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진 할아버지께서도 말씀하셨잖아. 너는 화진의 새로운 왕일 뿐만 아니라 500년 만에 한 번 나오는 황자라고. 네가 황위에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야. 나도 네가 새로운 황제가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이었다면 옛 왕실의 결말은 참혹했을 거야. 임씨 가문의 임무는 이미 끝났어. 이제는 네가 우리 임씨가 이루지 못한 것릏 이어가야 할 때야.”임홍연의 말은 일리가 있었고 이는 새로운 군주가 듣고 싶어 할 좋은 말이었다. 하지만 윤구주는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그 말들은 누가 가르쳐 준 거야? 설마 진동왕이야? 그래, 진동왕은 이미 군대에서 위엄을 세웠고 지금은 사람을 쓸 때라 그가 없어서는 안 되지. 진동왕은 임씨 황실의 왕이기도 하고 새로운 왕조의 왕이기도 해. 어느 쪽이 이기든 손해 보는 일은 없지.”윤구주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임홍연은 어안이 벙벙해져 윤구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윤구주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건 그녀를 믿지 않는다는 뜻이었다.너무 화가 났지만 윤구주가 황위에 오를 것을 생각하면 그녀는 윤구주를 화나게 할 수 없었고 오히려 옛 왕실의 신하들을 위해 살길을 마련해야 했다.다시 말해, 진동왕이 새로운 왕조에서 왕이 되는 것은 옛 왕실 구성원들을 보호하는 길이기도 했다.“아니, 진동왕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 없어. 그분은 자신의 능력으로 군대에서 높은 자리에 올랐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내가 이런 말을 너한테 하는 건 우리 두 사람의 관계 때문이야...”임홍연은 더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가슴이 베이는 듯한 고통이 밀려오며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계속 말해 봐. 우리가 무슨 관계야?”윤구주는 한 발자국씩 다가가며 그녀에게 얼버무릴 기회를 주지 않았다.임홍연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화진의 천하와 백성을 위해서 하는 말이야.”“나는 지금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묻는 거야.”윤구주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단호하게 말했다.“우리는 친구야! 누구든
윤구주는 임홍연의 허리를 끌어안아 올려 자리에 앉혔다.“윤구주... 잠깐 내 말을 들어봐.”윤구주는 두 손가락으로 임홍연의 붉은 입술을 가볍게 막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무력으로 천하를 평정할 수 있고 나라를 지킬 수 있지만 나라를 다스릴 재능은 없어. 공주님은 국주의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였고 조정의 신하들과도 많이 접촉잖아. 근데 그 서생들은 나를 엄청 무서워해. 나는 나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마음 놓고 쓸 수 없어. 다른 건 일단 제쳐두고 이번 북라국 침략을 막아낸 일만 봐도 장병들이 네게 복종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잖아. 나는 나라를 다스릴 재능이 없으니 이 국주의 자리는 역시...”이때 임홍연이 벌떡 일어서서 그의 말을 끊었다.“윤구주!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네가 올 줄은 몰랐다고. 내가 탱크들을 청관으로 소집했을 때는 살아서 돌아갈 생각이 없었어.”“공주님, 서두르지 말고 내 말을 끝까지 들어봐.”윤구주는 임홍연을 강제로 자리에 앉히고 나서야 다시 말을 이어갔다.“일주일 뒤에 전쟁이 시작될 거야. 이 일주일 동안 공주님은 나를 대신해 북역을 지켜줘. 나는 서울로 돌아갈 거야.”“서울로? 아버지를 구하러 가는 거야?”임홍연은 그가 무슨 일을 하려 하는지 깨달았다.“맞아. 나는 화진의 구주왕이야. 국주님이 위기에 처했는데 어떻게 구하지 않을 수 있겠어? 게다가 나 윤구주는 체면을 아끼는 사람이야. 만약 가지 않는다면 서생들이 날 욕할 거야.”윤구주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감히 널 욕해! 네가 아버지를 구하지 않는다고 해도 누구도 너를 비난할 수 없어!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나라와 백성이 군주보다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어. 전쟁이 임박했는데 사령관이 없으면 안 된다고. 군주는 죽을 수 있어도 국사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임홍연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하자 윤구주가 입을 열었다.“공주님 말이 맞아. 하지만 내가 방금 말했듯이 나 윤구주는 나라와 백성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야. 국주님은 나의 첫 번째 스승이셨
