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형재가 차갑게 웃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된다고 이 늙은이는 생각합니다. 또한 6대종문이 의논을 거친 후에 움직이라고 회장님께서 저에게 신신당부도 했고요.”구진철의 말에 손형재는 콧방귀를 뀌었다.“또 6대종문. 천 년이나 더 된 우리 종문은 왜 단독으로 일 처리를 못하고 매번 다른 종문들과 논의해야 하는 겁니까?”구진철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갑자기 현문 제자가 뛰어왔다.“도자님, 밖에 도자님을 뵈러 온 분이 계세요.”“누군데?”손형재가 물었다.“문씨 세가의 문아름 씨요.”문아름이라는 말에 손형재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그녀가 나를 찾아왔다고? 어서 들여보내.”“네!”현문 제자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봉황관을 쓴 절세미인 문아름이 들어왔다.마치 천하를 호령하는 고대의 황후 같았지만,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손형재를 향해 예의를 갖췄다.“아름이 도자님을 뵙습니다.”문아름을 보자마자 손형재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갔다.“아름 씨, 너무 예를 차리실 필요 없어요.”“아니에요. 도자님은 하늘이 내리신 현문의 미래니 당연히 예를 갖춰야죠.”문아름이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만하기 짝이 없던 손형재가 이런 말을 들었으니, 입이 귀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아름 씨가 어인 일로 예까지 발걸음하셨는지?”손형재가 물었다.“당연히 그 윤 씨 성을 가진 사람 때문이죠.”문아름은 천천히 말했다.“윤 씨요? 혹시 백성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그 구주왕 말인가요?”손형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네. 맞아요. 도자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저와 구주는 혼인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여기까지 말했을 때 그녀는 억울한 듯 눈물을 흘렸다.문아름이 눈물 흘리는 것을 본 현문 도자는 서둘러 그녀를 위로했다.“아름 씨, 어서 그 눈물을 거두세요. 혹시 그가 아름 씨를 괴롭혔나요?”“아니요. 저를 괴롭힌 적은 없지만 구주는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데다 고집불통이에요. 평생을 그와 함께하고 싶었지만
자신보다 강한 사람을 오만방자한 손형재가 절대로 용납할 리 없었다.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니 더욱 그러했다.“몰락한 왕인 주제에 오만하기 짝이 없네요. 제가 그의 목을 베서 아름 씨의 원한을 풀어드릴 것이니 안심하세요.”살기 가득한 눈빛을 한 손형재의 말을 들은 문아름은 자신의 계략이 먹혔다는 걸 알아챘다.윤구주를 처리하기 위해 종문이 나서준다면 일이 훨씬 수월해진다는 것을 무도 3대 서열의 종문 두목인 그녀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고마워요. 만약 도자님이 정말로 미쳐 날뛰는 구주를 없애준다면 저희 문씨 세가는 도자님의 은혜를 잊지 못할 겁니다.”문아름이 말했다.“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그가 어디 있는지 안다면 지금 당장 미친 구주에게 달려가 그의 모가지를 따겠는데.”살기 어린 눈빛으로 보아 손형재가 정말로 윤구주를 죽이고 싶어 한다고 문아름은 생각했다.“구주가 어디 있는지 제가 알아요.”문아름이 갑자기 말했다.“어디 있는데요?”손형재가 서둘러 그녀에게 물었다.“서울 외곽에 있는 그의 어머님 댁에 있어요.”윤구주의 개인정보를 문아름은 손형재에게 알려주었다.“그 미친놈이 어디 있는 것을 알았으니, 그의 명도 여기까지인가 보구나. 아름 씨,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당장 그를 죽이러 가겠어요.”이 현문 도자가 정말로 윤구주를 죽이려는 하자, 문아름이 말했다.“도자님, 잠깐만요!”“왜요?”손형재가 뒤돌아보며 물었다.“구주가 당시 수련한 봉왕팔기로 천하를 제압했잖아요. 혼자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 만약을 대비해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소개해 드릴 게요.”문아름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너희들도 이제 나와.”그네의 말에 절정의 기운이 감도는 6명의 강자가 갑자기 지하 궁전에 나타났다.이 6명의 리더는 검은 머리와 흰머리가 반반인 노인이었다.초롱초롱한 눈빛을 하고 있던 노인의 주름투성이 얼굴에는 희끄무레한 음산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노인의 뒤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절정 강자들이었다.“형재 씨를 만나 뵙게
