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요, 근데 문벌들이 왜 모두 서울에 모여있는 거죠?”가마 안에 있던 여섯째 공주님이 물었다. 마차를 몰고 있던 주도가 코끝을 만지며 대답했다. “아마도 공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인왕 때문인 것 같은데요.”“윤구주 말입니까?”“예, 제가 들은 바로는, 얼마 전, 서울의 문벌 절정이 제멋대로 뛰쳐나왔다가 정양문 아래에서 참살당했다고 합니다. 그 사건에 육도진도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고 하는데 저는 바로 그 소년 인왕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그가 곤륜에서 왕으로 봉해질 때 서열들은 세가를 비롯하여 종문까지 정치에 관여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게다가, 그의 사망 소식이 세상에 널리 퍼져서 3대 서열은 그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나서서 소란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그들은 이 소년 인왕이 살아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공주는 주도의 말을 듣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하죠. 제 남자는 쉽게 목숨을 잃을 사람이 아니에요.”“공주님 말씀이 맞으십니다.”“이 무식한 놈들이 감히 제 남자를 상대하다니 죽여야 마땅하지요.”공주는 화가 나는지 말투가 점점 거칠어졌다. “이 문벌들은 걱정할 게 못 됩니다. 하지만, 만약 세가와 종문이 참여한다면, 일이 번거로워질 것입니다.”“흥! 제 아버지는 너무 인자하세요. 그러니까 문벌, 세가와 종문이 이리 창궐하죠! 제 뜻대로라면 그들을 모두 죽여버릴 것입니다.”주도는 급히 공주를 말리며 대답했다. “공주님,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화진은 당시 3대 서열에 뒷받침받고 현재의 번화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공주님의 이 한마디는 천하의 무인들을 모두 단번에 때려죽이는 것입니다.”“안됩니까? 누가 그들더러 제 남자를 건드리라고 했습니까?”주도는 공주의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됐어요. 듣기 싫은 말은 그만하고 빨리 윤씨 일가로 가요.”마차 안의 공주가 말을 끝냈다.주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를 몰고 윤씨 일가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화진 여섯째 공주가 마차에서 내린 뒤 그녀는 아름다운 눈으로 윤씨 일가의 금으로 쓰인 간판을 보았다. 예전에 이 금으로 된 간판은 윤씨 가문의 자랑이었다. 왜냐하면, 이 간판 위에 글을 쓴 사람이 바로 화진의 오늘날 국주이기 때문이다.하지만 16년 전에 사고가 난 뒤로 윤씨 일가는 간판에 대해 더 언급한 적이 없었다. “이게 바로 아버지께서 직접 하사하신 간판이군요. 참 아쉽게 됐네요.”공주는 윤씨 일가의 금으로 쓰인 간판을 보며 말했다. 옆에 서 있던 주도가 눈을 비스듬히 뜬 채 그 간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찌 되었든 국주님의 글은 아주 예술입니다.”공주가 쓴웃음을 지으며 어릴 적 기억에 빠져들어 갔다. “어렸을 때 저는 항상 그를 따라 대문 앞에 와서 함께 놀았어요.”“그는 저를 누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고, 저는 구주 오빠라고 불렀어요.”윤씨 일가의 대문을 바라보는 공주는 마치 10여 년 전 윤구주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공주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주도는 그녀가 소중한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공주가 드디어 기억 속에서 빠져나왔다. “들어가죠.”말을 마친 공주가 발걸음을 내디디며 먼저 윤씨 일가 안으로 들어가자 뒤에 있던 주도도 빠른 걸음으로 공주를 따라갔다. 윤씨 일가에 들어서자 갑자기 4줄기의 센 기운이 감돌았다.뒤이어 네 사람의 모습이 마당에 나타났다.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사람은 50살 좌우지만 온몸에서 고위 신급 강자의 기운을 뿜어냈다.나머지 세 사람도 모두 윤씨 일가의 신급 강자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윤씨 일가의 안위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는 분이시다. “두 분이 말도 없이 무슨 일로 윤씨 일가를 침입하셨나요?”네 사람이 나타나기 바쁘게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공주는 그 사람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하 할머니를 찾으러 왔는데요?”“하미연 님 말씀입니까?”“실례지만 그쪽 성함이 무엇입니까?