“게다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네가 모를 리가 없잖아? 네가 공주라도, 미래에 왕이 된다 해도 넌 나 윤구주의 여자야. 우린 영원히 함께할 거야.”“윤구주, 난 네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들어.”콜록.두 사람이 알콩달콩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밖에서 민규현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민규현은 어색한 표정으로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쟤는 밖에서 뭐 하는 거야? 감히 엿듣고 있었다니.”윤구주의 품에서 애교를 부리던 임홍연의 표정이 갑자기 엄숙해지더니 왕의 기세를 뽐냈다. 이 장면을 본 윤구주는 마음속으로 감탄했다.‘왕실의 유전자는 정말 다르네. 한 번의 경험만으로 예전의 기운을 모두 벗어버렸어. 우리 불쌍한 채은이...’윤구주는 소채은이 안쓰러워졌다. 그녀는 임홍연과 달랐고, 윤구주는 그녀의 순수함과 선량함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무술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평가를 하고 싶지 않았다.우상 육도진의 말을 빌리자면, 소채은은 무술에 대한 재능이 없었다. 누구라도 윤구주와 그렇게 오래 함께했으면 주변 사람의 지도를 받아 이미 강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인데 말이다.“나는 빨리 서울로 돌아가야 해. 너에게 문제가 생겨서는 안 돼. 그러니 북역에 남아 있어. 일주일 뒤 북역에서 전쟁이 일어날 거지만 화진에서 북역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어.”윤구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신신당부했다.“응. 난 너를 믿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난 너를 원망하지 않을 거야.”임홍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별 인사로 키스를 했다.임홍연에게 일을 맡기고 난 윤구주는 급히 민규현을 따라 저택을 떠났다.“저하, 비행기가 준비되었습니다. 왕의 명령대로 누구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왕이 서울로 돌아가는 것을 몰라요. 역시 우리 왕이십니다. 정말 훌륭한 계획이에요. 왕께서 전 세계에 결전을 선포하니 북라국 놈들이 더는 별짓을 못 하고 급히 전쟁 준비를 시작했죠.”민규현이 혀를 차며 말했다.“오? 너 언제 이렇게 똑똑해졌어? 이건 너답지 않은데. 천현수가 너
진동왕의 말이 엄연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었다.북경왕이 문씨 가문과 타협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자신의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그가 아는 바에 따르면 북경왕은 일찍이 구오에 도달했지만 무술로 도를 깨우쳤기 때문에 곤륜에서 천지의 기운을 흡수해 구오에 도달한 자들보다 실력이 훨씬 뒤떨어졌다.문씨 가문은 곤륜을 등지고 있어 북경왕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그렇다면 진동왕의 뜻은...”“엄 장군만 알고 있으면 됩니다. 해야 할 말만 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마세요.”진동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엄연을 바라보자 엄연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진동왕은 다른 장군들에게도 눈치를 주며 의도적으로 엄연을 통해 위엄을 세우려 했다.현장에 있던 장군 중에는 구주군 휘하의 장수들도 있었는데 진동왕의 이런 행동에 매우 불쾌해했다.바로 그때 윤구주가 도착했다.그의 모습이 보이기도 전에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진동왕, 정말 위엄이 대단하시군요. 얼마 안 돼 구주군 총사령관 자리도 진동왕에게 넘어갈 것 같습니다.”그의 말을 들은 진동왕은 매우 당황하여 윤구주가 들어오기도 전에 먼저 무릎을 꿇었다.자리에 있던 모든 장군도 윤구주에게 경례를 했다.윤구주는 안으로 걸어 들어와 자신을 위해 준비된 상석에 앉지 않고 진동왕이 원래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진동왕 임성진은 불안했는지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윤구주는 진동왕을 유심히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아저씨, 우리한테 사적인 관계가 있는 건 맞지만 오늘 장군들 앞에서 분명히 말해야겠어요. 진동왕은 국주님이 아저씨에게 봉한 자리에요. 밖에서 제가 아저씨를 진동왕이라고 부르는 것도 우리의 관계 때문이죠. 그 관계가 없다면 저는 아저씨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아요. 다시 말하지만 아저씨가 제 휘하에서 일하지 않는다면 저는 아저씨를 관계하지 않을 것이에요. 하지만 진동왕은 지금 구주군의 장수며 삼주 총사령관에까지 봉해졌잖아요. 한마디로 제가 진동왕을 쓰겠다면 누구도 아저씨를 밀어낼 수 없고 제가 쓰지 않겠다면 누
