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때, TV에서 점심 뉴스가 방송되었다.뉴스는 왕실 대표가 직접 진행했으며 뒤쪽 화면에는 구주왕의 좌상이 비치고 있었다.화면 속에서는 윤구주가 군복을 입고 가장자리에 앉아있었다.화면이 펼쳐짐에 따라 여러 장군이 좌우에 나란히 서 있었다.그 기세는 어마어마할 정도로 대단했다.화면을 통해서도 여러 장군에게 압도당하는 기분이었으니 말이다.가장 강력한 것은 구주왕이었고, 그는 온몸에서 왕자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그는 그저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대세가 이미 정해진 듯한 안전감을 줬다.왕실 진행자는 구주왕의 화려한 역사를 이야기하며 과장된 표현으로 구주왕에 대한 개인적인 숭배의 감정을 드러냈다.가장 빛나는 전적으로는 혼자서 열 개국을 상대했는데 그 열 개국의 적들이 스스로 화해를 요청한 것이다.소채은은 그만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말았다.이순간 그녀는 꿈처럼 느껴졌다.화진에서 오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도 나올까 말까 한 존재가 그녀의 남자였으니 말이다.“어? 구주네? 저 사진은 쟤가 가장 기세등등할 때 찍은 사진이거든요. 저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봐봐요. 너무 잘난 척하지 않아요?”김도현은 밥을 다 먹고 이를 쑤시며 말했다.“선배님, 윤구주를 알아요?”소채은이 놀라면서 물었다.“그럼요. 제가 쟤 아버지거든요.”김도현이 입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소채은은 멍을 때리고 말았다.“김씨 아니셨어요?”“아, 양아버지라고요.”소채은은 그제야 왜 그가 자신을 양딸이라고 불렀는지 알 것만 같았다.그녀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져 얼굴이 발그레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양딸로 인정받아서 내심 기뻤다.“하하.”김도현은 피식 웃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정말 이 헛소리를 믿는 거야?’이런 관계 덕분에 소채은은 자연스럽게 김도현과 가까워지게 되었다.“선배님, 뉴스에서는 왜 제 스승님을 언급하지 않는 거예요?”소채은은 이상하기만 했다.‘설마 사부님이...’“이것저것 의심하고 걱정하는 대신 제발 자신감 좀 가져줄래요? 제가 괜찮다면 괜찮은
화진 북부지역에 있는 비밀 공항.윤구주 일행은 아침에 이미 천옥과 50km도 안 되는 곳에 도착했다.눈이 펑펑 내려 추운 눈 속에 고립된 윤구주는 계속 서울에서 전해지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서울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다음 행동을 시작할 방법이 없었다.극도로 억제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소채은의 영향을 받아 감정이 불안정한 상태였다.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암부 3대 지휘사는 그들의 왕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그들도 소채은이 무사하기를 기도하고 있었다.소채은은 너무나도 중요했다. 만약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아무도 몰랐다.“걱정하지 마세요. 문씨 가문이 바보도 아니고 형수님을 죽였다간 별로 좋은 일도 없을 거예요.”“제가 봤을 땐 아무 일도 없거나 이미 문씨 가문에 잡혀갔을 수도 있어요.”가장 권모술수에 능한 천현수가 분석했다.“씁! 그럼 우린 왜 서울을 떠나야 하는데? 천옥에 가는 게 급하지도 않은데.”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정태웅이 구시렁거렸다.“너 바보야? 저하가 안 가는데 현문 시조가 서울에 갈수 있겠어?”“우리는 움직이지 않고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거야?”민규현이 정태웅의 머리를 한 대 때리며 말했다.“그래. 서울에 남아있으면 더욱 수동적일 수밖에 없어. 저하가 이러는 것도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한 거라고!”천현수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바로 이때, 민규현의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민규현이 핸드폰을 꺼낼 때, 세 사람은 동공이 확장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 핸드폰은 암부와 곤륜 구역을 연결하는 전용 핸드폰으로 곤륜 구역에서만 암부에 연락할 수 있었다. 이 선로가 설치된 이후로 곤륜 구역에서 암부와 연락한 것은 처음이었다.“곤륜 구역이에요?”정태웅이 긴장하며 물었다.암부는 곤륜 구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곤륜 구역은 전 세계와 맞먹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그 역사는 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으면 이 지구에서 가장 신비로운 지역이었다.민규
