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최악의 폭군 연산과 희대의 요부 장녹수 사이 태어난 유일한 핏줄, 영수가 성장하여 살아가는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 반정 성공 후, 연산과 장녹수는 결국 목숨을 잃었지만 영수는 한 나인의 도움으로 궁을 빠져나와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하지만 신분도 이름도 지워야 살 수 있는 기구한 운명, 그녀는 어떻게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사랑을 얻고 한 여자로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 나갈까? 갓난아이의 영수에서 당당한 여인으로 성장하는 영수의 일대기를 뒤쫓아 가는 로멘스 스토리
View More1506년 가을,
임금이 폐위되던 밤, 그의 핏줄도 함께 사라져야 했다.
후.후. 거친 숨결이 턱밑까지 올라왔다.
최나인은 생전 이토록 큰 불을 본적이 없었다. 자시인데도 번지는 불길에 사방은 대낮처럼 빛났고 뒤엉킨 고함소리에 궁궐은 쑥대밭이었다.
자선당(연산군의 침소)을 벗어나니 다행히도 금군의 고함소리는 조금씩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강보에 싸인 채 겁에 질려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는 아이를 안고 뛰다보니 더 이상 맏다리(허벅지)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조금만 더 제발, 조금만 더...’
그때였다.
“거기 누구냐?”
수색 중에 있던 금군 하나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최나인 쪽으로 다가왔다. 최나인은 잽싸게 행각 창고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 행각까지는 아직 불길이 번지지 않았다. 창고 안은 어둡고 고요했다. 지난 번 행각을 증축한 이후로 버려졌던 창고였던 터에 곰팡이 냄새와 쥐똥 썩는 냄새가 섞여 자연스럽게 토악질이 나왔다.
‘참아야 해’
최나인은 죽을 힘을 다해 숨을 참고 서서히 내쉬었다. 거칠게 터져 나오려는 숨을 억누르며 가마니 사이로 몸을 슬며시 밀어 넣었다. 손끝에 닿는 볏짚이 바스락거릴 때마다 심장이 튀어 나올 것 같았다.
횃불을 든 군졸 하나가 천천히 다가왔다.
서벅 서벅
‘아 이렇게 끝나는구나.’
모든 걸 포기하려는 순간, 창고 바깥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뭐하는 게냐?”
“예, 나으리, 창고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 듯하여……."
바로 지척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 탄지간의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품 안의 아이가 미세하게 몸을 뒤척였다. 잠결에 무언가 불편한지, 아이의 작은 입술이 달싹거리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실룩였다.
‘안 돼, 제발…….’
“아무도 없지 않느냐? 자 빨리.. 시간이 없다. 주상을 추포하는 것이 먼저다. 자선당으로 빨리 가자!”
“예!”
두 횃불을 든 금군이 사라지자 창고는 다시 어둠과 정적으로 뒤덮였다.
“하아.”
이제야 최나인은 숨이 쉬어졌다.
“유모.. 엄마”
이제 몇마디 말을 떼기 시작한 아직 젖먹이의 아이가 입을 열였다.
“쉿, 애기씨 쉬………잇”
최나인은 불과 일각 전을 떠올렸다.
“최나인! 어서! 아이를 어서!”
장녹수가 급하게 최나인을 불렀다. 장녹수의 고고하고 단정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옷고름조차 풀어진 채, 절박하게 아이를 내밀었다.
“이 아이를 살려다오. 이 아이는 꼭 살아야 하느니라”
대답할 틈도 없이 장녹수는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1년 전,
견습 나인이던 최나인이 크게 화를 입을 뻔한 적이 있었다.
“짝!”
최나인은 얼굴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고통이었다.
“악”
“네년이 내 비녀를 훔친 것이 확실 하렸다. 입궁할 때 우리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증표로 주신 소중한 비녀다. 목숨 만큼 내가 아끼는 그런 비녀인데 네가 방을 청소한 이후로 보이지를 않는다. 어디에 숨겼느냐?”
“마마. 저는 정말 기필코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년이 그래도 발뺌을 하는구나. 그래 어디 보자꾸나.”
“사월아!”
