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사위 잘 둔 덕에 이제 재벌들과 한자리에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민아!”함께 학교를 다닐 때도 곽민과 친하게 지냈고 방금 전 왕연이 못 되게 굴 때도 진숙영의 편을 들어준 건 곽민뿐이었기에 진숙영은 다른 사람들은 깔끔하게 무시한 채 곽민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어보였다.“이리 와. 우리 사위는 저쪽에 앉았어. 내가 소개해 줄게. 다른 도련님들한테 얼굴 도장도 찍을겸.”한편, 그녀의 말에 곽민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고 진숙영의 팔을 잡은 손에도 힘이 꽉 들어갔다.다른 도련님들?‘동창들 중에서 나름 잘 나간다는 애들도 도련님들에 비할 바야 못 되지.’곽민을 제외한 다른 동창들 역시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도 젓가락질 한 번 못한 채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초특급 재벌들의 자제들, 그 수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막대한 자산, 용하국 권력과 재력의 상징을 이렇게 직접 눈앞에서 본다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워낙 강력한 포스에 다들 인사는커녕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한편, 손가을의 손을 꼭 잡은 염구준은 다른 사람들에겐 눈빛도 주지 않은 채 바로 곽민의 앞으로 다가갔다.“방금 전, 상황에서 장모님의 편을 들어주신 건 사모님뿐이셨습니다. 저희 장모님과 아주 돈독한 사이신가 보네요. 그리고 아까 애기를 들어보니 사모님 남편분은 의대 출신이고 지금 사모님은 가정주부시라죠?”한진을 힐끗 돌아본 염구준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그건 한진 씨한테 맡기시죠.”‘한진한테 맡긴다고? 그... 그게 무슨 소리인지...’“아, 아니 그게...”한진을 힐끗 바라보던 곽민이 다시 잔뜩 겁 먹은 얼굴로 염구준을 돌아보았다. 정말 기가 많이 죽었는지 목소리마저 살짝 떨리고 있었다.“난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포부 같은 것도 별로 없고. 한진 대표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내가 뭐라고 내 일자리까지 알아봐 주겠어.”이에 염구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살짝 웃었다.‘장모님 친구라는 것만으로도 그런 대접받으실 자격 충분한데.’“
방금 전엔 꽤 멀리 떨어져있어서 제대로 실감이 안 났다면 바로 눈앞에서 귀티가 좔좔 흐르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태산 같은 부담이 가슴을 턱 막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어머, 쟤 지금 그 사람들 옆에 앉은 거야?”“학교 다닐 때부터 숙영이랑 친했잖아. 룸메이트였을걸.”“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아까 상황에서 곽민 쟤만 숙영이 편 들어서 저런 대접받는 거 아니야. 솔직히 나도 나서려고 했는데 휴... 타이밍을 놓쳤네.”같은 공간, 다른 동창들은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며 부러운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그냥 옆자리에 앉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평생 자랑할 만한 얘기거리였으니까.“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희보다 훨씬 더 어른이시잖아요. 모르는 사람들이야 저희더러 대표네, 도련님이네 하지만 어차피 아무 의미 없어요.”염구준의 부탁이니 한진 역시 곽민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사모님, 무슨 부탁이신지는 모르겠지만 뭐든 말씀하세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돕겠습니다.”“그... 그게...”살아생전 한진 대표에게서 사모님 소리를 들을 줄이야.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에 살짝 휘청이던 곽민은 진숙영과 손가을의 부축을 동시에 받고 나서야 겨우 안정을 되찾고 용기를 내 말했다.“별 건 아니고... 내가 사실은 일자리를 못 찾는 게 아니라 안 찾는 거예요. 나이도 많고 손주도 봐줘야 하는데 출근까지 하면 체력이 못 따라갈 것 같아서요. 사실 문제가 있는 쪽은 우리 남편이에요. 이제 겨우 51살에 의사로서 능력도 나쁘지 않은데 동네 진료소에서 일하는 모습만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안 좋아서요. 그래도 왕년에는 용두 의대까지 나온 수재였어요. 솔직히 용두 대학병원에서 일하려고 했었는데 그땐 용두에서 방 한 칸 얻기 힘들 정도로 집안 사정이 안 좋아서... 결국 현실 앞에서 꿈을 접은 거죠.”곽민의 설명에 한진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용하국의 중심 도시로서 용두는 땅 한 평이 곧 금싸라기 같은 곳, 게다가 대학병원이 있는 곳
