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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Author: 봄야
주호민은 낯선 이국의 거리에 홀로 서 있었다.

간단한 캐리어 하나를 끌고 있었고, 얼굴에는 먼 길을 달려온 사람처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예전보다 눈에 띄게 야위었고, 턱에는 거뭇거뭇한 수염이 자라 있었다.

눈가도 움푹 패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보아하니 주호민은 밤새 비행기를 갈아타며 밀라노까지 온 모양이었다.

나와 한마디 말을 하기 위해서,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서 국내에서 내가 사는 도시까지 쫓아온 것이었다.

나를 발견하자, 주호민은 빠르게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한없이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아야, 갑작스럽게 밀라노까지 찾아와서 미안해.”

“네가 계속 내 연락을 피하니까...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

주호민이 손을 뻗어서 나를 잡으려고 했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서며 미간을 찌푸렸다.

“돌아가. 여기까지 찾아와도 아무 의미도 없어.”

하지만 주호민은 내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나한테 조금만 시간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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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추석, 나는 이 집을 버렸다   제10화

    주호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침내 내가 홧김에 이러는 게 아니라, 정말 마음속 깊이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았다는 걸 깨달았다.주호민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얼마나 많은 것을 내놓든, 얼마나 비참할 정도로 매달리든 나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다음 날 아침, 아파트 맞은편의 집은 깨끗이 비어 있었다.주호민은 귀국하기 전, 내게 쪽지 한 장을 남겼다.그 위에는 단 한 마디만 적혀 있었다.[기다릴게.]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하지만 주호민이 귀국한 뒤, 진짜 골치 아픈 일이 시작될 줄은 나도 그도 몰랐다.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진 하지연은 자신의 모든 집착을 주호민에게 쏟아부었다.원래부터 주호민을 짝사랑하고 있었던 데다, 친척들은 모두 하지연이 나를 질투해서 일부러 약혼식을 망쳤다고 했다.그래서 하지연은 주호민과 결혼하기만 하면 자신의 인생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거라고 믿었다.주호민이 국내에 도착한 날부터 하지연은 매일 그의 아파트 앞으로 찾아갔다.날이 밝으면 찾아온 뒤, 해가 질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주호민이 집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아파트 아래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주호민이 차를 몰고 나가려고 하면 그대로 차 앞을 막아섰다.하지연은 감정이 불안정해서 상태가 좋을 때와 나쁠 때의 차이가 극심했다.정신이 멀쩡할 때면 울면서 말했다.“호민 오빠도 원래 나한테 마음이 있었잖아. 그러니까 나랑 같이 언니를 골탕 먹인 거잖아.”하지만 감정이 폭발할 때면 주호민의 옷을 붙잡고 한사코 매달렸다.“싫어. 나랑 결혼 안 해주면 나 그냥 죽어버릴 거야.”부모님은 하지연이 병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딸을 도와주려고 했다.몇 번이고 주호민을 찾아가 설득했고, 심지어 도덕적인 책임까지 들먹였다.“약혼식에서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지연이가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거야.”“어차피 둘 다 우리 딸인데, 누구랑 결혼하든 똑같잖아.”처음에는 차분하게 설명하던 주호민도 점점 지

  • 그 추석, 나는 이 집을 버렸다   제9화

    주호민은 낯선 이국의 거리에 홀로 서 있었다.간단한 캐리어 하나를 끌고 있었고, 얼굴에는 먼 길을 달려온 사람처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예전보다 눈에 띄게 야위었고, 턱에는 거뭇거뭇한 수염이 자라 있었다.눈가도 움푹 패 있었다.얼마나 오랫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보아하니 주호민은 밤새 비행기를 갈아타며 밀라노까지 온 모양이었다.나와 한마디 말을 하기 위해서,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서 국내에서 내가 사는 도시까지 쫓아온 것이었다.나를 발견하자, 주호민은 빠르게 내게 다가왔다.그리고 한없이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지아야, 갑작스럽게 밀라노까지 찾아와서 미안해.”“네가 계속 내 연락을 피하니까...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주호민이 손을 뻗어서 나를 잡으려고 했다.나는 한 걸음 물러서며 미간을 찌푸렸다.“돌아가. 여기까지 찾아와도 아무 의미도 없어.”하지만 주호민은 내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나한테 조금만 시간을 줘.”그날부터 주호민은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밀라노에 남았다.하필 내 아파트 바로 맞은편의 집을 빌렸다.그리고 행동으로 내게 사과하며 다시 기회를 얻으려고 했다.주호민은 내 출퇴근 시간을 알아냈고, 매일 어김없이 아파트 아래에서 나를 기다렸다.내가 출근할 때면 차를 몰고 와서 회사까지 데려다줬다.퇴근하면 미리 음식을 사놓고, 빨래를 하고 침구까지 갈아주었다.내가 일이 바빠서 끼니를 거를 때면, 회사 프런트까지 꼬박꼬박 식사를 가져다주었다.주호민은 내 업무를 방해하는 일만큼은 절대 하지 않았다.날씨가 변하거나 기온 차가 클 때면 미리 옷을 준비해 두었고, 비가 올 것 같으면 미리 우산까지 챙겨왔다.주호민은 할 수 있는 배려를 하나하나 다했다.나는 주호민이 예전에 내게 부족했던 배려를 한꺼번에 만회하려는 것임을 알았다.하지만 주호민을 볼 때마다, 내가 예전에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무관심했던 모습이 떠올랐다.조윤미도 이 사실을 알고 나자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주호

