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 후, 배준우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은영을 데리고 그린빌을 나왔다. 안지영과 장선명이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지금 고은영은 너무 화가 나서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걸음을 옮기며 이를 갈았다.“진짜 미친 거 아냐? 집은 절대 안 판다니까? 무슨 소리를 해도 안 팔아.”분노로 목소리가 떨리는 고은영을 바라보며 배준우가 단호하게 말했다.“일단 집에 가자.”단 한 시간이었지만 상황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집값은 5억 원에서 순식간에 50억 원까지 뛰었지만 고은영의 대답은 한결같았다.그녀가 팔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태현은 아예 나갈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그 뻔뻔한 태도에 고은영의 분노는 한층 더 치솟았다.양쪽 모두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배준우는 혹시나 고은영이 분노로 쓰러질까 염려되어 서둘러 그녀를 데리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차에 타려던 순간, 고은영이 문손잡이를 움켜쥐고 그를 노려보았다.“저 경찰 부를 거예요. 여보, 저 진짜 신고할 거예요.”그 말을 들은 배준우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심한 두통이 몰려왔다.‘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람...’“우선 집에 가자.”“저 인간이 제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놨어요!”그게 고은영이 가장 참기 힘든 이유였다.이유야 어찌 됐든 나태현은 현재 그녀의 집에 ‘얹혀사는’ 처지였다.‘최소한 남의 물건을 소중하게 대해야 하지 않나...’하지만, 나태현은 그런 배려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내가 처리할게. 넌 이제 집에 가서 자, 응?”“당장 그 인간을 쫓아내 줘요.”고은영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병원에서 전화를 받았을 때, 그녀는 온갖 가능성을 다 예상했다. 심지어 가장 파렴치한 조보은까지 떠올렸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조보은보다 더 뻔뻔한 인간도 있다는 걸 그녀는 오늘 처음 알았다.이제야 고은영은 예전에 안지영이 비슷한 일로 시달릴 때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지금 그녀도 나태현을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말이다.“알았어. 바로 사람 보내서 처리
“나가라고 했잖아요. 못 들었어요?”고은영이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배준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태현을 힐끗 바라봤다.그러나 나태현은 끝까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태연한 얼굴이었다.안지영은 장선명과 눈을 마주치는 동시에 속으로 혀를 찼다.‘역시 나씨 가문 사람들이네. 남의 집에 달라붙는 버릇 하나는 판박이야.’그 뻔뻔한 태도에 고은영은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오르려 했지만 배준우가 앞으로 나섰다.“은영아.”“여보, 정말 너무하잖아요!”고은영이 발을 동동 구르자 배준우가 그녀를 달래듯 손을 들어 올렸다.“괜찮아. 괜히 몸만 안 좋아지니까 화는 내지 말고.”“이 꼴 좀 보세요. 집을 이렇게 만들어놨다고요.”고은영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다.이 집은 그녀가 겨우 마련한 곳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모를 정도로 아끼는 곳이었고 처음 계약서에 사인하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했다.‘그런데 지금은 이 꼴이라니... 혹시 아예 자기 집으로 만들 작정인가? 쫓아낼 수도 없게? 말도 안 돼.’배준우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대체 나태현이 무슨 이유로 이런 소동을 벌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그러던 중, 줄곧 침묵하던 나태현이 불쑥 입을 열었다.“얼마면 돼요?”“뭐라고요?”고은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배준우도 순간 말을 잃었다.안지영과 장선명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무슨 뜻이에요? 집세라도 내겠다는 건가요?”‘뭐가 모자라서 여기서 세를 얻겠다고 그래?’“이 집, 제가 살게요.”그의 짧고 단호한 한마디에 주변 공기가 싸늘해졌다.그 말을 들은 고은영은 숨이 가빠졌다.나태현은 손에 든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말했다.“10억, 어때요?”“아니, 그게 아니라…”“20억.”“뭐라고요?”그는 미친 게 분명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안지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나씨 가문 핏속에는 진짜 광기가 흐르는 게 틀림없어.’나태현의 말투는 아주 단호했다. 마치 오늘 꼭 이 집을 사고야 말겠다는 듯한 기
