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나 보군.”구씨 성 노인의 모욕적인 발언에 연규비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하지만 그녀가 직접 나서려던 그때 갑자기 정태웅이 끼어들었다.“저한테 맡기세요. 저 노인네 제가 대신 죽이고 오겠습니다.”그는 말을 마친 뒤 앞으로 다가가 구씨 성 노인을 빤히 바라보았다.“노인네가 할 짓이 어지간히도 없나 보지? 대낮부터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야?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죽을 각오는 됐겠지?”정태웅은 금방이라도 공격하려는 듯 몸을 풀었다.구씨 성의 장로 역시 불같은 성격이라 정태웅이 다가오는 걸 보더니 금세 자세를 고치고 서서히 기운을 뿜어냈다.그때 남궁 세가 사람들 쪽에서 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구씨, 이만 물러서게!”그 말에 구씨 성의 장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는 어르신과 눈이 마주쳐버렸다.“어르신, 하지만 이놈을...”“물러서라는 말이 들리지 않는가!”여기서 더 말을 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기에 구씨 성의 장로는 기를 거두어들이고 뒤로 물러섰다.“남궁 세가의 늙은이 남궁원, 지휘사 님을 뵙습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요.”자신을 남궁원이라 소개한 이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정태웅이 지휘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한편 남궁원이라는 이름을 들은 정태웅은 노인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남궁원이라면 그 넷째 대장로?”남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네, 맞습니다.”“하, 당신들 남궁 세가 사람들이었어?”정태웅은 이제야 기억난다는 얼굴로 말했다.그의 옆에 있던 연규비와 백화궁의 여자들은 그들이 4대 세가 중 하나인 남궁 세가 라는 것을 듣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남궁 세가는 고대 무술 세가로 백화궁과는 감히 함께 이름을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일가였다.“10개국 간의 전쟁 이후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지휘사 님은 여전히 멋있으십니다.”남궁원은 웃는 얼굴로 정태웅에게 말을 걸
정태웅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이 눈앞에 있는 노인을 없애버리고 싶었다.그때 그의 마음을 알아챈 듯 남궁원이 서둘러 다시 입을 열었다.“지휘사 님이 저희 도련님과 의형제를 맺은 건 압니다. 하지만 도련님은 저희 가문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분이세요. 그러니 이 늙은이를 봐서라도 저희 도련님을 만나게 해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설득은 저희가 하겠습니다.”“꼬맹이 지금 여기 없어.”“네? 그러면 어디로 가셨는지요?”“지금 한창 우리 형님한테서 검술을 배우는 중이야.”정태웅은 솔직하게 대답했다.“그게 무슨, 누가 감히 우리 남궁 세가 검도 귀재 도련님에게 검술을 가르친답니까? 지휘사 님 농담이 지나치십니다.”구씨 성의 장로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정태웅을 바라보았다.남궁원 뒤에 있던 남궁 세가 사람들 역시 기가 막힌다는 듯이 콧방귀를 꼈다.“우리 남궁 세가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검도를 보유한 집안입니다. 그런데 그런 집안의 검도 귀재에게 검을 가르친다고요? 허 참, 말도 안 되는 소리를.”단호한 장로의 말에 정태웅이 물었다.“누가 꼬맹이한테 검술을 가르치고 있는지 알고 싶어?”“네, 어디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얼굴 한번 보고 싶네요.”구씨 장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에 정태웅은 재미있는 구경할 생각에 잔뜩 들떠서는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궁금하다면 내가 친히 데려가 주지. 미리 말하지만 이제 후회해도 늦었어.”“후회라뇨. 그럴 일 절대 없으니 안내해주시죠.”정태웅은 앞장서며 그들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그가 정말 남궁 세가 사람들을 데리고 윤구주와 남궁 서준을 찾으러 가려 하자 바닥에 쓰러진 인해민이 연규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궁주님, 저들을 정말 이대로 보내주실 생각입니까?”그녀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잔뜩 묻어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몇 분도 안 된 이 짧은 시간 동안 부상자가 너무나도 많이 생겼다.연규비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오늘 저들은 무사히 돌아가지는 못할 거니까.”“네?