“음, 알고 있으면 됐어요. 미리 말해두겠는데 공이 있으면 상을 주고, 잘못이 있으면 벌을 줄 겁니다. 스스로 잘 생각해보세요.”말을 마친 윤구주는 이제야 장군들을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온 목적은 단 하나 장수들의 내공을 올려주기 위해서다.”내공을 올려준다니.엄연은 이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진동왕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진동왕의 뜻은 엄 장군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거네. 여기 온 사람들은 모두 선택받은 사람들이야.”말을 마친 윤구주는 다시 진동왕을 바라보았다.임성진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설명했다.“현장의 장군들은 모두 어느 정도 무술을 익히고 있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천부적인 재능이 한정되어 있다는 거예요.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강해질 수 없어요. 엄 장군은 워낙 단순해서 실수로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버리면 반드시 유언비어가 퍼져서 왕에게 해가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군심이 흔들릴 텐데 그건 장군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임성진이 이렇게까지 설명했지만 엄연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저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됩니다. 그냥 직접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진동왕은 침묵을 지켰고 윤구주도 어이없어했다.“임 장군, 자네는 정말 단순하구먼. 외부 세력이 유언비어를 퍼뜨려 군심을 흔드는 건 둘째치고, 현장의 여러분을 생각해보게. 다른 장군들이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 동료들만 선택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자네들 체면이 다 깎여서 구주군에 더 남아있을 수 있겠나?”윤구주는 어쩔 수 없이 설명했다.이 말을 듣고 자리에 있던 장군들은 모두 얼굴이 붉어졌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다.“오.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제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군요.”엄연은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워했다.구주군은 한마음으로 뭉쳤지만 로봇이 아니기에 각자의 사심과 자존심이 있었다. 모두 왕과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리를 이루고 서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알았으면 시작하지.”설명
서울.북주에서 출발한 군용 비행기가 도시 상공에 도착했다. 비행기에 탑승한 사람은 바로 윤구주였다.비행기는 곧 서울 교외의 북하 군용 공항에 도착했다.육도진은 공항에 도착한 비행기를 걱정이 가득 찬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윤구주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육도진이 급히 다가갔다.“구주왕, 곧 전쟁이 시작될 텐데 어찌 이런 결정을 할수 있다는 말입니까. 군대에 사령관이 없으면 안 됩니다. 어떻게 이렇게 마음대로 하실 수 있습니까? 만약 돌아오기로 결정했다면 북라국에 전쟁을 선포하지 말았어야 했죠.”이는 스스로 자신의 퇴로를 차단해버리는 행동이었다.윤구주는 육도진을 한 번 훑어보더니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영감도 나라에 하루도 군주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거야.”“이건 다릅니다. 제가 국주님의 조서를 보여드렸잖습니까. 국주께 무슨 일이 생기면 저하가 다음 국주가 됩니다.”“오? 영감의 이 말은 지금 옛국주를 두고 새로운 군왕을 모시겠다는 말인가?”육도진은 굳어진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저는 그런 말을 한 적 없습니다.”“내가 이렇게 하는 데는 나만의 이유가 있네.”윤구주는 육도진에게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저하, 차량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은용위 지휘사 견배영이 앞으로 나와 윤구주에게 경례하며 일부러 육도진을 밀어냈다. 은용위는 육도진이 데려온 사람들을 바깥쪽으로 밀어냈다.“그래, 시간이 급하니 얼른 출발해. 그리고 영감은 나랏일이나 잘 처리하게. 군무와 전쟁은 자네가 신경을 쓸 것이 아니니까.”떠나기 전 윤구주는 일부러 육도진에게 경고를 했다. 그 한 마디에 육도진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윤구주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국운도 이미 가졌는데 그냥 왕이 되면 되지. 오히려 나를 이렇게 난처하게 만들다니.”육도진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우상, 구주왕도 다른 뜻은 없을 겁니다. 단지 우상이 청관 전투를 해결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는 것뿐입니다.”주변의 몇몇
