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라는 소파로 걸어가 앉더니 천천히 물 한 잔을 따라 마신 뒤에야 입을 열었다.“그 여자가 수작을 부리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있어야지. 이명수는 이미 떠났고 증거도 없어. 그 여자 혼자서 뭘 어쩌겠어?”“말은 맞는데 그래도 난 좀 불안해. 남설아 쪽을 계속 감시하는 게 어때? 요즘 무슨 수작 부리는지 지켜보자고.”서도현은 조심스럽게 제안했지만, 여전히 조심해야 한다는 태도였다.서유라는 물잔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저었다.“감시해서 뭐 해? 지금쯤이면 남설아는 이명수 찾느라 정신없을 거야. 감시해봤자 소득도 없고 인력 낭비야.”“그럼 어떡해? 아무 대책도 없이 남설아가 들이닥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라고?”서도현은 조급한 듯 목소리가 높아졌다.서유라는 고개를 들어 서도현을 한번 째려보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렇게 흥분해? 나도 지금 생각하고 있잖아.”서도현은 그 눈빛에 움찔해 입을 닫았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서유라는 문득 입을 열었다.“도현아, 만약 우리가 남설아한테 더 큰 문제가 생긴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면? 그럼 걔가 이명수 쪽 신경 쓸 겨를이 없지 않을까?”“더 큰 문제?”서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누나, 무슨 말이야?”서유라의 눈빛에 음산한 기운이 스쳤고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그 여자가 이명수를 붙잡겠다고 저리도 애쓰는데 우리가 다른 문제를 하나 만들어주면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잖아.”“다른 문제라니? 누나, 빙빙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해봐. 궁금해서 못 견디겠단 말이야.”서도현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재촉했다.서유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서도현 앞에 섰고 목소리를 낮췄다.“도현아, 내가 만약 납치당하면 배서준은 어떻게 나올 것 같아?”“납, 납치?”서도현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제 귀를 의심했다.“누나, 미쳤어? 납치라니, 납치가 장난이야?”그러나 서유라는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미
“멍청한 놈!”서유라는 이를 악물며 서도현을 향해 쏘아붙였다.“10억이 뭐 대단한 줄 알아? 배씨 가문의 재산에 비하면 그깟 10억은 새 발의 피야. 이명수가 정말 우리를 뜯어먹을 생각이면 이건 시작일 뿐이야.”서도현은 서유라의 호통에 말문이 막혀 얼굴이 새하얘졌다.그제야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그럼 이제 어떡하지?”서도현은 당황해 목소리마저 떨렸다.“누나, 우리 이제 어떡해? 이명수가 배신해서 우릴 밀고라도 하면...”“닥쳐!”서유라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 말을 끊었다.“지금 와서 허둥대서 뭐가 달라져? 아직 최악의 상황까지 간 건 아니야.”그녀는 마음속으로 계속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남설아가 그렇게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하지만 요즘 배서준이 자신에게 점점 더 의지하고 더욱 신뢰를 보내고 있는 것을 느낄수록 서유라는 마음이 조금씩 놓이기도 했다.그 시각, 배서준은 사무실에서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남설아, 또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그는 보고서에 나온 내용을 확인하며 얼굴을 굳혔다.보고서에는 남설아, 강연찬, 그리고 송우민이 ‘이명수’라는 정신과 의사를 수소문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배서준은 물론 이명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그리고 남설아가 그를 찾는 이유도 짐작하고 있었다.“자기 목적을 위해서라면 별짓을 다 하네.”배서준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의사를 괴롭히고 헛소문까지 퍼뜨리고. 남설아, 넌 갈수록 역겨워진다.”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오르며 가슴까지 답답해져 왔다.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서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곧바로 연결되었고 서유라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준아, 무슨 일이야?”“유라야, 지금 어디야?”배서준은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며 화가 났다는 것을 들키지 않도록 조심했다.“집이야. 왜 그래?”서유라의 목소리에는 살짝 의아함이 섞여 있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닌가 해서.”배
