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 삼촌이라는 한 마디에 윤신우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는 고개를 돌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걸어 나오는 이홍연을 바라보았다.“혹시 공주... 전하십니까???”이홍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신우 삼촌, 아직도 절 알아보시네요?”이 말은 윤신우를 당황하게 했다.“윤신우,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이홍연의 신분을 알아본 순간, 윤신우는 바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뒤에 있던 윤창현과 윤정석 역시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그들은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황급히 윤신우를 따라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공주 전하를 뵙습니다!”그들이 전부 무릎을 꿇는 걸 보자, 이홍연은 급히 다가가 윤신우를 일으키며 말했다.“신우 삼촌, 저는 막 변새에서 돌아왔어요. 이렇게까지 예를 차릴 필요 없어요. 얼른 일어나세요.”이홍연은 말하면서 서둘러 윤신우를 부축해 일으켰다.일어난 윤신우는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이홍연을 바라봤다.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기에 그는 하마터면 이 왕실의 여섯째 공주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방금 ‘신우 삼촌’그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길거리에서 만나도 십여 년 전 윤씨 일가에 머물렀던 왕실의 여섯째 공주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신우 삼촌, 십수 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젊으시네요!”이홍연은 미소를 지으며 윤신우를 바라봤다.“아닙니다...전 이미 나이가 들었어요. 오히려 공주 전하께서, 방금 저를 부르지 않았다면 정말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윤신우가 감회에 젖어 말했다.“그렇죠, 눈 깜짝할 사이에 십수 년이 흘렀네요!”이홍연도 말했다.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윤창현과 윤정석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이 사람이 바로 어렸을 때부터 계속 윤씨 일가에 있던 왕실의 여섯 번째 공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공주 전하께서는 지난 몇 년 동안 계속 밖에서 두루 돌아다니신다고 들었는데, 언제 돌아오신 건가요?”윤신우가 물었다.“방금 막 돌아왔어요.”이홍연이 대답했다.“그렇군요! 공주 전하께서 갑자기 왕
윤씨 일가의 대문을 나서자, 이홍연은 번화한 거리 한복판에 서서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며 감탄했다.“오랜만에 돌아왔더니, 서울은 정말 더 번화해졌네!”곁에 서 있던 육도 주도는 그녀가 지난 과거를 떠올리고 있다는 걸 알고 별다른 말 없이 묵묵히 서 있었다.“갑시다! 그를 찾아가서 제대로 따져봐야죠.”이홍연이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디로요?”주도가 잠시 당황하며 물었다.“어디긴 어디예요? 당연히 그 배신자, 나를 몇 년 동안이나 애태우게 한 그 자식에게 가야죠!”이홍연은 투덜거리며 여섯 마리 용과 봉황이 그려진 마차에 올라탔다.그녀의 말에 주도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날려 마차에 올라탔다.“이랴!”그는 채찍을 휘두르며 마차를 먼 곳으로 질주해 갔다....윤구주는 서울로 돌아온 이후, 줄곧 형제들과 함께 16년 전 어머니와 의지하며 살던 작은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이 집은 윤구주의 어린 시절 추억과 어머니와의 깊은 정을 간직한 곳이었다.정태웅과 천현수 두 사람은 이른 아침부터 청룡과 유명전에 대한 정보를 비밀리에 조사하러 나갔고 다른 이들은 집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재이야, 또 무슨 생각 하고 있어? 도련님을 모신 뒤로 너 많이 변한 것 같아.”마당에서 건장한 체격의 철영이 붉은 옷을 입은 아름다운 재이를 보며 물었다.재이는 철영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매혹적인 눈으로 윤구주의 방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보아하니, 재이는 상사병에 걸린 모양인데!”용민이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뭐라고요? 상사병?”“재이가 설마 정말로 우리 도련님께 반한 건 아니겠죠?”철영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안 반할 수 있겠냐? 우리 도련님은 당대의 인왕으로 실력도 수단도 천하제일이거니와 용모 또한 출중하시잖아! 그러니 누가 우리 도련님을 좋아하지 않겠어?”“맞아요, 맞아요.”용민과 철영이 재이를 놀리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매섭게 째려보았다.“둘 다 입 좀 다물어요! 전 한낱 여종인데, 어찌