두둥!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뭘 폭파했는지 폭발음이 귀청을 찌르는 듯했다.“이런 제기랄! 난 윤구주 아버지라고! 전하든 말든 마음대로 해!”세 사람은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전화기를 들고 걸어가며 조용히 경고했다.“말조심해 주세요. 저희도 당신을 위해서 이러는 거예요.”윤구주 앞에 도착한 민규현은 전화기를 막으면서 말했다.“저하, 곤륜 구역에서 전화가 왔는데 어떤 건방진 놈이 검도의 사람이라면서 저하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더라고요. 저희가 도저히 어떻게 할수가 없었어요.”윤구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민규현이 핸드폰을 건네려고 하는데 스피커폰으로 해놓으라고 했다.윤구주는 몸에 쌓인 눈을 훌훌 털어내고 천현수에게 천옥으로 출발할 준비 하자고 했다.‘대화도 해보지 않고 떠날 준비를 한다고? 설마 이미 뭔가를 알고 있는 걸까?’핸드폰은 이미 스피커폰 모드로 되어있는데 검도 강자라는 사람은 핸드폰이 이미 윤구주에게 건네진 걸 모르고 욕설을 퍼부었다.“이런 병신같은 자식들! 윤구주 부하들은 왜 하나같이 멍청한 거야. 정말 짜증 나네? 윤구주, 이 망할 놈! 빨리 네 아버지 전화를 안 받아?”윤구주에게 이렇게 대드는 사람은 처음이라 민규현, 정태웅, 천현수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말았다.동시에 상대방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말할 줄 모르면 말하지 마. 저번에 떠나면서 너희 스승님더러 너한테 본때를 보여주라고 했는데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나 보네.”윤구주의 담담한 목소리에 상대방은 멍해졌다.민규현 3인은 상대방이 긴장한 것을 느낄수 있었다.“어...”“뭐라고? 벌거벗고 15,000km를 달리게 한 게 모자랐나 봐?”민규현 3인의 표정은 순간 밝아졌다.‘글쎄 어딘가 이상하다 했어. 아까 대화를 나누면서 저하를 언급했을 때 원망이 가득했단 말이야. 이제 보니 저하에게 학대당한 거였네!’“윤구주...”“뭐라고?”“저하!”“저하가 네가 마음대로 불러도 되는 이름인
“조상님! 채은 씨는 이미 안전해. 스승님이 단련시키려나 본데?”검도 도주가 직접 단련시킨다는 말에 민규현 3인은 부럽기 그지없었다.“알았어.”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소채은에게 별일 없다니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조상님, 한 가지 더 이야기할 거 있어! 우리 검도도 참여하게 해주지? 진작에 종문 동맹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무슨 낯짝으로 감히 화진 무도라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 조상님 한마디면 우리 검도 전원이 곤륜 구역을 벗어나 종문 동맹을 모조리 없애버릴 거야.”전화기 너머에서는 거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윤구주가 아무 말도 없이 민규현에게 눈빛을 보내자 통화는 이대로 끝났다.“저하, 저 자식 도대체 누구예요? 검도까지 나서면 정말 종문 동맹을 해결하는 건 크게 문제도 아니잖아요.”천현수가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권모술수의 달인은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너의 시야는 너무 좁아. 권모술수도 일정한 실력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하는 거야. 넌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몰라.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거야. 권모술수를 남용하면 화를 자초할 뿐이라고.”윤구주가 진지하게 말하자 천현수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종문 동맹이 내가 봤던 거와는 다른가? 그 뒤에 다른 고수도 있는 건가?’“채은이가 별일 없다는데 굳이 급해 할 필요도 없어. 지금은 예전과 달라서 잘못 움직였다간 잘못될 수도 있어. 내 계획대로 진행해.”천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윤구주가 권모술수를 쓰려는 모양이다.그는 권모술수의 길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는 국주가 직접 나서서 따로 간섭할 필요가 없었다.이제 왕이 직접 나선다는 것은 상황이 이미 통제 불능이라 국주가 컨트롤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저하, 그 자식 도대체 누구예요?”정태웅이 질문했다.“검황도종의 선배이자 검도의 검수. 간단히 말해서 야망은 크지만 속셈이 없는 허수아비일 뿐 큰일을 이루기 어려운 사람이라