“아, 원장님. 참... 무슨 말씀을 드려야지 할지... 정말, 정말 너무 고맙습니다.”휴대폰을 꼭 쥔 곽민은 어찌나 기쁜지 횡설수설을 이어갔다.“내일 바로 그이 대학병원으로 보내겠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참... 정말...”화상춘 역시 곽민의 감격스러운 감정을 그대로 느꼈는지 목소리가 한결 더 가벼워졌다.“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감사인사는 한 대표님, 아니 염 대표님과 진숙영 여사님께 하시죠.”‘아, 맞네.’순간 멍한 표정을 짓던 곽민은 전화를 끊지도 않고 염구준과 진숙영을 향해 눈시울을 붉혔다.“숙영아, 구준아...”“아니에요, 사모님. 남편분 실력이 워낙 뛰어나시니 이런 기회도 오는 거죠.”그리고 염구준은 옅은 미소를 띤 채 질투와 부러움으로 가득한 표정의 다른 동창들을 향해 말했다.“이건 하늘에서 뚝 떨어진 행운이 아니라 평소 덕을 쌓은 덕분이라고 보는 게 맞죠. 사모님처럼 언제 어디서든 불의에 맞서고 맞는 건 맞다,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 대단한 분이시니 이런 행운과 기회도 찾아오는 겁니다. 다른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시죠?”염구준의 말에 다른 동창들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하늘에서 떨어진 행운이 아니라 평소 덕을 쌓은 덕분이라는 말이 왠지 무겁게 느껴져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미... 미안해, 숙영아.”잠깐의 침묵 끝에 누군가 먼저 입을 열었다.“솔직히 왕연이 한 말 다 거짓말이라는 거 알고 있었어. 그런데 아까 그 상황에서 괜히 나섰다가 보복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그게 무서워서 네 편 못 들어줬어...”“그래, 숙영아. 우리가 미안했어.”“숙영아, 아까 왕연이 그렇게 당할 때 솔직히 우리 다들 속이 시원했어. 그리고 네 덕분에 이렇게 높으신 분들과 같이 식사 자리도 함께 하고. 이런 영광을 어디서 누리나 그래.”“구준아, 우리가 원망스러운 마음은 알겠지만... 왕연 성격도 알잖아. 그래서 차마 말을 못 꺼냈어. 그런데 이번
염풍도?진영주와 인사를 나눈 염구준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손가을과 시선을 마주쳤다.얼마 전 주작호 사고가 있었을 때 염구준은 염풍도의 자기장을 뚫고 손가을을 구조하는 데 성공했었다.그때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으니 지금까지도 공식적인 입장은 ‘염풍도의 천연 자기장이 갑자기 사라져 쌍둥이섬이라는 기묘한 자연경관을 만들어냈다’는 것뿐이었다.이런 뉴스가 자연스레 묻힐 수 있었던 건 뭐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 이 세상 어느 한 곳에 그렇게 신기한 곳이 생겼구나라는 뉴스 한 줄로 넘겼던 무반응 덕분이었다.일일 소비금액만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럭셔리 휴가지를 갈 생각 자체를 아예 안 하고 있을 테니까.“글쎄 요즘 염풍도 모험이 그렇게 유행이라잖아.”향산 저택으로 향하는 길, 뒷자리에 앉은 진영주는 손가을과 진숙영의 팔을 번갈아 잡아당기며 재잘거림을 이어나갔다.“그런데 그 사람들이 뭘 발견했는지 알아? 글쎄 거기 화산이 있었대. 그 휴화산에서 특별한 자기장이 나왔던 건데 이젠 자기장이 거의 소모돼서 화산 온천만 남았대. 거기에 몸을 담그면 그렇게 편하다잖아.”“그래?”아무렇지 않은 척 되물었지만 손가을의 마음은 어느새 흔들리기 시작했다.자기장이 처음 사라졌을 때 손가을은 이미 염구준과 화산 모험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고 그 화산에서 옥패 하나를 발견했다. 지금까지 획득한 옥패는 총 3개, 옥패 하나, 하나마다 어마무시한 고대 비밀이 숨겨져있다고 하지만...손가을이 신경 쓰는 건 그게 아니었다.염구준과 결혼한 뒤로 제대로 된 웨딩촬영도, 신혼여행도 못 가본 터라 아쉬움이 많이 남은 그녀였다.“염풍도... 나도 가보고 싶어.”운전 중이던 염구준이 백미러로 손가을을 힐끗 바라보았다.“그래. 아, 물론 이번엔 제대로 준비하고 가자. 경호원들도 대동해서.”저번 납치사건이 깊은 트라우마로 남은 것도 있고 흑풍 조직까지 나타났으니 걱정이 앞서는 염구준이었다.정경림도, 용준영도 있고 뢰인과