그는 황금빛 눈동자로 집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육도의 기운이 느껴지는군...”집 뜰안에서...용민과 철영, 재이 외에 꼬맹이 남궁서준은 마치 돌처럼 조용히 한쪽에 앉아 있었다.가부좌를 하고 있는 그의 무릎 위에는 한 자루 검이 놓여 있었다.윤구주를 따르기 시작한 이후로, 이 남궁세가의 검도 귀재는 줄곧 이런 모습이었다.그는 말수가 적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검도에 몰두하며, 검심을 갈고닦는 데 쏟고 있었다.민규현 또한 그러하였다.절정 이중천에 들어선 지금, 그의 내공은 이미 세가의 조상이라 불릴 만큼 뛰어났다.모두가 뜰 안에서 머물고 있을 때, 달그닥, 달그닥 마차 소리가 작은 뜰 앞에 멈춰 섰다.이홍연의 마차가 도착한 것이었다!“무슨 소리냐?”뜰 안에 있던 용민과 재이 그리고 철영은 마차 소리를 듣고 의아하게 밖으로 나왔다.“어머? 이게 웬 마차야? 요즘 같은 때에 마차라니, 혹시 촬영 중인가?”재이가 마차를 보고 신기해하며 말했다.“와, 이 마차 진짜 호화롭네! 저기 위에 있는 가마를 봐, 용과 봉황 무늬가 수놓아져 있잖아!”용민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마차를 바라보았다.“저기, 어르신. 무슨 일로 이 마차를 몰고 우리 뜰 앞에 멈추셨어요?”재이는 마차 위에 앉아 있는 너절한 주도에게 물었다.그 물음에 주도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이곳을 찾으러 온 거니까!”“엥? 누구를 찾으신단 말씀이세요?”재이가 계속 물었다.“윤구주라 불리는 소년을 찾으러 왔어.”마차에 앉은 주도가 입을 열었다.“뭐라고요? 우리 도련님을 찾으신다고요?”세 사람은 그 말을 듣고 즉시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그래!”“어르신, 어찌하여 우리 도련님을 찾으시는 겁니까?”용민이 차가운 눈으로 물었다.“그 녀석이 우리 아가씨에게 큰 빚을 졌거든! 그래서 오늘 내가 아가씨를 모시고 그 빚을 받으러 온 거다!”주도는 허리춤에 매달린 커다란 호리병을 들어 벌컥벌컥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그 말을 듣고 재이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졌다.세 사
이것이 바로 진정한 육도 절정이었다.그의 몸에서 발산된 웅장한 기운이 순간적으로 퍼져나가자, 용민, 재이, 철영 이 세 명의 신급 강자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주도는 세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에야 웃으며 말했다.“걱정 마라, 애송이들아. 난 너희 같은 후배를 해칠 생각이 전혀 없단다. 내가 말했듯이, 오늘은 오로지 우리 아가씨의 빚을 갚으러 왔을 뿐이다!”말을 마친 그는 발걸음을 옮겨 집 마당으로 향했다.그가 발을 막 작은 뜰에 들이려는 찰나, 천지를 울리는 검명이 천공을 찢으며 울려 퍼졌다.곧이어 한 줄기 번개 같은 검광이 주도를 향해 날아들었다.이 검의 위력은 압도적이었다.검기가 넘실대는 가운데, 주위에 살기 어린 검의 기운이 감돌았다.“어?”검이 날아오는 것을 보자, 주도의 눈이 번뜩이더니 두 손가락을 뻗어 허공을 집었다.짤랑!놀랍게도 그 무시무시한 검날은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고스란히 멈춰 섰다.이 검을 휘두른 이는 바로 남궁 세가의 천 년에 한 번 나올 법한 최고의 검도 귀재 남궁서준이었다.자신의 필살 검이 이 남루한 노인에게 잡히자, 남궁서준의 차가운 얼굴도 파르르 떨렸다.그 역시 이 노인이 자신의 검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꼬맹아! 조심해! 저 늙은 자는 초절정 고수야!”곁에서 외치는 목소리가 울렸다.민규현이었다!아까 주도가 마차에서 내리던 순간, 마당에 있던 민규현과 남궁서준은 그 강력한 절정의 기운을 감지했다.그래서 두 사람은 지체 없이 바로 공격을 개시했던 것이다.지금, 남궁서준의 검날이 주도의 두 손가락에 잡힌 것을 본 민규현은 말없이 온 기운을 끌어올렸다.이미 절정 이중천의 경지에 오른 민규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장 강력한 호마공을 펼쳐냈다.온몸에서 뿜어져 나온 현청색 기운은 하늘을 뚫을 듯 솟구치더니 그의 등 뒤에 삼 장 크기의 호랑이 형상이 갑자기 나타났다. 호랑이의 강렬한 포효와 함께 민규현은 하늘을 찢을 기세로 주먹을 내리쳤다.거대한
