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 쪽 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고 남설아는 아직 처리해야 할 다른 일들이 많았다.배서준이 무슨 생각을 하든 남설아는 신경 쓰지 않았고 바로 항공권을 예매해 돌아갈 준비를 했다.한편, 배서준은 몇 장의 사진을 전달받았다.사진 속에는 남설아와 강연찬이 함께 호텔로 들어가는 모습, 그리고 남설아가 강연찬을 배웅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손에 들린 사진을 꽉 움켜쥔 채 배서준은 이를 악물었다.지금껏 남설아를 마음에 둔 적도, 눈에 넣은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지금 법적으로 배씨 가문 사모님이었다. 이런 행동은 명백히 부적절했다.게다가 이건 그를 정면으로 모욕하는 짓이었다.“서준아, 왜 그래?”서유라는 그런 배서준의 표정을 보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가와 그의 소매를 살며시 당겼다.“이제 우리도 짐 싸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우연히 배서준 손에 들린 사진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이, 이게 뭐야? 이건... 남 팀장이랑 강 대표님? 왜 저 사람들이 같이 호텔에 간 거야?”“닥쳐.”배서준은 사진을 전부 걷어 들이더니 차가운 시선으로 서유라를 노려봤다.배서준에게 있어 이 일은 말 그대로 치욕이었다.절대 누구에게도 알려선 안 되는 일이었고 그 대상이 서유라라 해도 예외는 없었다.서유라는 놀란 얼굴로 배서준을 바라보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연신 사과했다.“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그녀는 말을 하면서 스스로 뺨을 세게 내리쳤다.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완전히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배서준은 얼른 그녀의 두 손을 붙잡았다.“됐어, 됐어. 너한테 뭐라 한 거 아니야. 잘못한 거 없어. 넌 아무 잘못 없어, 알았지?”“서준아... 나 뭐든 다 할게. 제발... 날 버리지 마. 부탁이야.”서유라는 울먹이며 배서준의 팔에 매달렸고 이내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배서준이 가장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이렇게 절대 자신을 떠나지 않겠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남설아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이를 꽉 물고 배서준을 날카롭게 노려봤다.“남설아, 넌 아직도 배씨 가문 사모님이야. 그런데 밖에서 저렇게 질질 웃으며 남자들한테 들러붙어? 창피한 줄은 알아야지!”배서준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그가 이렇게까지 격하게 분노하는 모습을 본 한원준은 곧바로 앞으로 나섰다.“대표님, 그런 게 아닙니다. 저희가 남 팀장님께 드리려고 깜짝 이벤트 준비한 거였어요. 남 팀장님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계셨어요.”“닥쳐.”배서준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한원준을 노려봤다.그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고 사나웠다.그 기세에 눌린 한원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더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남설아를 염려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진짜 미친 거 아니에요?”남설아는 그의 손을 확 뿌리치고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이건 그냥 회사 동료들하고의 정상적인 인사일 뿐이야. 당신 말처럼 들러붙는다느니 뻔뻔하다느니, 그런 말 나올 일이 아니라고요.”여기는 회사였다.남설아는 이곳에서 더 이상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창피한 꼴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하지만 오늘 배서준은 완전히 이성을 놓은 사람처럼 체면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았다.“남설아, 넌 역시 수를 잘 쓴다니까. 봐, 기술팀 전체가 네 발밑에 꿇고 있잖아. 인정할 수밖에 없지, 대단하긴 해.”“서준 씨, 정신에 문제 있으면 병원 가요. 혹시 돈 없어서 못 가는 거예요?”남설아는 고개를 돌리고는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그때 서유라가 한 발 앞으로 나서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난처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남 팀장, 이제 그만하지. 서준이 이미 다 알아. 남 팀장이랑 강 대표님 사이 일, 더는 숨길 수 없어.”‘강 대표님? 연찬 선배?’그 말을 들은 남설아는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나랑 연찬 선배는 서로 깨끗해. 당신들이랑은 다르다고. 두 사람은 이미