“예 마마”
“가서 작두를 가져와라. 내 이년이 진실을 고할 때 까지 손가락을 하나 씩 잘라낼 것이야”
“마마 제발 살려 주십시오. 믿어 주십시오! 저는 정말 그 비녀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작두를 대령하자 최나인은 얼굴이 백지장같이 질려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었다.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곧 손가락에 피가 솓구칠 것 같은 공포심이 짓눌렀다.
그때였다.
“웬 소란이냐?”
장녹수가 나인 둘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장숙원이 여기는 무슨 일이오? 그냥 지나가세요.”
“귀인 마마 궁궐 안에서 대체 이 무슨 해괴한 일입니까? 작두까지 대령해서요.”
“장숙원이 끼어 들 일이 아니니 그냥 가세요.”
“아니 지금 나인 하나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울고 있지 않습니까? 내명부 일을 이렇게 사사로운 감정으로 처리하는 걸 주상께서 아시면 귀인마마도 좋지 않으실 텐데요.”
장녹수의 엄포에 홍귀인은 한발 물러섰다.
“내가 입궐할 때 사가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비녀가 있었소. 그런데 이 아이가 내 침소를 청소한 후 그 비녀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아이를 추궁하고 있었습니다.”
“마마. 절대 아닙니다. 저는 그 비녀를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미시 경 방안을 청소하고 나왔을 뿐인데 비녀는 제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귀인마마 이 아이가 이리도 아니라고 결백을 주장하는데 한 번 더 살펴 보심 어떨지요?”
“장숙원! 내가 생사람을 지금 잡고 있다는 뜻이오?”
“때로는 일이 희안하게 꼬이다가도 쉽게 풀리는 법입니다. 제가 마침 데리고 온 아이들이 있으니 이 아이들에게 방을 한 번만 살펴 보라고 하면 어떨지요?”
“흥! 그리 하시오. 보나마나일 께요.!”
장녹수의 나인 둘이 귀인의 방으로 들어가 잠시 후 은색 비녀를 가지고 나왔다.
“마마 혹시 찾는 것이 이것인지요?”
“오 그래 이거다. 맞다! 하. 정말 다행이야 이게 어디 있었느냐?”
“예, 병풍 끝자락 바닥에 끼어 있었사옵니다.”
“귀인 마마 다행이십니다.”
귀인은 장녹수에게 체면이 깎인 것이 마음이 상하여 인사도 받지 않고 가버렸다
장녹수는 독하고 남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비정한 여우였을 지언정, 최나인에게는 너무나도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 일 이후로 최나인은 장녹수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녀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살아야 했다.
“불이야! 불이야!”
최나인의 삭신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녀가 강보에 싸인 아이를 품에 안았다.
‘ 이 아이를 살려야 한다.’
…………………………………………..
최나인을 쫓던 금군이 다행히도 자선당 쪽으로 물러난 틈을 타, 최나인은 창고를 얼른 빠져나왔다. 몇 걸음도 채 달리지 않았을 때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꺄악”
“드디어 찾았다. 이 여자가 장녹수다. 얼른 포박하라.”
“놓아라! 감히 어디에 손을 대는 것이냐? 이 손 놓지 못하겠느냐?”
“당장 포박하지 않고 뭐하는 것이냐?”
“내 너희들을 가만 둘 성 싶으냐?”
“이 여자의 입을 쳐라”
“윽”
이제 장녹수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처해 있었다. 최나인은 직감적으로 장녹수를 생전에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애기씨를 살려야 한다. 꼭!’
생각이 이에 미치자 발걸음이 저절로 빠르게 움직였다.
어린 시절 세답나인(빨래담당궁녀)일 때부터 사용했던 궐밖으로 빠져나가는 비밀 통로에 다다랐다. 장녹수의 내밀한 심부름을 수행할 때 사용하던 그 곳이었다. 흙벽처럼 위장된 부분을 발로 두어 번 차니 바로 헐리면서 성인 한 명이 드나들 만한 틈이 생겼다. 문제는 아이였다. 강보의 끈을 더 강하게 동여매고 우선 그 구멍을 통해 바깥으로 아이를 힘껏 밀어 넣었다.
“으앙”
불편함을 느꼈는지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최나인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애기씨 쉬잇. 제발.. 좀만 참으세요.”
