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몸이 다 나은 것 같아. 완전 괜찮아! 하지만... 조금 배고파. 헤헤!”소채은은 웃으며 말했다.“바보야, 배고프면 밥 많이 먹어. 네 체내의 시독은 내가 깨끗이 없앴으니까 지금부터는 절대 문제가 없을 거야.”“응, 엄마, 아빠가 얘기해주셨어. 구주야. 고마워. 날 살려줘서!”“바보야, 나한테 고맙다고 할 필요 없어.”윤구주는 소채은을 품 안에 안았다.소채은의 부모님은 두 사람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청하는 천희수에게 눈치를 줬고 두 사람은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밖으로 나온 뒤 천희수는 붉게 부어오른 눈을 쓸면서 감탄했다.“정말 다행이에요. 우리 딸 드디어 다 나았어요.”“그러게. 이 모든 건 구주 덕분이야. 구주가 아니었다면 우리 딸이 어떻게 됐을지 몰라.”소청하도 감탄했다.천희수는 줄곧 윤구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러나 윤구주가 정말로 소채은을 치료한 걸 보게 되자 이렇게 말했다.“여보, 구주 정말 점점 더 신기해지는 것 같지 않아요? 예전에는 기억을 잃은 정비공이라고 했었는데 지금은 왜 점점 더 달라지는 것 같죠?”소청하는 호탕하게 웃었다.“여보, 나도 비록 구주의 진짜 신분을 알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얘기할게. 우리 소씨 일가는 분명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야. 그러니까 구주 같은 애가 우리 집안 사위가 되려는 거지!”“그 정도라고요?”“그럼!”두 사람은 그렇게 얘기를 나누면서 거실에 도착했다.거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중무장한 창용 부대가 줄을 지어 대문 앞에 서 있는게 보였다.그 외에도 천하회, 백화궁 사람들이 가득했다.더욱 무시무시한 것은 천여 명쯤 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십여 대의 탱크가 있다는 점이었다.“세상에! 싸움이라도 났대요? 왜... 왜 군인들이 이렇게 많은 거죠?”천희수는 깜짝 놀라면서 눈을 크게 뜨고 눈앞의 상황을 보았다.소청하 또한 눈앞의 광경에 놀라서 멍해졌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지? 이곳에 왜 사람들이
박창용, 원성일 등 사람들은 정태웅의 소개를 듣고 소청하 부부를 바라보았다.“저분들이 바로 소채은 씨 부모님이셨군요!”“아저씨, 아주머니, 안녕하세요!”원성일이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중하게 말했다.천희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거실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카리스마가 넘쳤고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의 분위기가 있었다. 강한 압박감에 천희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면서 소청하의 큰 손을 서둘러 잡았다.소청하도 깜짝 놀랐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면서 침을 꿀꺽 삼킨 뒤 말했다.“여러분들은 누구시죠?”“아저씨, 아주머니.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저희는 모두 저하의 부하입니다!”천현수가 웃으며 말했다.“저하요?”그 단어를 들은 천희수는 넋이 나갔다.“그렇습니다.”군복을 입은 박창용이 말했다.소청하와 천희수는 박창용이 군복을 입고 있고 어깨에 총사령관 표식을 달고 있는 걸 보았다. 그 순간 소청하는 두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사령관님...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누가 저하라고요?”소청하는 두려워하면서 물었다.박창용은 호탕하게 웃었다.“누구겠어요? 이 세상에 저희 구주왕 외에 누가 우리를 부하로 삼을 자격이 있겠습니까?”“구주왕이요?”소청하는 다시 듣고 깜짝 놀랐다.‘구주? 윤구주?’“세상에, 설마 윤구주를 말하는 겁니까?”소창하는 그제야 뒤늦게 반응했다.정태웅은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그분이 바로 우리 저하입니다. 우리 화진의 왕, 구주왕이기도하죠!”정태웅이 윤구주를 구주왕이라고 하자 소청하 부부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구주왕?화진 최고의 구주왕?소청하 부부는 완전히 얼어붙었다.“윤구주가 구주왕이라고요? 화진 최고의 구주왕 말인가요?”소청하 부부는 일반 백성들이었지만 화진에서 구주왕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세 살짜리 아이도 구주왕을 알 정도였으니 소청하 부부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그리고 구주왕이 화진을 수호하려고