남설아는 눈앞에서 분노로 가득 찬 배서준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처음 기술팀으로 보내겠다고 한 건 당신이었어요. 근데 지금 와서 여기서 이 난리에요? 안 창피해요? 우리 문제를 회사에서 해결하겠다는 거예요?”“남 팀장, 밖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서준이 앞에서 이렇게 떳떳하게 굴 수 있어?”서유라는 조심스럽게 말하면서도 마치 타이르듯이 덧붙였다.“사실 서준이는 그렇게 따지는 사람 아니야. 그냥 사과 한마디면... 용서해줄 수 있어, 그치? 서준아?”남설아는 도무지 이 여자가 무슨 자격으로 앞에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기에 차가운 눈빛으로 서유라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여기서 제일 입 다물어야 할 사람은 바로 그쪽이야.”“너...!”서유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남설아를 노려봤다.남편 앞에서, 그것도 정면에서 자기에게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이 더 통하지 않겠다 판단한 서유라는 곧바로 배서준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그럼 두 사람 얘기해. 난 나갈게. 서준아, 너무 흥분하지 마. 남 팀장도 그냥 기분 좀 상해서 그러는 거니까 천천히 얘기해.”그러고는 한숨을 쉬며 마치 모든 걸 이해하고 감싸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남설아를 보고 조용히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이런 연극을 남설아는 지난 몇 년간 수도 없이 봐왔다.처음에는 억울하고 속이 뒤집혔지만 지금은 그냥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처음엔 괴로웠으나 이제는 우스웠다.“남설아, 이쯤 됐으면 그만해도 되지 않겠어? 언제까지 이딴 식으로 굴 건데?”“혹시 네가 이러면 내가 너한테 관심이나 줄 거라고 생각해? 사랑이라도 하게 될 것 같아?”배서준은 팔짱을 낀 채 위압적인 자세로 남설아를 내려다봤다.그의 눈엔 여전히 과거 자신에게 집착하던 그 못난 여자가 보일 뿐이었다.그저 눈치 빠르고 집요한 여자, 그런데 지금은 거기에 독기까지 더해졌다고 생각했다.그 말에 남설아는 참지 못하고 결국 ‘하하하’ 하고 세 번이나 웃어버렸다.너무
예전 같았으면 배서준이 이렇게 다정하게 말을 하면 남설아는 며칠이고 기분이 좋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의 남설아는 이런 다정함이 그저 역겹기만 했다.가볍게 웃은 남설아는 조용히 손을 뻗어 배서준의 목을 감쌌다.배서준은 그 동작이 자신에게 순순히 응한 것이라 착각해 흐뭇하게 웃었다. 눈빛에도 여유와 자만이 가득했다.“남설아, 넌 역시 똑똑하네. 적당할 때 멈출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거지.”그 순간 남설아는 그의 목을 세차게 물어버렸다. 거의 온몸의 힘을 다 실은 듯 입 안 가득 쇠 맛이 번졌다.고통에 찬 비명을 지른 배서준은 남설아를 거칠게 밀쳐냈다.그런데 남설아의 등 뒤는 기술팀 출입문이었고 그 충격에 유리문이 산산이 부서지며 남설아는 그 조각들 위로 쓰러졌다. 등이 유리에 찔려 피가 흘러내렸다.“남 팀장님!”한원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피 웅덩이에 쓰러진 남설아에게 달려왔다.“괜찮으세요? 대표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기술팀 직원들도 놀라 달려왔고 이내 누군가가 급히 구급차를 불렀다.남설아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을 때 등에선 피가 멈추지 않았고 옷은 이미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배서준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조롱이 담겨 있었고 얼굴엔 싸늘한 웃음이 있었다.남설아가 실려 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배서준은 무의식적으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얼굴은 어둡게 굳어 있었다.마음속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꿈틀거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서준아, 목이 왜 그래? 피나잖아!”“어디 좀 봐!”서유라는 남설아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 없는 듯했다. 대신 배서준의 목에서 피가 나는 걸 보고는 다급히 달려왔다.“설아 씨가 너무 심했어!”“서준아, 우리도 병원 가자!”서유라는 배서준의 팔을 잡고 병원으로 가자며 서둘렀다.두 사람이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배서준은 처음으로 뭔가 몹시 불편한 기분을 느꼈다.예전엔 둘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그런 관계가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요즘 들어 무언가가
지금 강연찬의 마음속은 죄책감과 긴장, 자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혹시라도 남설아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불안하고 너무 마음이 아팠다.남설아는 살짝 강연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그 사람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고 그 순간 가슴 한쪽이 찢어질 듯 아팠다. 억울하고 서러움이 복받쳤다.혼자서 고통과 위험을 감내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강해져야만 했다.