“나는 이홍연이라고 해. 꼬마야 너는 이름이 뭐야?”공주가 윤하율에게 물었다. “저는 윤하율이라고 해요.”윤하율은 물음에 대답하고 공주를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 정말 예쁘세요. 하율이는 지금까지 언니처럼 예쁜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요.”이홍연은 윤하율의 칭찬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홍연은 윤하율에게서 아름답다는 칭찬을 받고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너는 입이 참 달콤한 꼬마구나.”“그러면 언니한테 하 할머니께서 집에 계시는지 알려줄 수 있어?”“제 할머니 말씀하시는 거예요?”“그래 맞아.”“할머니께서는 지금 오빠 장난감 정리하고 계세요. 예쁜 언니, 제가 같이 찾아 줄게요.”윤하율은 대답하며 그네 위에서 뛰어내렸다. 이때 이홍연의 시선이 윤하율이 손에 쥐고 있던 흙인형에 꽂혔다. 그 흙인형을 보자 이홍연은 흠칫하더니 물었다. “하율아, 저 흙인형 어디서 가진 거야?”이홍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윤하율은 오른손으로 흙인형을 들고 신이 나서 대답했다. “이 흙인형은 할머니께서 갖고 놀라고 주신 거에요. 할머니께서 알려주신 건데 이 흙인형은 구주 오빠가 어렸을 때 소꿉친구랑 같이 놀던 거래요.”소꿉친구? 이 네 글자가 이홍연 머릿속에 들어가자 그녀가 갑자기 몸을 살짝 떨기 시작했다. 아주 오랫동안 입에 붙인 적 없는 네 글자였는데 지금 다시 들으니 이홍연의 어릴 적 기억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그녀는 넋을 놓은 채 윤하율 손에 있는 인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율아, 그 인형을 언니한테 보여줄 수 있어?”윤하율은 잠깐의 고민 뒤에 대답했다. “좋아요.”그리고 손에 있던 흙인형을 이홍연에게 건네주었다. 이홍연은 인형을 건네받고 복잡한 표정으로 인형을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그 인형은 이홍연이 어렸을 때 윤구주와 같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흙인형이 하나는 남자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이다. 남자는 윤구주를 뜻하고 여자는 이홍연을 뜻했다. 그들은 두 손을 맞
하미연은 뒤에 서 있는 이홍연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섯째 공주님이시죠?”이홍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이가 공주님을 뵙습니다.”하미연이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겨우 다섯 살 먹은 윤하율이 이 장면을 보고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께서 왜 예쁜 언니를 만나자마자 갑자기 무릎을 꿇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할머니 이러지 마세요. 어서 일어나세요.”이홍연은 급히 말리며 하미연을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이 늙은이가 이번 생에 다시 공주님을 뵐 수 있으리라 상상도 못 했습니다.”하미연이 일어선 뒤 흐릿한 눈을 뜨고 후들거리며 말했다. “할머니, 왜 이러십니까? 벌써 잊으셨어요? 저는 어릴 적부터 할머니를 제 친할머니라고 생각했는걸요.”이홍연이 웃는 얼굴로 하미연의 팔을 껴안았다. 하미연은 매우 흥분했다. 그녀는 화진의 가장 아름다운 이홍연 만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십여 년 전, 이홍연이 황성으로 돌아간 뒤, 몇 년 동안 윤씨 일가에 한 번도 발길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오시다니!“공주님, 어서 들어오세요.”하미연은 감격에 겨워 이홍연을 끌어당기면서 대나무 의자를 들고 그녀를 앉혔다.이홍연도 사양하지 않고 의자 한쪽에 앉았다.“오랜 시간 못 뵈었더니 공주님께서는 정말 점점 예뻐지셨네요.”하미연은 한쪽 눈을 보지 못했지만, 여전히 이것이 십여 년 전의 이홍연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할머니, 칭찬 감사해요. 근데 왼쪽 눈은 어떻게 되신 거예요?”이홍연은 그제야 하미연의 한쪽 눈이 실명했다는 것을 알았다. “괜찮아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눈이 나빠졌습니다.”하미연은 그녀의 눈이 윤구주를 위해 울어서 실명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이홍연은 그 말을 듣고 더 묻지 않았다.“공주님.”하미연이 입을 열려 하는데 이홍연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 “할머니, 저를 홍연이라고 불러주세요. 어릴 적에 계속 이렇게 불러주셨잖아요.”“하지만.”하미연이