문아름의 설득에 손형재는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그러면 아름 씨의 청을 받아들여 이 자들을 데려가도록 할게요.”손형재의 말에 얼굴에 미소가 번진 문아름은 6명의 절정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어서 도자님에게 감사 인사를 드려.”“도자님, 감사합니다.”말을 마친 6명의 세가 절정은 손형재의 뒤에 다가갔다.“구주야, 네가 이번에 어떻게 죽는지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볼 거야.”손형재는 눈빛에는 살의가 가득했다.문아름이 떠나자, 현문의 장로인 구진철이 다급히 물었다“형재 씨, 정말로 저 화진의 구주왕을 죽일 생각인가요?”“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손형재가 말했다.“형재 씨의 생각이 짧은 것 같아서요. 문씨 세가의 목적은 오직 형재 씨를 이용하려는 것이에요. 그리고 다른 종문이 아직 나서지 않고 있는 마당에 우리 현문만 나서는 것이 이 늙은이는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드네요.”구진철이 계속해서 충고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말을 손형재는 전혀 듣지 않았다.“구 장로님이 지나친 걱정을 하는 것 같아요. 3대 서열 중의 1순위인 우리 현문이 하찮은 구주왕조차도 없애지 못한다면 어찌 종문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단 말입니까?”“도자님…”구진철이 또다시 그를 설득하려 하였으나 손형재의 얼굴에는 이미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그만하세요. 저는 이리 하기로 정했으니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마세요. 장로님이 저와 함께하기 싫다면 산으로 돌아가든지.”말을 마친 후, 손형재는 구진철을 무시하고 밖으로 향해 걸어갔다.제멋대로 행동하는 손형재를 보며 구진철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서울의 외곽.정태웅이 공수이를 데리고 떠난 후, 장원에는 용민, 철영, 재이, 그리고 은설아, 민규현, 천현수 등이 남았다.장원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용민이 재이에게 말했다.“재이야, 작은 주인님의 소식은 아직 없는 거냐?”그의 입에서 나온 작은 주인님이란 윤구주를 말하는 것이었다.윤신우가 손수 키웠던 3명 사사의 목숨이 윤신우가 준 것이니 윤구주에게 충
“빌어먹을! 절정이라니!”용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재이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당신들 누구야? 어딜 감히 침범해?”용민이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우리는 구주왕을 찾고 있으니 싸우기 싫으면 썩 비켜! 그러지 않으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야.”손형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뭐라? 작은 주인님을 찾는다고?”용민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손형재와 그의 뒤에 있는 절정들을 쏘아보았다.“잘못 찾아왔네. 작은 주인님은 이곳에 없어.”용민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손형재의 뒤에 있던 1명의 세가 절정이 코웃음을 쳤다.“말이 많구나!”이 절정은 말하자마자 번개처럼 빠르게 용민을 향해 달려갔다.용민은 비록 실력이 있다고는 하나 신급 수준에 불과했다.이 세가 절정의 공격에 그는 황급히 두 손바닥을 모으더니 온몸의 힘을 손에 집중시킨 후 절정을 향해 공격했다.하지만 그가 손바닥으로 절정을 치려는 순간 그 절정도 손바닥을 내밀며 맞받아쳤다.펑!두 손바닥이 마주치자, 용민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뒤로 십여 미터 튕겨 나갔다.그리고 땅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다.“용민 씨! 괜찮나요?”튕겨 나간 용민이를 본 재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난… 난 괜찮으니 어서 규현에게 가서 이 상황을 알려.”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용민은 바닥에서 일어났다.“곧 황천길로 갈 텐데 뭔 발악이야?”독수리 눈을 가진 세가 절정이 말을 내뱉자마자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2개의 장영을 발산하며 용민에게 일격을 가하려고 했다.그 모습을 본 재이가 장영을 막으려고 긴 채찍을 휘두르며 달려갔다.“제 주제를 모르나 보네.”장영이 재이가 들고 있던 긴 채찍을 휘감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재이 역시도 절정의 힘에 밀려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죽여주마.”독수리 눈을 가진 이 세가 절정은 극악무도하기 짝이 없었다.눈 깜짝할 사이에 재이와 용민이에게 상처를 입힌 것도 모자라 살기 어린 눈빛으로 두 사람에게 일격 가할 준비를 하고 있
