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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추석, 나는 이 집을 버렸다

그 추석, 나는 이 집을 버렸다

작가:  봄야완결
언어: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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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를 맞아 퇴근하기 직전, 여동생이 가족 단톡방에 이사한 집 주소라며 새 주소를 올렸다. 나는 그 주소를 따라서 버스를 무려 5번이나 갈아타면서 찾아갔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건 황량한 산과 잡목 숲뿐이었다. 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여동생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빙고! 장난 성공! 마지막 버스도 떠났으니, 이제 어떡할래?]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지만, 부모님은 배를 잡고 웃으셨다. [그런 말도 믿다니. 저 멍청한 꼴은 대체 누굴 닮은 건지 모르겠네.] [우린 추석에 가족끼리 밥 먹을 거니까, 너는 알아서 걸어와.] 그러고는 내가 누구를 더 닮았는지, 전화기 너머에서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시작했다. 절망한 순간, 나는 배터리가 간당간당한 휴대폰으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 또 익숙한 배경음이 들려왔다. 남자친구의 비웃음이 가볍게 흘러나왔다. [지아야, 방금 네 부모님한테 다 들었어. 그냥 혼자 돌아오라고 하시던데.] [처음 당하는 장난도 아닌데, 이제 와서 예민하게 굴지 마.]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는 무정하게 끊겼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울면서 다시 전화를 걸어 집에 데려다 달라고 애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멀리 보이는 집집마다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지쳐버렸다. 여동생은 추석마다 장난을 치는 걸 좋아했고, 온 가족은 늘 그 장난에 맞장구를 쳤다. 재작년에는 복숭아털을 물컵에 넣어서 내가 천식 발작을 일으키게 했다. 작년에는 샴푸를 제모크림으로 바꿔 놓아서 내 면접을 망쳤다. 올해는... 가족 모두가 내가 어둠을 무서워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여동생과 짜고 나를 속여서 교외로 보냈다. 그리고 가족들은 식탁에 앉아서 내가 몇 분 만에 애원할지 내기를 걸고 있었다. 나는 울지도, 떼를 쓰지도 않았다. 어둠 속에서 집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 장난은 여기서 끝이다. 나 혼자서라도 끝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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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제1화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워서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 모니터링 화면에는 가족들이 식탁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식탁 한가운데에는 핸드폰 4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내가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전화를 걸어서 살려 달라고 빌 거라고 내기를 하는 중이었다.

여동생 하지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1분.]

10살 추석때, 하지연은 내가 키우던 강아지에게 독을 먹였다.

나는 울부짖으며 항복하고, 부모님 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강아지를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내가 울부짖으며 난리를 치는데도 부모님은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지연이 너랑 장난 좀 친 거야. 개가 죽으면 또 한 마리 사주면 되지.”

강아지는 내 품 안에서 경련하다가 결국 숨이 끊어졌다.

정확히 1분이었다.

그날 이후 부모님이 사주겠다고 했던 새 강아지는 아무도 다시 입에 올리지 않았다.

부모님은 망설임 없이 입을 모아 말했다.

[5분.]

가족과 함께 먹었던 유일한 추석 식사 자리에서, 하지연은 내 콜라를 농약으로 바꿔치기했다.

나는 배를 움켜쥔 채 바닥을 뒹굴다가 5분 만에 결국 살려 달라고 빌었다.

그날 나는 병원에서 위세척을 했고, 가족은 C시로 달구경을 갔다.

그 후로 나는 하지연의 장난이 두려워서 가족과 추석을 함께 보내지 않았다.

주호민은 그런 나를 안쓰러워하며, 바쁜 업무에도 매년 휴가를 내서 나와 함께해 주었다.

그런데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주호민이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듯 벌떡 일어나더니, 외투를 집어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주호민에게 위치를 전송하려던 순간, 그의 발걸음이 문 앞에서 멈췄다.

주호민은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더니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지아가 오늘 밤 절대 전화해서 살려달라고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저 교외 지역의 통신 기지국은 우리 회사 관할이거든.]

[내가 방금 비서한테 점검 공지를 내리라고 했어. 오늘 자정이 지나면 지아가 있는 지역은 신호가 완전히 끊길 거야.]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놀라움과 기쁨에 들뜬 하지연이 달려와서 주호민을 껴안았다.

[그래서 오빠가 굳이 장소를 교외로 바꾸자고 한 거구나.]

[역시 오빠는 최고의 장난 전문가라니까!]