천옥이 위치한 곳은 세계 10대 생명 금지구역으로도 분류되었다.극단적인 기후 외에도 이곳에서는 모든 내비게이션 장치가 전부 무효화되었다.근 수백 년 동안 수많은 탐험대가 이곳을 정복하려고 금지구역까지 깊이 들어갔는데 결국 실종되거나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이제 막 진입한 대오는 이미 완전히 방향감을 잃고 말았다.윤구주가 앞에서 인도하지 않았다면 암부 3대 지휘사라도 길을 잃었을 것이다.“저하, 여긴 정말 기이한 곳이네요! 모든 내비게이션 장치도 소용없고 나침판조차 엉망이네요.”“이런 제기랄! 하늘에 왜 태양이 열 개나 있는 거야? 오로라도 있고! 여긴 도대체 어떤 곳이야!”정태웅 3인은 구시렁거리기만 했다.“그래서 내가 진북왕을 앞장세웠잖아. 구오 지존이 길을 안내하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함정에 빠질지 몰라. 너희들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허구일 뿐 직접적인 생명 위협은 가하지 않을 거야. 제일 무서운 것은 이곳 영기가 무질서하다는 거야. 쉽게 말해 자기장이 비정상적으로 혼란스러워 정신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여기에 오래 머무를수록 더 깊이 빠지게 될 거야. 게다가 자기장이 불안정해서 어떤 규칙도 적용되지 않아. 내비게이션 장비는 물론 현수오행, 풍수 변위 기술도 여기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윤구주가 설명했다.정태웅 3인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저하, 왜 진북왕은 괜찮은 거예요?”정태웅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너희는 구오 지존에 도달하지 않으면 이 경계의 신비를 알수 없어. 이 경계가 지존 왕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곳이 천지의 영기를 흡수해 자기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야. 내가 방금 말했듯이 천옥 영기가 혼란스러운 것은 영기가 너무 많아서야. 구오 지존 절정에 이르면 천지의 영기를 명확히 감지할 수 있어. 이곳에서 발생하는 기이한 변동은 모두 영기 때문에 발생하는 거야. 영기의 변화를 주의 깊게 지켜보면 대부분 숨겨진 위험을 예측하고 피할 수 있어. 그리고 영기가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중심점이 존
현관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윤구주는 모든 정신을 모아 흐르는 천지 영기를 자세히 감지했다.영기가 침적된 곳이 아니라 영기가 충족하게 안팎으로 내뿜는 곳이 바로 현관 입구였다.“찾았어. 다들 따라와.”윤구주가 발을 내딛자 뒤에 있는 일행은 멍때리다가 대오를 놓칠까 두려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따랐다.열 걸음도 채 가지 않았는데 갑자기 윤구주가 사라졌다.바짝 뒤따르던 민규현도 반응하지도 못한 채 강력한 흡입력에 휘말려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무슨 상황이야!”정태웅도 손을 뻗어 잡으려다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지휘사, 저희는 이제 어떡해요?”다른 사람들은 겁에 질려서 함부로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했다.“무서워할 필요가 뭐가 있어. 저하도 들어가셨는데 물불을 가리지 않고 따라 들어가야지!”천현수는 소리를 지르며 뛰어들어갔다.뒤따르던 열몇 명의 대장들도 소리를 외치며 앞다투어 뛰어들었다.이들은 오색찬란한 무지개 통로에 빨려 들어갔다.이들은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지, 아니면 하늘로 솟아나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얼마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희미하게 거대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슝슝!한 무리의 사람들이 연달아 통로를 뚫고 나와 마치 분수처럼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쿵! 쿵! 쿵!이들은 바닥에 떨어져 어질어질한 상태에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그러다 한참을 엎드려 쉬어서야 겨우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 시각 윤구주는 바닥에 앉아 환하게 웃으면서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처음이라 어지러운 게 정상이야. 사실 여기는 이미 곤륜 구역이나 마찬가지야. 다만 영기가 혼란스러워 곤륜 구역에서 배제된 것뿐이야.”윤구주는 일어나 먼지를 툭툭 털면서 소개했다.“천옥은 곤륜 지역의 은신지로 곤륜 구역에서 쫓겨난 수련자들이 이곳으로 유방 되는 거야. 시간이 지나면서 수련자들이 점점 많이 모이기 시작했고, 이들이 외계로 나갈까 봐 곤륜 구역에서 감시자를 보내기도 했어.”민규현 3인과 대장들은 그제야 이 신비로운 세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온 세계가