검기들이 빼곡하게 모여 하늘을 가리고 또 윤구주도 가렸다.검기들은 남궁서준의 행동에 맞춰 웅장한 소리를 내며 천지의 힘을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충분히 에너지를 모은 다음 바람을 가르며 그대로 윤구주를 향해 날아갔다.108개의 검기가 모여 하나의 거대한 검이 만들어진 것을 보자 윤구주는 미소를 지었다.“역시 남궁 세가의 검도 귀재답네. 이렇게도 빠르게 천지의 힘까지 끌어당기다니. 신의 경지까지 머지않겠어!”윤구주는 오른손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거대한 소리와 함께 금색 방패막이 그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방패막이 나타남과 동시에 검기들이 그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내려왔다.마치 비가 내리듯 검기들은 하나둘 금색 방패 위에 꽂혔다. 바닥에 꽂혀버린 검기들은 폭발음을 내며 사라져버렸다.연기가 천천히 가시고 중앙을 보니 거기에는 윤구주가 멀쩡한 얼굴로 서 있었다.남궁서준의 108개의 검기가 그의 손에 전부 막혀버린 것이다.자신의 공격이 하나도 통하지 않은 것을 본 소년의 눈에는 희열과 흥분 그리고 존경심이 일렁거렸다.윤구주는 아직 하늘에 있는 소년을 향해 말했다.“꼬맹아, 네 공격은 확실히 대단해.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게 빠졌어.”“그게 뭔데요? 알려주세요, 형님”“너한테는 의가 없어.”“의요?”“그래, 사람을 죽이려는 마음인 살의, 너한테는 이게 없어. 네가 검을 뽑았을 때 사람을 죽이려는 기술은 충분했지만 살의는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았어. 너는 나를 죽이려는 마음이 없었던 거야.”윤구주의 말에 남궁서준은 침묵했다.윤구주는 그의 형님이다.그런데 어떻게 형님에게 살의를 내비칠 수 있단 말인가.“꼬맹아, 잘 기억해. 살의는 네 마음에서 나오는 거야. 다음번에 검을 뽑을 때까지 한번 잘 터득해봐.”윤구주는 말을 마친 뒤 오른손으로 검결을 움직이며 소년을 가리켰다.“꼬맹아, 이 형님의 검은 어떤지 한번 봐줄래?”말이 끝나자마자 소년의 손에 있던 유용검이 바람을 가르며 곧바로 윤구주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윤구주는 머리 위에 있는 검을 잡더니
남궁서준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던 그때, 윤구주는 사람들의 기운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그는 그들이 다가오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누군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그 말에 남궁서준은 금세 경계태세를 갖추며 검을 잡았다.“기운으로 볼 때 남궁 세가 사람들이야.”윤구주는 시선을 내리고 소년을 바라보았다.“너 집에서 몰래 나온 거지?”남궁서준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네.”“어쩐지. 상황을 보아하니 너 데리러 온 사람들인 것 같네.”그 말에 소년은 고개를 번쩍 들며 말했다.“형님, 저 안 갈래요. 형님 곁에 계속 있고 싶어요!”윤구주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너는 남궁 세가의 검도 귀재고 화진 제일가는 천재야. 그런 네가 홀로 밖에서 이러고 있는데 너희 집안이 마음 놓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형님, 저는 그런 거 하나도 관심 없어요. 천재라느니 검도 귀재라느니 이런 수식어 저한테는 필요 없는 것들이에요. 저는 형님 옆에만 있으면 돼요!”남궁서준의 다급한 말에 윤구주는 피식 웃었다.“그만 고집부리고 형 말 들어. 남궁 세가 사람들이 너 데리러 온 게 맞으면 알겠다 하고 이만 돌아가.”그 말에 소년의 눈가가 빨갛게 변해버렸다.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남궁 세가의 검도 귀재라 칭송받는 천재 소년이 윤구주의 옆에서 떨어지기 싫다는 이유로 눈물을 흘릴 줄을.남궁서준은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은 채로 말했다.“제가 가면 형님은 누가 지켜줘요. 그리고 제가 가면 섭섭하지 않으시겠어요?”“꼬맹아, 너 없다고 내가 갑자기 죽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 그리고 이대로 다시는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잖아. 안 그래?”남궁세준이 빨개진 눈으로 뭐라 하려는데 윤구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형 말 들어. 네 검도는 남궁 세가의 검옥에서 수련을 해야만 해. 거기에 있는 검기가 너를 최고봉에 다다르게 할 거야. 나는 내 동생이 언젠가 화진의 제일 강한 검객이 되어 나타났으면 좋겠다.”“그럴게요! 딱 1