예전의 주호민은 내가 이 지역 근처에 오는 것조차 싫어했다.

주호민은 이곳이 아직 개발되지 않아서 노숙자도 많고 들개도 있어서 위험하다고 했다.

내가 위험한 일을 당할까 봐 걱정이 된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지금, 주호민은 하지연의 장난 게임에 맞춰주기 위해서, 나를 이곳에 밤새 내버려두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가족들은 장난 게임에 든든한 조력자가 한 명 더 생겼다며 환호했고, 서로를 끌어안고 기뻐했다.

내 마음속 마지막 기대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핸드폰 신호가 아직 1분 정도 남아 있는 틈을 타서, 나는 사흘 뒤 밀라노로 장기 파견되는 근무 신청에 답장을 보냈다.

전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없다는 생각에 망설였다.

하지만 이런 가족은 내가 원하는 가족이 아니었다.

이 집까지도 나는 이제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자정이 되자, 핸드폰은 신호 하나 잡히지 않는 벽돌이 되어버렸다.

나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고, 이를 악물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한참 걷다 보니, 이상하게도 더는 무섭지 않았다.

원래 사람은 의지할 곳이 없을 때 정말로 묘하게 용감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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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챕터
제1화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워서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핸드폰 모니터링 화면에는 가족들이 식탁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식탁 한가운데에는 핸드폰 4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내가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전화를 걸어서 살려 달라고 빌 거라고 내기를 하는 중이었다.여동생 하지연이 단호하게 말했다.[1분.]10살 추석때, 하지연은 내가 키우던 강아지에게 독을 먹였다.나는 울부짖으며 항복하고, 부모님 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강아지를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내가 울부짖으며 난리를 치는데도 부모님은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지연이 너랑 장난 좀 친 거야. 개가 죽으면 또 한 마리 사주면 되지.”강아지는 내 품 안에서 경련하다가 결국 숨이 끊어졌다.정확히 1분이었다.그날 이후 부모님이 사주겠다고 했던 새 강아지는 아무도 다시 입에 올리지 않았다.부모님은 망설임 없이 입을 모아 말했다.[5분.]가족과 함께 먹었던 유일한 추석 식사 자리에서, 하지연은 내 콜라를 농약으로 바꿔치기했다.나는 배를 움켜쥔 채 바닥을 뒹굴다가 5분 만에 결국 살려 달라고 빌었다.그날 나는 병원에서 위세척을 했고, 가족은 C시로 달구경을 갔다.그 후로 나는 하지연의 장난이 두려워서 가족과 추석을 함께 보내지 않았다.주호민은 그런 나를 안쓰러워하며, 바쁜 업무에도 매년 휴가를 내서 나와 함께해 주었다.그런데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주호민이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듯 벌떡 일어나더니, 외투를 집어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나는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주호민에게 위치를 전송하려던 순간, 그의 발걸음이 문 앞에서 멈췄다.주호민은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더니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지아가 오늘 밤 절대 전화해서 살려달라고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왜냐하면 저 교외 지역의 통신 기지국은 우리 회사 관할이거든.] [내가 방금 비서한테 점검 공지를 내리라고 했어. 오늘 자정이 지나면 지아가 있는 지역은 신호가 완전히 끊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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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다음 날 동이 트자, 나는 흙과 물에 젖은 바짓단을 질질 끌며 첫차 버스에 올라탔다.기사님에게 부탁해서 핸드폰을 충전할 보조배터리를 빌렸다.하룻밤 내내 꺼져 있던 핸드폰을 켜자, 가족 단톡방에 메시지가 100개 넘게 쏟아져 있었다.하지연이 올린 달구경 사진도 있었고, 부모님이 보내주신 추석 용돈 이야기도 있었다.주호민이 직접 만든 요리 사진도 올라와 있었다.그런데 내게 개인적으로 연락이 온 건 회사뿐이었다.[며칠 동안은 출근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번에 가면 10년 동안 파견 근무하게 되니, 돌아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세요. 모레 정시에 출발합니다.]나는 집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손에는 테마파크 입장권 5장이 들려 있었다.한 달 내내 야근해서 번 돈으로 가족 모두를 위해 준비한 추석 선물이었다.원래는 다 같이 가려고 했다.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내 몫 한 장만 남기고, 나머지 4장은 문틈으로 밀어 넣었다.그런데 다음 순간, 문이 갑자기 안에서 열렸다.하지연이 내 손목을 잡더니 거칠게 안으로 끌어당겼다. 주호민은 기다렸다는 듯 내 머리 위로 양동이에 담긴 찬물을 들이부었다.