원래는 조용히 자리를 뜨려던 안지영이었지만 고은영의 분노에 찬 목소리를 듣자마자 깜짝 놀라서 황급히 앞으로 다가갔다.“은영아...”그녀는 원래 고은영을 달래주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막상 입이 열자 위로의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나씨 가문 사람들은 참으로 특이하기 그지없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벌써 석 달이 지났는데 그동안은 의외로 잠잠했기 때문이다.량천옥이 예전의 일을 모조리 들춰낸 이후로는 별다른 소문조차 들려오지 않았던 데다가 나태웅도 동안에서 돌아오지 않아서 안지영에게는 오히려 한동안 조용한 나날이 이어졌다.그렇게 차츰 나씨 가문 사람들의 존재마저 잊어갈 무렵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보게 된 나태현이 하필 이런 꼴이라니...‘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고은영은 원래부터 나씨 가문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품고 있었는데 이번 일로 기름에 불을 붙인 셈이었다.“진정해. 괜히 화를 내서 몸 상하지 말고...”결국 안지영이 겨우 이 한마디밖에 하지 못했다.고은영의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저 사람이 뭘 잘했다고 우리 집에서 술을 마셔? 무슨 자격으로?”“...”무슨 자격이냐니... 그야 나씨 가문 사람이란 이유 하나면 족했다. 그들은 항상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했으니 말이다. 마치 예전에 나태웅이 그랬듯,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아도 그들에게 물어뜯기는 건 순식간이었다.그때 배준우와 장선명은 2층으로 올라가 나태현을 데려가려 했다. 본래 끼어들 생각이 없던 안지영도 고은영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사실 그녀가 이 상황에서 발을 빼고 싶은 건 당연했다. 나씨 가문 사람들은 한 번 엮이면 놓아주지 않는 참으로 끈질긴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예전에 한 번 당한 경험이 있었던 터라 이번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지영은 고은영 뒤에 바짝 붙어 섰다.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눈앞의 광경을 확인한 고은영이 비명이 섞인 외침을 터뜨렸다.“여보...”배준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장선명은 이미 한 번 이 방에 다녀간 터라, 크게 놀라지 않았
고요하던 밤공기를 가르듯, 점점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고은영은 단지 정문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걸 느꼈다.뒤를 돌아보자 배준우가 숨을 몰아쉬며 급히 달려오고 있었고 그 뒤엔 굳은 표정을 한 진청아도 따라붙고 있었다.고은영은 전화를 끊고 그를 향해 다가갔다.“여보...”배준우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안지영에게도 시선을 돌려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두드려주었다.고은영은 그의 품에서 물러나며 긴장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선명 씨가 먼저 올라갔어요.”“나도 올라가 볼게.”배준우는 잠시 눈빛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고은영은 아무 말 없이 그의 결정을 따랐다.배준우는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며 진청아에게 말했다.“여기서 은영이 좀 봐줘.”“알겠어요.”진청아도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이 일은 누가 봐도 석연치 않았다. 고은영이 한 번도 머문 적 없는 이 집에 전등이 일주일 넘게 켜져 있었다는 건 이상한 상황이었다.배준우가 엘리베이터 입구에 막 도착했을 무렵, 안에서 장선명이 무거운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그를 본 배준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무슨 일이에요? 위에 누가 있어요?”장선명은 대답하지 않은 채,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직접 올라가서 보세요.”그 애매한 말투에 배준우는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서 그는 장선명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장선명이 내려온 걸 본 고은영과 안지영도 급히 그쪽으로 다가왔다.안지영이 그 옆에서 조심스레 물었다.“그래서 누가 있어요?”고은영 역시 긴장한 눈빛으로 장선명을 바라보았고 배준우까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그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며 말을 내뱉었다.“하... 진짜, 나씨 가문 사람들 꼴 보기 싫어 죽겠네.”“뭐라고요?”고은영과 배준우가 동시에 얼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나씨 가문이라니?’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뒤, 다시 장선명을 바라봤다.“나태현 씨가 있더라고요. 술을
