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라.”염구준은 검을 위문석의 목덜미에 갖다 댄 채 차갑게 말했다.그 목소리는 한 치의 의심도 허용하지 않는 위압으로 가득했다.“말하겠소. 하지만 날 풀어줘야 합니다.”위문석은 뭔가 협상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하며 흥정을 시도했다.윙—염구준의 검날이 옆으로 스치며 위문석의 목덜미를 가르고, 선혈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피는 그의 옷을 붉게 물들였다.“네가 나와 흥정할 자격은 없어. 말할지 말지는 네가 판단해.”바닷바람이 불어오자, 염구준의 몸에 서린 살기는 더욱 짙어졌다.배 위에 남아 있던 이들은 충격에 숨을 삼켰다.이 선장이 얼마나 잔혹한 인물인지, 그들은 이미 똑똑히 알고 있었다.과거에 누군가 그를 거슬렀다가, 선미에 묶인 채 상어 미끼가 되었던 일도 있었다.그런 자가 지금은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좋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죽음의 위협 앞에서 위문석은 더 이상 조건을 내세우지 못했다.한 순간이라도 더 살아 있는 게 중요했다.“헛짓거리 하지 마라. 네 목숨은 하나뿐이다.”염구준은 검을 거두고, 위문석의 단전을 봉한 뒤 배를 몰라는 눈짓을 보냈다.“알겠습니다!”위문석은 답을 하고, 상처를 움켜쥔 채 조타실로 달려갔다.배는 방향을 틀고 새로운 항로로 나아갔다.염구준은 검을 거두고 먼 바다를 바라보며 묘한 기대감을 품었다.몇 년 사이, 위문석이 이 정도로 성장해 있을 줄은 몰랐다.“염 형…… 염 전주를 뵙습니다!”왕동군이 앞으로 나서며 한쪽 무릎을 꿇고, 눈빛은 뜨겁게 빛났다.그는 늘 위험을 무릅쓰는 경호원 일을 해왔고, 염구준에 대한 소문을 조금씩 들은 적이 있었다.늘 단편적인 이야기뿐이었지만, 들을 때마다 온몸이 전율했다.용제국에 이런 강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는 자랑이었다.“일어나. 형제라 부르기로 했으면, 이런 건 신경 쓸 필요 없잖아.”염구준이 왕동군의 팔을 힘껏 끌어올렸다.“하아!”왕동군은 감격에 몸을 떨었다.염구준과의 인연, 앞으로 평생 자랑할 거리였다.그 후 염구준은 배
염구준은 다른 자리가 있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배가 작아서 옮길 곳이 없었다. “야, 뚱땡이 비켜.”“죽고 싶어?”션이 크게 화를 내며 벌떡 일어서자, 어선 전체가 요동쳤다. 덩치만 보면 족히 삼백 킬로그램은 되어 보였지만 움직임은 놀라울 만큼 빠르고 거칠었다. 그가 손바닥을 날리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귀를 찢듯 울렸다. 엄청난 힘이었다.쾅!그러나 그보다 먼저 움직인 건 염구준이었다. 공격은 늦었지만, 반응이 빨라 염구준은 순식간에 한 손으로 션의 팔을 붙잡고 어깨 너머로 넘겨버렸다.이건 힘이 아닌 기술이었다.이렇게 단 한 번만에 전신위 경지인 션은 허무하게 지고 말았다.“허억... 허억...”몇 분이 지나서야 숨을 몰아쉬며 일어선 션은 곧 전신의 진기를 끌어올리고 내뿜었다.그는 방금 전엔 자신이 너무 안일했다고 생각했다.“네 대가리를 깨버릴 거다!”션은 고래고래 외치며 두 팔을 벌리고 염구준에게 돌진했다. 그 자세는 어딘가 씨름꾼을 닮아 있었다.“온몸이 약점투성이네.”퍽!염구준은 그가 다가오자, 발로 복부를 가격해서 멀리 차버렸다.사실 션은 힘이 강해서 무공이 괜찮아 보이는 거지, 별다른 기술이 없었다.연달아 밀리던 션은 결국 분노에 눈이 뒤집혔다.쾅!그는 옆에 있던 사람을 별 이유도 없이 한 손에 찍어 죽였다. 원래부터 악인인 만큼, 션은 사람을 죽이는 데 크게 이유를 두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다른 이들은 죄다 겁을 먹고 흩어지기 시작했다.흩어지면서 남에게 부딪혀 넘어진 사람도 있었는데, 그는 곧바로 일어나서 자신과 부딪힌 사람과 싸우기 시작했다. “씨X, 여긴 내 자리야. 죽고 싶어?”“그럼 어디 한 번 붙어보든가. 내가 정말로 널 무서워할 것 같냐?”“감히 공격 해? 죽고 싶어?”...어선 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서로 죽이겠다는 목소리는 배를 울렸고, 전부 상대를 죽이는 데 진심이었다.도망자들 사이의 싸움은 원래 보통 참담한 게 아니었다.이 모든 시작은 션 때문이었다.“용하인, 널