윤구주는 육도진에 대해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했지만 정치인 출신인 육도진이 권모술수를 즐기는 버릇은 여전했다. 말할 때마다 어느 정도 숨기는 식이라 윤구주는 그에게서 대답을 얻는 걸 포기했다.“저하, 지하 궁전은 사실 전조에서 지어진 것으로 용맥 위에 세워졌습니다. 전조 국주가 수련과 폐관을 하는 장소였죠. 후에 지질 문제로 용맥이 무력화되면서 이 지하 궁전은 점차 피난처로 변했습니다.”견배영이 지하 궁전에 관해 설명했다.그의 말을 들은 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만해. 내가 모르는 걸 말해보게.”“네, 사실 지하 궁전 아래에는 마인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임씨 왕조의 첫 번째 국주 임세현이 봉인한 것인데 그 마인은 봉인되기 전에 이미 중상을 입었죠. 오래전에 죽어야 했는데 며칠 전 지질 변동으로 용맥에 다시 기운이 돌아오면서 그 마인이 깨어난 것 같습니다.”윤구주는 그제야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알아챘다.임정설은 그 마인이 나올까 두려워 직접 지하 궁전에 들어가 그를 처단하려 한 것이다.“국주께서 들어가신 후 저희에게 입구를 봉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 생각엔 국주께서 이렇게 하신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인을 처단하기 위함일 겁니다. 설령 죽이지 못하더라도 출현을 막으려는 생각이죠. 다른 하나는 국주께서 위기가 다가옴을 알아채고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아 마인과의 전투를 통해 경지를 넘어 진정한 신경에 도달하려 하셨을 것입니다.”견배영은 자기 생각을 윤구주에게 말했다.“자네 추측이 맞아. 국주는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니까.” 윤구주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종문 동맹을 상대하기로 한 이상 종문 동맹 뒤의 세력을 뽑아내려면 국주의 실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지금은 불안정한 시국이라 국주가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화진에 부담이 되지 말아야 했다.“저하, 주작도 지하 궁전에 있습니다.”“주작?”윤구주는 잠시 멈칫하다 기쁜 표정을 지었다.주작은 윤구주 휘하 4대 군신 중 하나였다. 군신
한밤중,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황량한 산골짜기.화진에서 가장 번화한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황량한 산에는 무수한 무명의 묘지가 있었고 임씨 왕조가 건국된 이래 이곳은 금지 구역으로 지정됐다. 근처에는 경비군이 주둔하며 주위를 감시하고 있었다.평소에는 아무도 찾지 않던 이곳이 지금은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경비군은 이곳을 완전히 봉쇄하고 군사 금지 구역으로 지정했으며 금지 구역 내부는 은용위가 감시하고 있었다. 공중에는 무장 헬리콥터가 24시간 순찰 중이었다.윤구주가 탄 차량이 금지 구역으로 들어갔다. 그의 행적은 엄격히 비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경비를 서던 경비군은 차 안에 화진의 구주왕이 타고 있는걸 모르고 있었다.차량은 깊은 산속까지 계속 달려가다가 멈췄다.“저하, 지하 궁전에 도착했습니다.”견배영이 먼저 차에서 내려 윤구주를 위해 문을 열었다. 차에서 내린 윤구주는 지하 궁전 입구를 찾지 못했다. 대신 봉쇄된 지역 주변에는 방호복을 입은 방역 요원들이 검사 장비를 들고 무언가를 검사하며 기록하고 있었다.“저하, 국주께서 들어가신 후 저희는 입구를 완전히 봉쇄했습니다. 이 산 전체에 고성능 폭약을 매설했고 전투기 세 대가 24시간 대기 중입니다.”견배영이 보고했다.이렇게 많은 준비를 한 이유는 바로 그 마인을 막기 위해서였다.만약 국주의 작전이 실패하고 마인이 나온다면 폭탄을 터뜨려 이곳을 지도에서 지워버릴 계획이었다.윤구주는 견배영의 안내를 받고 여러 관문을 통과해 지하 궁전 입구 앞에 도착했다.현재 지하 궁전 입구는 봉쇄된 상태였다. 외부는 만 톤의 강철로 봉쇄되어 있었고 기술자들이 입구를 뚫고 있었다.십여 분 후 밖은 조금 열렸지만 안쪽이 콘크리트로 막혀 있었다. 기술자들이 입구를 열려면 최소 세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입구가 열리더라도 안쪽이 막혀 있어 많은 인력이 필요할 것이다.“너무 느려. 견배영, 모든 인원을 철수시켜라. 입구는 내가 열겠다.”이 말을 들은 견배영은 잠시 멈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