하지만 누군가 다가와 걱정해 주고 안아주는 순간, 간신히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마음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이런 감정의 격차에 남설아는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하지만 강연찬을 끌어안고 있자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배나은이 떠나던 날, 남설아는 이미 배서준에 대한 모든 사랑과 기대를 내려놨다.그리고 지금, 어린 시절 좋아했던 사람이 다시 돌아온 이 순간 자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여전히 헤어날 수 없이 사랑하고 있었고 여전히 그 마음을 제어할 수 없었다.“울지 마.”강연찬의 마음은 더더욱 찢어졌다.남설아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그의 얼굴에는 참을 수 없는 아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설아야, 이혼하자. 그 사람은 네가 붙잡을 가치도 없어.”남설아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배서준은 붙잡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하지만 아직 돌려받아야 할 것들이 남아 있었기에 여기서 멈출 수 없었고 끝까지 가야만 했다.“선배, 나 지금은 갈 수 없어.”“내 걸 다 찾아와야 해. 나은이가 그냥 허무하게 죽은 게 되면 안 돼.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해.”남설아는 눈가가 붉게 물든 채 꼭 참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강연찬을 바라봤다.상처 입은 토끼처럼 가엾고 순한 눈빛이었다.강연찬은 원래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모든 결심이 흐트러졌다.답답한 듯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너 진짜 왜 이렇게 고집이 세니. 이제 애까지 있는 사람이 예전보다 더 고집불통이 됐어.”“원래 난 이런 사람이잖아.”
“설아 씨, 주원 그룹은 우리 경쟁사야. 그런 경쟁사 사람이랑 이렇게 가까이 지내는 건 아무래도 좀 곤란하지 않을까?”서유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면서도 마치 다 남설아를 위해서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런 서유라의 모습에 남설아는 씁쓸하게 웃고는 강연찬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그럼 유라 씨는 내 남편이랑 그렇게 가까이 지내는 거 괜찮다고 생각해?”‘남편’이라는 단어에 강연찬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남설아를 바라봤다.눈빛엔 분명한 서운함이 스쳤다.남설아는 그 눈빛을 보며 장난스럽게 윙크를 한번 해 보였다.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강 대표님, 저런 여자 하나 붙잡고 노는 게 재밌어요?”배서준은 냉소를 띤 채 강연찬을 노려보다가 곧 남설아를 향해 시선을 옮기며 날을 세운 말투로 쏘아붙였다.“설마 진짜로 강 대표님이 너한테 관심 있는 줄 아는 거야? 네가 나 배서준의 아내가 아니었으면 강 대표님이 너한테 눈길이나 줬을 것 같아?”“설아가 당신 아내 되기도 전에 난 매일 설아를 봤어요. 아무리 봐도 모자랄 만큼.”강연찬은 망설임 없이 즉시 받아쳤다.애초에 남설아를 먼저 알게 된 건 자기였고 그저 유학을 떠나면서 기회를 놓친 것뿐이다.귀한 사람 데려다 놓고 소중히 여기기는커녕 상처만 주는 배서준 같은 인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지금부터 내 아내랑 이야기 좀 하려고요. 나가요.”배서준은 문을 열고 노골적으로 쫓아냈다.차가운 기운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 무서울 정도였다.하지만 강연찬은 그런 분위기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오히려 배서준 앞에서 태연하게 남설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 먼저 갈게. 맛있는 거 해 올게, 이따가 다시 올게.”“고마워, 선배.”남설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운 듯한 목소리였다.그 둘 사이의 자연스럽고도 다정한 분위기를 보며 배서준은 속이 뒤틀릴 만큼 질투심이 솟구쳤다.강연찬은 마지막으로 배서준을 향해 손을 한 번 들어 인사했다.“배 대표님, 그럼 아내 분
남설아는 눈앞에 서 있는 배서준을 멍하니 바라봤다.지금 왜 저렇게 어정쩡하게 굴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흉터 안 남게, 제일 좋은 의사 붙여줄게.”마침내 배서준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남설아는 비웃음만 나왔고 차갑게 말했다.“그 얘기하려고 미안하단 말 꺼낸 거면 정말 안 해도 돼요.”“너...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배서준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남설아를 바라봤다.예전의 뭐든 순순히 따르던 여자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알 수 없었다.왜 지금의 남설아는 온몸에 가시만 가득한 사람처럼 변해버린 걸까?남설아를 바라보던 배서준의 눈에 불현듯 옛날 모습이 떠올랐다.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던 그 순한 눈동자도 지금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나는 그냥 할아버지가 준 유산 챙겨서 이혼하고 너랑 끝내고 싶을 뿐이에요. 멀리멀리 떠나고 싶은데 그 말 못 알아들어요?”남설아는 조소를 머금은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사실 처음부터 그녀가 원하는 건 명확했다.