“하지만 저하께서 정체를 밝히는 걸 꺼리셔서 줄곧 숨겨왔습니다. 저하가 아니었다면 누가 소씨 가문과 조씨 가문, 그리고 강성에서의 문제를 해결해 줬겠습니까?”주세호가 호기롭게 말했다.그 말에 소청하 부부는 그제야 깨달았다.그들은 윤구주가 나타난 뒤로 왜 소씨 가문이 180도 달라졌는지 알게 되었다.SK 제약공장이 회복할 수 있었던 것도, 온갖 악행을 일삼던 소천홍 부자가 제재를 받은 것도, 조씨 가문과 다른 수많은 문제도 전부 윤구주가 해결해 줬던 것이다.전에 두 사람은 순진하게도 주세호가 소씨 가문을 도운 이유가 소채은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그걸 떠올린 두 사람은 지금 당장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사실 윤구주가 왕이었다니, 그것도 화진 최고의 구주왕이었다니!’“하지만... 이상한데요? TV에서는 구주왕이 죽음의 바다에서 전사했다고 했는데요?”소청하 부부는 갑자기 떠올라서 말했다.“하하! 이 세상에 누가 우리 저하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저하는 그 지독한 여자가 파놓은 함정 때문에 독에 당해서 죽음의 바다에 빠진 것뿐입니다. 그 일이 없었더라면 형수님과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정태웅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쿵!소청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바다에서 만났다고?’이때 소청하는 윤구주와 제일 처음 만났던 곳이 바닷가였음을 떠올렸다.동시에 그는 자기 딸이 윤구주를 바닷가에서 건져내 살려준 걸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소청하는 그제야 이해가 됐다.“알겠어요! 사실 우리 화진의 구주왕은 죽음의 바다에 빠진 것뿐이지 죽지는 않았던 거예요. 그리고 그 일로 구주왕은 우리 채은이를 만나게 된 거고요... 알겠어요! 이해했어요! 세상에, 우리 채은이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걸까요? 구주왕이 우리 채은이를 사랑하게 되다니, 정말 놀랍네요!”“하하하하! 이제 알겠죠?”정태웅은 웃으며 말했다.소청하 부부는 모든 게 이해가 됐다.그들은 소씨 가문이 이렇게 복이 많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화진 최고의 왕, 구주왕의 장인어
많이 먹은 뒤 소채은은 허기짐이 많이 줄어들었다.소채은은 배를 툭툭 두드리더니 윤구주의 손을 잡고 말했다.“침대에 오래 누워있었더니 몸이 찌뿌둥해. 구주야, 나랑 같이 밖에 나가서 걷자.”“그래!”두 사람은 손을 잡고 윈워터힐스 밖으로 나왔다.밖은 밤경치가 아름다웠다. 달빛이 환해서 그런지 별이 적었다.소채은은 밖으로 나오더니 의아한 얼굴로 낯선 주변 환경을 둘러보며 말했다.“어, 여기 용인 빌리지 아니었어?”“응. 여긴 주세호 씨의 거처야!”윤구주는 웃으며 말했다.“주 회장님?”“응!”“세상에, 내가 왜 주 회장님댁에 있는 거야? 이건 너무 실례 아냐?”“괜찮아. 주세호 씨는 우리 사람이야. 멋쩍어할 필요 없어.”윤구주가 그녀를 달랬다.그렇다고 해도 소채은은 조금 익숙하지 않았다.마당으로 나오자마자 줄지어 선 중무장한 사람들과 탱크들, 그리고 천하회, 백화궁 사람들이 소채은의 시야에 들어왔다.소채은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세상에... 여기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심지어 군인들과 탱크도 있네?”소채은은 아름다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오늘 밤 일이 조금 있었거든. 그래서 다들 온 거야.”윤구주는 별거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설명했다.“무슨 일이 있었길래 군인들까지 출동한 거야?”소채은은 눈을 깜빡이면서 물었다.윤구주는 당연히 자세히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그는 갑자기 소채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채은아, 너한테 얘기하고 싶은 일인데 들어줄래?”“뭔데?”소채은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나에 관한 일이야.”윤구주는 고개를 돌리더니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의 여자를 바라보았다.“너에 관한 일?”“그래. 난 줄곧 너에게 내가 누군지, 예전에 무슨 일을 했었는지 얘기하지 않았지. 하지만 오늘은 너에게 알려주고 싶어.”윤구주는 오늘이 말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앞으로 일어날 일들은 어쩌면 화진 전체에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그래서 소채은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소채은은 윤