온몸이 흠뻑 젖은 나는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하지연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난 언니가 먼저 울 거라고 했어!”주호민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말했다.“난 지아가 먼저 화를 낼 거라고 했고.”부모님은 물에 흠뻑 젖어 꼴이 말이 아닌 나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어서 지아 반응 좀 보자. 내기에서 진 사람은 딱밤 세 대씩 맞기!”그제야 네 사람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향했다.하지만 나는 울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대신 피가 배어 나오는 상처를 꾹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하지연의 이마 앞에 손을 내밀었다.“다들 졌네. 한 사람당 딱밤 세 대야.”하지연은 본능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질렀다.“아!”주호민이 순간적으로 나를 거칠게 밀쳤다.“하지아, 너 뭐 하는 거야?!”부모님도 새끼를 감싸듯 하지연을 두 사람 사이에 꼭 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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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주호민이 약혼식 준비를 하지연에게 맡기겠다고 했을 때부터,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하지만 부모님은 몇 번이고 내게 장담했다.“약혼식도 결혼식이나 다름없어. 평생 한 번뿐인 날이잖니.”“우리가 어떻게 이런 중요한 날에 지연이가 마음대로 장난치게 내버려두겠어.”주호민 역시 몇 번이나 나를 설득했다.“지연이는 그저 네가 준비할 게 많을까 봐 도와주려는 것뿐이야.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예비 신부가 되도록 도와주려는 거야.”그 말을 믿고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가족들이 하지연과 함께 쇼핑을 나간 사이에, 나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지아의 행복한 추억’이라고 적힌 USB 하나를 꺼내 들었다.USB를 컴퓨터에 꽂았다.그리고 영상을 재생한 순간, 스피커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너무나 익숙한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영상 속에는 내가 12살이던 생일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부모님과 하지연은 번갈아 가며 나를 달래면서 생일 케이크를 먹였다.나는 입안에 검고 하얀 덩어리를 가득 머금은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엄마, 아빠... 이 케이크는 뭐로 만든 거예요? 나 진짜 더는 못 먹겠어요.]내가 케이크를 다 먹자, 10살이었던 하지연은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웃음을 참더니 결국 폭소를 터뜨렸다.[소똥이랑 구더기로 만든 거야. 이 멍청이야!][우리 언니 진짜 배가 고팠나 봐. 별걸 다 먹네!]내가 미친 듯이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어서 억지로 토해내는 모습을 보며, 부모님은 핸드폰을 제대로 들지도 못할 만큼 웃었다.화면은 가족들의 웃음에 따라 계속 흔들렸다.곧이어 다음 영상이 재생됐다.잠에서 깼다가 이불 속에 뱀이 있는 걸 발견하고 그대로 기절해 버린 나.고장 난 엘리베이터에 갇혀 공포에 질린 나.그리고 내가 짝사랑하던 남학생에 대한 일기를 하지연이 공개해 버려서, 고등학교 3년 내내 ‘두꺼비 언니’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나.내가 가장 추하고 가장 처참하고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순간들을 하지연은 장난 영상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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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부모님은 내가 드디어 철이 들었다며 흐뭇해하셨다.그날 밤,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주호민이 내 방으로 찾아왔다.그 역시 후련한 표정이었다.“사실 요즘 계속 고민했어. 너랑 정말 약혼해야 하는 건지.”“넌 성격도 까칠하고 겁도 많잖아. 지연이가 어린애처럼 장난치는 것까지 하나하나 따지고 들고.”“그런데도 지연이한테 선물까지 준비한 걸 보니, 나도 이 관계를 계속 이어가기로 마음먹었어.”나는 짐을 싸던 손을 멈췄다.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그래서 그동안 지연이랑 같이 나한테 장난을 친 게... 나를 시험한 거야?”주호민은 부정하지 않았다.“자기 동생 하나도 받아주지 못하는 여자를 내가 어떻게 아내로 맞이하겠어?”그 말을 남긴 주호민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 방을 나갔다.약혼식 당일, 출발하기 전까지 하지연은 몇 번이나 내게 신신당부했다.“언니, 꼭 흰색 차 타고 와. 흰색이 고급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길한 색이잖아. 언니랑 오빠 결혼에도 좋은 일이 있을 거야.”부모님도 맞장구쳤다.“지연이가 아침 일찍부터 세차까지 해놨어. 그러니까 지연이 성의를 절대 저버리면 안 돼.”나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속으로는 약혼식장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가족과 주호민이 다른 검은색 차를 타고 먼저 출발한 뒤, 나는 짐을 챙겨 들었다.그리고 떠나기 전, 일부러 주차장에 들러서 하지연이 타라고 지정한 흰색 차를 확인했다.