한 시간 후, 세 사람은 함께 그린빌 단지로 향했다.가는 길 내내, 고은영은 배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황당한 상황을 들은 배준우는 단박에 말했다.“당장 집으로 돌아가.”하지만 지금의 고은영에게 냉정함이란 없었다. 머릿속은 온통 안지영의 말 한마디로 가득했다.“혹시 네 언니 아냐?”정말, 정말 고은지였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 그 희망 하나만으로 그녀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그린빌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날이 어두워진 뒤였다. 고은영과 안지영은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의 집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정말로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었다.그 순간, 고은영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지영아...”“응, 나도 봤어.”안지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거실뿐만 아니라 주방과 침실까지 온통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오기 전까지만 해도 안지영은 고은지가 살아 있다면 이미 연락을 줬을 거라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지금 도둑이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이상했다.‘대체 어느 도둑이 이렇게 대놓고 모든 불을 켜두겠어?’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고은영의 눈은 멍하니 비어 있었고 안지영은 살짝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잠깐만, 먼저 올라가지 말고 있어 봐.”그때 장선명이 차를 세우고 다가왔다. 그리고는 두 사람처럼 고개를 들어 고은영의 집을 바라보았다.장선명은 정확한 집주소는 알지 못했지만 안지영의 시선을 따라 위를 쳐다보았다. 이 아파트 단지는 입주율이 꽤 높아서 대부분의 집에 불이 켜져 있었다.“은영아, 언니한테 전화라도 해보는 게 어때?”안지영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제야 고은영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맞다... 전화부터 해야지.”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고은지의 번호를 눌렀다.‘은지 언니... 정말 집 안에 있는 사람이 언니라면 얼마나 좋을까?’통화 연결음이 울리고 이내 기계적인 멘트가 흘러나왔다.“고객님의 전화기는 현재 전원이 꺼져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차가운 음성이, 마치 찬물을 끼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특히 장선명의 눈에 온통 안지영으로 가득한 걸 본 고은영은 새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정말 다행이야. 지영이가 함께하는 사람이 선명 씨라서... 만약 나태웅 씨랑 엮였더라면...’고은영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나태웅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은영의 마음속에는 본능적인 거부감과 함께 재수 없다는 단어가 자동으로 떠올랐으니 말이다.그때, 휴대전화가 진동했다.휴대폰을 꺼내어 화면을 바라보자 모르는 번호였다. 어딘가 낯익으면서도 생소한 숫자에 곰곰이 떠올려보니 예전에 란완 리조트 근처에 있는 그린빌 쪽 부동산 전화번호 같았다.입주 당시에는 한두 번 연락한 적 있었지만 이후에는 그곳에 살지도 않았기에 연락할 일도 없었다.고은영의 눈빛에 잠시 부드러운 기색이 스쳤다. 그린빌은 그녀가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얻어낸 소중한 공간이었다.그녀는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고은영 씨 맞으신가요?”“네, 맞습니다.”“최근에 집에 다녀가신 적 있으신가요?”고은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혀요.”“그렇다면 혹시 집에 머무는 다른 가족이나 지인이 있으신가요?”“없는데요? 무슨 일이죠?”상대방의 의문스러운 질문에 고은영은 점점 불안해졌다.“사실은... 최근 들어 매일 밤 고은영 씨 댁의 불이 켜져 있어서요. 관리 시스템을 통해 확인했는데 입주자 출입 기록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길래 이상하다 싶어서 확인차 연락드렸습니다.”“불이 켜진다고요?”“네. 매일 밤이요.”고은영은 미간을 찌푸렸다.‘집에 가지도 않았는데, 불이 켜진다고?’“혹시 최근 들어 그런 건가요?”“정확히는 지난 일주일 내내입니다.”‘일주일? 누가 그 집에 다녀간 거지? 설마 조보은인가? 말도 안 돼. 이미 비밀번호도 바꿔서 들어갈 수 있을 리 없잖아...’‘그렇다면 누구지? 혹시 도둑인가?“고은영 씨, 계속 듣고 계신가요?”전화기 너머로 관리인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려왔다.고은영은 정신을 수습하며 급히 대답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