하늘 위에서 일곱 줄기의 별빛 같은 광채가 번쩍이더니 일곱 개의 칼날로 변해 주도를 향해 내리쳤다.“허? 칠성 금술인가?”하늘에서 떨어지는 일곱 개의 검 그림자를 바라보며 주도는 미소 지었다.“이 어린 나이에 칠성 금술을 펼치다니, 참으로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검도 귀재로구나! 하지만 아쉽게도, 넌 아직 북두칠성의 참된 오의를 깨닫지 못했어! 만약 그랬다면, 이 공격으로 사상 절정에도 오를 수 있었을 텐데.”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도는 다시금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향해 가볍게 두 번 찔렀다.그러자 어둠이 가득한 밤하늘은 순간 떨리기 시작했고 떨어지던 일곱 자루의 검 그림자는 주도의 머리 위에 닿기 직전에 차례대로 펑, 펑, 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그렇게 칠성 금술은 주도의 손끝에서 허망하게 깨져버렸다.하지만 꼬맹이는 이 장면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검의 기운을 끌어올리며 다시금 공격을 시도하려 했다.그러나 바로 이때, 집 안에서 윤구주의 차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꼬맹아! 그만두거라. 너는 그의 상대가 아니다!”윤구주의 말이 떨어지자, 남궁서준은 그제야 콧방귀를 뀌며 검의 기운을 거두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주도를 매섭게 쏘아봤다.결코 굴복할 기세는 아니었다.집안에서 윤구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육도 주도도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마당을 바라보았다.마당 안에서 무언의 경계가 감지되자 주도의 얼굴에는 서서히 긴장감이 스며들었다.그러나 순간 그의 눈은 번쩍이더니 다시금 맹렬한 광채를 뿜어냈다.“쯧쯧! 사십 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더니 이 천하에 다시금 이 술귀신를 두려움에 떨게 할 기운이 존재할 줄이야! 과연 어떤 녀석의 솜씨인지 보고 싶구나!”그의 말이 끝나자, 방 안에서 다시 윤구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보고 싶다면, 이 마당 안으로 들어와라!”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마치 천둥과도 같았다.“어허? 이리도 오만한가? 좋아, 좋아! 오늘은 내가 이 술 귀신의 손맛을 보여주마!”그 말과 함께 육도 주도는 한
생각만으로 상대를 멸하는 의념의 힘!이것은 오직 오악 절정에 도달한 자만이 펼칠 수 있는 신통한 능력이었다.지금, 이 순간, 윤구주와 주도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으나, 그들의 의념 전투는 열 명, 아니 백 명의 절정 고수를 상대하는 것보다도 더 공포적이었다.주도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희미한 백색 현기인 반면 마당을 덮고 있는 윤구주의 기운은 황금빛 광채였다.두 강력한 의념의 힘이 공중에서 격렬히 충돌하며 얽히는 순간, 쩍, 쩍하는 소리와 함께, 대지와 모든 사물은 이 강력한 신법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마치 조각난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다.“세 번째 걸음!”주도가 세 번째 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의 얼굴은 점점 더 긴장감이 감돌았다! 두 발이 마치 천근의 쇳덩이로 눌린 듯 무겁고 떨려왔던 것이다.쿵!세 번째 걸음이 땅에 닿자, 작은 마당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이 막강한 힘에 주도의 온몸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오호, 정말 대단한 젊은이로다! 이 술 귀신이 사십 년간 오늘과 같은 상황은 처음 겪어보는구나! 하하하, 정말 통쾌하다!”그렇게 크게 웃음 지은 후, 주도는 갑자기 허리춤의 호리병을 꺼내어 크게 몇 모금 들이켰다,술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주도의 머리카락은 날리기 시작했고 기운은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상승했다.그 기운은 이전의 백색 현기와는 전혀 다르게, 차디찬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암흑의 기운으로 변해버렸다.이것은 ... 살기였다!!!전설에 따르면, 육도 절정을 넘어선 자만이 칠 살의 경지에 다다른다고 하지 않았는가.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십 년 전, 천하를 뒤흔들었던 육도주도가 이미 칠 살 절정에 도달하였음을!그의 진정한 실력이 드러나자, 지면에 벌어진 균열 속에서 암흑의 살기가 솟구치며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살기가 온몸에 스며들자, 주변의 기운은 순식간에 음침하고 뼈를 에는 듯한 냉기로 가득 찼다.심지어 달궈졌던 땅마저 검은 서리에 덮여가며 섬뜩한 기운을