타이어 네 개 중 세 개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만약 저 흰색 차를 타고 약혼식장까지 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그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족과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택시에 올라탔다.한편 약혼식장에서는 부모님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하지연의 이번 장난을 실현해 주기 위해서, 부모님은 하지아와 아는 사람이라면 모조리 초대했다.유치원 시절 친구부터, 고작 한 번 마주쳤던 경비 아저씨까지.모두에게 하지연이 공들여 만든 장난 영상을 보여줄 생각이었다.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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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비행기가 밀라노 공항에 착륙했다.약혼식이 끝난 지 5시간이 지난 뒤였다.기내 안내음이 울린 직후, 내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핸드폰 화면에 뜬 4개의 번호는 각각 아빠, 엄마, 하지연, 그리고 주호민이었다.나는 곧바로 전화를 받지 않고, 그저 캐리어를 끌고 탑승구를 빠져나왔다.공항 밖으로 나와서 근처 편의점에다 잠시 자리를 잡았다.전화는 계속 울리다가 자동으로 끊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벨이 울렸다.슬프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더 이상 미련이 남아 있지 않았다.굳이 하나 후회되는 게 있다면, 대형 스크린의 영상을 본 가족들의 표정을 직접 보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몇 분 뒤 나는 마음을 추스른 뒤 가장 먼저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엄마의 날카로운 고함이 귓가를 때렸다.[하지아,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미쳤어?][이런 것들을 사람들 앞에서 틀어놓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은 해봤어?]나는 창밖으로 낯선 외국의 거리를 바라봤다.귀가 따끔거릴 만큼 날카로운 목소리였다.다행히 먼 거리와 6시간의 시차 덕분에 나는 조금씩 마음이 놓였다.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평소 엄마가 하지연을 감싸며 내게 하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그냥 장난 좀 한 건데, 뭘 그렇게 따져요?”그 한마디가 엄마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엄마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높아졌다.[장난? 이런 장난이 어디 있어? 집안일을 밖에 드러내면 어떡해!][우리가 네 가족이고, 지연이는 네 동생이야! 네가 이렇게 하고도 우리한테 미안하지도 않아?]나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오히려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예전에는 엄마 아빠가 지연이랑 같이 나한테 장난칠 때도 그냥 게임이라고 했잖아요.”“왜 당신들은 해도 되고, 나는 하면 안 돼요?”엄마가 잠시 말을 멈췄다.늘 순종적이던 내가 이렇게 대놓고 반박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하지만 나는 엄마가 정신을 차릴 틈조차 주지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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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전화기 너머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내가 내뱉은 말은 주호민의 모든 예상을 완전히 산산조각으로 만들어버렸다.주호민은 평소 순종적이고, 어디서든 참고 양보하던 내가 이렇게 단호하게 모든 관계를 끊어낼 거라고는 믿지 못했다.잠시 후 주호민은 코웃음을 치며 거만하게 말했다.[그래. 가고 싶으면 가. 내가 막지는 않을게.][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알아둬. 너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밀라노에서 버티지 못하고 외롭게 의지할 곳도 없이 지내다 보면, 결국 울면서 나를 찾아 돌아오겠지.][난 그날을 기다리고 있을게.]그 말을 끝으로 주호민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나는 주저 없이 핸드폰에서 내 가족과 주호민에 관한 모든 사진을 삭제했다.그리고 캐리어를 끌고 공항 밖으로 나왔다.밀라노에서 업무를 담당할 직원이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지사 근무 관련 절차와 아파트 입주 수속까지 모두 순조롭게 끝났다.나는 새로 마련된 아파트에 짐을 풀고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앞으로 10년 동안 나는 밀라노에서 살고 일하면서, 이곳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그 10년이면 과거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나만의 삶을 다시 세우기에 충분할 터였다.그런데 한참을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았다.비행기에서 오후 내내 잠을 잔 탓인지 전혀 졸리지 않았다.그때 핸드폰 화면이 갑자기 밝아졌다.약혼식에 초대했던 전 직장 동료 조윤미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그리고 현장에서 찍은 영상 하나가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조윤미는 내가 겁에 질려 눈가가 시퍼렇게 멍든 모습을 본 적이 있었고, 하지연의 장난 게임 때문에 내가 병원에 간 것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조윤미는 메시지를 보내며 통쾌하다고 말했다.