“고마워요. 용하국에 돌아가면 술 한 잔 대접해 드릴게요.”염구준은 이번엔 진짜 괜찮은 사람을 도와줬음을 느꼈다. ‘역시 같은 나라 사람이 더 믿음직하다니까.’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먼저 가서 정산 좀 받고 올게.”왕동군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온니사 쪽으로 향했다.낯선 타국 땅에서, 목숨을 걸면서까지 일하는 건 돈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였다.“온니사 양, 토착민도 보셨으니 약속한 잔금도 처리해 주시죠.”왕동군은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저 다친 거 안 보여요? 그리고 모욕까지 당했잖아요. 이게 전부 당신이 제대로 지키지 못한 탓이에요. 그러니까 한 푼도 못 줘요.”온니사는 고급 와인을 흔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태도를 보아 돈 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저흰 목숨을 걸고 일해서 받는 겁니다. 그리고 전에도 목숨만 보장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왕동군은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길 바랐다.하지만 온니사는 오히려 뻔뻔하게 옆에 있는 남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애교를 부렸다.“자기야, 저 사람이 나 괴롭혀.”“용하국 개새끼들아, 꺼져!”개문은 와인잔을 흔들며 상위자의 태도를 취했다.경멸 어린 눈빛으로부터 그가 왕동군 일행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왕동군은 기분이 순식간에 나빠졌다.“돈도 안 주면서 사람을 모욕해? 못 배운 거 티 내는 것도 아니고.”“넌 날 화나게 만들었어.”쨍그랑!개문은 와인잔을 내팽개치고는 배에서 뛰어내려 왕동군에게 주먹을 날렸다.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일격이었다.‘전신의 경지야!’왕동군은 전신 영역을 보고는 자신이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닫고 최대한 팔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온니사를 지켜주며 여기까지 왔더니 정작 돌아온 건 이런 대우였다.쿵!하지만 시간이 지났음에도 왕동군은 털 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앞에서 누가 그 일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돈도 안 주고 죽이려고까지 하다니, 좀 심한 거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한 무리의 대오가 빽빽한 우림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한잔하고 땀 좀 빼.”수염이 덥수룩한 동양계 사내가 술병 하나를 휙 던지며 말했다.“고마워요, 형.”염구준은 마다하지 않고 감사 인사를 짧게 하고는 그 자리에서 병째 들이켰다. 독한 술이 식도와 속을 훑고 지나가며 온몸에 열기를 더했다. 그는 안개 늪을 빠져나온 뒤 이 탐험대를 우연히 만났는데, 대장인 왕동군이 성격이 괜찮은 걸 보고 그들에게 합류했다.교통수단도 없고 여정도 길기 때문에 우림을 빠져나가려면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야만 했다. “대장, 저런 짐 덩어릴 왜 데리고 다녀요?”이때, 대오에서 군복 스타일의 옷을 입고 큼직한 백팩을 멘 이쁜 여자가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온니사는 이번 탐험의 의뢰인으로, 서양 사람이고 나이는 스물다섯에서 스물여섯쯤이었다.그녀가 이 우림까지 온 이유는 조금 웃겼는데, 바로 토착민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싶어서였다.그냥 배가 불러서 할 일이 없는 것 같았다.“허. 누가 짐덩어린지는 끝까지 가 봐야 알겠지.”염구준은 돈 받고 따라온 것도 아니기 때문에 굳이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주지 않았다.무엇보다 반보천인이 동행하면 안전은 확보된 셈인데,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흥. 위험한 상황이 오면, 알아서 해요.”온니사는 못마땅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꺄아아악... 살려줘!”곧바로 대오의 제일 앞으로 간 온니사가 순식간에 땅속으로 꺼지며 비명을 질렀다.함정에 빠진 것이다.“빨리 사람부터 구해!”이에 왕동군은 잔뜩 긴장한 채로 서둘러 달려나갔다.의뢰인이 죽으면 잔금을 아예 못 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우우우우!”하지만 온니사를 구하기도 전에, 주위에서 야성적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온니사가 바라던 대로 토착민들이 온 것이었다.“전원 전투 태세 갖춰!”왕동군은 긴장한 채로 크게 외쳤다.보통 토착민들은 성격이 따뜻해서 멋대로 사람을 해하지 않지만, 극소수의 부족은 난폭