“도련님을 뵙습니다!”남궁서준은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정태웅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사람들은 왜 데리고 온 겁니까?”마치 남궁 세가 사람들의 얼굴은 보기도 싫었다는 양 원망과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정태웅은 억울한 얼굴로 대꾸했다.“왜 나한테 그래? 네 가족들이 멋대로 찾아온 거야.”소년은 그 말을 듣더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시선을 돌렸다.그때 구씨 장로가 입을 열었다.“도련님, 집까지 모시겠습니다.”“집?”정태웅은 뭔가 생각난 듯 구씨 장로를 가리키며 말했다.“노인네, 잠깐 기다려!”그러고는 남궁서준을 향해 물었다.“꼬맹이, 너 여기서 뭐 했어?”“뭐하긴요. 검술을 배우는 중이었죠.”“하하하, 노인네, 들었지? 그 집 도련님이 여기서 검술을 배운다고 내가 그렇게 말해도 안 믿더니, 이제는 믿겠어?”정태웅은 구씨 장로를 향해 조롱 가득 섞인 얼굴로 말했다.그러자 심기가 언짢아진 장로가 혀를 찼다.“헛소리! 우리 남궁 세가의 검도는 세계 제일이며 도련님은 검도 귀재입니다. 그런 도련님을 가르친다니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하, 정말 못 들어주겠네. 남궁 세가가 대단한 건 알겠지만 세상은 넓고 당신들보다 대단한 사람은 많아. 정말 진심으로 자기들 검도가 세계 최강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구씨 장로는 여전히 고고한 태도로 일관했다.“흥, 우리 도련님께 검술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그 말이 끝나자마자 남궁서준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방금 뭐라고 했지? 자격이 뭐가 어쩌고 어째?”“소인은 사실을 얘기했을 뿐입니다. 남궁 세가의 검도 귀재이신 도련님에게 누가 감히 함부로 검술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장로의 말에 정태웅이 남궁서준을 바라보았다.“들었지? 저 노인네 아까부터 주제 파악도 못 하고 계속 너한테 검술을 가르쳐 줄 사람은 없다고 떠들어댔어. 아까는 백화궁에 있는 여자들에게 손도 댔고 말이야. 그리고 궁주님한테는 백화궁이 남자들 욕구나 풀어주는 곳이라는
“형님? 형님 누구?”남궁원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그러자 남궁서준이 차갑게 대답했다.“우리 형님 이름은 아무한테나 얘기해줄 수 없습니다.”그 말에 남궁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넷째 대장로인 자신이 아무나 인가?기가 막힌 듯 소년을 바라보니 그 소년은 다시 화제를 돌렸다.“그래서 정말 저를 막으시겠다고요?”그 말과 함께 남궁서준의 몸에서 살의가 흘러나왔다. 이 근방을 다 에워쌀 정도의 살의에 남궁원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민약 이대로 계속 막아섰다가는 이 15살 꼬맹이의 손에 자신이 먼저 죽을 것만 같았다.살의는 점점 더 짙어졌고 남궁 세가 사람들은 다리가 저절로 휘청거렸다.남궁원은 소년과 구씨 장로를 번갈아 보더니 어쩔 수 없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구씨, 미안하네. 나도 더는 안 되겠어.”“어르신!!”남궁원의 말에 구씨 장로는 그만 절망하고 말았다.입을 열어 마지막으로 빌어보고 싶었지만 남궁서준의 검이 더 빨랐다.쉬잉.날카로운 칼끝이 구씨 목에 닿자마자 빠르게 뼈와 살을 뚫고 나왔다. 구씨 장로의 머리는 허공에 잠깐 떠 있더니 이내 바닥으로 데구루루 굴러떨어졌다.남궁 세가의 내문 장로가 남궁서준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피가 흥건히 흘러나오는 머리를 본 정태웅은 신이 나서 달려가 발로 그 머리를 꾹꾹 밟으며 웃었다.“노인네, 이제야 좀 후회해? 하지만 늦었어, 하하하!”남궁원을 포함한 남궁 세가 사람들은 정태웅이 구씨 장로의 시체를 모욕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단칼에 구씨 장소를 베어버린 남궁서준은 그제야 유용검을 거두어들이며 정태웅에게 말했다.“이제 됐어요? 죽일 사람도 죽였으니 저는 이제 가볼게요.”“뭐? 간다고? 야 꼬맹이, 어딜 가?”정태웅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검옥으로 돌아갈 겁니다.”“진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네.”“저하는 어쩌고 이렇게 가겠다는 거야?”정태웅의 질문에 남궁서준은 빨개진 두 눈으로 외쳤다.“나라고 가고 싶어서 가는 줄 아세요? 형님이 나보