이 장면을 보고 민규현, 꼬맹이 등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천상의 여신 같은 화진의 여섯째 공주가 눈물을 흘리며 윤구주를 때리고 있다니.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얼마나 때렸을까. 손이 아팠는지, 혹은 울다가 지쳤는지, 이홍연은 마침내 멈추었다.그녀가 멈추자, 윤구주는 그제야 부드럽게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물 어린 얼굴을 바라보았다.“홍연아, 너 정말 많이 성장했구나!”이홍연은 붉어진 눈으로 말했다.“당연하지!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못 봤는지 알아?”윤구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오라버니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걸 아냐?”말하면서 이홍연은 서러움을 못 이겨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윤구주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닦아주었다.그 모습은 오빠가 여동생을 애틋하게 걱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하긴 십여 년 전, 두 사람은 소꿉친구였으니까.그 시절, 이홍연은 언제나 윤구주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달콤한 목소리로 구주 오라버니라고 불렀다.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십수 년이 흘러가 버렸다.윤구주가 곤륜에서 왕으로 봉해진 후, 그는 몰래 이홍연을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 그는 이미 문 씨 세가와의 혼인을 강요받아, 더 이상 그녀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참으로 세월이란 알 수 없는 것이었다.그가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세월이 돌고 돌아 어릴 적 소꿉친구를 이렇게 다시 마주할 줄을.“가자. 들어가서 이야기 좀 나누자꾸나!”윤구주는 말을 마치고 이홍연의 가녀린 손을 살며시 잡았다.존귀한 공주였지만 그녀 역시 발그레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윤구주의 손에 이끌려 마당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주도는 윤구주에게 끌려가는 이홍연을 보며 말했다.“쯧쯧, 좋겠다. 에효! 지금까지 이렇게 기뻐하는 공주는 처음 보네!”...조용한 마당으로 누구도 감히 들어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민규현도 꼬맹이도 심지어는 주도도 그저 발치에서 머뭇거릴 뿐
그때, 그녀는 흑목국 국경에 있었다. 윤구주가 죽음의 바다에서 전사했다는 비보를 처음 들은 순간, 그녀는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나중에 그녀는 주도의 덕에 깨어날 수 있었지만,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녀는 무려 사흘 밤낮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슬픔 속에 빠져 있었다.그러다가 주도의 따스한 위로와 설득 덕분에 그녀는 비로소 슬픔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그리고 바로 얼마 전, 서울에는 내란이 일어났고 수많은 문파의 절정 고수들이 참살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이홍연은 그 소식을 듣고 서울로 돌아갈 결심을 굳혔고, 그 무렵 황성에서 또 하나의 소식이 전해졌다.바로 윤구주가 죽지 않았다는 소식이었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사랑 때문에 오랜 세월 서울을 떠났던 이홍연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서울로 돌아왔다.그러다 드디어 윤구주를 만나게 된 것이다.과거 그의 죽음 소식에 관해 묻자, 윤구주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말했다.“말하자면 길어. 나중에 말해줄게!”“왜 지금은 말할 수 없는 건데?”이홍연이 다시 물었다.“지금은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윤구주의 단호한 태도에 이홍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그럼, 나중에 꼭 말해줘!”윤구주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마친 뒤, 이홍연은 갑자기 윤구주의 커다란 오른손을 움켜잡고 정다운 눈빛으로 물었다.“이 나쁜 놈아,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나를 한 번이라도 그리워한 적은 있어?”“했어... 당연히 그리워했지...”윤구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런데 왜 나를 그리워하면서 한 번도 날 찾아오지 않았어?”“16년 전의 그 일이 아바마마의 잘못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나를 외면할 수 있어? 평생토록 나를 지키고 돌봐주겠다고 했던 그 말을 잊은 거야?”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홍연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졌다.하지만 윤구주는 가볍게 그녀의 손을 떼어내며, 진지한 눈빛으로 이홍연을 바라보았다.“홍연아, 어린 시절의 일들은 잊어.