원씨 가문 가주 원종, 나름 강자니까 우리 경호를 맡기기엔 충분해. 우리가 염풍도로 가기 전까지 무조건 모시고 올게. 여기에 경림 아저씨까지 합류하면 나름 안전할 거야. 기다리고 있어.”그리고 염구준은 단 이틀만에 모든 협상을 끝냈다.염구준이 직접 나선 이상, 원씨 가문에서 부탁을 거절할 리가 없었고 가주인 원종이 직접 최정상 고수 2명과 함께 청해시로 향해 정경림과 각각 손씨 그룹 본부와 항산 별장의 경호를 맡게 되었다.그렇게 손태석, 손씨 그룹 임원진들의 안전까지 보장한 뒤...“여긴 걱정하지 말고 재미있게 놀다와.”빈해 공항.손태석과 진숙영은 흐뭇한 얼굴로 염구준 일행을 바라보았다.“염 서방이 있어서 마음이 놓여.”손태석이 염구준의 어깨를 토닥였다.“희주도 학교에서 잘 지내고 있대. 경림이 형이 잘 지키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정경림, 용준영, 뢰인, 그리고 12명의 엘리트 경호원들이 학교 주위를 물 샐 틈 없이 지키고 있는 데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지하 벙커로 옮기기로 되어 있어 흑풍 존주가 직접 오지 않는 한, 위험할 상황은 벌어질 리 없었다.그리고 흑풍 존주는...염구준과의 결투에서 중상을 입은 터라 완치까지 적어도 1년은 걸릴 것이니 그 동안은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되었다.“장인어른, 장모님, 그럼 저희 가보겠습니다.”그렇게 부푼 가슴을 안고 염구준 일행은 염풍도로 향했다....한편, 염풍도.“염구준이 이미 옥패 3개를 손에 넣었다고 합니다.”거센 파도의 바다 위, 20여 명의 장정들이 대형 선박 갑판 위에 서있다.그들 중 검은색 망토를 두른 이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조직에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염구준이 염풍도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이에 다른 남자들은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염구준이 자기장을 파괴하고 옥패까지 획득했다는 건 조직 내부에서 이미 공공연히 알고 있는 사실, 그런데...옥패까지 다 가져간 마당에 왜 다시 돌아온 걸까?“왜 다시 돌아온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어.”망토
“염구준이 다시 염풍도로 가는 건 분명 기회지만 그럴 때일수록 더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걸 잊지 마라. 다들 우호법도 곧 도착할 때까지 기다린다.”우호법?이에 모인 이들 중 몇몇은 코웃음을 내쳤다.‘존주님한테 알랑대는 개 주제에...’오늘 자리에 모인 이들은 다들 흑풍 조직에서 내놓으라 하는 강자들, 리더인 흑풍 존주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는, 아니 심지어 농담마저 건넬 수 있는 일당백 고수들이었고 그만큼 자존심도 강했다.하지만 우호법 ‘도천연’은 달랐다. 전신 경지를 바로 코앞에 둔 고수임은 분명한데 흑풍 존주에 대한 충성심은 그야말로 병적이었고 그런 그의 충심은 콧대 높은 흑풍 조직원들 사이에서 오히려 독특하게 느껴졌다.철썩철썩...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저 멀리 파도가 이상하리만치 넘실대더니 작은 체구의 누군가가 해수면을 밟고 타다닥 달려왔다.“형님.”백 미터 넘는 거리를 훌쩍 점프한 도천연이 갑판에 발을 딛자 학신통이 먼저 다가갔다.“존주님 상태는 어떠십니까? 이번에 염구준이 다시 염풍도에 온다는데. 우리도...”하지만 도천연은 무거운 얼굴로 자리에 모인 이들을 훑어보았다.“존주님의 상태는 조직 최대 기밀사항이니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라. 그리고 내가 여기로 오기 전에 존주님께서 특별히 당부하셨다. 염구준의 손에서 옥패를 빼앗는 자, 그게 누구든 다음 존주로 추대하겠다고.”쿠궁!폭탄발언에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진 것도 잠시, 학신통을 포함해 모든 이들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뜩이기 시작했다.다음 존주?흑풍 조직원들이라면 누구든 갈망하는 자리, 수천, 수만 명의 강자들을 호령할 수 있는 절대 거부할 수 없는 권력의 징표를 물려준다는데 어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그게... 사실입니까?”가장 먼저 이성을 되찾은 학신통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그러니까 저희 타깃은 옥패고... 그럼 형님 타깃은 뭡니까?”“손가을.”한참을 침묵하던 도천연이 천천히 손가을의 이름을 내뱉었다.‘손가을?’순간 학신통의 눈동자가 살짝
한편, 염풍도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환고도’.공항이 없는 염풍도로 관광을 오는 사람들은 무조건 환고도에서 내려 2시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비로소 섬의 유일한 항구에 도착할 수 있다.“진영주 씨 어디 계신가요?”염구준이 탄 배가 정박하자 부두에 나와있던 가이드가 팻말을 흔들며 소리쳤다.“여깁니다, 여기!”염풍도는 개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지만 럭셔리 관광지로 워낙 유명한 곳이라 20곳은 넘는 여행사가 주둔하고 있는 건 물론 섬 곳곳에 호텔, 리조트, 오락시설 등이 잘 구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매력적인 건 편리함을 추구하면서도 섬 본유의 신비로운 매력을 그대로 지켜냈다는 점이었다.