최나인은 있는 힘껏 두어 번 강보를 바깥쪽으로 밀어낸 후 자신도 몸을 그 구멍에 들이 밀었다.
“앗”
몸을 엎드린 채 빠져나오다가 뾰족한 돌부리에 팔꿈치가 깊게 긁혔다. 지릿한 통증이 팔과 어깨를 타고 얼굴까지 화끈거렸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최나인은 다시 아이를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최대한 궁에서 멀리 벗어나야 했다.
‘애기씨 조금만 참으면 돼요. 조금만…’
처서가 끝나고도 이레나 지나 밤에는 이제 입에서 입김이 나올 정도로 차가운 날씨였으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더 이상 뛸 수가 없어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궁궐의 소리는 이제 전혀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집에서 새어 나오는 듯한 호롱불 빛이 보였다.
‘휴. 살았구나.’
그때까지 아무도 몰랐다. 잊혀져야 살 수 있는 연산의 여식이 도덕과 정의의 이름으로 세상에 다시 불려 내어지고 만다는 것을.
“마님 승철이옵니다.”“그래 승철아, 알아낸 것이 있느냐?”“예, 마부의 집은 이미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웃의 말로는 이사한 지 한 석달 되었다 하옵니다. 아마 마부가 밀반출한 화약을 싣고 떠난 직후인 듯 하옵니다.”“그렇구나. 그래 혹시 어디로 이사를 갔다더냐?”“그건 이웃도 모른다고 하옵니다. 갑자기 소문도 없이 이사를 갔다 하옵니다. 하온데…”영수는 귀를 쫑긋 세웠다.“마님… 화약 인계를 맡았던 군관이 있었습니다. 그 자가 며칠 전 병조 좌랑으로 승진했다 합니다.”“화약이 사라졌는데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말이냐.”“오히려 공을 세웠다 하더이다. 변방 화약 유통 체계를 정비했다는 명목이라 합니다.”“그래 승철아 네가 이번에도 크게 수고를 했구나. 계속 사라진 마부 주변을 잘 감시하거라. 분명히 단서가 더 있을 것이다.”“예 마님.”‘분명 화약을 내주고 승진한 사람은 필시 뭔가가 있을 것이야. 반드시 알아내야 겠다!’영수는 다짐을 하고 짐을 꾸렸다.………………………..“병조좌랑! 자제가 이번에 큰 공을 세웠다지?”“아닙니다 대감! 이렇게 불러 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그래 술 한잔 하세나. 자 받게”“예, 대감!”“마지막 뒤처리까지 잘 부탁하네 흔적이 남으면 나중에 귀찮아 질걸세. 그날 기록은 남길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예 대감, 명심하겠사옵니다.”“자네가 내 사람이 되어 참으로 기쁘이. 자. 한 잔 더 받게”병조판서의 집에서 나온 병조좌랑은 골목에서 쓰개치마를 입고 갑자기 나타난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영수였다.“아이고 깜짝이냐 뭐냐! 이런.”“나으리, 어디를 다녀 오시는지요?”“넌 누구냐? 네따위가 뭐길래 어디서 왔는지 묻는 게냐? 썩 물러나라.”“나으리, 제가 병판대감 댁에서 나으리가 나오는 걸 이 두 눈으로 똑바로 보았사옵니다. 이번에 승진하셨다지요?”“넌 도대체 누구냐? 누구길래 내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것이냐?”다소 겁에 질린 듯한 좌랑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저는 지난 화약 밀
봉분에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아 붉은 채로 있었다.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열어라. 관에서 나왔다.”영수는 아이를 안은 채 문 앞으로 걸어 나갔다. 최나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따라 나섰다.문이 열리자, 푸른 도포를 입은 군관 둘과 아전 하나가 서 있었다.“이 집에 거하는 한수의 처가 누구냐.”“접니다.”영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아전이 서책을 펼쳤다.“한수는 국경 인근에서 불온한 물건을 나른 혐의가 있다.죽었다 하나, 사실 여부를 밝히기 위해 가산과 호구를 조사할 것이다.”최나인이 분개했다.“사람이 죽은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이러시는 겝니까?”영수가 조용히 손을 들어 막았다.“무슨 물건이라 하셨습니까.”군관이 영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관의 화약이다.”아이를 안은 영수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증좌가 있습니까?”잠시 공기가 멈췄다.아전이 눈을 치켜올렸다.“지금 따지는 것이냐.”“따지는 것이 아닙니다.”영수의 눈빛이 서늘해졌다.“억울한 자의 집을 뒤지려면, 그에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할 터.남편은 이미 숨을 거두었습니다.이미 눈을 감은 자에게 죄를 더 씌우는 것이 관의 도리입니까.”군관의 눈이 가늘어졌다.“말조심하라.”“저는 조심하고 있습니다.”