“좋아, 민아. 우리 각자 움직이자.”남설아는 고마운 눈빛으로 송우민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번엔 정말 고마워.”“무슨 고마워야. 우린 동맹이잖아!”송우민은 웃으며 남설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게다가 나도 서유라 남매가 설치는 꼴 더는 못 보겠어. 꼭 잡아서 죗값 치르게 해야지!.”송우민과 강연찬이 자신을 위해 이리저리 발로 뛰는 모습을 보며 남설아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따뜻한 감정이 솟구쳤다.이런 순간에 진짜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 절실히 느껴졌다.한편, 서도현은 서유라의 방에서 들뜬 표정으로 팔을 휘저으며 기세등등하게 떠들고 있었다.“누나, 내가 뭐랬어? 내 계획 완벽하다고 했지? 그 돌팔이 이명수, 진짜 제대로 튄 모양이야.”서도현은 얼굴까지 벌게지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남설아 쟤네 지금쯤 완전 허탕 치고 미쳐 날뛰고 있을걸? 하하하!”서유라는 화장대 앞에 앉아 손에 핸드크림을 바르면서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은 차갑고 매서웠다.“시끄러워. 뭐가 그렇게 좋아서 들떠?”서유라는 서도현을 힐끔 보며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누나, 기분 안 좋아? 우리 이번에 완전 깔끔하게 문제 해결한 거잖아. 남설아 쟤네가 아무리 똑똑해도 이명수 못 찾는다고. 증인도 없는데 우리가 무슨 죄야?”서도현은 승리에 도취해 있었고 누나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래? 너는 진짜 걔네가 이명수를 못 찾을 거라고 확신해?”서유라는 핸드크림을 내려놓고 돌아서더니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었다.“당연하지!”서도현은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자신 있게 말했다.“이명수는 이미 출국했어. 남설아가 하늘을 날아다녀도 절대 못 찾아.”“출국했다고?”서유라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묘한 어조로 물었다.“그거 확실해? 이명수가 정말 출국한 거 맞아?”서도현은 순간 움찔하며 말문이 막혔다.“변호사가 그렇게 말했어. 이명수도 직접 자기 입으로 피신하겠다고 했고...”“변호사 말이면 다 믿어? 이명수가 그렇다니까
“누나, 이명수가 출국하겠다고 했어. 절대 우리한테 폐를 끼치지 않는다고 했어!”서도현이 전화를 끊자마자 들뜬 목소리로 서유라에게 달려왔다.서유라는 그 말을 듣고서야 긴장했던 얼굴이 조금 풀어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됐어. 이명수만 나가면 우리도 안전한 거야.”그녀는 속삭이듯 중얼거렸지만, 마음 한구석의 불안감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왠지 모든 일이 그렇게 순조롭게 끝날 리 없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한편, 남설아와 강연찬이 이명수의 진료소에 도착했을 때 철문은 차갑게 닫혀 있었고 문 앞에는 ‘양도 예정’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의원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약장이 쓰러져 있었고 바닥에는 찢어진 문서들이 흩어져 있었으며 공기 중에는 희미한 소독약 냄새와 함께 급히 떠난 흔적이 남아 있었다.“완전히 도망간 거네?”송우민은 주위를 둘러보며 당황스러움과 불쾌감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우리가 한발 늦었어.”남설아는 약장 근처로 다가가 쪼그려 앉으며 바닥에 떨어진 종잇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이건 뭐야?”송우민도 다가와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들여다봤다.“오래된 문서 조각이야. 별로 쓸모도 없어 보여. 일부러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려고 버린 걸지도 몰라.”남설아는 종잇조각을 바닥에 다시 내려놓고 일어나 주변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살폈다.“이명수, 참 빠르기도 하네.”송우민은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완전 허탕 쳤네.”진료소는 완전히 뒤집혀 있었고 중요한 것들은 이명수가 이미 가지고 떠난 듯했다.그리고 일부러 흘린 듯한 오래된 문서 조각들은 그들의 수사를 교란하려는 눈속임에 가까웠다.“즉흥적인 게 아니라 미리 계획하고 도망친 것 같아.”남설아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계획적이라고?”송우민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그럼 애초부터 도망갈 생각이었다는 거야?”“그럴 가능성이 커.”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굳혔다.“그리고 누군가가 이명수에게 정보를 흘렸을지도 몰라.”“정보를?”송우민은