  • 그 추석, 나는 이 집을 버렸다   제8화

    밀라노에서 생활한 지 석 달이 지나자, 나는 어느새 이곳의 삶에 조금씩 적응하고 있었다.그 사건 이후 부모님은 더 이상 감히 먼저 내게 연락하지 못했다.그 집에서 벌어졌던 온갖 일들도 이제는 완전히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딱 한 사람, 주호민만 빼고.약혼식이 끝난 뒤에도 주호민은 내게 연락하는 것을 줄곧 멈추지 않았다.처음에는 여전히 강압적이고 차가운 태도였다.[밀라노에는 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야?][네 부모님 일은 우리 둘과 상관없는 일이잖아. 정말 나한테 아무 설명도 안 할 거야?]하지만 내가 계속 답장을 하지 않자, 주호민도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회사에서 들었어. 너 10년 계약을 맺었다면서. 앞으로 밀라노에 아예 정착할 생각이라던데.][정말 안 돌아올 거야? 이렇게 오래 연락도 없이, 나랑 완전히 끝내려는 거야?][내가 잘못했어. 이제 됐어?][그동안 내가 잘못했어. 그 사람들과 함께 네가 장난도 못 받아준다고 말한 것도, 네가 당할 때 말없이 지켜본 것도 다 내 잘못이야.][난 정말 그저 평범한 장난인 줄 알았어. 미안해. 정말 다 미안해.][그러니까 제발 한마디만 해주면 안 돼?]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주호민의 번호를 그대로 차단했다.아마 주호민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내 마음속에서 우리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우리 관계가 끝난 순간은 약혼식장에서 녹음 파일을 공개하기로 결심했던 날도 아니었고, 해외로 떠난 날도 아니었다.바로 그 추석날 밤, 주호민이 처음으로 내 전화를 끊고 그 사람들과 함께 나를 괴롭히면서, 내 안전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그때였다.주호민이 하지연의 편에 선 순간부터 우리의 관계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그러니 지금 와서 주호민이 쏟아내는 후회와 변명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나는 밀라노에서 잘 지내고 있었다.거기에는 나를 재미 삼아 가지고 놀던 가족도,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하는 남자친구도 없었다.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더 이상 전전긍긍할 필요도

  • 그 추석, 나는 이 집을 버렸다   제7화

    약혼식에서 녹음 파일이 공개된 뒤, 우리 집은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혈연관계가 아니라는 사실과 약을 먹이려 했던 계략까지 드러나면서, 친척들 사이에서는 그 이야기가 밥 먹을 때마다 화제에 올랐다.아빠는 경찰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고, 주호민은 일방적으로 우리 가족과의 관계를 끊었다.이런 일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하지연이 20년 넘게 누려왔던 우월감은 산산조각이 나면서 무너졌다.고작 보름 만에, 늘 오만하고 제멋대로 굴며 내게 장난치는 것을 즐기던 하지연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렸다.방에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고, 누구와도 말도 섞지 않았다.사람들과의 연락도 모두 끊은 채 감정이 극도로 불안정해졌다.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무 이유 없이 울고 소리를 지르다가 물건을 집어 던지고 깨뜨리기도 했다.병원에서 내린 진단은 중증 우울증이었다.예전 같았으면 엄마는 벌써 발을 동동 구르며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니고, 좋다는 약은 어떻게든 구해왔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엄마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엄마는 하지연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20년 넘게 자신들이 키워준 은혜를 내세우면서 하지연에게 합의서에 서명해달라고 애원했다.모녀는 매일 마주 보고 울었다.서로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주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결국 하지연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사흘 뒤 아빠가 집으로 돌아왔다.하지만 하지연은 아빠의 얼굴만 보면 점점 더 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마치 뭔가에 자극을 받은 사람처럼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부모님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하지연의 정신적인 괴롭힘에 시달리며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갔다.집안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더 이상 방법이 없어진 부모님은 결국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내 탓으로 돌렸다.부모님은 친척들을 만날 때마다 하소연했다.“지아가 철이 없어서 조금만 양보하면 될 일을 끝까지 고집을 부렸어.”“가족끼리 이렇게까지 갈라서지만 않았어도, 우리 가족이 지금처럼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