그리고 그들을 맞이한 가이드는 진영주가 출발하기 전 예약해 둔 여행사의 직원이었다.“자, 얼른 오십시오. 버스 곧 출발합니다.”숨도 돌리기 전에 가이드의 말이 쉴새 없이 몰아쳤다.“자, 그럼 염풍제2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일단 기본적인 정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염풍제2도는 비록 개발된 지 2개월밖에 되지 않은 곳이지만 관광시설은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습니다. 세계 각지의 여행객들을 맞이하기 위한 투어 타온도 마련되어 있죠. 관광하실 땐 최대한 제 근처에 꼭 붙어계십시오. 워낙 다양한 나라에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문화차이 등 여러 문제로 갈등이 생기는 경우도 꽤 있거든요.”한편, 가이드의 얼굴을 힐끗 살피던 염구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너무 티나네...’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줄인다는 건 관광객들의 정보 루트를 차단한다는 것, 오로지 여행사의 계획에만 따르게 하는 건 딱 봐도 관광객들을 선동해 이상한 물건을 사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인센티브를 챙기려는 속셈이 분명했다.‘인기 여행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지.’“자, 휴식 지점 도착했습니다!”버스가 광장에 도착하자 가이드가 들고 있던 깃발을 흔들었다.“자, 다음 휴식 지점에 도착하려면 2시간은 걸릴 겁니다. 그 사이에는 슈퍼 같은 것도 없이 사실 거 있으면 여기서 미리 사두세
‘관광에는 문제 없겠지만 내 실적에는 큰 문제가 생긴다고!’하지만 이런 말을 대놓고 할 순 없는 노릇.이성과는 버스 밖에 배치된 노점을 가리키며 어색하게 웃었다.“관광객 여러분들의 쇼핑 자유는 물론 보장해 드립니다. 하지만 다들 어떻게든 먹고 살자고 이렇게 힘들게 노점상으로 일하고 있는데 매출이라도 올려주시죠. 저 코코넛 좀 보세요. 저희 염풍도 특산품입니다. 신선하고 시원한 건 물론이고 여자분들 피부에도 그렇게 좋아요. 우리 여성분들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우시지만 자고로 미모도 다다익선 아니겠어요?”피부에 좋다고?순간 손가을의 눈빛이 번뜩였다.손씨 그룹이 청해시에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바로 뷰티 분야에서의 인지도 덕분이었다.‘그래. 저번에 왔을 때 코코넛 먹어 본 적 있었는데 맛은 확실히 좋았어. 퀄리티는 보장됐고... 여기 코코넛을 들여와서 성분을 추출하면...’“구준 씨, 우리 사자.”염구준의 팔짱을 낀 손가을은 진영주와 함께 버스에서 내려 가장 가까운 노점 앞으로 다가갔다.“코코넛 가격이 어떻게 돼요, 사장님?”유창한 영어 실력에 아시아인으로 보이는 노점 사장은 흰 치아를 훤히 드러내며 웃었다.“한국어 하셔도 됩니다. 저도 다 알아들어요! 코코넛이요? 하나에 5만원입니다.”쿠궁!사장의 대답에 염구준은 물론 손가을의 표정도 싸늘하게 굳었다.평소 마트에서 사도 이 정도 가격은 아닌데 현지 특산품을 이렇게 비싸게 판다는 건 분명 비합리적이었다.“사장님, 5만원은 너무 비싼데요.”염구준이 최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관광지 물가가 비싼 거야 당연한 거지만 이 가격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저희가 이런 바가지를 쓸 것 같습니까?”“하이고, 비싸다고 생각되시면 안 사시면 되지요. 억지로 팔 수야 없으니까요.”이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던 사장은 이성과와 시선을 맞추더니 피식 웃었다.“이 섬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잘 모르시는군요.”이 섬은 휴화산이 자리한 곳, 땅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인해 수분 소모가
파악!곧이어 물기둥이 하늘로 솟구치며 거대한 향유고래가 염구준과 멀지 않는 곳에 떨어진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마치 떠나기 아쉬워하는 듯했다.촤악!염구준은 몸을 날려 향유고래의 머리 위로 뛰어오른 뒤, 세 척의 어선 쪽으로 진기를 날려 물보라 일게 했다.이에 향유고래는 곧장 방향을 틀고, 어선을 향해 빠르게 헤엄치기 시작했다.말이 통하지 않아 이런 방식으로 밖에 교류할 수 없었지만 별로 큰 문제는 없었다.그 시각, 1호 어선은 다른 어선보다 조금 더 시끌벅적했다.노대영은 배의 지휘권을 장악한 뒤, 끝까지 저항한 소수만을 제거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포로로 붙잡아두었다.물론 그가 자비로워서가 아니었다.그저 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어떻게 복수하는지 지켜보게 하기 위해서였다.