈은 이미 긴장한 상태였고 양시연의 말에 마음이 더욱 초조해졌다.“괜찮아. 잘못된 거면 나중에 또 생길 거야.”연정훈이 먼저 그녀를 위로했고 양시연은 배를 살며시 만지며 잠시 생각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사가 다시 돌아왔고 연정훈은 무의식적으로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몸을 바로 세웠다.박사는 그들이 기다리는 걸 알고 바로 말했다.“축하드립니다.”그 말에 양시연과 연정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놓았다.“확인했습니다. 양시연 씨는 이미 임신 중입니다. 현재 상태는 양호합니다.”박사가 덧붙였다.‘세상에.’양시연은 기쁨을 느끼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고 박사는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연정훈은 손을 뻗었지만 양시연에게 먼저 빼앗겼다.양시연은 보고서를 받아 들고 한참 동안 그것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연정훈의 눈을 마주쳤다.‘믿어요? 내 배 속에 작은 생명이 있
반우희는 연정훈이 양시연을 과잉보호하고 있다는 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친근한 미소를 띠며 양시연에게 말했다.“오늘 병원에 올 시간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양시연은 곧바로 대답했다.“갑자기 일이 마무리돼서 바로 왔어요.”반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히 답을 주고 이어 물었다.“검사 결과에는 별문제 없죠?”양시연과 연정훈은 잠시 멈칫하며 이 질문을 어떻게 넘길지 고민하고 있을 때 멀리서 부승원이 두 사람을 쓱 훑어보며 말했다.“임신했어요?”양시연과 연정훈은 동시에 침묵했다.‘변호사의 날카로운 직감은 정말 대단하네.'양시연은 그저 웃어넘겼고 반우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반우희의 시선은 양시연의 평평한 배에 머물렀고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양시연은 더는 숨길 필요 없다고 판단해 작은 소리로 말했다.“네. 아직 석 달이 안 됐어요. 다른 사람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반우희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육아 비법에 관해서라면 끝없이 이야기할 자신이 있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알았어요. 첫 3개월 동안은 말하지 않는 게 좋다면서요.”양시연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지었다.“이런 것까지 알고 계시다니 놀랍네요.”반우희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가볍게 휘저으며 말했고 이내 양시연에게 육아 이야기를 시작할 듯 잡으려 하던 찰나 부승원의 차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조금 있으면 의사 선생님이 오전 근무를 마칠 시간이야.”반우희는 그제야 중요한 일을 떠올렸다.‘맞네.’반우희는 이마를 한번 치고는 동준을 끌어당기며 양시연에게 말했다.“언니, 우리는 먼저 동준을 데리고 진찰받으러 가야 해요.”양시연은 아직 집에 돌아갈 마음이 없었고 눈앞의 세 사람이 묘하게 흥미로웠다.“우리 같이 가도 될까요?”반우희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녀는 한 손으로 동준을 잡고 다른 손으로 양시연의 팔을 끌어 잡으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연정훈은 양시연에게 집에 가서
...방 안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양시연과 연정훈은 서로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않았고 부승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반우희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분위기를 정리하려고 애썼다.동준은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아니에요. 반우희 누나예요.”의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금세 깨닫고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부승원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아빠는 정말 젊어 보이네요.”‘이렇게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있다니.’방 안의 모두가 당황했다.???부승원은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양시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고 연정훈은 웃음을 참으려 애쓰다 못해 이마를 짚으며 간신히 표정을 유지했다.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동준은 어른스럽게 한숨을 쉬며 두 손을 펼치며 말했다.“아빠도 아니에요. 부 삼촌이에요!”이번에는 의사가 또 한 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이게 무슨 조합이지?’의사가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또 질문하려던 찰나 안내 직원이 얼른 나서서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용 선생님! 먼저 아이를 진찰해 주세요. 나머지는 나중에 얘기하시죠.”“네. 알겠어요.”양시연은 이 의사에게서 더 웃긴 말들이 나올 것 같아 속으로 기대가 되었다.역시나 의사는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진찰하면서도 계속해서 반우희와 부승원을 쳐다보며 무심코 말을 던졌다.“엄마는 평소에 아이에게 운동 좀 시켜야 해요. 아이고 늦게 왔네요. 부모가 돼서 어쩜 이렇게 태만할 수 있죠? 아빠는 저기 가서 서세요. 키를 재볼게요.”...부승원은 처음에는 말이 나오지 않았고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거의 진짜로 가서 키를 잴 뻔했는데 반우희가 부승원을 잡고 다시 한번 설명해 줬다.“부 대표님은 아빠가 아니에요! 동준 아빠는 키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요.”“알았어요.”그런데 또 의사는 금세 말하였다.“자 아빠...”모든 사람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양시연은 웃음을 참느라 괴로워하며