영수는 아이를 고쳐 안았다.“호구를 보시려거든 보십시오.그러나 남편의 죽음을 역적으로 꾸미려 하신다면… 그 일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그 말에 군관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연산의 피.그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집 안을 훑던 아전이 낮게 속삭였다.“이 아이도 기록에 올려야겠군.”그 순간, 영수의 눈이 달라졌다.슬픔은 사라지고, 다른 것이 자리 잡았다.“아이의 이름은 제 입으로 올릴 것입니다.”조용했지만 물러섬이 없었다.군관은 한참을 바라보다 서책을 덮었다.“오늘은 기록만 하겠다. 그러나 다시 부를 것이다.”문이 닫혔다.잠시 후, 최나인이 속삭였다.“마님… 어찌 그리 담담하십니까.”영수는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
대청 마루에는 밤마다 서늘한 바람이 드나들었다. 한은 멍하니 초점을 잃은 채 앉아 있었다. 한은 말이 없어졌고 점점 야위어 갔다. 최나인은 한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 했고 영수는 소리를 내지 못한 채 가슴으로 울었다.“부인”“예, 서방님”“우리 아가를 이리 주시오. 한 번 안고 싶소.”“예”이제 제법 무거워 진 아이를 한의 품에 안겼다.“이 아비를 용서해 다오.”아이를 안고서 한참을 가만히 있자 아이는 답답한지 몸을 비틀었다. 한은 아이를 다시 영수에게 건네 주었다“서방님…?”다음 날 아침 영수가 그의 손을 흔들었다.“서방님, 제발… 눈 좀 떠 보세요.”대답은 없었다.눈은 반쯤 열린 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아이는 어미 옆에서 무슨 일인지 모른채 몸을 좌우로 한들고 있었다.영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한의 손을 가슴에 끌어안았다.그 손이,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 영수는 아이를 안고 동산에 올랐다. 강아지풀이 바람에 흔들리던 언덕이었다.혼인을 약조하던 날 강아지풀이 바람에 너풀 거리던 그곳, 길을 떠나던 날,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던 그곳, 영수에게는 추억이 많은 그 동산을 한을 묻고 난 뒤 다시 올랐다. 차가운 꽃샘바람이 가슴을 꿰뚫었다. 그렇게 영수는 한을 가슴에 묻었다.‘아가야 아버지는 널 정말 사랑했단다. 그리고 하늘에서도 늘 너를 지켜 주실 거야.’영수는 한을 목놓아 불렀다. 그러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나무 숲은 빽빽하게 울창하여 낮인데도 마치 밤처럼 느껴졌다. 새 지저귐이 나무 사이에 울려 퍼져 메아리로 갈라졌다.“이제 이 숲만 빠져나가면 마지막 성문이 보일게요. 거기 지나서 강이 보이면 거기가 바로 국경이오. 거기까지만 가면 되오.”본진 마차를 모는 마부가 말고삐를 바짝 당겨 쥐었다. 한이 뒤를 바짝 따랐다. 한 식경쯤지나니 빽빽했던 숲이 조금씩 헐거워 지며 빛이 드러났다. 햇빛을 받으니 짐을 덮은 천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휘익’흑마를 탄 십여 명의 무리들이 좌측과 우측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한이 활을 쏘기엔 이미 너무 가까웠다. 한은 검을 꺼냈다. 검을 들고 경계하며 본진 마차로 접근하는 순간, 마부가 별안간 단도로 한의 옆구리를 찔렀다.‘욱’얼굴을 찡그리며 반사적으로 한은 발로 마부의 정강이를 걷어 찼다.‘악’마부는 엉덩방아를 찧자마자 얼른 일어나더니 앞쪽으로 물러섰다.“살아서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 보아라.”“처음부터 속일 속셈이었던 게요?”한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어차피 돌아가 봐야 너는 변명조차 못할 신세 아니더냐. 짐승 밥이 되지 않길 빈다. 놓아주는 것을 행운으로 여겨라.”“왜 나를 끌어 들인 것이오?”한이 물었다.“여기까지 무사히 오는 데 보호해 줄 호위무사가 필요했다. 이제 네 역할은 끝났으니 당장 꺼져라.”한은 분노가 들끓었으나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했다. 마부와 숲에서 나타난 검은 무리들이 마차 두 대를 자신들이 데려 온 말에 연결시켜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을 한은 분노를 삼키며 뒤에서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서방님! 얼굴이 대체… 서방님”영수가 한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몸이 얼었다.‘퍽’영수를 보자마자 한이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다.“얼른 안으로 모셔라 얼른!”최나인이 옆에 같이 놀라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승철이에게 소리쳤다.한은 이틀을 사경을 해맸다. ‘악 으악’식은땀을 흘리는 한은 계속 허공에 헛소리를 질러 댔다.“서방님, 정신 차리세요! 서방님!”