남궁 세가 사람들이 떠나간 후 정태웅의 뒤편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기척을 느낀 정태웅이 뒤돌아보니 거기에는 윤구주가 서 있었다.“저하, 줄곧 여기 계셨군요?”“그래.”윤구주는 짧게 대답한 후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남궁서준이 떠나간 곳을 바라보았다.“꼬맹이가 떠나서 많이 아쉬우신가 봐요?”정태웅은 그를 보며 물었다.“어떻게 아쉽지 않을 수 있겠어. 내 동생인데. 하지만 꼬맹이의 미래를 위해서 이대로 보내주는 게 맞아.”윤구주의 말에 정태웅은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꼬맹이를 위한 선택이셨군요.”윤구주는 씁쓸하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백화궁.윤구주는 정태웅과 함께 백화궁으로 돌아왔다.백화궁 입구에 막 도착해보니 거기에는 차량 여러 대가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경찰차도 보였다.이에 사람들 쪽을 바라보니 바로 앞에 암부 제36여단 여단장인 원건우와 서남 경찰서장인 육명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은 윤구주와 정태웅을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지휘사 님을 뵙습니다.”원건우는 윤구주의 정체를 아직 모르기에 정태웅에게만 인사를 올렸다.정태웅은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두 사람을 의아하게 여기며 물었다.“여기는 왜 왔어? 특별한 일 없으면 찾아오지 말랬잖아.”원건우가 답했다.“중요한 보고가 들어와 이렇게 찾아왔습니다.”“뭔데, 빨리 얘기해.”정태웅이 귀찮은 얼굴로 물었다.원건우는 윤구주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외부인 앞에서는 얘기하기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그 뜻을 눈치챈 정태웅이 미간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뭐해, 말 안 하고. 그리고 옆은 왜 자꾸 힐끔거리는 건데? 얘기하기 싫으면 이만 돌아가. 나 피곤해.”그 말에 원건우는 서둘러 그를 붙잡았다.“아닙니다. 지금 당장 얘기하겠습니다. 크흠, 저희가 입수한 소식에 의하면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 수십 명의 킬러가 서남지역에 발을 들였다고 합니다. 그 킬러들은 국제적으로도 악명이 높은 놈들이고요.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미
암부 지휘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국제킬러들을 막지 않고 그냥 들여보내는 걸까?원건우와 육명진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정태웅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어 밖으로 나갔다. 서남 여단장과 육명진이 나가고 나서야 정태웅은 윤구주를 향해 말했다.“저하, 그 겁대가리 없는 놈들이 정말 온 것 같습니다.”윤구주는 백화궁으로 향하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전부 다 올 때까지 기다려서 죽일 거야.”윤구주는 열 팀의 국제킬러들이 제 목숨을 노리는지도 모르고 태평하게 내일은 소채은과 쇼핑도 하며 맛있는 것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밤.대스타의 은설아의 방.탁시현의 일을 계기로 은설아는 연예계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그 대가가 지금 바로 치르는 건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치러야 할 것이었다.그래서 은설아는 연예계를 떠나고 싶었다.어차피 천음 엔터의 일로 공연과 활동도 전부 정지되어 이미 연예계에서는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고 있었으니 지금 은퇴한다 해도 아무도 저를 잡지 않을 것이다.“됐어!”“나 안 해! 은퇴할 거야! 이런 생활 이젠 지긋지긋해.”은퇴를 결심하자 은설아는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 같았다.2년 동안 연예인을 한다고 그래도 돈을 꽤 모아놓은 데다 예쁜 미모까지 있으니 연예인을 안 해도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마음의 짐을 덜어낸 은설아가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욕조에 물을 받고는 그 위에 장미꽃 잎을 떨어트리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그렇게 온몸으로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으니 또 그놈의 윤구주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밤에 잠을 잘 때도 그러더니 젠장.“설마 내가 은인님을 좋아하나?”윤구주에 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져 은설아가 빨개진 얼굴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아니야!”“은인님은 이미 그렇게 예쁜 여자친구도 있는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내 맘엔 영웅님 말곤 다른 사람이 들어올 자리도 없어.”...어느 화려하기 그지없는 별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