양지원은 양석진이 예전엔 어떤 사람이었는지 희미하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그가 살이 찐 건지 빠진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저릿함은 그가 분명히 살이 빠졌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했다.잠시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양석진과 그의 일행이 어느새 그녀 앞에 다다라 있었다.그녀는 손을 꽉 움켜쥔 채 순간 말을 잃었고 그의 뒤에 서 있는 예전에 본 적 있던 용 국장의 얼굴을 보고서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용 국장 역시 그리 나이가 많지 않았고 서른네다섯쯤 되어 보였고 또래들 사이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었다.하지만 양석진을 마주하면 그는 어딘가 빛을 잃는 듯했다.그가 먼저 운명 같은 우연이라며 말을 꺼냈다. 대운산을 사용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정말로 이곳에서 회의가 잡혔고 그 책임자가 다름 아닌 양석진이었다.“양 대표님, 우연의 일치네요. 막 완공된 이 대회장의 첫 번째 사용자가 바로 당신 가족입니다.”양지원은 미소를 머금은 채 최대한 차분히 그를 바라보았다.‘오빠’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끝내 입을 다물고 대신 직함을 부르며 입을 열었다.“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오늘은 더우니까요. 조금 후에 제가 임원분들을 모시고 천천히 둘러보시게 해드릴게요.”양석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더는 머무르지 않고 돌아섰다.“2시에 출발하죠.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좋아요.”양지원은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안은 채 돌아서 앞장섰다.그 일행은 의외로 조용히 정리되어 있었고 마치 더는 움직이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쉬었다.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홀은 금세 고요해졌다.양지원은 아래층에 홀로 앉아 차를 마셨지만 입안에는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두 사람은 서둘러 스쳐 지나갔고 양석진은 그녀에게 단 한 마디를 남겼다.비록 이제는 서로 마주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그녀의 시간과 기억은 여전히 십 년 전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그가 모든 것을 그녀를 중심으로
[청년기]“내일 돌아오는 거예요?”대운산으로 향하던 길 양지원은 집에 있는 양혁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그녀는 감기에 걸린 지 이틀째였다. 아무것도 할 기운이 없었고 그나마 양혁수와 이야기하는 순간만이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해주었다.“가능하면 돌아가려고 해.”몇몇 선생님들의 불만이 떠오르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집에서는 좀 얌전히 지낼 수 없을까? 너 때문에 맨날 선생님 앞에서 얼굴을 못 들겠어.”한창 말썽꾸러기 시절을 지나 양혁수는 이제 누구에게도 귀여움을 받지 못하는 나이에 접어들었다.몇몇 선생님이 함께 교육을 맡으면 그는 종종 머리를 치켜들고 반항했다.“저 정도면 엄청 얌전한 편 아닌가요? 같이 농구도 하잖아요.”양지원은 눈동자를 굴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무더운 여름날 예민한 성격의 선생님들이 누가 그런 말썽꾸러기와 농구장에 나가고 싶겠는지 의문스러웠다.“알겠어. 어쨌든 조금만 얌전히 있어 줘.”“알겠어요. 엄마는 밖에서 몸조심하고 집에 오시면 제가 생일 챙겨드릴게요.”양지원은 말끝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세상 어딘가에서 여전히 자신을 걱정해 주는 이 작은 녀석이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통화가 끝나자 차의 속도도 서서히 줄어들었고 비서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양 대표님, 먼저 접대소에서 잠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용 국장 쪽 점검팀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양지원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대운산 관광 프로젝트는 오래전에 시작되었지만 그녀는 그동안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위쪽에서 이 지역을 외교 관련 주요 회의 장소로 활용하고 싶다는 연락이 들어왔다. 그건 분명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행궁’을 조성하려면 결국 관계자들의 사전 점검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양지원은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일주일 전 이곳에 도착해 현장을 둘러보며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점검했다.최근 날씨가 너무 더워서 에어컨이 있는 곳과 뜨거운 태양 아래를 오가다 보니 체력이 많이 지쳐갔다.비서는 그녀의 얼굴 색