[지아야, 너 진짜 대단하다! 오늘 약혼식에서 한바탕 뒤집어놓은 거, 진짜 통쾌했어!]나는 영상을 재생했다.곧바로 USB에 들어 있던 그 녹음 파일이 핸드폰 스피커를 통해 또렷하게 흘러나왔다.한 달 전 한밤중에 물을 마시러 일어났다가, 부모님 방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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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약혼식에서 녹음 파일이 공개된 뒤, 우리 집은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혈연관계가 아니라는 사실과 약을 먹이려 했던 계략까지 드러나면서, 친척들 사이에서는 그 이야기가 밥 먹을 때마다 화제에 올랐다.아빠는 경찰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고, 주호민은 일방적으로 우리 가족과의 관계를 끊었다.이런 일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하지연이 20년 넘게 누려왔던 우월감은 산산조각이 나면서 무너졌다.고작 보름 만에, 늘 오만하고 제멋대로 굴며 내게 장난치는 것을 즐기던 하지연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렸다.방에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고, 누구와도 말도 섞지 않았다.사람들과의 연락도 모두 끊은 채 감정이 극도로 불안정해졌다.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무 이유 없이 울고 소리를 지르다가 물건을 집어 던지고 깨뜨리기도 했다.병원에서 내린 진단은 중증 우울증이었다.예전 같았으면 엄마는 벌써 발을 동동 구르며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니고, 좋다는 약은 어떻게든 구해왔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엄마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엄마는 하지연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20년 넘게 자신들이 키워준 은혜를 내세우면서 하지연에게 합의서에 서명해달라고 애원했다.모녀는 매일 마주 보고 울었다.서로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주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결국 하지연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사흘 뒤 아빠가 집으로 돌아왔다.하지만 하지연은 아빠의 얼굴만 보면 점점 더 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마치 뭔가에 자극을 받은 사람처럼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부모님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하지연의 정신적인 괴롭힘에 시달리며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갔다.집안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더 이상 방법이 없어진 부모님은 결국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내 탓으로 돌렸다.부모님은 친척들을 만날 때마다 하소연했다.“지아가 철이 없어서 조금만 양보하면 될 일을 끝까지 고집을 부렸어.”“가족끼리 이렇게까지 갈라서지만 않았어도, 우리 가족이 지금처럼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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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밀라노에서 생활한 지 석 달이 지나자, 나는 어느새 이곳의 삶에 조금씩 적응하고 있었다.그 사건 이후 부모님은 더 이상 감히 먼저 내게 연락하지 못했다.그 집에서 벌어졌던 온갖 일들도 이제는 완전히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딱 한 사람, 주호민만 빼고.약혼식이 끝난 뒤에도 주호민은 내게 연락하는 것을 줄곧 멈추지 않았다.처음에는 여전히 강압적이고 차가운 태도였다.[밀라노에는 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야?][네 부모님 일은 우리 둘과 상관없는 일이잖아. 정말 나한테 아무 설명도 안 할 거야?]하지만 내가 계속 답장을 하지 않자, 주호민도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회사에서 들었어. 너 10년 계약을 맺었다면서. 앞으로 밀라노에 아예 정착할 생각이라던데.][정말 안 돌아올 거야? 이렇게 오래 연락도 없이, 나랑 완전히 끝내려는 거야?][내가 잘못했어. 이제 됐어?][그동안 내가 잘못했어. 그 사람들과 함께 네가 장난도 못 받아준다고 말한 것도, 네가 당할 때 말없이 지켜본 것도 다 내 잘못이야.][난 정말 그저 평범한 장난인 줄 알았어. 미안해. 정말 다 미안해.][그러니까 제발 한마디만 해주면 안 돼?]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주호민의 번호를 그대로 차단했다.아마 주호민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내 마음속에서 우리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우리 관계가 끝난 순간은 약혼식장에서 녹음 파일을 공개하기로 결심했던 날도 아니었고, 해외로 떠난 날도 아니었다.바로 그 추석날 밤, 주호민이 처음으로 내 전화를 끊고 그 사람들과 함께 나를 괴롭히면서, 내 안전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그때였다.