단 한 걸음,그 한 걸음만 넘기면, 그는 곧 성급 바로 직전 경지에 이른다.그리고 그 마지막 문턱을 박살내는 순간 반쯤 성인이 된 경지, 반성급이다!지금 이 자리, 그 반성급 경지에 선 자는 바로 인마라고 불리는 무명이었다.“과연... 화진의 인황, 구주왕이라 불릴 자격은 있군. 하지만 너도 알겠지. 지금 네 수준으론 몸을 직접 이 판에 던지지 않는 이상 나랑 맞붙을 자격조차 없어. 네가 그 잘난 원신출체를 어떻게 하겠다는지 구경이나 해보자고. ”무명이 입꼬리를 비틀며 코웃음쳤다.팔기귀일에 도달한 윤구주의 전투력은 이미 황의 지경을 뛰어넘었다.하지만 무명과의 경지 차이는 여전히 너무 컸다.실력은 분명 엄청났지만 격이 다르였다.지금 상태로도 보통의 황자의 경지까지 초월한 상태지만 무명을 상대하긴 아직 한참 부족했다.심지어 무명이랑 싸울 실력은커녕 참마검조차 손에 제대로 못 잡는 게 현실이었다.“팔기로 부족하다면... 제구기는 어때? 구기:적선!”부우우우웅!윤구주의 온몸을 하얀 선기가 감싸는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웃고 있던 무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뭐라고? 이건 네 따위가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잖아! ”그 순간, 무명조차 숨을 삼켰다.이건 상식의 틀을 깨부수는 광경이었다.근대에 들어서면서 도에 대한 수련는 사실상 약해졌다.그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세상에 흐르는 천지영기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봉신전쟁 당시, 상상을 초월하는 영기가 소모됐고 그 전쟁이 끝난 후 곤륜구역은 세상의 영기 90%를 신계에 봉인해버렸다.거기서 마음껏 영기를 탕진한 것도 모자라 바깥의 산수들까지 무분별하게 빨아들인 탓에세상의 영기는 걷잡을 수 없이 줄어들고 말았다.결국 세상은 고위 수련자가 태어나기 어려운 구조가 되었다.그래서 화진에선 500년에 한 번 황자가 나올까 말까 할 정도이고 황자의 경지에 도달하는 건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었다.임정설이 황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처음부터 그가 강해서가 아니라 윤구주를 돕기 위해 왕
마기가 검종 제자들의 혼백에 침투하자 그 순간 제자들의 몸에서 시커먼 마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이를 목격한 장인 대진인은 망설임 없이 즉시 결단을 내렸다. 오염된 제자들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정화해 버린 것이다.“모든 제자들아, 입문 첫날 내가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서요산은 찬란한 성지 화진 정통의 계승지다. 정은 사악함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정은 사악함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서요산 제자들이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도의였다.입문과 동시에 깨달음을 얻은 그들은 언젠가 반드시 도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저 화진 정통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서였다.그 순간 진요탑 외곽에서는 7대 진인을 중심으로 전 종문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진요탑을 사수하고 있었다.하늘을 뒤덮을 듯한 마기의 기세는 점점 거세져 어느새 검종의 경내 전역을 삼켜버렸다.검종 제자들은 마기를 막아내면서도 동시에 진요탑의 결계를 유지해야 하는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정도를 지키는 일은 그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투쟁이었다.산 아래 상황도 마찬가지로 치열했다.온갖 요괴와 귀신들이 들이닥치는 가운데 임정설은 황운을 등에 업고 이씨 가문의 국운을 모두 모아 홀로 수백만 마기를 막아서고 있었다.백호는 마인으로 완전히 변신해 광란의 충격 속으로 몸을 던졌고, 스스로 마를 품은 채 적진을 난도질했다.청해는 천뢰신술을 펼쳐 수만 개의 천뢰를 무기로 변환시켜 온갖 사도와 악귀를 쓸어내기 시작했다.그 무렵 진요탑 내부에서 풍무극의 기세는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구주야, 내 한계에 도달했다. 이제 내 500년 수련의 혼을 너에게 바치겠다."”풍무극의 준비는 이미 완료되었다.그는 미리 준비해 둔 제천 법기를 꺼냈고 전법이 발동되는 순간 그의 육신은 산산조각 부서졌다.그의 정기와 천지 정기를 모두 품은 찬란한 진신 영혼은 한 자루의 참마검으로 변해 윤구주 앞에 떠올랐다.“풍 종주...” 윤구주는 입술을 깨물었다.슬프고 아쉬