양지원은 화려한 의상에 휩싸인 채 기분이 한껏 들떠 있었다.그녀는 오빠의 팔에 살며시 팔짱을 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우리 오빠는 당연히 멋져요. 키도 크고 잘생기기까지 했는걸요.”진병수는 이마를 짚은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양석진은 길을 걸으며 양지원에게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지만 현장에 도착하자 그녀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두 세트를 함께 찍기로 했다.예복을 입고 양지원과 함께 거울 앞에 서자 주위에서 감탄의 말들이 흘러나왔다.그는 마음속에서 불안이 스멀거리자 양창수의 애매한 미소를 피하려 애써 시선을 돌렸다.결혼사진을 찍는 자리였지만 양지원에게는 가족사진을 남기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그녀는 예쁜 옷을 입었으니 기념으로 사진을 남기고 싶었고 중간에 진병수에게도 함께 찍자며 부탁했다.“자, 신부가 신랑에게 키스해 주면 좋겠네요.”사진사가 말하자 양석진의 눈빛이 흔들렸고 양지원은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저기요. 이분은 제 오빠예요.”사진사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아. 깜빡했네요.”양창수가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키스하는 게 뭐 어때? 얼굴에 하는 거면 괜찮아.”진병수도 거들었다.“나는 괜찮은 것 같은데.”“안 돼. 그건 너무 이상해.”양지원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손명우가 조용히 제안했다.“카메라 각도를 조절해서 찍으면 돼.”양지원과 양석진은 동시에 외쳤다.“안돼.”순간 현장은 조용해졌다.“...”양지원은 웃으며 옆에 앉은 오빠를 바라보았다.“오빠, 우리 둘 진짜 잘 맞는 것 같아요.”그녀는 그의 팔을 감싸며 바르게 자세를 고쳤다.“오빠, 우리 사진 한 장 찍어요. 처음 오빠를 만났을 때도 가족사진 찍느라 소파에 나란히 앉았잖아요.”양석진은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감정을 억누르며 부드럽게 말했다.“맞아. 그렇게 하는 게 제일 좋지.”두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고 찰칵하는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그 순간이 고정되었다.수많은 사진 중 그 사진은 양지원이 가장 아끼는 사진이 되었
배가 콕콕 쑤시는 걸 제외하면 양지원은 꽤 신나게 놀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미소가 가득했다.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양석진이 양창수를 뒤뜰로 불렀고 늦여름이라 뒤뜰에는 매미 소리가 귀를 울렸다. 양창수는 계단에 뚝 멈춰 섰다가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뒤뜰에서 양석진이 말했다.“지원이 이제 어리지 않으니 지원이 앞에서 아무 말이나 쉽게 내뱉지 말았으면 해.”“내가 뭘 또 아무 말이나 했다고 그래요?”양석진은 시시콜콜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너 자꾸 까불면 바로 입대시켜 버린다?”양창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마음대로 하세요.”양창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며 위층을 슬쩍 보다가 양석진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내가 헛소리했다 치죠.”그리고 몸을 휙 돌려 자리를 떠났다.양석진은 뒤뜰에 홀로 남아 사라지는 양창수의 뒷모습을 지켜봤다.의미심장한 양창수의 시선은 마치 오래된 전등처럼 깜빡깜빡하며 양석진의 마음을 괴롭혔다.양석진은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러다가 위층에서 양지원이 저를 부르자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갔다.양석진은 그날 밤 또 불면증에 시달렸다. 하룻밤 내내 뜬눈으로 지새우는 건 양석진에게 있어 흔한 일이 되었다.어느 날부터인지, 양석진은 감히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못할 감정이 생겼고 아무리 억눌러도 아무도 없는 새벽이 되면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양석진도 이게 무슨 감정인지, 본인이 뭘 하고 싶은 건지 잘 몰랐다.그저 양지원만 떠오를 뿐이었다.어쩌면 양지원도 나이가 좀 더 들고, 각자 연인이 생기면 이런 감정이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다.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이 현실이 되기를 양석진은 늘 기도했고 한편으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날 뒤로, 양석진은 며칠 동안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양지원의 걱정을 사지 않기 위해 최대한 집을 비우는 것을 택했다.그 시간이 점차 길어지고 더 이상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양석진은 바로 진병수의 연락을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