소채은이 알기론 화진의 구주천왕은 나이가 아주 많은 대영웅이었다.윤구주처럼 젊고 잘생긴 청년일 수가 없었다.그건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소채은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자 윤구주는 답답했다.“채은아, 정말로 내가 화진의 구주천왕이라는 걸 믿지 않는 거야?”윤구주가 다시 말했다.“당연히 안 믿지!”그 말에 윤구주는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그는 오늘 소채은에게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소채은은 알려줬는데도 전혀 믿지 않았다.윤구주가 서글퍼 하고 있을 때 소채은은 갑자기 윤구주의 팔에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바보야, 내가 말했었잖아. 네가 누구든 난 널 사랑할 거라고. 뭘 무서워하는 거야?”윤구주는 그녀가 해주는 말을 들으면서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그녀의 말대로였다.‘왜 굳이 채은이에게 신분을 밝히려고 한 걸까? 내가 화진의 구주천왕이 아니면 뭐 어때?’그런 생각이 들자 윤구주는 더는 말을 이어 나가지 않았다. 그는 품 안에 그녀를 안은 채 뭇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그날 밤 윤구주는 그렇게 줄곧 소채은과 함께 있었다.그러다 날이 밝기 시작할 때가 되자 그제야 소채은을 데리고 윈워터힐스로 돌아갔다.방문 앞에 도착하자 소청하 부부가 보였다.“아빠, 엄마.”부모님을 본 소채은은 서둘러 그들에게 인사했다.그러나 소청하와 천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갑자기 윤구주를 향해 무릎을 털썩 꿇었다.“어? 아빠, 엄마. 뭐 하시는 거예요?”부모님이 갑자기 윤구주의 앞에 무릎을 꿇자 소채은은 넋이 나갔다.심지어 윤구주마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구주천왕을 뵙습니다! 저희가 안목이 없어서 저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저희를 용서해 주십시오!”소청하 부부는 윤구주를 향해 용서를 빌면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그 광경에 소채은은 어리둥절해졌다.“아빠, 엄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구주왕이라뇨?”천희수는 소채은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바보야, 아직도 모르겠어? 구주는 우리 화진
다음날, 윤구주는 아침 일찍 소채은의 방문 앞에 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채은은 여전히 자신을 방 안에 가둬놓고 있었다.윤구주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다가 거실로 나왔다.거실로 나오자마자 정태웅이 문 앞에 나타났다.“저하! 형수님 이제 저하의 신분을 알게 된 거죠? 아주 들떠 하고 기뻐하지 않으셨나요?”윤구주가 말했다.“넌 그냥 입 다물고 있어.”“네? 왜 그러세요? 형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셨나요?”정태웅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그는 세상의 그 어떤 여자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천하무적의 왕인 걸 알게 되면 기뻐할 거로 생각했다.“기뻐하긴. 채은이는 아직도 방 안에서 나오지 않고 있어. 내 신분을 받아들이기가 힘든가 봐.”윤구주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정말요? 형수님은 기뻐서 환호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방 안에서 나오지 않는대요?”“그게 채은이가 다른 여자와 다른 점이 아닐까?”정태웅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휴, 여자 마음은 정말 모르겠네요.”“됐어. 이 일은 그만 얘기하고 현수와 창용 씨는?”윤구주는 자리에 앉은 뒤 말했다.정태웅이 말했다.“아까 밖에 나갔어요. 지금 불러올게요.”“그래.”잠시 뒤, 정태웅이 천현수와 박창용을 데리고 거실로 왔다. 윤구주를 본 그들은 곧바로 깍듯이 말했다.“저하!”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었다.“현수야, 현재 암부원들 전부 연락이 닿지 않는 거야?”“네. 국방부는 저희를 공격하면서 암부의 모든 통신 수단을 마비시켰어요.”그 말을 듣자 윤구주의 얼굴에 살기가 드러났다.한때 윤구주의 친위대였던 그들이, 화진의 정보기관이었던 암부가 한 명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니.“창용 씨, 국방부의 장군들과 고위직 지휘관들 모두 문씨 일가 편에 선 건가?”윤구주는 박창용을 바라보았다.창용 부대의 총사령관인 박창용은 질문을 받고 서둘러 대답했다.“제가 알기론 대부분이 문씨 일가 편에 섰습니다. 그리고 저항한 사람들은 비밀리에 처형당했습니다.”“그런 일이 있다고?”