“대영 문주님, 준비 완료됐습니다. 언제든 시작 가능합니다.”노대영에게 붙은 아첨꾼 하나가 다가와 공손하게 말했다. 이번에 출정한 천기문 문도 중 절반 이상이 이미 노대영 편이었다.쿵!노대영은 부도 갑옷을 입은 채로 웃으면서 팔을 휘둘러 노신기를 바닥에 내던졌다.“악독한 놈. 네가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난 오늘 아버지의 복수를 할 거다.”며칠 전에 대의를 위해서라면 혈연관계는 얼마든지 끊을 수 있다는 그의 말은 그저 노신기를 안심시키기 위함에 불과했다. 그의 가슴 속에 맺힌 복수심은 한순간도 식지 않았었다.“하아...”노신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의 창백한 얼굴엔 깊은 후회가 서려 있었다.‘그때 불쌍해 보인다고 해서 검은 머리 짐승을 거두는 게 아니었는데.’그는 생각했다. “모든 일은 내가 벌인 거니까 찢어죽이든, 뭘하든 나한테만 해.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 건드리지 말고.”지금 이런 상황에 이른 이상, 그는 더 도리를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전에 이미 노대영에게 그의 출신을 말해주며 그의 아버지가 눈 깜빡하지 않고 살인을 저지르는 변태 악마라고 말해주었으나 그는 전혀 듣지 않았기 때문에 말해봤자 쓸모가 없다는 걸 알아서였다.스승과 제자의
염구준을 향해 날아오는 것은 엄청난 기운을 내뿜고 있는 금강 방망이 한 개 뿐이었다. 기운의 량으로 보아 세 명의 힘이 전부 들어있는 게 분명했다.이건 베르 일행이 전력을 건 최후의 일격이었다.쾅!한 자루의 검과 한 개의 방망이가 충돌하며 눈부신 불꽃을 일으켰다.폭발적인 에너지가 주변에 퍼져나가며 양측은 잠시 균형을 이루었다.세 사람의 실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막았다! 얼른 보트 준비해, 후퇴한다!”베르의 창백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비틀거리며 일어나 부하들에게 소리쳤다.루카와 슈카 역시 서로 부축하며 일어섰다.이미 힘이 고갈된 지라 그들의 얼굴엔 혈색도 없었고, 기운조차 미약했다.더 이상의 싸움은 무리였다.“하압!”염구준은 팔에 힘을 주어 금강 방망이를 밀어내려 했지만, 방망이가 꼼짝도 하지 않는 걸 발견했다. 이 전법은 오묘했다. 상대방이 시전하고 조종하지 않아도 타겟을 쫓아 움직이는 것처럼 홀로 움직였으니까 말이다.이대로라면, 몸이 먼저 나가떨어질 판이었다.베르는 떠나기 전에 염구준을 보며 독한 말을 남겼다.“염구준, 자만하지 마라. 스텔라성은 아직 남아 있으니까. 돌아가서 강자들을 전부 불러와 널 죽여주지.”“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얼음처럼 차가운 염구준의 목소리에 모두가 몸을 살짝 떨었다.이미 흑풍의 사태로 배운 바가 있었기 때문에 염구준은 적을 쉽게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흥, 말은 누구나 하지. 하지만 나중에 지키지 못하면, 네 얼굴에 침 뱉는 꼴이 될 걸?”베르는 비웃으며 염구준의 말을 맘 속에 담아두지 않았다. 자신의 필살기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염구준은 검을 쥔 양손을 살짝 옆으로 움직이며, 손을 놓았다.우웅!그러자 구자검은 더 이상 금강 방망이와 대치하지 않고, 잔상을 남기며 쏜살같이 전방을 향해 날아갔다.같은 시각에 금강 방망이 역시 미친 듯한 속도로 염구준의 왼쪽 가슴을 향해 돌진했다.이건 자신의 목숨으로 적의 목숨을 바꾸는 방식이었다.꽈악!염구준
“염 선생님, 저희가 가서 막을까요?”노신기는 갈등하며 조심스레 물었다.비록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염구준 덕분에 얻은 것이 많았기에 돕고 싶어서였다.“아니요. 그냥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염구준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대형 방패를 계속 내리쳤다.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노신기 일행의 실력으로는 개입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염구준은 잘 알고 있었다. 가봤자 죽을 게 분명하다는 것도 말이다.한편, 전장의 중심에 선 세 사람은 자신들이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해있으며, 살려면 스스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죽을 각오로 덤벼!”쾅!베르의 눈엔 살기가 가득했다. 손에 쥔 대형 방패는 마침내 한계에 도달하며 산산이 부서졌다.그의 피로 물든 두 손에는 어느새 짧은 단검이 들려 있었고, 그는 그것으로 염구준의 가슴을 향해 휘둘렀다.하지만 날카로운 칼날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얕은 두 줄의 상처뿐, 역시 깊이 파고들지는 못했다.일반적인 공격은 염구준에게 통하지 않았다. 과거, 염구준이 육체의 한계를 돌파한 리아성전의 전주를 쓰러뜨린 것도 필살기와 정제된 진기 덕분이었었다. 