두 사람이 괜찮다는 말을 듣고서야 민규현은 고개 들어 분노 가득한 눈빛으로 세가 절정과 현문 도자를 쏘아보았다.이때 장원 안에 있던 천현수, 철영, 은설아도 함께 밖으로 뛰쳐나왔다.입가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재이와 용민을 보더니 그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너희들은 누구야? 어디서 감히 행패야?”건장한 체격을 가진 민규현이 호마 기운을 뿜어내며 소리쳤다.뒤에 있던 위압적인 호랑이 그림자는 그를 더욱 난폭해 보이게 만들었다.“암부 3대 지휘자인 호존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어. 이렇게 만날 줄이야!”이때 세가 쪽에서는 변씨 성의 노인이 나섰다.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민규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 노인을 흘끗 쳐다봤다.“너도 세가 출신이냐?”“지휘사라 그런지 보는 안목이 있네. 난 서남 세가인 변만산이야.”상대방이 세가 출신이라는 말에 민규현의 얼굴이 싸늘해졌다.민규현의 뒤에 있던 천현수와 은설아도 마찬가지로 안색이 어두워졌다.노룡산 전투 이후 제자백가의 그 누구도 감히 행패 부릴 엄두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서남 세가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이 변씨 성을 가진 절정이 제자백가가 아닌 다른 세가 출신이 분명했다.“빌어먹을! 서남 세가마저 구주왕을 찾으러 왔다고?”민규현이 직설적으로 말하자, 변만산이 웃었다.“민 지휘사의 말이 맞아. 구주왕이 문벌과 세가에 진 빚을 내가 갚아주러 왔어.”“너희 같은 오합지졸들이 구주왕을 상대하겠다고?”민규현이 거칠게 소리쳤다.“당연하지. 하지만 우리는 구주왕에게 복수하러 왔을 뿐 암부와 척지고 싶지 않거든. 그러니 구주왕을 어서 나오라 해.”변만산이 말했다.“하하하!”민규현은 갑자기 크게 웃었다.“쓰레기 같은 놈들이 망발을 잘도 지껄여대는구나.”그의 뒤에 떠 있던 청색 호영이 울부짖자, 민규현의 온몸에서 호마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민 지휘사가 기어코 막겠다면 어쩔 수 없지.”변만산이 눈빛이 차가워졌다.“죽여버려!”그의 말에 아까부터 벼르고 있던 2명의 절정이 나섰다.이들 6명의 절
자신의 강한 기운만 믿고 있던 손형재는 누구도 안중에 없었다.“이 사람들은 누군데 작은 주인님을 해하려 하는 것일까요?”철영이 주먹을 불끈 쥐며 묻자, 천현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온 것으로 보아 호락호락한 놈들은 아닌 것 같아요.”천현수의 말을 듣고 있던 철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쾅!바로 그 순간, 우레와 같은 폭발음과 함께 맨손으로 덤볐던 절정이 민규현의 호마권에 맞고 비명을 지르며 피를 토했다.그의 몸이 뒤로 젖혀지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칼을 사용하던 절정도 버티기 힘들어하긴 마찬가지였다.이 절정은 검을 휘두르는 검술만 쓰다 보니 온몸에 호마의 기운이 가득한 민규현의 상대가 전혀 되지 못했다.그의 허점이 드러나는 순간, 민규현은 재빨리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세게 쳤다.이 절정도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두 절정이 민규현의 상대가 전혀 아닌 것을 확인한 변만산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함께 덤벼서 저 자들을 죽여버리자.”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주위에 있던 3명의 절정이 공격 태세를 갖췄다.번개 같은 힘을 가진 변만산이 긴 창으로 허공을 가로지르며 민규현을 향해 달려갔지만,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민규현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오히려 그의 뒤에 있던 호영이 점점 더 난폭해지기 시작했다.절정에 발을 들인 후부터 그의 호마는 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호영이 울부짖는 소리와‘펑펑’하는 소리가 나며 민규현은 6명의 절정과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그러던 중, 이들의 싸움을 한참 지켜보고 있던 현문 도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들! 삼중천 절정조차도 못 이기면 어떡해? 그야말로 세가의 수치야!”이 현문 도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힘차게 한 발짝 내디뎠다.쿵쿵!땅이 심하게 흔들리며 검은 현기가 이 도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손형재가 손을 들어 올리자, 먹물 같은 검은 현기가 순식간에 검은 대검으로 변하더니 무지개처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민규현을 향해 날