남설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닐 거야. 그들이 이명수를 미리 옮길 능력이 있었으면 지금처럼 급하게 돈을 보내진 않았겠지.”“그럼 이명수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송우민은 점점 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계속 찾아. 내가 못 믿겠다는 건 그 사람이 그렇게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는 거야.”남설아의 눈빛은 단호했고 말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한편, 서도현 역시 남설아와 강연찬이 이명수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뭐? 걔네가 지금 이명수 같은 허접한 의사를 찾고 있다고?”부하의 보고를 들은 서도현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누나, 큰일이야! 남설아 쪽에서 이명수를 찾고 있는 것 같아!”서도현은 서유라에게 달려가며 다급하게 말했다.“뭐라고?”서유라는 화장 붓을 떨어뜨릴 뻔하며 얼굴이 굳어졌다.“걔네가 어떻게 이명수를 떠올릴 수 있었지?”서유라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섞여 있었다.“나도 몰라. 뭔가 눈치를 챘나 봐.”서도현은 초조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누나, 지금 어떻게 해야 해? 이명수가 잡히면 우리 끝이야!”서유라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남설아가 이렇게 빠르게 정곡을 찔러올 줄은 몰랐다.“안 돼. 절대로 이명수를 그들 손에 넘겨선 안 돼.”서유라는 이를 악물며 차가운 눈빛을 드러냈다.“도현아, 빨리 변호사한테 연락해.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봐!”서도현은 즉시 휴대폰을 꺼내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변호사는 서도현의 설명을 듣고 잠시 침묵한 후 조심스레 조언했다.“서도현 씨, 지금 상황이 급박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명수를 최대한 빠르게 외국으로 내보내는 겁니다. 멀리, 아주 멀리 말입니다.”“외국으로 보낸다고요?”서도현은 잠시 멍해졌지만, 곧 물었다.“근데 그 사람이 말을 들을까요? 도망가긴 해도 자기 맘대로 할 수도 있잖아요.”“돈이면 해결됩니다.”변호사의 목소리는 침착했다.“이명수에게 말하세요. 해외로 나가 잠시 몸을 숨긴다면 더 많은 돈을 지급하겠다고. 그리고 이후
“누나, 돈은?” 이명수의 전화를 끊자마자 서도현이 마치 재촉하듯 서유라 앞에 들이닥쳤다.목소리는 조급했고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10만 원도 아니고 10억이야. 어디 땅 파면 나오는 돈인 줄 알아?”서유라는 은행 이체 화면을 보며 속이 상한 듯 불쾌하게 말했다.10억, 말 그대로 순식간에 사라진 돈이었다.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누나, 지금 돈 아까워할 때야? 그 자식이 뒤집으면 우린 끝이야. 10억이 문제가 아니라 100억을 줘도 못 막아!”서도현은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그는 절대 감옥에 가고 싶지 않았고 모든 걸 잃는 것도 원치 않았다.“알았어, 알았다고! 그만 좀 닦달해!”서유라는 짜증 섞인 말투로 대꾸하면서도 손가락은 계속 화면을 조작하고 있었다.아깝긴 해도 상황은 이해하고 있었다.돈으로 재앙을 막는다, 지금은 그렇게 자신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빠르게 송금 절차를 마친 서유라는 송금 완료 화면을 캡처해 이명수에게 전송했다.“이 정도면 됐지?”그녀는 휴대폰을 옆으로 툭 던지며 짜증스럽게 말했다.“진짜 이걸로 끝나야 할 텐데.”서도현은 여전히 찜찜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서유라의 휴대폰이 울렸다.이명수에게서 온 답장이었다.[서유라 씨, 안심하세요. 돈은 잘 받았습니다. 바로 자리를 정리하고 떠날 예정입니다.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이 문자를 본 서유라는 비로소 긴장을 조금 풀었다. 오랫동안 조여 있던 신경이 겨우 느슨해졌다.“겨우 처리됐네.”그녀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피로를 느꼈다.“그 의사 놈, 진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네.”서도현은 여전히 투덜거렸고 그 불신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됐어, 이제 와서 뭐 어쩌겠어. 돈은 이미 보냈고 후회해도 소용없어.”서유라는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이제 중요한 건 다음 수를 어떻게 둘지가 문제야.”한편, 카페 안.남설아는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이명수가 도망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