전장에서 그는 수없이 죽음의 문턱을 넘었지만, 단 한 번도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린 적이 없었다.‘됐다!’슉!마침내 몸의 감각을 되찾은 염구준은 남아 있는 내력을 끌어모아 응축된 검기를 정확히 고무라의 목덜미를 향해 날렸다.쾅!고무라는 급히 입을 다물며 몇 개의 치아를 부순 뒤, 염구준을 향해 강력한 꼬리 지느러미를 휘둘렀다. 자신의 영역이라 그런지, 고무라의 반응은 번개처럼 빨랐다.이에 염구준은 강한 육체로 이 일격을 받아내 거대한 나무로 날아갔다.“젠장, 힘 한 번 진짜 세네!”염구준은 몸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크아아!”고무라는 염구준이 약해졌다는 걸 감지하고 뿔을 자른 것을 복수하기 위해 거대한 나무 쪽으로 빠르게 다가갔다.힘이 넘치는 꼬리로 나무의 뿌리를 연달아 때리자 거목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이 녀석, 꽤 앙심 깊네.”“쿨럭.”염구준이 다시 한 번 검은 피를 토하자 뿜어나오는 기운이 한층 더 약해졌다. 체내에 퍼진 독이 더는 억제되지 않고 있었다.더 이상 미룰 수 없었기에 그는 곧장 가부좌를 틀고 앉아 정신을 가다듬고 독을 몸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그러자 적지 않은 검은 안개들이 몸 밖으로 배출되었다. 쾅!그러나 일분도 채 되지 않아 독을 빼내는 행위는 고무라의 돌격에 끊겼다.이 속도로 독을 전부 빼내려면 아무리 빨라도 십여 시간은 걸릴 판이었다.오승 전주의 독은 진짜 강했다. 몇 차례 방해를 당한 끝에, 염구준의 인내심이 바닥이 나서 아래쪽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야! 뿔 하나 부러뜨린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렇게까지 원한을 품고 있냐?”고무라는 당연히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물며 용하국 언어는 더더욱 말이다.고무라는 계속해서 나무를 부딪혔다.거목이 두꺼운 건 사실이나 몇 시간을 부딪히면 정말 무너질 수도 있었다.‘좋은 향기다.’극도로 짜증이 나있을 때, 염구준은 코를 벌렁이며 어디서 풍겨오는 색다른 향기에 정신이 팔렸다.이건 그도 처음 맡는 냄새였다.숨을 몇
“죽어라!”전대미문의 힘을 가진 오승 전주는 핏빛의 금속 발톱을 휘저으며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동반되었다.‘진짜 강하네.’염구준은 검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온몸으로 그 강대한 기세를 체감했다.지금 눈앞의 오승 전주의 힘은 전에 만났던 그 어떤 위천인보다도 더 강했다.일극 반보천인에서 위천인의 경지로 돌파한 사람의 힘은 다른 경지에서 돌파한 사람의 것보다 더 엄청났다.“난 널 죽이고 용하국으로 돌아가 너와 연관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거다.”“그리고 다시 용하국의 강호에 피바람을 일으켜 주지. 생각만 해도 짜릿하군.”오승 전주는 공격을 하면서 계속 주절거렸다. 그 늙은 얼굴엔 사악한 웃음이 가득했는데, 마치 이 싸움이 이미 이긴 싸움이라 믿고 있는 듯했다.“난 질 수 없어!”상대방의 말에 가족을 떠올린 염구준은 열세에 처해있으면서도 전부의 기운을 끌어올렸다.이기려면 막는 게 아니라 공격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피 튀기는 살벌한 공방을 주고받았다.푹! 푹!염구준이 검으로 오승 전주를 베면, 오승 전주는 그 틈을 노려 염구준을 할퀴었다.둘의 옷은 어느새 피로 물들었고, 온몸엔 상처가 가득했다.두 사람 모두 일극 반보천인이고, 극한의 육체에 도달했기 때문에 육박전이 미친 것만큼 치열했다.서로 공격을 주고 받느라 당장 승부를 내기가 어려웠다.하지만 이건 수많은 시체가 쌓인 전쟁터에서 오고가던 염구준이 제일 좋아하는 싸움 방식이었다.그는 거의 살만 찢어졌지만, 오승 전주는 치명타를 입는 게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전투 경험의 차이가 여기서 현저히 드러났다.오승 전주도 비장의 카드가 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염구준을 할퀴었다.“이건 부식독이다. 네 놈 몸이 얼마나 버티나 보자.”두 사람의 싸움은 말릴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해져 더 이상 승부가 아닌 생사가 걸리 게 되었다.어느덧 싸움은 다섯 시간째 이어졌고, 불길도 사그라들고, 하늘에 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