네 사람은 비석을 지나자마자 환각의 전법에 부딪혔다. 이 전법은 우연히 들어오거나 경고를 무시한 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결국 서요산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것이었다.의지력으로 환각의 전법을 통과하면 다음 전법이 기다리고 있었다.당연히 네 사람에게 환각의 전법은 통하지 않았다. 윤구주와 임정설은 물론, 백호와 청해도 곤륜에서 강자로 존경받는 존재들이었다.다음은 섭혼 전법이었다.전법에 들어가기 전부터 하늘을 찌를듯한 원한의 기운이 밀려왔다.그 기운을 느낀 임정설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수년간 왕궁에서 비술을 연구해서 알아본 건데. 이곳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거야. 반경 수천 리 이내의 원한의 기운이 모두 이곳에 모여있어. 내 치하에서도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그걸 내가 몰랐다니.”그는 깊은 자책에 빠졌다.“국주님, 인간이 있는 곳에는 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근대에 들어 큰 전쟁은 사라졌지만 소규모 충돌은 끊이지 않았죠.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게다가 이곳에 모여진 원한의 기운은 억울한 죽음뿐만 아니라 극형을 받은 흉악범들의 원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죠. 사랑 때문에 미워하고, 미움 때문에 미쳐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윤구주의 말을 듣고 임정설이 한마디 물었다.“구주야, 너는 문아름을 미워하지 않느냐?”문아름의 이름을 들은 윤구주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번뜩였다.“당연히 미워하죠. 저 윤구주는 순수하게 사랑하고 미워하는 인간입니다. 사랑은 사랑, 증오는 증오에요. 그녀를 위해 변명 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문아름이 저를 배신했으니 저에게 당연히 미워할 권리가 있죠. 하지만 문아름을 사랑한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문아름이 제게 사랑이 무엇인지, 인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으니깐요. 가려는 길이 다르면 미래를 함께할 수 없죠. 저희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걸었어요. 저희의 만남 자체가 잘못이었지만 문아름이 저를 구주왕으로 만든 것도 사실이죠. 그리고 제가 문아름을
“저하와 생사를 함께할 수 있다니. 그건 제 영광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전하와 제가 정말로 서요산에서 죽게 되면 청룡이 돌아온다 해도 성수가 한자리 비게 되는 건데 그분을 어떻게 소환하시렵니까?”백호가 의혹이 담긴 표정으로 물었다.윤구주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그걸 설명하려면 너를 실험체로 삶고 실험을 진행할 때부터 얘기해야 해. 정확히 말하면 청룡, 현모, 주작의 몸속에는 네 피가 흐르고 있어. 네가 성수의 피를 융합한 첫 번째 수련자야.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직 너만이 진정한 융합에 성공했지. 네 피를 빌려 그들에게 성수의 정수를 주입했던 거야.”“백호,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다. 네가 이런 괴물 같은 모습이 된 건 전부 내 탓이야. 그러니 나를 원망해도 좋아.”백호는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어떻게 저하를 원망하겠습니까? 게다가 당시 저하께서는 제 목숨을 구하려고 그러신 거였잖아요. 제가 고마워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로 융합에 성공한 수련자는 제가 아닐건데요? 저하께서도 성수의 피를 다루시지 않았습니까?”그 말을 들은 윤구주가 고개를 저었다.“아니. 달라. 그건 그냥 성수의 피를 통제하는 것 뿐이야. 진짜 융합했으면 나도 네 꼴이 됐을 거야.”백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됐다. 옛날얘기는 그만하고 얼른 서요산으로 떠날 준비나 해.”며칠 후, 윤구주는 임정설 국주, 청해, 백호와 함께 서요산으로 향했다.비 오는 밤, 연기를 뿜는 수송기가 짙은 구름을 뚫고 산을 향해 돌진했다.비행기가 산에 충돌하기 직전, 수많은 바람의 부적이 나타나 비행기를 강제로 선회시켜 간신히 산기슭에 착륙했다.비행기가 막 착륙하자 비행기 문이 누군가의 주먹 한 방에 박살 났다. 멀미로 비틀거리던 청해가 나오더니 몸을 움츠린 채 구토를 멈추지 못했다. 뒤이어 내린 임정설도 배를 움켜쥐며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그들과 달리 윤구주는 멀쩡한 상태로 내려와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백호의 질문에 윤구주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네가 진짜라 믿는다면 그것은 진짜야. 초심을 잃지 않아야 길이 열리는 법이지.”이 말은 백호에게만이 아닌 자신에게도 하는 것이었다.