문제는 배서준이 그걸 내놓기 싫어했던 것뿐이었다.그 말에 배서준은 차갑게 받아쳤다.“그건 절대 불가능하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돈은 줄게. 딸 잃은 거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해. 그 정도면 됐지?”“너...!”남설아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악랄할 줄은 몰랐다.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남설아는 배서준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그러고는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지금 그게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이에요? 내 딸? 나은이는 그럼 당신한텐 딸도 아니에요? 당신 같은 인간은... 짐승보다도 못해요!”“내 딸을 죽인 게 바로 당신이에요. 당신 같은 인간이 무슨 아빠예요? 자격도 없어요! 아빠 자격도, 사람 자격도 없다고요!”남설아는 눈물과 콧물이 뒤섞인 얼굴로 소리쳤다.감정을 완전히 터뜨린 것이다.사실 이런 말을 그녀는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다.하지만 꾹꾹 눌러 참아왔고 꺼낼 기회조차 없었다.그런데 오늘 배서준의 말은 그 모든 인내를
“꺼져!”남설아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비명을 질렀다.배서준이 자기 딸을 ‘불량품’이라고 말한 걸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가 배나은을, 자기 딸을 하나의 ‘제품’처럼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미치게 했다.배서준은 뭔가 더 말하려다 남설아의 등에서 피가 번져 나오는 걸 보게 됐다.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졌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머뭇거리며 손을 뻗어 남설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이건 내 잘못이 아니란 걸.”그 말을 끝으로 그는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가버렸다.“이 개자식아!”남설아는 비명을 지르며 병실 안의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그 소리에 배서준의 발걸음이 문밖에서 잠시 멈췄고 얼굴엔 불쾌한 기색이 짙게 드리워졌다.그는 이내 찡그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진짜, 말이 안 통하는 여자야.”배서준에게 있어 세상에서 중요한 건 오직 ‘자신’뿐이었다.다른 사람은 그저 배경일 뿐이었고 심지어 딸이라는 존재조차도 그러했다.게다가 배나은은 애초에 자신이 원해서 생긴 아이도 아니었다.잠시 후, 강연찬이 도시락을 들고 병실에 들어섰다.그러나 안에 펼쳐진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실은 난장판이었고 남설아는 방 한쪽 구석에 웅크린 채 몸을 잔뜩 말고 있었다.강연찬은 놀란 마음을 부여잡고 도시락을 내려두고는 서둘러 그녀에게 달려갔다.“설아야, 괜찮아?”그녀를 조심스럽게 일으키려던 순간 강연찬의 손에 뭔가 축축한 게 느껴졌다.내려다본 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피였다.“설아야, 너... 왜 그래?”강연찬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급히 방의 조명을 켜자 남설아의 등에 피가 번지고 있는 게 보였다.“괜찮아. 그냥 상처가 조금 벌어진 거야.”남설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눈빛엔 깊은 절망이 담겨 있었다.강연찬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있는 사이, 남설아는 갑자기 그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흐느끼며 말했다.“그 사람... 나은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 죄책감조차 없어. 그 사람
그는 줄곧 자신과 남설아는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 생각해왔지만 지금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강연찬이 회복되자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특히 남설아는 그동안 불안했던 마음을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었다.한편, 멀리 리조트에 머무르고 있던 서유라는 무척 불안하고 초조했다.서도현은 자신이 보낸 사람들이 전부 체포되어 한 명도 빠짐없이 구속되었다는 정보를 이미 입수했다. 남설아가 다치지 않은 것도 모자라 다친 사람마저 회복되었으니 그동안 벌인 모든 일이 헛수고가 되고 만 것이다.“뭐라고? 강연찬이 회복했다고?”서유라의 목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웠다.“그 사람들이 엄청 대단하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여자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남설아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여자잖아. 그런데도 그 여자 하나 못 건드려서 이 지경이 된 거야? 돈을 그렇게 많이 받고는 뭐 하겠다는 거야? 적은 돈이 아니었잖아.”서도현은 배서준의 감시를 피해 몰래 리조트 안으로 숨어들어와 서유라와 만났다.