하미연의 물음에 이홍연은 갑자기 침묵을 지켰다. 하미연도 자기의 말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는지 황급히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이 늙은이가 말을 잘못했네요.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이홍연은 당연히 조그마한 일에 화를 낼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손을 저으며 고개를 들고 물었다. “할머니,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무슨 일입니까? 물어보세요.”“할머니 구주 오빠 지금 서울에 있나요?”이홍연는 예쁜 눈으로 하미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미연은 한참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구주는 지금 서울에 있어요.”이 말을 들은 이홍연은 순간 감격에 겨워 할머니의 투박한 두 손을 잡아끌었다. “진짜로 살아있어요? 죽지 않았어요?”“예, 살아있답니다.”이홍연의 가냘픈 몸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아름다운 눈이 너무 흥분된 나머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쁜 놈! 살아있으면서 저에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어요.”이홍연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억울해져서 눈물이 줄 끊어진 진주처럼 흘러내렸다.화진의 공주님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하미연이 얼른 말했다. “공주님 용서하소서. 확실히 구주가 잘못했습니다만 구주에게도 고초가 있습니다.”“알고 있어요.”“십여 년 전 그 일은 제 아버지 잘못이에요. 하지만 구주 오빠가 곤륜에서 왕이 된 후로부터 아버지께서 더는 책임을 묻지 않았잖아요.”이홍연도 사실 십 여년 전 사건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이홍연은 윤하율만한 아이였기 때문에 사고를 막을 수 없었다. “공주님 말씀이 맞아요. 하지만 공주님도 아시다시피 구주가 고집이 세요. 고생을 너무 많이 한 아이인지라, 제가 제멋대로 결정해줄 수는 없어요.”하미연의 말속에는 온통 윤구주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를 무시하면 안 되죠.”“예전에 저랑 결혼할 거라고, 저만 사랑할 거라고 약속했으면서 곤륜에서 왕이 되고는 문아름이랑 결혼했잖아요.”말하는 이홍연의 목소리가 분노로 가득 찼다. 그녀는 주먹
이홍연은 아버지 생각에 갑자기 안색이 나빠졌다. 왜냐하면, 이홍연의 아버지께서 확실히 그녀와 윤구주가 사귀는 것를 반대하며 막으려 했었다. 그가 이홍연을 황성에 가두어 윤구주를 만나지 못하게 한 것도 사실이다.이홍연은 순간 뭔가 깨달았다. “홍연아, 구주는 너에게 항상 미안하다고 생각했어. 비록 너를 입에 올린 적은 없지만 그 애의 마음은 이 할머니가 그 누구보다도 잘 안다.”하미연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홍연은 하미연의 말에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렸을 적에 이홍연은 윤씨 일가를 찾아와 윤구주를 만나기 좋아했다. 윤하율이 가지고 놀던 흙인형마저 이홍연이 어릴 때 윤구주와 함께 만든 것이였다. 하지만 16년 전 윤구주 모자가 윤씨 일가에서 쫓겨난 뒤로부터 이홍연은 윤구주를 만난 적이 없었다. 줄곧 윤구주가 곤륜에서 왕이 될 때까지 말이다. 그때 화진의 공주인 이홍연은 멀리서 윤구주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홍연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왕을 배후하고 화진의 제1인왕이 되었는데 여전히 그와 상봉하지 못했다.윤구주가 문씨 가문과 결혼한 뒤에야 이홍연은 슬픈 나머지 홀로 화진을 떠나 세계 각지를 유람하게 되었다. 이제 그녀가 드디어 돌아왔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면, 이홍연의 마음속에는 온갖 신맛, 단맛, 쓴맛이 다 있었다. 다만 지금 두 사람이 만나면 어떤 모습일지 그녀 자신도 모르고 있다. “할머니, 제발 구주 씨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이홍연은 깊은 생각에서 잠깐 빠져나와 눈물을 닦고 하미연을 바라보았다. “구주는 지금 예전에 엄마가 살던 곳에 머물러 있을 거야.”“할머니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이홍연은 하미연을 향해 큰 인사를 하며 감사를 표했다. “할머니, 저희가 만나면 구주 오빠가 저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이홍연이 갑자기 물었다. 어릴 적에 이홍연은 윤구주를 졸졸 따라다니던 여자아이였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두 사람이 다시 만나면 윤구주가 이홍연을 알아볼 수 있을까? 하미연은