서울의 위기는 해결되었지만 윤구주는 이 모든 것이 문씨 가문의 그 여자의 계획 중 하나임을 알고 있었다.“국주님, 이제 서요산으로 갈 때입니다.”그가 임정설을 바라보며 말했다.“서요산을 지키려는 거니? 마인이 나타날 거란 말이야?”임정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요탑 아래에는 천년 동안 갇힌 수많은 마인들이 있었다.“맞아요. 서요산의 지맥 영기가 거의 고갈되었습니다. 만약 진요탑이 무너지면 큰 재앙이 찾아올 것입니다.”윤구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요탑이 붕괴하여 마인들이 쏟아져 나오면 윤구주라도 그들을 처리하기 힘들 것이다.“좋아. 내가 같이 가주마. 이 늦은 재앙은 언젠가 닥칠 운명이니 우리가 짊어져야 해. 지금의 희생은 후손들을 위한 것이야.”임정설의 눈빛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화진을 위해, 백성들을 위해 그는 언제든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윤구주는 현모에게 연락을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뭐라고요? 저하께서 서요산으로 가신다고요? 그렇다면 저희도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현모와 주작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특히 주작은 서요산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천년 동안 축적된 재앙을 겨우 수십 년 수련한 윤구주 혼자서 떠맡기엔 버거웠다.“괜찮아. 너희에게는 따로 시킬 일이 있어. 내가 서요산에 있는 동안 너희는 국경을 지켜줘. 청룡의 행방은 잠시 접어두고 내가 시킨 일에 몰두해. 난 문아름을 그 여자를 잘 알고 있어. 문아름은 일이 내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추가로 부탁이 있는데 만약 내가 전사한다면 그때쯤 청룡이 모습을 드러낼 거야. 청룡을 불러내는 게 복인지 화인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그 상황이 오면 너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거야. 문아름이 결정을 내리겠지. 그러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유언을 남기는 듯한
‘헐, 대박.’진동왕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윤구주를 신처럼 떠받들었다.‘이게 진짜 신이지. 곤륜에 있는 그 자식들은 모두 가짜 신들이었어. 허위적이기 그지없지.’오늘 밤 그는 여러 강자의 싸움을 직접 목격하고 강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문경우도 아주 강했지만 윤구주가 나타나자 문경우는 도망조차 제대로 치지 못하고 영혼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윤구주의 술법에 의해 영혼도 남기지 못하고 진정한 죽음을 맞이했다.승리는 결국 화진에게 돌아갔다. 화진을 무너뜨리려는 역적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윤구주는 자신의 힘으로 화진의 막강한 실력을 전 세계에 알렸다.문경우를 처단한 윤구주는 즉시 임정설의 치료에 돌입했다.“짐은 별일 없으니 먼저 왕숙과 네 친구를 치료해줘라.”임정설이 임성진과 청해를 가리키며 말했다.청해는 이미 정신을 차렸다. 비록 상처가 심해 반쯤 죽은 상태였지만 화진 국주에게 인정받은 첫 순간이었다. 묘한 영예감이 그의 마음을 꽉 채우며 날아갈 듯 기뻤다.“이 두 사람 모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은 아닙니다. 오히려 국주님이 더 위험하십니다. 경지를 무리하게 넘어서셨고 섭혼번 아래서 정기를 너무 많이 잃으셨습니다. 지금 국주님의 기운이 안정하지 않으니 제 도움이 없다면 폭주 할수도 있어요. 그때가 되면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윤구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임정설은 결국 윤구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도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다. 윤구주의 치료를 거부한 이유는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황자급 경지에 오르긴 했지만 예전보다 죽음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 있었다. 윤구주는 임정설에게 풀지 못한 원한이 있음을 눈치채고 치료를 해주며 화진으로 압박했다.“국주님께서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화진에게는 국주님이 필요합니다. 국주님은 30년 동안 화진을 지켜오셨잖아요. 지금 승부가 달린 이 중요한 시점에서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시면 안 됩니다.”임정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