그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누나, 나도 최선을 다했어. 그놈들이 이런 일 하나도 제대로 못 할 만큼 이렇게 쓸모없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 그래도 다행인 건 그놈들이 입이 무지하게 무겁다는 거야. 지금껏 한마디도 안 했어. 나도 계속 지켜볼 거니까 우리한테 불똥이 튀게 두진 않을 거야.”“쓸모없는 놈들! 전부 다 쓸모없어!”서유라는 온몸을 떨며 분노했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어 바닥에 힘껏 내던졌다.“이제 어떡해? 강연찬이 회복됐다고? 혹시 이 일을 남설아한테 말하면 어쩌려고? 남설아가 알게 되면, 나는...”“누나, 진정해봐.”서도현은 급히 달래며 말했다.“강연찬이 회복됐다고 해도 우리가 한 짓이라는 증거는 없어. 게다가 그 킬러들은 내가 따로 구한 사람들이라서 우리랑 직접적인 연결 고리는 없어.”“그래도...”서유라는 여전히 불안했다.“남설아 그 여자는 워낙 교묘해서 무슨 단서라도 찾아내게 되면 우리는 순식간에
“알겠어.” 송우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희가 그렇게 말한다면 따를게.”“우민아, 고마워.” 남설아가 말했다.“네가 얼마나 복수를 원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우리는 냉정해야 해. 감정에 휘둘리면 안 돼.”“응, 알아.” 송우민이 고개를 끄덕였다.“너희 계획에 최선을 다해 도울게.”“좋아.”남설아가 미소 지었다.“우린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야.”세 사람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더 논의한 후, 각자 맡은 일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연회가 끝난 후, 남설아는 사무실로 돌아와 밀린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그때 강연찬이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설아야, 우유 좀 마시고 일찍 쉬어.”강연찬이 우유를 건네며 말했다.“요즘 너무 무리하고 있어. 몸을 챙겨야지.”“응, 고마워, 오빠.”남설아가 우유를 받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오빠도 일찍 쉬어.”“난 안 피곤해.” 강연찬이 말했다.“너 일 마칠 때까지 같이 있어 줄게.”“괜찮아, 오빠. 몸도 아직 완벽히 회복된 건 아니잖아. 푹 쉬는 게 좋아.”남설아가 말했다.“이 서류들은 나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어.”“그래도 옆에 있어 줄게.”강연찬이 말했다.“너도 너무 늦지 않게 마무리하고 쉬어.”“응, 알겠어.”강연찬이 나간 뒤에도 남설아는 계속해서 일을 처리했다.그녀는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더 강해져야만 배서준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나은이를 위해 복수할 수 있었다.깊은 밤이 되어서야 남설아는 마침내 모든 서류를 정리했다.그녀는 기지개를 켜면서 창가로 가서 불빛이 번쩍이는 도시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나은아, 보고 있어?”남설아는 혼잣말처럼 속삭였다.“엄마가 반드시 복수할 거야. 기다려줘.”다음 날, 남설아는 이른 아침부터 회사에 출근했다.그녀는 회사의 핵심 팀을 소집해 다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여러분, 우리 그동안 좋은 성과를 거뒀지만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남설아가 말했다.“배건 그룹은 지금 위기에 처해 있지만
“선배...”남설아는 강연찬을 바라보며 가슴 깊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송우민은 두 사람 사이의 다정한 분위기에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기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편이 허전했다.연회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던 중, 남설아가 잔을 들어 모두와 함께 축하의 건배를 하려는 찰나 강연찬이 재빨리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막았다.“설아야, 요즘 너무 무리했잖아. 술은 좀 줄여.”강연찬의 목소리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남설아는 그의 따뜻한 눈빛을 마주하며 마음이 포근해졌다.하여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대신 주스를 들었다.“알겠어. 선배 말 들을게.”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 광경을 본 송우민은 잔을 들고 조용히 다가왔다.“남설아, 내가 한 잔 올릴게.”송우민은 잔을 들며 말했다.“이번 성공, 정말 축하해.”남설아는 주스를 들고 잔을 맞댔다.“고마워, 우민아.”남설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네 도움이 없었으면 이렇게 빠르게 결과를 얻진 못했을 거야.”“우린 친구잖아. 서로 도와야지.”송우민은 웃으며 말했다.“근데 정말 대단하다. 네가 이렇게 멋진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우민아, 너무 띄우지 마.”남설아는 조금 쑥스러워하며 웃었다.“운이 좋았을 뿐이야.”“그건 아니지.”송우민은 단호히 말했다.“너의 실력, 결단력, 배짱, 모두 내가 본 사람들 중 최고야.”“그 얘기는 그만하고...”남설아는 말을 돌리며 미소 지었다.“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해보자.”“좋아.”송우민이 고개를 끄덕였다.“남설아, 내 생각엔 지금이 기회야. 우리가 배건 그룹을 한 방에 무너뜨리고 배서준한테 확실하게 복수해야 해!”그의 눈빛에는 분노와 집념이 가득했다.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배서준을 단죄하고 싶은 듯했다.그러나 강연찬은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난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왜?”송우민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지금 배건 그룹은 거의 끝장난 상태잖아. 이