이들은 바로 윤구주 밑에 있는 장군이자 신급 고수들이었다.윤구주와 인사를 나눈 후, 멍하니 서 있는 정태웅 일행을 조롱했다.“막 도착해서 이러는 것도 정상이에요. 이틀 정도 지나면 익숙해질 거예요.”바로 이때, 한대의 중형 군용 헬리콥터가 사람들 머리 위를 지나가며 헬리콥터에 장착된 군용 카메라로 지질을 찍고 있었다.먼곳에는 한 무리의 방호복을 입은 연구원들이 고정밀 기기를 만지작거리며 무언가를 측정하고 있었다.정태웅 일행은 그제야 윤구주가 이미 하산해서 진영 쪽으로 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문이 있는 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중앙에는 넓은 평지가 있었다. 진동왕이 이끄는 십만 대군은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고, 이미 산골짜기에 임시 진영을 구축했다.몇만 명 전사들이 대형을 이루고 있었고, 열몇 명의 장군이 주축이 되어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전사들의 함성은 하늘을 찔렀고, 정태웅 일행은 인기척을 느끼고 하나둘 진영으로 달려갔다.정태웅 3인은 간단히 씻고 바로 지휘소로 모였다.지휘 텐트 안에는 이미 많은 인원이 모여있었고, 장군들은 뜨거운 시선으로 윤구주를 쳐다보았다.“윤구주, 서울 쪽은 어떻게 되었어?”진동왕은 서울의 변고에 관해 묻고 있었다.“일이 좀 생겼는데 전반적으로 잘 통제되고 있어요. 저도 서울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고 천옥으로 온 거예요.”윤구주가 말했다.“그럼 다행이네. 십만 대군들이 내 지휘를 따르긴 하지만 네가 없으니까 전혀 기운을 차리지 못하더라고. 네가 오니까 다들 정신을 차리잖아. 나까지 마음이 불안하더라고.”진동왕은 그야말로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십만 대군은 선발된 정예로 화진의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대표하고 있었다.무슨 일이 생기면 그 후과는 상당히 심각했다.“아저씨도 곤륜 구역에서 수련한 분인데 겪어보지 못한 것이 없잖아요. 화진 5천 년 역사에서 고난은 수도 없이 많았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윤구주는 이 말로 진동왕에게 큰 자신감을 안겨주었다.“그래요. 그러면 저희는 계획
연구원들이 있는 텐트.“수장님!”윤구주를 보자마자 연구원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다들 앉아요. 저한테 너무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어요.”시간이 촉박하고 임무가 중대했기에 이들과 예의 차릴 겨를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요 며칠 어떤 방법을 연구해 낸 거예요? 천옥 영기가 이 정도로 이상한데 외부에 영향을 미치면 화진에 재난을 가져다주는 거 아니에요?”윤구주가 물었다.정태웅 3인에게 말해봤자 알아듣지도 못할 바에 너무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았다.천옥은 고대 신들의 전쟁 때문에 왕자들이 천술을 남용한 나머지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상식적으로 천술이 가져온 영향은 결국 사라질 것이고, 만물이 회복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하지만 윤구주가 수년간 조사도 해보고 천옥에도 들어와 본 결과 영기는 진정되지도 않고 오히려 더욱 혼란스러워졌다.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윤구주도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어 과학적 근거를 따지면서 진상을 밝혀보기로 했다.연구를 주관하는 몇몇 학자들은 윤구주에게 기기로 측정한 결과를 보여주었다.윤구주는 전문 용어들을 잘 몰랐기에 결론만 보았다.데이터에 의하면 외부에 영향을 미쳤을 경우 이상 기후가 발생할 것으로 보였다.특히 현재 환경에 적응한 모든 생명체에게는 심각한 시련이 닥칠 것이다.인류 측면에서는 통신 장애가 발생하여 모든 전자기기가 다양한 정도로 영향을 받을 것이다.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이곳에 온 지 며칠밖에 안 되었기에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인체에 분명 좋지 않을 거예요.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신체 기능도 심각한 영향을 받을 거예요.”윤구주가 심각하게 말했다.몇몇 학자들이 요약하길 지질 재해는 인류 문명에 큰 충격을 안겨줄 것이라고 했다.“그래요. 서둘러 연구해 주세요. 우린 여기 오래 있지 못해요.”한편으로 진동왕은 대군들에게 이번 목적을 설명하고 있었다.“천옥에 들어온 목적은 사람을 구하기 위함이고, 이 부분은 구주왕이 책임질 거야. 우리의 임무는 이곳에 숨어있는 귀신족 잔당을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