심지어 한 번에 쓰러뜨린 것도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싸웠었다.육체가 극한으로 강해진 상대를 쉽게 이긴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염구준은 베르를 걷어차 밀어낸 뒤, 곧바로 루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세 명을 상대할 때 가장 확실한 방식은, 하나씩 쓰러뜨리는 것이었다.“젠장!”염구준이 갑자기 타겟을 바꿀 줄 몰랐던 루카는 급히 막아섰지만 한 칼에 밀려났고 이어진 두 번째 공격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강자들의 승부는 한 수, 한 수가 치명상이라 조금의 방심도 용납되지 않았다. 자칫하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베르는 상황이 좋지 않음을 직감하고 이를 악물며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삼절진을 쓰자!”두 형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베르 뒤로 이동한 뒤, 손을 그의 등에 얹었다.이 필살기에 승패가
베르 세 사람을 포함해 이 싸움을 지켜보던 반보천인들조차 염구준이 쓰는 게 무슨 전술인줄 몰라 어리둥절해졌다.방어를 완전히 포기하고 정면으로 달려드는 행위는 자살이나 다름없으니까 말이다.“건방지긴!”“내가 막을 테니 너희는 죽을 힘을 다해 공격해!”이에 베르의 일그러진 얼굴에는 약간의 기쁨이 섞였다. 그는 달려오는 염구준을 보며 포효하듯이 명령을 내렸다. 해저에서의 전투 경험에 의하면, 그는 자신이 특별히 제작한 대형 방패로 염구준의 공격을 최소 서른 번은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쾅!그러나 시작에 불과한 염구준의 첫 공격에 베르는 몇 걸음이나 밀려났고, 방패엔 반 치 정도 깊이의 칼자국이 선명히 새겨졌다.이 방패는 염구준의 공격을 막기 위해 베르가 특별히 주문 제작한 거라 다른 것보다 더욱 단단하고 두꺼웠다.텅텅!루카와 슈카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동시에 염구준의 옆구리를 향해 칼을 박아넣었다.손목에 힘을 잔뜩 실은 터라 염구준의 호체진기를 가뿐히 뚫었지만 몸에는 옅은 상처밖에 내지 못했다.아무리 힘을 더 실어도, 더 깊숙이 찌를 수가 없었다.“육체의 극한까지 도달했다고?”싸움을 지켜보던 반보천인들은 일제히 감탄을 내뱉었다.두 명의 최강 반보천인의 공격을 오직 맨몸으로 버텼다는 것부터 염구준의 육체가 이미 극한까지 도달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쾅! 쾅!염구준은 루카 형제의 공격을 거의 무시한 채, 계속해서 베르에게 맹공을 퍼부었다.공격이 계속 되면서 방패에는 칼자국이 점점 더 많아졌고, 베르도 연달아 밀려났다. 이 엄청난 충격력에 그의 손바닥은 결국 찢어져 버렸고, 상처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공격 안 해? 밥 안 먹었어?”베르는 체내의 기혈이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방패를 들고 소리쳤다.그제야 그는 그가 자신의 실력을 과대평가 했음을 깨달았다.‘방패가 30번의 공격을 버틴다고 해도 내가 버티지 못해.’염구준의 몸이 반보천인의 극한에 다다른 이후, 방어력 뿐만 아니라 힘도 강해져서 전보다 공격이
모두가 향유고래의 위를 보고 눈이 커졌다.기뻐하는 사람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었다.사람과 고래가 마음을 합쳐 수많은 고난을 뚫고 마침내 위험천만한 해저 심연에서 빠져나온 거다.그 과정의 험난함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노신기는 드디어 마음이 놓였다는 듯, 기뻐하며 입을 열었다. “염 선생님, 돌아가시지 않으셨군요?”말을 내뱉은 후, 그도 이상함을 느꼈지만, 이미 말을 마친 후라 뭐라고 바꿀 수도 없었다. “어... 네, 살아있긴 합니다.”염구준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냈다.솔직히, 좀 웃긴 질문이었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완전히 멀쩡한 염구준을 본 베르는 숨이 턱 막혔다.“염구준, 너...”깊고 깊은 바다 밑에서 화산 폭발과 함께 대지진이 일어난 상황에, 잠수 장비도 없다는 건 그냥 죽음을 의미했다.하지만 염구준은 그 위기 속에서 향유고래를 몰아 드라마처럼 살아 돌아왔다.베르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진정해, 나이도 있는데 괜히 심근경색이나 뇌졸중 와서 그 자리에서 죽으면 곤란하잖아.”염구준은 베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로 열받아서 죽어버리길 바라는 눈치였다.서로 죽이려 드는 사이끼리 예의는 사치일 뿐이었다.“흥! 바다 밑에선 겨우 살아남았을지 몰라도, 여기선 끝이다.”“루카, 슈카! 저 녀석을 죽여라!”베르는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고 염구준을 가리켰다.