“세가, 종문, 국방부, 문벌, 4대 서열. 돌아가면 내가 전부 후회하게 해주겠어!”...소채은은 윤구주가 천하를 뒤흔든 구주천왕이라는 걸 알게 된 뒤로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그녀는 도저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구주왕은 화진 백성들 마음속의 신화나 전설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그런데 그 신화가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라니.다른 사람이었어도 당황스러웠을 것이다.“채은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구주는 우리 화진의 영웅이자 화진의 왕이야. 그런데 왜 전혀 기뻐하지 않는 거야?”방 안에서 소청하와 천희수는 멍한 표정의 딸을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그래, 채은아. 구주는 우리 화진의 신이야. 네가 구주를 만난 건 우리 소씨 가문의 엄청난 영광이자 복이라고!”소청하도 말했다.그러나 소채은은 여전히 침묵하며 넋을 놓고 있었다.그녀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아빠, 엄마. 그만 말해요. 사실 전 기쁘지 않은 게 아니에요. 전 그저... 그저 구주가 우리 화진의 신화와도 같은 존재, 구주왕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해서 그러는 것뿐이에요.”소청하는 웃으며 말했다.“바보야, 그건 우리 집안이 운이 좋다는 걸 증명하는 거야.”“맞아, 맞아. 예전에는 내가 안목이 없어서 구주를 얕봤어. 그런데 지금 보니 정말 그러지 말아야 했어.”천희수는 후회하며 말했다.“하지만 지금은 잘 됐지. 우리 딸은 천하무적의 구주왕과 만나고 있으니 우리 소씨 일가는 평생 영광을 누리게 될 거야. 아니, 앞으로 대대로 영광을 누리게 될 거야.”부모님의 말씀을 들은 소채은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아빠, 엄마. 구주가 정말로 우리 화진의 구주왕이라면... 저랑 구주가 만나는 건, 제게 너무 과분한 일 아닐까요?”소채은은 갑자기 예쁘장한 얼굴을 들고 말했다.‘응?’“그게 무슨 말이야?”천희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예전에 그러셨잖아요. 결혼하려면 집안이 비슷해야 한다고. 그런데 아빠, 엄마도 보셨다시피 구주는... 우리 화진의 구주
점심때가 되자 윤구주는 소채은을 보러 왔다.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소청하 부부가 보였다.“아버님, 어머님. 채은이 안에 있나요?”소청하는 서둘러 대답했다.“그래.”“그러면 저 들어가 볼게요.”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그런데 그가 문을 열기 직전, 소청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구주야... 너 혹시 우리를 원망하니?”“원망이요?”윤구주는 당황했다.“그래. 우리가 예전에 어리석고 안목이 없어서 널 무시했었잖아. 그래서...”천희수는 용기를 내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구주야, 우리를 원망해도 괜찮아. 우리를 때려도 좋고 욕해도 좋아. 하지만 절대 채은이를 힘들게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채은이는 진심으로 널 사랑하니까!”천희수가 말했다.두 사람의 말을 들은 윤구주는 말문이 막혔다.“아버님, 어머님.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전 단 한 번도 두 분을 원망한 적이 없어요.”“정말?”천희수가 말했다.“그럼요.”“구주야, 고마워. 예전에는 우리가 어리석었어. 우리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어떤 상황이 생기든 절대 우리 채은이를 원망하지는 말아 줘. 너희 지금처럼 잘 만나기까지 쉽지 않았잖아. 만약 우리 둘 때문에 너희 사이가 멀어진다면 우리가 너무 미안할 것 같아서 그래.”천희수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윤구주는 똑똑했기에 그들의 말을 듣고 대충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그는 웃으며 말했다.“아버님, 어머님. 그런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 단 한 번도 제 신분 때문에 누군가를 싫어한 적이 없어요. 게다가 전 채은이를 무척 사랑하는걸요.”그 말을 듣자 소청하 부부는 그제야 마음이 한결 놓였다.“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우리도 마음이 놓인다.”윤구주는 소청하 부부와 간단히 대화를 나눈 뒤 문을 열고 소채은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방 안에서 소채은은 혼자 멍하니 창가 옆에 앉아 있었다.미풍이 불어와 그녀의 아름다운 뺨을 쓸었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채은아,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윤구주는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