그날 밤 영수는 꿈을 꾸었다.자신이 냇가를 건너려 하는 데 불어난 물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발을 디디는 순간 미끄러져 물살에 떠내려 갈 것 같았다. 산나물을 가득 뜯은 광주리를 양손에 붙들고 어떻게 해서든 물을 건너 보려 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돌아갈 길도 없었고 거기서 밤을 지샐 수도 없었다.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던 찰나, 한 사내가 뒤에서 오더니 말을 건넸다.‘업히시오. 얼른 업히시오. 내가 저쪽으로 낭자를 데려다 주겠소.’익숙한 목소리와 풍채, 그리고 체취, 그 사내는 한이었다. 영수는 놀라
“유모 쇠스랑의 모가지 부분이 덜렁거려 아무래도 곧 탈이 날 거 같아. 내가 오늘 장에 내려가서 새것으로 사와야겠어.”“아씨. 저는 기옥이네 김매는 밭에 품앗이 해주러 가기로 되어 있는데 어쩌죠?”“응. 나 혼자 얼른 다녀 올 수 있어. 유모 이따 봐”영수는 엽전 몇닢을 귀주머니에 넣고 채비를 했다. 웬지 장에 가는 마음이 가볍고 설렜다. …… 영수가 장에 노리개에 잠시 한눈을 팔고 있었다.“낭자, ...영수 낭자?”영수가 사뭇 놀라 위를 올려다 보았다. 한도령이었다.“어. 도련님. 한 도련님 아니신지요?”그 이름이
악 아-악’지나가는 마차의 바퀴가 갑자기 빠져 굴러 왔다. 놀란 말이 앞발을 크게 치켜 들었다. 말 위의 사내가 다급하게 고삐를 채 보지만 이미 늦었다. 말은 그대로 영수를 향해 달려들었다.사내가 고삐를 놓으며 몸을 날렸다. 영수의 허리를 끌어안고 바닥으로 굴렀다. 먼지가 일고 숨이 서로 맞닿았다. 영수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의 손이 허리를 감싼 채 영수가 몸을 서서히 일으킬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난전의 주인인 듯한 여자가 나와 소리 질렀다.“아이고 내 물건. 아이고.”말이 발버둥을 치다 가게의 좌판을 건드려 물
정적을 가르는 것은 승덕 어멈의 날카로운 비명이었다."불이야! 안부엌에 불이 났다!"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인시의 끝자락에 모두들 깜짝 놀라 마당으로 뛰어 나왔다. 안채 뒤편에서 매캐한 연기가 솟구쳤다. 아궁이 근처에 쌓아둔 마른 짚단에 불씨가 옮겨붙은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불길은 부뚜막을 타고 올라와 나무 기둥을 핥기 시작했다. 승덕어멈은 두 손을 걷어 부치고, 당황해 멈춰 선 종들의 어깨를 거세게 밀치며 호통을 쳤다."멍하니 서서 무엇들 하시오! 어서 우물가로 가서 물을 길어 오시오! 어서!"그녀의 서슬 퍼런 외침에
revi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