“서준아, 나 너무 힘들어...”서유라는 침대에 누운 채 핏기없는 얼굴로 힘없이 중얼거렸다.“유라야, 어디 아파?”깜짝 놀란 배서준은 침대로 다가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온몸이 다 불편하고 아파...”서유라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얼른 의사 부를게!”배서준은 급히 몸을 일으키며 나가려 했다.“안 돼...”하지만 서유라가 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의사 부르지 마. 나 병원 가기 싫어...”“근데 지금 상태가... 그냥 둘 수 없잖아.”배서준은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정말 괜찮아. 그냥... 네가 곁에 있어 주면 돼...”서유라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겠어, 옆에 있을게.”그렇게 배서준은 서유라의 손을 살며시 잡고 말했다.“아무 데도 안 갈게. 여기서 널 지킬 거야.”“응...”서유라는 그의 품에 기대며 살짝 웃었고 그 입가엔 희미하지만 분명한 만족감이 스쳐 지나갔다.배서준은 서유라의 달콤한 말과 애정 어린 행동에 완전히 빠져 있었고 그녀의 진짜 속내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여전히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있었다.한편, 남설아의 세심한 간호 아래 강연찬의 몸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그는 점차 회사 일에도 다시 참여하기 시작했고 남설아와 함께 나란히 전선에 서며 경영에 힘을 보탰다.그 사이 남설아는 잇따라 중요한 프로젝트들을 따내며 사업적으로 완전한 전성기를 맞이했다.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성과가 이어졌고 배건 그룹은 연일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이러한 성과를 기념하고 고생한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남설아는 대규모의 축하 연회를 열기로 했다.연회는 고급 호텔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고 현장은 화려하게 꾸며졌으며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직원들은 모두 정장을 차려입고 참석했고 모두의 얼굴엔 성취와 기쁨이 가득했다.그들은 서로 잔을 부딪치며 축하했고 성공의 기쁨을 나누었다.남설아는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한가운데에 서서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천기준은 조용히 배서준의 현재 상황과 결정을 남설아에게 전했다.“대표님, 이제 배 대표님은 완전히 사방에서 외면당하고 있습니다.”천기준의 말투에는 깊은 체념과 실망이 묻어났다.“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그 여자 곁에 붙어 있으려 하네요.”“후, 그야말로 자업자득이죠.”남설아는 비웃듯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자기가 아직도 예전처럼 뭐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착각하나 본데 지금의 배서준은 그냥 여자한테 정신 팔린 멍청이일 뿐이에요.”“대표님,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천기준이 물었다.“지금처럼 그 사람이 회사에 없는 틈이야말로 우리가 움직일 절호의 기회입니다.”“당연히 병들었을 때는 끝장내는 게 기본이죠.”남설아의 눈빛엔 싸늘한 결의가 번뜩였다.“이젠 그 인간도 잃는 게 뭔지 뼈저리게 느껴봐야 해요.”“역시 대표님답습니다.”천기준이 말했다.“지시하신 대로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좋아요.”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듯 말했다.“기억해요. 이번엔 반드시 속전속결로, 숨 돌릴 틈도 주지 마요.”“네, 대표님!”남설아와 송우민이 손을 잡고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배건 그룹의 위기는 한층 더 깊어졌다.남설아의 회사는 굶주린 늑대처럼 배건 그룹의 시장을 빠르게 잠식했고 원래 배건 그룹 쪽에서 따냈던 주요 프로젝트들마저 차지해버렸다.그 결과, 배건 그룹의 주가는 폭락했고 시가총액은 대폭 줄어들었으며 고객사들은 잇따라 이탈했고 사내 분위기는 혼란과 불안으로 가득 찼다.주주들의 손실은 상상을 초월했고 배서준에 대한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배서준, 진짜 쓸모없네!”“회사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어떻게 대표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지?”“당장 끌어내려야 해!”“그래! 더는 회사 말아먹게 놔두면 안 돼!”분노한 주주들의 외침은 마치 화산처럼 폭발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천기준은 그 상황을 남설아에게 보고했고 남설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내렸다.“계속 감시해요. 그 둘이 무슨 짓을