네 사람은 비석을 지나자마자 환각의 전법에 부딪혔다. 이 전법은 우연히 들어오거나 경고를 무시한 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결국 서요산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것이었다.의지력으로 환각의 전법을 통과하면 다음 전법이 기다리고 있었다.당연히 네 사람에게 환각의 전법은 통하지 않았다. 윤구주와 임정설은 물론, 백호와 청해도 곤륜에서 강자로 존경받는 존재들이었다.다음은 섭혼 전법이었다.전법에 들어가기 전부터 하늘을 찌를듯한 원한의 기운이 밀려왔다.그 기운을 느낀 임정설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수년간 왕궁에서 비술을 연구해서 알아본 건데. 이곳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거야. 반경 수천 리 이내의 원한의 기운이 모두 이곳에 모여있어. 내 치하에서도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그걸 내가 몰랐다니.”그는 깊은 자책에 빠졌다.“국주님, 인간이 있는 곳에는 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근대에 들어 큰 전쟁은 사라졌지만 소규모 충돌은 끊이지 않았죠.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게다가 이곳에 모여진 원한의 기운은 억울한 죽음뿐만 아니라 극형을 받은 흉악범들의 원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죠. 사랑 때문에 미워하고, 미움 때문에 미쳐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윤구주의 말을 듣고 임정설이 한마디 물었다.“구주야, 너는 문아름을 미워하지 않느냐?”문아름의 이름을 들은 윤구주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번뜩였다.“당연히 미워하죠. 저 윤구주는 순수하게 사랑하고 미워하는 인간입니다. 사랑은 사랑, 증오는 증오에요. 그녀를 위해 변명 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문아름이 저를 배신했으니 저에게 당연히 미워할 권리가 있죠. 하지만 문아름을 사랑한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문아름이 제게 사랑이 무엇인지, 인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으니깐요. 가려는 길이 다르면 미래를 함께할 수 없죠. 저희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걸었어요. 저희의 만남 자체가 잘못이었지만 문아름이 저를 구주왕으로 만든 것도 사실이죠. 그리고 제가 문아름을
“저하와 생사를 함께할 수 있다니. 그건 제 영광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전하와 제가 정말로 서요산에서 죽게 되면 청룡이 돌아온다 해도 성수가 한자리 비게 되는 건데 그분을 어떻게 소환하시렵니까?”백호가 의혹이 담긴 표정으로 물었다.윤구주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그걸 설명하려면 너를 실험체로 삶고 실험을 진행할 때부터 얘기해야 해. 정확히 말하면 청룡, 현모, 주작의 몸속에는 네 피가 흐르고 있어. 네가 성수의 피를 융합한 첫 번째 수련자야.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직 너만이 진정한 융합에 성공했지. 네 피를 빌려 그들에게 성수의 정수를 주입했던 거야.”“백호,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다. 네가 이런 괴물 같은 모습이 된 건 전부 내 탓이야. 그러니 나를 원망해도 좋아.”백호는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어떻게 저하를 원망하겠습니까? 게다가 당시 저하께서는 제 목숨을 구하려고 그러신 거였잖아요. 제가 고마워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로 융합에 성공한 수련자는 제가 아닐건데요? 저하께서도 성수의 피를 다루시지 않았습니까?”그 말을 들은 윤구주가 고개를 저었다.“아니. 달라. 그건 그냥 성수의 피를 통제하는 것 뿐이야. 진짜 융합했으면 나도 네 꼴이 됐을 거야.”백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됐다. 옛날얘기는 그만하고 얼른 서요산으로 떠날 준비나 해.”며칠 후, 윤구주는 임정설 국주, 청해, 백호와 함께 서요산으로 향했다.비 오는 밤, 연기를 뿜는 수송기가 짙은 구름을 뚫고 산을 향해 돌진했다.비행기가 산에 충돌하기 직전, 수많은 바람의 부적이 나타나 비행기를 강제로 선회시켜 간신히 산기슭에 착륙했다.비행기가 막 착륙하자 비행기 문이 누군가의 주먹 한 방에 박살 났다. 멀미로 비틀거리던 청해가 나오더니 몸을 움츠린 채 구토를 멈추지 못했다. 뒤이어 내린 임정설도 배를 움켜쥐며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그들과 달리 윤구주는 멀쩡한 상태로 내려와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백호의 질문에 윤구주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네가 진짜라 믿는다면 그것은 진짜야. 