“한마디만 할게. 구주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너희들은 다 죽은 목숨이야.”민규현은 물론 천현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손형재의 안중에 없었다.“네가 감히 우리 저하의 목숨을 노려?”민규현의 포효와 함께 호마가 뿜어져 나오더니 뒤에 있던 청색 호영이 순식간에 2배로 커졌다.그가 두 손을 휘두르자, 호영이 현문 도자를 향해 돌진했다.하지만 민규현의 공격에 현문 도자는 차갑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무모하군.”현문 도자가 또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 이번에는 온몸의 검은 현기가 주먹으로 변하더니 호영을 향해 날아갔다.쾅!큰 굉음이 나더니 민규현이 발사한 호영은 손형재의 검은 현기에 순식간에 뚫리고 말았다.민규현은 또 피를 토했다.그가 비록 삼중천이라고는 하지만 현문 천재인 이 도자와의 실력 차이가 너무 컸다.“이래도 구주의 행방을 말 안 할 거야? 그렇다면 나를 탓하지 마! 죽어!”사실 이 현문 도자는 애초부터 이들을 죽일 생각이었다.그가 ‘죽어’라는 말을 내뱉자, 대검으로 변한 검은 현기가 허공을 가르며 민규현과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날아갔다.그들을 모두 죽이려는 듯 보였다.일촉즉발의 순간에 갑자기 윙윙거리는 소리가 장원 안에서 들려왔다.무서운 소리가 들려오자, 현문 도자는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장원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갑자기 하늘에서 한줄기의 검빛이 내려오더니 무서운 살기를 내뿜으며 손형재를 향해 날아왔다.어찌나 빨랐으면 맨눈으로 포착할 수 없을 정도였다.“형재 씨! 조심하세요!”손형재의 뒤에 있던 현문의 장로 구진철이 무시무시한 검빛의 위력을 감지하고는 소리를 질러댔다.손형재도 이 기세에 눌려 방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민규현을 찌르려던 검을 재빨리 되돌려 그 검빛으로 방향을 트는 수밖에 없었다.쾅!두 개의 검이 부딪치며 귀청을 찢는 듯한 굉음을 냈다.그 소리와 함께 검의 기세에 눌린 현문 도자는 몇 발짝 뒷걸음질 치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 멈춰 섰다.“빌어먹을! 감히 이 도자에게 칼을 겨누다
꼬맹이의 검법은 위압적이고 거칠었다.검빛이 나타나더니 검의 기운을 내뿜으며 손형재를 향해 날아가자, 손형재는 깜짝 놀랐다.이 꼬맹이가 절정에 발을 들였다는 것을 손형재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거칠게 나올 줄은 몰랐다.그가 두 손으로 결계를 만들자, 주위의 검은 기운이 순식간에 두 개의 큰 주먹으로 변하면서 꼬맹이를 향해 날아갔다.“하루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손형재는 진정한 오악 절정이었다.하늘이 내린 현문의 천재였던 그는 지위나 재능이 높아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그런 그가 이제 막 절정에 발을 들인 애송이에게 이런 말을 들었으니, 수모를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주먹으로 변한 검은 기운이 꼬맹이에게 날아오는 순간, 꼬맹이는 들고 있던 칼을 휘둘렀다.그러자 밝은 달 모양의 검망이 주먹과 부딪쳤다.쾅!주먹이 산산조각 나며 폭발을 일으켰다.“형재 씨! 이 검법이 위험해요! 조심하세요!”손형재의 옆에 있던 구진철이 안색이 어두워진 채 남궁서준의 절세 검법을 바라보며 소리 질렀다.‘이제 막 절정에 발을 들여놓은 애송이가 오악 절정인 내게 치욕을 안겨주다니!’남궁서준의 검법에 밀리고 있던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바로 손바닥을 폈다.그러자 손바닥에서 뱀 모양의 장검이 나오기 시작했다.절정에 몸을 담근 사람들이 기를 여러 형태로 변환하는 것에 익숙하다지만 이 뱀 모양의 장검은 다름 아닌 현문의 가장 큰 보물인 흑사검이었다.이것은 역대 도자들이 지니고 있던 검이었다.흑사검이 나타남과 동시에 손형재의 기운이 치솟더니 검은 검빛은 순식간에 꼬맹이의 검망과 얽혀버렸다.쾅! 쾅! 쾅!하늘 위에는 검은색과 흰색의 검이 부딪히고 있었다.“젠장, 저 작은 녀석의 정체가 대체 뭐죠? 어떻게 감히 우리 도자님과 대등한 싸움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요?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현문의 한 제자가 입을 열었다.“그러게 말이에요! 저 작은 녀석이 이제 막 절정에 발을 들였다고 하던데.”“혹시 저 애송이가 명성이 자자한 구