천기준은 눈앞의 광경을 보며 깊은 무력감에 휩싸였다.소파에 앉은 배서준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고민에 잠겨 있었고 서유라는 그의 곁에 꼭 붙어 앉아 힘없이 기대어 있었다.“대표님, 이대로는 안 됩니다!”천기준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지금 회사 상황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더 늦기 전에 돌아가셔서 직접 수습하셔야 합니다. 이러다 진짜 배건 그룹이 무너집니다!”“근데 유라가 지금 몸이 안 좋아. 어떻게 이럴 때 내가 유라를 혼자 두고 가겠어.”배서준의 말투에는 깊은 피로와 한숨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대표님...”천기준이 설득을 이어가려던 순간, 서유라가 조용히 말을 가로막았다.“서준아, 천 비서님 탓하지 마.”서유라의 목소리는 마치 곧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나약했다.“회사 일이 중요한 건 나도 알아. 그냥 돌아가. 난 괜찮아.”“유라야, 무슨 소리야.”배서준은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제일 중요한 건 네 건강이야. 내가 어떻게 널 놔두고 가.”“그래도...”서유라의 눈가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내가 네 일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미안해.”“바보야, 너 하나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어.”배서준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회사 일은 내가 방법을 찾을게.”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천기준은 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정말 기가 막히네. 내가 본 배 대표님 중에 제일 한심한 버전이야. 예전엔 그렇게 단호하고 냉정했던 사람이 이젠 여자가 곁에만 있으면 정신줄을 놓고 있잖아.’“대표님, 진짜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천기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주주들은 이미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어요. 계속 이렇게 계시면 정말로 해임당합니다!”“알아, 나도 알아.”배서준은 초조한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그렇지만 유라가...”“서준아, 돌아가.”서유라가 조용히 말했다.“나 혼자서도 괜찮아.”“유라야, 너 지금...”배서준은 놀란 눈으로 서유라를 바라봤다.“정말
“네.”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명심해요. 이 일은 최대한 시끄럽게 만들어요. 배서준이 모두의 표적이 되도록 말이에요.”“알겠습니다, 대표님. 바로 처리하겠습니다.”천기준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남설아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싸늘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봤다.‘배서준, 당신이 의리를 저버렸으니 나도 더는 자비를 베풀지 않을 거야.’곧이어 배서준이 리조트에서 서유라와 밀회를 즐기고 있다는 소문이 각종 언론을 통해 퍼지기 시작했다.여론은 순식간에 들끓었고 배서준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무능하다’, ‘책임감 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다.“배서준, 진짜 너무하네!”“회사는 지금 무너지고 있는데 밖에서 여자나 만나고 앉았어?”“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표 자리에 앉혔는지 이해가 안 가.”“저 사람한테 회사를 맡긴 게 큰 실수였지.”“이참에 그냥 물러나게 해야 돼!”결국 회사는 긴급 주주총회를 소집했다.얼마 전, 배서준이 자신의 자금을 담보로 위기를 넘기겠다고 한 뒤 감쪽같이 사라졌고,오히려 남설아가 한발 물러나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간신히 버텨온 상황이었다.하지만 정작 의사결정을 할 실권자는 자리에 없고 남은 이사들은 완전한 권한도 없는 상태라 회사 운영은 갈수록 마비되어가고 있었다.거기에 이번 스캔들까지 터지자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됐다.“이게 지금 어느 땐데 여자를 챙겨?! 본인 위치도 잊었나?!”“천 비서님, 배 대표님 떠나기 전에 천 비서님한텐 아무 말도 안 하고 갔어요?”천기준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사실 함께 일한 지 오래됐지만 배서준이 모든 걸 공유하진 않았다.“지금 당장 리조트로 가서 배 대표님 데려와요!”한 이사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든 끌고 와야 해요. 회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요!”“네, 이사님. 바로 다녀오겠습니다.”천기준은 피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답했다.‘정신적으로 남 대표님한테 매일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 두 사람을 만나러 내가 가야 한다고? 이게 대체 무