초심을 잃지 않아야 길이 열리는 법이지.”이 말은 백호에게만이 아닌 자신에게도 하는 것이었다.서울의 위기는 해결되었지만 윤구주는 이 모든 것이 문씨 가문의 그 여자의 계획 중 하나임을 알고 있었다.“국주님, 이제 서요산으로 갈 때입니다.”그가 임정설을 바라보며 말했다.“서요산을 지키려는 거니? 마인이 나타날 거란 말이야?”임정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요탑 아래에는 천년 동안 갇힌 수많은 마인들이 있었다.“맞아요. 서요산의 지맥 영기가 거의 고갈되었습니다. 만약 진요탑이 무너지면 큰 재앙이 찾아올 것입니다.”윤구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요탑이 붕괴하여 마인들이 쏟아져 나오면 윤구주라도 그들을 처리하기 힘들 것이다.“좋아. 내가 같이 가주마. 이 늦은 재앙은 언젠가 닥칠 운명이니 우리가 짊어져야 해. 지금의 희생은 후손들을 위한 것이야.”임정설의 눈빛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화진을 위해, 백성들을 위해 그는 언제든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윤구주는 현모에게 연락을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뭐라고요? 저하께서 서요산으로 가신다고요? 그렇다면 저희도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현모와 주작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특히 주작은 서요산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천년 동안 축적된 재앙을 겨우 수십 년 수련한 윤구주 혼자서 떠맡기엔 버거웠다.“괜찮아. 너희에게는 따로 시킬 일이 있어. 내가 서요산에 있는 동안 너희는 국경을 지켜줘. 청룡의 행방은 잠시 접어두고 내가 시킨 일에 몰두해. 난 문아름을 그 여자를 잘 알고 있어. 문아름은 일이 내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추가로 부탁이 있는데 만약 내가 전사한다면 그때쯤 청룡이 모습을 드러낼 거야. 청룡을 불러내는 게 복인지 화인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그 상황이 오면 너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거야. 문아름이 결정을 내리겠지. 그러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유언을 남기는 듯한
‘헐, 대박.’진동왕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윤구주를 신처럼 떠받들었다.‘이게 진짜 신이지. 곤륜에 있는 그 자식들은 모두 가짜 신들이었어. 허위적이기 그지없지.’오늘 밤 그는 여러 강자의 싸움을 직접 목격하고 강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문경우도 아주 강했지만 윤구주가 나타나자 문경우는 도망조차 제대로 치지 못하고 영혼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윤구주의 술법에 의해 영혼도 남기지 못하고 진정한 죽음을 맞이했다.승리는 결국 화진에게 돌아갔다. 화진을 무너뜨리려는 역적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윤구주는 자신의 힘으로 화진의 막강한 실력을 전 세계에 알렸다.문경우를 처단한 윤구주는 즉시 임정설의 치료에 돌입했다.“짐은 별일 없으니 먼저 왕숙과 네 친구를 치료해줘라.”임정설이 임성진과 청해를 가리키며 말했다.청해는 이미 정신을 차렸다. 비록 상처가 심해 반쯤 죽은 상태였지만 화진 국주에게 인정받은 첫 순간이었다. 묘한 영예감이 그의 마음을 꽉 채우며 날아갈 듯 기뻤다.“이 두 사람 모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은 아닙니다. 오히려 국주님이 더 위험하십니다. 경지를 무리하게 넘어서셨고 섭혼번 아래서 정기를 너무 많이 잃으셨습니다. 지금 국주님의 기운이 안정하지 않으니 제 도움이 없다면 폭주 할수도 있어요. 그때가 되면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윤구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임정설은 결국 윤구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도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다. 윤구주의 치료를 거부한 이유는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황자급 경지에 오르긴 했지만 예전보다 죽음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 있었다. 윤구주는 임정설에게 풀지 못한 원한이 있음을 눈치채고 치료를 해주며 화진으로 압박했다.“국주님께서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화진에게는 국주님이 필요합니다. 국주님은 30년 동안 화진을 지켜오셨잖아요. 지금 승부가 달린 이 중요한 시점에서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시면 안 됩니다.”임정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