단 한 걸음,그 한 걸음만 넘기면, 그는 곧 성급 바로 직전 경지에 이른다.그리고 그 마지막 문턱을 박살내는 순간 반쯤 성인이 된 경지, 반성급이다!지금 이 자리, 그 반성급 경지에 선 자는 바로 인마라고 불리는 무명이었다.“과연... 화진의 인황, 구주왕이라 불릴 자격은 있군. 하지만 너도 알겠지. 지금 네 수준으론 몸을 직접 이 판에 던지지 않는 이상 나랑 맞붙을 자격조차 없어. 네가 그 잘난 원신출체를 어떻게 하겠다는지 구경이나 해보자고. ”무명이 입꼬리를 비틀며 코웃음쳤다.팔기귀일에 도달한 윤구주의 전투력은 이미 황의 지경을 뛰어넘었다.하지만 무명과의 경지 차이는 여전히 너무 컸다.실력은 분명 엄청났지만 격이 다르였다.지금 상태로도 보통의 황자의 경지까지 초월한 상태지만 무명을 상대하긴 아직 한참 부족했다.심지어 무명이랑 싸울 실력은커녕 참마검조차 손에 제대로 못 잡는 게 현실이었다.“팔기로 부족하다면... 제구기는 어때? 구기:적선!”부우우우웅!윤구주의 온몸을 하얀 선기가 감싸는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웃고 있던 무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뭐라고? 이건 네 따위가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잖아! ”그 순간, 무명조차 숨을 삼켰다.이건 상식의 틀을 깨부수는 광경이었다.근대에 들어서면서 도에 대한 수련는 사실상 약해졌다.그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세상에 흐르는 천지영기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봉신전쟁 당시, 상상을 초월하는 영기가 소모됐고 그 전쟁이 끝난 후 곤륜구역은 세상의 영기 90%를 신계에 봉인해버렸다.거기서 마음껏 영기를 탕진한 것도 모자라 바깥의 산수들까지 무분별하게 빨아들인 탓에세상의 영기는 걷잡을 수 없이 줄어들고 말았다.결국 세상은 고위 수련자가 태어나기 어려운 구조가 되었다.그래서 화진에선 500년에 한 번 황자가 나올까 말까 할 정도이고 황자의 경지에 도달하는 건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었다.임정설이 황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처음부터 그가 강해서가 아니라 윤구주를 돕기 위해 왕
마기가 검종 제자들의 혼백에 침투하자 그 순간 제자들의 몸에서 시커먼 마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이를 목격한 장인 대진인은 망설임 없이 즉시 결단을 내렸다. 오염된 제자들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정화해 버린 것이다.“모든 제자들아, 입문 첫날 내가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서요산은 찬란한 성지 화진 정통의 계승지다. 정은 사악함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정은 사악함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서요산 제자들이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도의였다.입문과 동시에 깨달음을 얻은 그들은 언젠가 반드시 도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저 화진 정통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서였다.그 순간 진요탑 외곽에서는 7대 진인을 중심으로 전 종문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진요탑을 사수하고 있었다.하늘을 뒤덮을 듯한 마기의 기세는 점점 거세져 어느새 검종의 경내 전역을 삼켜버렸다.검종 제자들은 마기를 막아내면서도 동시에 진요탑의 결계를 유지해야 하는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정도를 지키는 일은 그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투쟁이었다.산 아래 상황도 마찬가지로 치열했다.온갖 요괴와 귀신들이 들이닥치는 가운데 임정설은 황운을 등에 업고 이씨 가문의 국운을 모두 모아 홀로 수백만 마기를 막아서고 있었다.백호는 마인으로 완전히 변신해 광란의 충격 속으로 몸을 던졌고, 스스로 마를 품은 채 적진을 난도질했다.청해는 천뢰신술을 펼쳐 수만 개의 천뢰를 무기로 변환시켜 온갖 사도와 악귀를 쓸어내기 시작했다.그 무렵 진요탑 내부에서 풍무극의 기세는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구주야, 내 한계에 도달했다. 이제 내 500년 수련의 혼을 너에게 바치겠다."”풍무극의 준비는 이미 완료되었다.그는 미리 준비해 둔 제천 법기를 꺼냈고 전법이 발동되는 순간 그의 육신은 산산조각 부서졌다.그의 정기와 천지 정기를 모두 품은 찬란한 진신 영혼은 한 자루의 참마검으로 변해 윤구주 앞에 떠올랐다.“풍 종주...” 윤구주는 입술을 깨물었다.슬프고 아쉬