휙휙.하지만 그 두 형제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빠르게 몸을 뒤로 빼며 보트를 밟고 전함 위로 훌쩍 올라가 버렸다.“부성주님, 저 녀석은 강하니 부성주님께서 직접 나서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입에 발린 소리로 한껏 띄워주니 베르도 그들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셋이 하나를 상대하는 상황임에도 정작 그의 마음속엔 불안감만이 가득했다.염구준의 강함이, 그에게 공포로 다가왔기 때문이다.염구준은 검을 들고 베르를 향해 겨누었다.“이제 끝을 보자.”이제 거의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으니, 갚을 원한은 갚고, 끝낼 일은 끝낼 때였다.“
비록 인수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베르 일행이 드디어 수면 위로 올라왔다.여러 가문을 합쳐서 겨우 20명이 살아서 돌아오고 나머지는 심해에서 전사했다.신비한 생물체가 공격하는 바람에 또 한 번 참담한 손해를 보았다.“빨리 출발해!”베르는 선박에 올라오자마자 부하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지금 그의 안색은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정예병들을 잃고 강력한 조력자 세라까지 잃었는데, 고작 가짜 옥패를 찾다가 죽을 뻔했다.“출발해. 바다 화산이 곧 폭발할 거야!”“우리도 스텔라성이 복수하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다른 가문에서도 각자 선박과 잠수함을 타고 먼 곳으로 향했다.바다 밑의 움직임이 너무 커서 그들도 휘말릴까 봐 너무 무서웠다.지금 해수면에 남은 사람은 노신기와 아타의 선박뿐이었다.그들은 염구준이 살아서 돌아오길 기다렸다.저런 인간들도 살아서 돌아오는데 대단한 실력을 가진 염구준은 무조건 살아서 돌아올 거라 굳게 믿었다.“문주님, 소용돌이가 나타났어요.”선박에서 누군가 소리를 쳤다.“소용돌이?”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소용돌이가 점점 거세게 번지는데 이러다 선박 세 척까지 삼켜버릴 것 같았다.또 위기가 닥치자 그들은 안절부절하지 못했다.“아타 장로님, 저기…!”노신기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뒷말을 흘렸다.솔직히 그도 염구준이 살아서 돌아오길 기다리고 싶지만 이러다가 백 명의 부하들이 전부 죽을까 봐 걱정되었다.“일단 철수하고 소용돌이가 사라지면 보트로 찾으러 오죠.”아타도 급속하게 퍼지는 소용돌이를 보고 일단 명령을 내렸다.해수면이 올라오면서 작은 섬들을 완전히 삼키고, 멀지 않은 곳에서 소용돌이가 미친듯이 주변을 삼켜 버리기에 이러다 정말 전멸할 것 같았다.노신기가 베르에게 다가가 나지막하게 물었다.“염 선생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하하하, 당연히 내가 죽였지!”베르는 바다에 쩌렁쩌렁 울리도록 웃으면서 빌어먹을 허영심 때문에 또 허풍을 떨었다.당시 현장은 난장판이라 제대로 본 사람은 얼마되지 않
밖에서 보면, 절벽이 곧 무너질 것처럼 거세게 흔들렸다.게다가 바닥에서 진흙과 모래가 일면서 시야까지 가려, 앞에 무엇이 있는지 어느 방향인지 알아보기조차 힘들었다.“하하하, 염구준이 동굴에 묻혔으면 틀림없이 죽었을 거야.”이미 추동 장치로 수십 미터 올라간 베르가 유난히 신나게 웃고 있었다.염구준이 이곳에서 뼈가 부서지고 연기처럼 사라지길 바랬다.촤아아!그런데 기뻐한 지 10초도 되지 않아, 한 그림자가 혼탁한 바닷물을 뚫고 나타난 것이었다.염구준이 아니면 누구일까?“흥, 추동 장치도 없는데 수천 미터나 되는 심해에서 어떻게 올라오나 보자.”베르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더니 더는 염구준을 상관하지 않고 위로 올라갔다.동굴 밖으로 나온 염구준은 마치 지옥에 온 것 같았다.검붉은 암장이 소용돌이치고 모래벌레들이 꿈틀거리며 사방을 헤엄치고 대왕 오징어도 균열을 뚫고 심연으로 빠져나왔다.이곳의 기괴한 생물체들도 도망치느라 인간을 봐도 공격하지 않았다.염구준은 동굴 밖에 나와서도 바다의 화산이 폭발하는 위기에 처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지금 잠수 장비와 추동 장치는 없고 산소통만 남는데 몇 숨만 쉬면 바닥날 것 같았다.갑작스러운 변고로 아래로 흡수하는 암류가 사라져서 올라가기 쉬웠지만 그래도 시간이 한참이나 필요했다.어쩌면 해수면으로 올라가기 전에 암장에 삼키거나 익사해 죽을 것 같았다.‘방법이 있어.’문뜩 좋은 방법이 생각난 그는 빠른 속도로 심해 모래벌레의 둥지로 향했다.그곳에 죽은 무술인들의 잠수 장비를 찾아볼 생각이었다.슈우웅!얼마 가지 못하고 지면이 점점 격렬하게 움직이며 대량의 암장이 사방으로 흘러나왔다.바다의 화산이 제대로 폭발한 것이다.분화점에서 가장 가까운 모래벌레 둥지는 순식간에 암장이 덮쳐버렸다.“뭐야. 나랑 해보자는 거야?”왠지 모든 불리한 요소들이 전부 염구준을 향하는 것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심해에서 알 수 없는 에너지에 의해 놀아나다가 죽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방금 전에 심해 눈물의 덕