주호민이 하지연의 편에 선 순간부터 우리의 관계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그러니 지금 와서 주호민이 쏟아내는 후회와 변명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나는 밀라노에서 잘 지내고 있었다.거기에는 나를 재미 삼아 가지고 놀던 가족도,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하는 남자친구도 없었다.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더 이상 전전긍긍할 필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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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주호민은 낯선 이국의 거리에 홀로 서 있었다.간단한 캐리어 하나를 끌고 있었고, 얼굴에는 먼 길을 달려온 사람처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예전보다 눈에 띄게 야위었고, 턱에는 거뭇거뭇한 수염이 자라 있었다.눈가도 움푹 패 있었다.얼마나 오랫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보아하니 주호민은 밤새 비행기를 갈아타며 밀라노까지 온 모양이었다.나와 한마디 말을 하기 위해서,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서 국내에서 내가 사는 도시까지 쫓아온 것이었다.나를 발견하자, 주호민은 빠르게 내게 다가왔다.그리고 한없이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지아야, 갑작스럽게 밀라노까지 찾아와서 미안해.”“네가 계속 내 연락을 피하니까...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주호민이 손을 뻗어서 나를 잡으려고 했다.나는 한 걸음 물러서며 미간을 찌푸렸다.“돌아가. 여기까지 찾아와도 아무 의미도 없어.”하지만 주호민은 내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나한테 조금만 시간을 줘.”그날부터 주호민은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밀라노에 남았다.하필 내 아파트 바로 맞은편의 집을 빌렸다.그리고 행동으로 내게 사과하며 다시 기회를 얻으려고 했다.주호민은 내 출퇴근 시간을 알아냈고, 매일 어김없이 아파트 아래에서 나를 기다렸다.내가 출근할 때면 차를 몰고 와서 회사까지 데려다줬다.퇴근하면 미리 음식을 사놓고, 빨래를 하고 침구까지 갈아주었다.내가 일이 바빠서 끼니를 거를 때면, 회사 프런트까지 꼬박꼬박 식사를 가져다주었다.주호민은 내 업무를 방해하는 일만큼은 절대 하지 않았다.날씨가 변하거나 기온 차가 클 때면 미리 옷을 준비해 두었고, 비가 올 것 같으면 미리 우산까지 챙겨왔다.주호민은 할 수 있는 배려를 하나하나 다했다.나는 주호민이 예전에 내게 부족했던 배려를 한꺼번에 만회하려는 것임을 알았다.하지만 주호민을 볼 때마다, 내가 예전에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무관심했던 모습이 떠올랐다.조윤미도 이 사실을 알고 나자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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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주호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침내 내가 홧김에 이러는 게 아니라, 정말 마음속 깊이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았다는 걸 깨달았다.주호민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얼마나 많은 것을 내놓든, 얼마나 비참할 정도로 매달리든 나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다음 날 아침, 아파트 맞은편의 집은 깨끗이 비어 있었다.주호민은 귀국하기 전, 내게 쪽지 한 장을 남겼다.그 위에는 단 한 마디만 적혀 있었다.[기다릴게.]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하지만 주호민이 귀국한 뒤, 진짜 골치 아픈 일이 시작될 줄은 나도 그도 몰랐다.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진 하지연은 자신의 모든 집착을 주호민에게 쏟아부었다.원래부터 주호민을 짝사랑하고 있었던 데다, 친척들은 모두 하지연이 나를 질투해서 일부러 약혼식을 망쳤다고 했다.그래서 하지연은 주호민과 결혼하기만 하면 자신의 인생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거라고 믿었다.주호민이 국내에 도착한 날부터 하지연은 매일 그의 아파트 앞으로 찾아갔다.날이 밝으면 찾아온 뒤, 해가 질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주호민이 집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아파트 아래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주호민이 차를 몰고 나가려고 하면 그대로 차 앞을 막아섰다.하지연은 감정이 불안정해서 상태가 좋을 때와 나쁠 때의 차이가 극심했다.정신이 멀쩡할 때면 울면서 말했다.“호민 오빠도 원래 나한테 마음이 있었잖아. 그러니까 나랑 같이 언니를 골탕 먹인 거잖아.”하지만 감정이 폭발할 때면 주호민의 옷을 붙잡고 한사코 매달렸다.“싫어. 나랑 결혼 안 해주면 나 그냥 죽어버릴 거야.”부모님은 하지연이 병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딸을 도와주려고 했다.몇 번이고 주호민을 찾아가 설득했고, 심지어 도덕적인 책임까지 들먹였다.“약혼식에서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지연이가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거야.”“어차피 둘 다 우리 딸인데, 누구랑 결혼하든 똑같잖아.”처음에는 차분하게 설명하던 주호민도 점점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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