“서준아, 제발 이번만은 내 말 들어줘, 응? 그냥 나를 위해서 우리 미래를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잠깐이라도 푹 쉬면 안 돼?”서유라는 눈물을 글썽이며 배서준을 올려다봤다.그 애처로운 눈빛에 배서준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렸다.“알겠어, 네 말대로 할게.”결국 배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서유라는 곧장 환하게 웃으며 배서준을 꼭 껴안았다.“역시 나를 제일 아껴주는 사람은 서준이 너야.”배서준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안아주었지만 눈빛은 복잡하기만 했다.회사의 상황은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남설아와 송우민의 공격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고 배건 그룹의 주가는 연일 하락 중이었다.시장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고 내부는 불안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대로라면 배건 그룹은 정말 그의 손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서유라의 모습을 보면 차마 그녀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배서준의 가슴속은 끝없는 갈등과 번민으로 뒤엉켰고 도대체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었다.그때, 그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이번엔 천기준이었다.배서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배 대표님, 도대체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천기준의 목소리엔 조급함과 절박함이 가득 묻어났다.“지금 회사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에요. 주주들도 다 대표님만 기다리고 있습니다!”“나, 나도 지금...”배서준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서유라가 손을 뻗어 전화기를 낚아챘다.한편, 천기준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통화 종료’ 소리에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그는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리찍을 듯 내려놓으며 이를 악물었다.“이 서유라란 여자는 정말 재앙이라니까!”천기준은 이를 갈듯 말했다.“배 대표님도 왜 저 여자 말만 듣는 건지...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모르나?”곁에 있던 다른 비서도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천 비서님, 우리 이대로 괜찮을까요? 주주들한테 뭐라고 설명해야 하죠?”“설명할 방법이 어딨어요...”천기준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
“네, 송 대표님!”모두가 힘찬 목소리로 외쳤고 회의실 안은 결의에 찬 열기로 가득 찼다.송우민의 지휘 아래 남설아의 회사는 굶주린 늑대처럼 배건 그룹의 시장을 거침없이 잠식해 들어갔다.배건 그룹의 주가는 연일 하락했고 시가총액은 크게 줄어들며 내부 분위기는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흩어진 조직력에 동요하는 임직원들 사이로 불만이 번졌고 결국 주주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배서준에게 줄줄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배 대표님, 도대체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한 주주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이 완전히 개판이에요! 더 늦으면 정말 끝장납니다!”“맞아요, 대표님! 이대로 가다간 정말 회복 불가능합니다!”또 다른 주주도 강하게 덧붙였다.“지금 당장 돌아와서 진두지휘하셔야 합니다!”끊임없이 쏟아지는 전화에 배서준은 머리를 싸매고 이마를 짚었다.그 역시 당장 회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문제는 서유라였다.그녀는 절대 그를 보내려 하지 않았다.“서준아, 가지 마...”서유라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배서준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나 너무 힘들어. 옆에 있어 줘야 버틸 수 있어.”“유라야, 네가 힘든 거 알아. 하지만 회사도 지금...”배서준은 난처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몰라! 나한테 중요한 건 네가 곁에 있어 주는 거야! 너 없이 나는 단 하루도 못 버텨!”서유라는 울먹이며 소리를 질렀다.“그런 말 하지 마.”배서준은 가슴 아프다는 듯 그녀를 껴안았다.“널 내버려 두고 갈 수 없지. 하지만 회사 쪽 상황도 정말 더는 미룰 수가 없어.”“결국 날 버릴 거지? 날 두고 가겠다는 거잖아!”서유라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며 말했다.“내 몸은 누가 챙겨? 나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해... 넌 가면 안 돼!”“유라야, 그러지 마.”결국 배서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좋아, 당분간은 여기 있을게. 회사 일은 전화랑 화상회의로 처리할 테니까 괜찮지?”“진짜지?”서유라는 눈물로 젖은 눈을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