윤구주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국운의 기운이 그의 발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그가 진요탑의 문에 도달했을 무렵 모든 국운이 윤구주에게 집중되었다.윤구주의 주변으로는 천인신광이 펼쳐져 있었다.이 순간만큼은 그가 천지의 주재자 화진의 영겁을 관통한 유일한 존재였다.윤구주는 홀로 진요탑 안으로 들어섰다.겉보기에 거대한 산 같았던 진요탑의 내부는 참혹한 말세의 풍경이었다. 땅은 끝없이 펼쳐진 용암으로 뒤덮여 있었고 하늘에서는 강줄기가 거꾸로 흘러내리고 있었다.불과 물이 충돌할 때마다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격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거꾸로 흐르는 강물 위에 한 노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백발이 성성한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서요산 검종의 종주였다.밖에서 보이던 강건한 중년의 모습은 단지 화신에 불과했으며, 본체는 수백 년 전부터 이 진요탑에서 마인을 봉인해 왔다.서요산 검종 종주는 극도로 지쳐 있었고 이제는 마지막 호흡으로 버티고 있었다.“드디어 왔구나.” 서요산 검종 종주는 허약한 전음으로 말을 건넸다.“오백 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종주님.” 윤구주는 고개를 숙였다.풍무극은 현 서요산의 종주이자 당대 최고의 영웅, 화진 제일 검으로 불리던 남자였다.원래는 풍속을 다루는 수련자로 젊은 시절엔 검 하나로 화진을 호령한 사내로 알려졌다.그의 검은 아무도 궤적을 볼 수 없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500년 전 마인이 봉인되고 서요산의 조사가 승천한 후, 풍무극은 서요산의 거자로서 종주의 자리를 이어받았다.그날 이후 진요탑에 몸을 묻고 마인과의 싸움을 500년간 지속해 왔다.풍을 다루던 그였지만 지속적인 봉인을 위해 익숙하지 않은 수속까지 수련하며 지금까지 버텨왔다.그가 마도에 빠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이었다.“그래도 괜찮다. 다행히 이 시대에 또다시 인황이 나왔으니. 화진은 연달아 두 명의 인황을 배출했다. 임정설이 인황에 등극한 지금 쇠락하던 이씨 가문의 국운이 다시 살아났다. 그가 천지의
마인이 출현하면 곤륜 구역조차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서요산 검종의 진요탑은 이미 오백 년 동안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이는 곧 그 마인이 오백 년 동안 진요탑 안에 봉인되어 있었음을 의미했다.“우리가 가진 유일한 이점은 저 마인이 지난 오백 년간 수련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오백 년 동안 분명 무언가를 '깨달았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정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도가 존재하는 법입니다. 만약 그가 이곳을 벗어나 다시 한번 돌파에 성공하여 진정한 성인의 경지에 오른다면…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 우리 종문의 선대 종주께서 이 마인을 직접 봉인하셨습니다. 하지만 선대 종주께서는 진요탑만으로는 그를 완전히 봉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아셨지요. 그래서 마침내 구천으로 비상하셔서 바깥 세계에 존재한다는 신기를 찾기 위해 떠나신 것입니다.”장인 대진인이 비밀을 털어놓자 임정설은 왜 그 옛날 서요산 검종을 창립한 선조가 갑자기 사라졌는지 이해했다.“구천을 비상했다고? 전설 속 그 이야기 설마 전부 사실이었단 말인가? 이 세상 위에 더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건가?” 임정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들은 바로는 성인이란 육지에서 신선이 된 자를 이르는 말이고 준성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 반쯤 신선이 된 존재라 하더군요. 우리보다 더 풍부한 영기의 세계가 과연 존재하는지는 이 몸 역시 감히 짐작할 수 없습니다.” 장인 대진인은 고개를 저었다.그때였다.진요탑이 거칠게 흔들렸고 모든 호법 제자의 얼굴이 딱딱해졌다.수련이 부족한 제자 몇몇은 그 자리에서 마기의 침식으로 피를 토했다.“모든 제자에게 고한다. 나와 함께 현문을 수호하라.” 장인 대진인이 친히 자리에 앉아 온 종문의 기운을 모아 마인을 억제하기 시작했다.마인은 일시적으로 제압되었지만 산 밖의 요괴들과 악귀들은 마기의 부름을 받아 사방팔방에서 서요산으로 몰려들고 있었다.임정설은 이제 자신이 이곳에 온 진짜 이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