신비한 생물체는 춤을 추듯 물속을 떠다니더니 공의 명령을 받았는지 우르르 몰려서 베르 일행을 공격했다.“공격을 멈추지 마세요!”두통이 밀려온 베르는 명령을 내리고 곧장 동굴로 도망쳤다.일부 무술인들도 그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각자 도망치기에 바빴다.생물의 정체와 아직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기에 일단 도망치는 것이었다.“살려줘요!”간신히 숨이 붙어 있는 세라는 베르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데려가길 바랐다.그런데 본인만 챙기느라 누구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일단 한 걸음만 뒤처져도 바로 죽기 때문에 누구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아악!”운이 나쁜 무술인들은 대량의 생물체에 공격당해 비명을 지르다 백골이 되어버렸다.그리고 몸에 한두 마리씩 들어간 무술인들은 경련을 일으키다 바로 기절했다.기괴한 생물체는 공격력은 약하지만 일단 몸에 닿으면 방어할 틈도 없이 살해했다.곧 도망친 사람들은 살아남고 늦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전부 죽어버렸다.지금 심해에 염구준이 혼자 남았으니, 반투명한 생물체들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조금만 더!”염구준은 천천히 흐르는 심해의 눈물을 초조하게 바라보면서 여러 번이나 검기를 휘둘러 생물체를 제거했다.아무리 극한 반보천인이라고 해도 이름도 모르는 생물과 억지로 맞서고 싶지 않았다.그러다가 감당하지 못하면 백골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니까.슈슈슝!신비한 생물체가 죽는 족족 살아 있는 생물체들이 계속 헤엄치며 다가왔다.염구준이 검을 휘둘러 죽일 때마다 더 많은 생물들이 나타나는 것 같았다.마치 그의 피와 살을 모조리 먹어 치울 기세였다.그래도 염구준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검을 휘둘러 자신을 보호했다.그때 일부 생물체는 그가 방심한 틈을 타서 몸으로 스며들었다.“이것들이 정말 끈질기네.”염구준은 체내의 불 원소의 힘으로 몸 겉면에 황금색 화염을 형성했다.심해에서 불 원소의 힘은 압박을 받아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생물체를 제거하는 데는 효과가 있었다.치지직!그에게 접근한 생물체는 엄청
베르는 동시에 방어한다면 염구준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하나씩 파괴되는 것을 보고 괴성을 질렀다.“아아아악!”염구준의 검은 여전히 날카롭게 베르의 방어벽까지 쉽게 깨 부셨다.갑자기 대량의 에너지를 사용했더니 구자검이 전처럼 날카롭게 움직이지 않았다.“반격!”이때다 싶어 베르는 다섯 명과 함께 기운을 끌어올려 반격에 나섰다.쿵!맹렬한 공격으로 쌍방은 각자 뒤로 물러서고 그 충격으로 수중에 회오리바람을 만들어 동굴이 심하게 흔들렸다.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미처 방어벽으로 막지 못해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잠수 장비가 깨지고 심해의 수압에 경련을 일으키다 익사했다.그 장면을 본 일부 무술인들은 괜히 끼어들다 죽을까 봐 한참 뒤로 물러섰다.돌기둥에 돌아온 염구준은 아직도 심해의 눈물이 흐르는 것을 발견했다.이렇게 귀한 물건을 낭비할 수 없어, 다른 사람의 산소통을 빼앗아 검으로 자르고는 거기에 담기 시작했다.심해의 눈물이 워낙 밀도가 강해서 산소통의 물이 알아서 흘러나왔다.그때 전체 동굴이 심하게 흔들리더니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아아악!”또 갑작스럽게 닥친 변고에 다들 주변을 경계했다.베르의 표정은 가관이었다.눈앞의 강적도 죽이지 못했는데 또 알 수 없는 위험이 닥쳐서 미치고 팔짝 뛸 것만 같았다.“불꽃으로 비춰!”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몇몇 불꽃이 위를 비추었다.대부분 부하들은 가방에 보물을 하나라도 더 쑤셔 넣으려고 전등이나 불꽃을 만드는 장비를 전부 던졌다.불꽃이 이동할 때마다 주변을 비추었는데 위험한 생물체는 보이지 않았다.대신 아무런 상처도 없는 죽은 시체가 모두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그것을 본 순간 불길한 느낌이 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적의 정체를 모르니 아무리 힘이 있어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응?”염구준도 수상한 기운을 느끼다 갑자기 누군가 숨통이 끊어지는 것을 감지했다.죽은 모습은 전에 보물을 찾으러 왔던 무술인들의 시체와 증상이 똑같았다.‘엄청난 생명이 움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