윤구주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국운의 기운이 그의 발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그가 진요탑의 문에 도달했을 무렵 모든 국운이 윤구주에게 집중되었다.윤구주의 주변으로는 천인신광이 펼쳐져 있었다.이 순간만큼은 그가 천지의 주재자 화진의 영겁을 관통한 유일한 존재였다.윤구주는 홀로 진요탑 안으로 들어섰다.겉보기에 거대한 산 같았던 진요탑의 내부는 참혹한 말세의 풍경이었다. 땅은 끝없이 펼쳐진 용암으로 뒤덮여 있었고 하늘에서는 강줄기가 거꾸로 흘러내리고 있었다.불과 물이 충돌할 때마다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격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거꾸로 흐르는 강물 위에 한 노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백발이 성성한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서요산 검종의 종주였다.밖에서 보이던 강건한 중년의 모습은 단지 화신에 불과했으며, 본체는 수백 년 전부터 이 진요탑에서 마인을 봉인해 왔다.서요산 검종 종주는 극도로 지쳐 있었고 이제는 마지막 호흡으로 버티고 있었다.“드디어 왔구나.” 서요산 검종 종주는 허약한 전음으로 말을 건넸다.“오백 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종주님.” 윤구주는 고개를 숙였다.풍무극은 현 서요산의 종주이자 당대 최고의 영웅, 화진 제일 검으로 불리던 남자였다.원래는 풍속을 다루는 수련자로 젊은 시절엔 검 하나로 화진을 호령한 사내로 알려졌다.그의 검은 아무도 궤적을 볼 수 없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500년 전 마인이 봉인되고 서요산의 조사가 승천한 후, 풍무극은 서요산의 거자로서 종주의 자리를 이어받았다.그날 이후 진요탑에 몸을 묻고 마인과의 싸움을 500년간 지속해 왔다.풍을 다루던 그였지만 지속적인 봉인을 위해 익숙하지 않은 수속까지 수련하며 지금까지 버텨왔다.그가 마도에 빠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이었다.“그래도 괜찮다. 다행히 이 시대에 또다시 인황이 나왔으니. 화진은 연달아 두 명의 인황을 배출했다. 임정설이 인황에 등극한 지금 쇠락하던 이씨 가문의 국운이 다시 살아났다. 그가 천지의
마인이 출현하면 곤륜 구역조차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서요산 검종의 진요탑은 이미 오백 년 동안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이는 곧 그 마인이 오백 년 동안 진요탑 안에 봉인되어 있었음을 의미했다.“우리가 가진 유일한 이점은 저 마인이 지난 오백 년간 수련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오백 년 동안 분명 무언가를 '깨달았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정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도가 존재하는 법입니다. 만약 그가 이곳을 벗어나 다시 한번 돌파에 성공하여 진정한 성인의 경지에 오른다면…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 우리 종문의 선대 종주께서 이 마인을 직접 봉인하셨습니다. 하지만 선대 종주께서는 진요탑만으로는 그를 완전히 봉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아셨지요. 그래서 마침내 구천으로 비상하셔서 바깥 세계에 존재한다는 신기를 찾기 위해 떠나신 것입니다.”장인 대진인이 비밀을 털어놓자 임정설은 왜 그 옛날 서요산 검종을 창립한 선조가 갑자기 사라졌는지 이해했다.“구천을 비상했다고? 전설 속 그 이야기 설마 전부 사실이었단 말인가? 이 세상 위에 더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건가?” 임정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들은 바로는 성인이란 육지에서 신선이 된 자를 이르는 말이고 준성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 반쯤 신선이 된 존재라 하더군요. 우리보다 더 풍부한 영기의 세계가 과연 존재하는지는 이 몸 역시 감히 짐작할 수 없습니다.” 장인 대진인은 고개를 저었다.그때였다.진요탑이 거칠게 흔들렸고 모든 호법 제자의 얼굴이 딱딱해졌다.수련이 부족한 제자 몇몇은 그 자리에서 마기의 침식으로 피를 토했다.“모든 제자에게 고한다. 나와 함께 현문을 수호하라.” 장인 대진인이 친히 자리에 앉아 온 종문의 기운을 모아 마인을 억제하기 시작했다.마인은 일시적으로 제압되었지만 산 밖의 요괴들과 악귀들은 마기의 부름을 받아 사방팔방에서 서요산으로 몰려들고 있었다.임정설은 이제 자신이 이곳에 온 진짜 이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