“얼른 어머니를 보호해야 해요.”둘째 윤창현이 급히 소리쳤다. 윤신우는 갑자기 동생을 말리며 말했다. “창현아, 조급해하지 마. 내 느낌으로 상대방의 절정 기운은 아마 오약을 넘었을 거야. 설마 그가 어머니에게 해를 입힌다 해도 우리 셋의 힘으로는 그를 막을 수 없어.”윤신우의 말에 윤창현과 윤정석의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 오약 절정을 뛰어넘는 강자라니! 이는 오약 절정을 넘어 육도 절정에 이르렀다는 뜻이 아닌가?이런. 이 얼마나 다단한 강자인가! “형님, 이 서울에 언제부터 이처럼 강한 절정 강자가 나타났습니까? 혹시 황성 안에 있는 늙은 내시 한진모 일가요?”윤창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윤신우에게 물었다. 윤신우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그 어마어마한 절정 기운을 한참 느낀 뒤 고개를 저었다. “아니.”“한진모는 아닐 거야. 내가 전에 한짐모와 겨뤄본 적이 있는데 이 기운이 아니었어.”“그러면 누구죠?”이번에는 윤정석이 물었다. “비록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악감정이 없다는 것이 느껴져. 그러니 모두 시름 놓아도 돼.”윤신우의 말을 듣고서야 윤창현과 윤정석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 보지.”“어떤 강자가 윤씨 일가를 방문했는지 함께 가서 만나보지.”윤신우는 말을 마친 뒤 뒤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윤창현과 윤정석이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뒤를 따랐다. 뒤뜰. 이홍연과 하미연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문밖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허름한 차림의 주도가 조롱박을 들고 술을 벌컥벌컥 마시면서 한가하게 앉아 있었다.바로 이때.세 사람이 윤씨 일가 뒤뜰에 갑자기 나타났다. 윤신우, 윤창현, 윤정석. 세 사람이 뒤뜰에 들어온 뒤 윤신우의 시선이 주도에게 쏠렸다. 주도는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고 아주 지저분해 보였다. 온몸이 구질구질한 모습이 마치 몇백 년 동안 목욕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더러운 늙은이가 윤신우의 표정을 약간 굳게 했다.한동안 바라보고 윤신우는 주도에게
신우 삼촌이라는 한 마디에 윤신우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는 고개를 돌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걸어 나오는 이홍연을 바라보았다.“혹시 공주... 전하십니까???”이홍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신우 삼촌, 아직도 절 알아보시네요?”이 말은 윤신우를 당황하게 했다.“윤신우,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이홍연의 신분을 알아본 순간, 윤신우는 바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뒤에 있던 윤창현과 윤정석 역시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그들은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황급히 윤신우를 따라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공주 전하를 뵙습니다!”그들이 전부 무릎을 꿇는 걸 보자, 이홍연은 급히 다가가 윤신우를 일으키며 말했다.“신우 삼촌, 저는 막 변새에서 돌아왔어요. 이렇게까지 예를 차릴 필요 없어요. 얼른 일어나세요.”이홍연은 말하면서 서둘러 윤신우를 부축해 일으켰다.일어난 윤신우는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이홍연을 바라봤다.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기에 그는 하마터면 이 왕실의 여섯째 공주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방금 ‘신우 삼촌’그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길거리에서 만나도 십여 년 전 윤씨 일가에 머물렀던 왕실의 여섯째 공주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신우 삼촌, 십수 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젊으시네요!”이홍연은 미소를 지으며 윤신우를 바라봤다.“아닙니다...전 이미 나이가 들었어요. 오히려 공주 전하께서, 방금 저를 부르지 않았다면 정말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윤신우가 감회에 젖어 말했다.“그렇죠, 눈 깜짝할 사이에 십수 년이 흘렀네요!”이홍연도 말했다.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윤창현과 윤정석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이 사람이 바로 어렸을 때부터 계속 윤씨 일가에 있던 왕실의 여섯 번째 공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공주 전하께서는 지난 몇 년 동안 계속 밖에서 두루 돌아다니신다고 들었는데, 언제 돌아오신 건가요?”윤신우가 물었다.“방금 막 돌아왔어요.”이홍연이 대답했다.“그렇군요! 공주 전하께서 갑자기 왕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