  • 그 추석, 나는 이 집을 버렸다   제6화

    전화기 너머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내가 내뱉은 말은 주호민의 모든 예상을 완전히 산산조각으로 만들어버렸다.주호민은 평소 순종적이고, 어디서든 참고 양보하던 내가 이렇게 단호하게 모든 관계를 끊어낼 거라고는 믿지 못했다.잠시 후 주호민은 코웃음을 치며 거만하게 말했다.[그래. 가고 싶으면 가. 내가 막지는 않을게.][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알아둬. 너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밀라노에서 버티지 못하고 외롭게 의지할 곳도 없이 지내다 보면, 결국 울면서 나를 찾아 돌아오겠지.][난 그날을 기다리고 있을게.]그 말을 끝으로 주호민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나는 주저 없이 핸드폰에서 내 가족과 주호민에 관한 모든 사진을 삭제했다.그리고 캐리어를 끌고 공항 밖으로 나왔다.밀라노에서 업무를 담당할 직원이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지사 근무 관련 절차와 아파트 입주 수속까지 모두 순조롭게 끝났다.나는 새로 마련된 아파트에 짐을 풀고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앞으로 10년 동안 나는 밀라노에서 살고 일하면서, 이곳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그 10년이면 과거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나만의 삶을 다시 세우기에 충분할 터였다.그런데 한참을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았다.비행기에서 오후 내내 잠을 잔 탓인지 전혀 졸리지 않았다.그때 핸드폰 화면이 갑자기 밝아졌다.약혼식에 초대했던 전 직장 동료 조윤미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그리고 현장에서 찍은 영상 하나가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조윤미는 내가 겁에 질려 눈가가 시퍼렇게 멍든 모습을 본 적이 있었고, 하지연의 장난 게임 때문에 내가 병원에 간 것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조윤미는 메시지를 보내며 통쾌하다고 말했다.[지아야, 너 진짜 대단하다! 오늘 약혼식에서 한바탕 뒤집어놓은 거, 진짜 통쾌했어!]나는 영상을 재생했다.곧바로 USB에 들어 있던 그 녹음 파일이 핸드폰 스피커를 통해 또렷하게 흘러나왔다.한 달 전 한밤중에 물을 마시러 일어났다가, 부모님 방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이

  • 그 추석, 나는 이 집을 버렸다   제5화

    비행기가 밀라노 공항에 착륙했다.약혼식이 끝난 지 5시간이 지난 뒤였다.기내 안내음이 울린 직후, 내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핸드폰 화면에 뜬 4개의 번호는 각각 아빠, 엄마, 하지연, 그리고 주호민이었다.나는 곧바로 전화를 받지 않고, 그저 캐리어를 끌고 탑승구를 빠져나왔다.공항 밖으로 나와서 근처 편의점에다 잠시 자리를 잡았다.전화는 계속 울리다가 자동으로 끊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벨이 울렸다.슬프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더 이상 미련이 남아 있지 않았다.굳이 하나 후회되는 게 있다면, 대형 스크린의 영상을 본 가족들의 표정을 직접 보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몇 분 뒤 나는 마음을 추스른 뒤 가장 먼저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엄마의 날카로운 고함이 귓가를 때렸다.[하지아,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미쳤어?][이런 것들을 사람들 앞에서 틀어놓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은 해봤어?]나는 창밖으로 낯선 외국의 거리를 바라봤다.귀가 따끔거릴 만큼 날카로운 목소리였다.다행히 먼 거리와 6시간의 시차 덕분에 나는 조금씩 마음이 놓였다.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평소 엄마가 하지연을 감싸며 내게 하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그냥 장난 좀 한 건데, 뭘 그렇게 따져요?”그 한마디가 엄마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엄마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높아졌다.[장난? 이런 장난이 어디 있어? 집안일을 밖에 드러내면 어떡해!][우리가 네 가족이고, 지연이는 네 동생이야! 네가 이렇게 하고도 우리한테 미안하지도 않아?]나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오히려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예전에는 엄마 아빠가 지연이랑 같이 나한테 장난칠 때도 그냥 게임이라고 했잖아요.”“왜 당신들은 해도 되고, 나는 하면 안 돼요?”엄마가 잠시 말을 멈췄다.늘 순종적이던 내가 이렇게 대놓고 반박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하지만 나는 엄마가 정신을 차릴 틈조차 주지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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