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말이야, 혹시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 언젠가 백연신 씨가 이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고... 어떻게든 데려가겠다고 나오면 어떡할 거야?”임유진이 조심스레 물었다.한지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이는 내 아이야. 절대 누구한테도 넘겨줄 생각 없어.”“하지만 법적으로 싸울 수도 있어. 그리고 양육권을 되찾을 가능성도 있잖아.”임유진이 차분하게 말했다.“예전에 이경빈 씨가 유미 언니한테 소송 걸었던 거, 기억나? 윤이 양육권 뺏으려고 했던 거 말이야.”그 말에 한지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디저트 포크도 허공에서 멈췄다.“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어?”한지영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만약 백연신 씨가 진심으로 그렇게 하려 하고, 최고 실력의 변호사를 붙인다면... 아이가 두 돌을 지난 후부터는 양육권을 놓고 충분히 다툴 수 있어. 절반 정도의 가능성은 되지.”한지영은 이를 꽉 악물고 두 손을 무의식적으로 꽉 움켜쥐었다.임유진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지영아, 만약 정말 그런 상황까지 가게 된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반드시 널 도울게. 그런데... 너랑 백연신 씨, 왜 이렇게까지 멀어졌는지 모르겠어. 그날만 해도, 너 그 사람과 다시 시작해보려던 거 아니었어?”“이젠 무리야. 다시 시작할 수 없어.”한지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했다.“아마 그 사람은... 날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을 거야.”한지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처음에는 그 사람이 고은채랑 헤어진 게 진심이라고 믿었어. 고은채를 처음부터 사랑한 적 없었다고, 그저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거든. 나한테 공정함을 되찾아주고 싶었다고 해서... 나도 바보같이 그 말을 믿었지. 그런데 결국 다 거짓말이었어.”“그게 무슨 뜻이야?”임유진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그날, 내가 연신 씨를 찾아갔는데... 고은채가 그 별장으로 들어가는 걸 봤어. 그리고 다음 날 아침까지 나오는
임유진의 소매 밖으로 드러난 피부는 어느새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강지혁은 조심스럽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잠깐 눈 좀 붙여. 이따 강씨 저택에 도착하면 깨울게.”그러자 임유진은 눈을 살며시 내리깔며 물었다.“설마... 또 내가 널 못 찾게 하지는 않겠지?”이번에 강지혁을 찾을 수 있었던 건 우연 같은 기적이었다.그런 일이 두 번 다시 반복된다면... 임유진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안 그래.”강지혁은 단호히 말했다.“그러니까 편히 자.”강지혁의 짧지만 확고한 대답은 임유진의 불안을 조용히 잠재웠다.하룻밤 사이, 너무 많은 감정이 몰아쳤고, 지친 몸과 마음은 더 이상 버틸 힘조차 없었다.그렇게 임유진은 천천히 눈을 감았고,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강지혁은 옆에서 그녀의 잠든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는 쉽사리 가시지 않는 생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차는 묵묵히 강씨 저택을 향해 달려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저택 입구에 도착했지만, 강지혁은 임유진을 깨우지 않았다. 대신 살며시 품에 안아 침실까지 조심스레 데려갔다.그리고 침대 위에 그녀를 누인 뒤,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섰다.그의 시선은 잠든 임유진에게 오래 머물렀고, 낮지만 단단한 목소리가 조용히 공간을 울렸다.“유진아... 난 그 여자를 용서할 수 없어. 그러니까 제발, 이제 더는 그녀를 위해 부탁하지 마... 응?”그의 말은 얼핏 경고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말 못 할 간절함이 섞여 있었다....며칠 뒤, 한지영이 임유진을 찾아왔을 때, 임유진의 얼굴은 온통 근심으로 물들어 있었다.“무슨 일이야? 무슨 일 생긴 거야?”한지영은 당장이라도 뭔가 행동에 나설 기세로 물었다.한지영의 눈에 비친 임유진은 이제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강지혁의 사랑, 되찾은 아이들, 그리고 강씨 저가문의 안주인 자리까지... 누가 봐도 순탄한 길을 걷고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하지만 임유진은 무거운 표정으로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
하지만 강지혁은 수없이 자신을 속이며 임유진의 말이 진심이길 바랐다. 설령 그 말이 거짓이라도 믿고 싶었다.그녀의 말, 그 눈빛이...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진짜였기를.그렇게 애써 자신을 속이며 살아왔다.하지만 지금, 선택의 기로 앞에 선 순간... 그 모든 믿음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허울뿐인 진심은 마치 얇은 유리처럼 작은 충격에도 산산조각 났고, 이제 그는 더는 자신조차 속일 수 없었다.“돌아가. 오늘 밤은... 혼자 있고 싶어.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강지혁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싸늘했다.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따뜻한 온기가 그의 등을 조심스레 감싸안았다.임유진이었다.그녀는 조심스레 다가와 망설임 가득한 두 팔로 그를 안고 조용히 이마를 그의 등 위에 기댔다.강지혁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바람도 숨결도 멎은 듯, 고요한 적막 속에서... 임유진이 그 침묵을 깨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사모님을 위해서라면, 더는 너에게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을게. 하지만... 혁아, 스승님 부부는 내게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분들이야. 넌 모를 거야. 내가 기억도 잃고 어린 딸 하나만 안은 채 낯선 도시에서 버텨야 했던 그 시간들을...”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그 떨림은 절절한 진심 그대로였다.““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도시에서 기억도 잃고 어린 딸 하나만 안고 버텨야 했던 날들. 그 막막함 속에서...처음으로 숨을 쉴 수 있게 해준 게 바로, 스승님과 사모님이었어.”말을 마친 임유진은 잠시 숨을 골랐다.그리고 이윽고, 강지혁의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마치 지금 이 품이 무너질까 두려운 사람처럼... 더는 말을 잇지 못할까 봐 그에게 온몸을 기대었다.“넌 어떻게든 사모님께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겠지. 그렇지만 우리... 법대로 하자.네 어머니가 너에게 중상을 입힌 일,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네 아버지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것까지... 그 모든 걸 정의로 판단하게 하자. 응?”그녀는 누구보다
고요한 밤공기 속,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순간, 임유진은 마치 시간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도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문득, 처음 그를 마주했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그때도 그랬다. 그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고, 깊고도 매혹적인 눈동자 속엔 단 한 줌의 온기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얼음처럼 차가운 공허함만이 그 안에 고요히 자리하고 있었다.“혁아... 미안해.”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밤공기를 가르며 퍼졌다.그의 시선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잠시의 정적 끝에 조용히 물었다.“미안해? 나한테 뭘 그렇게 미안한데?”“오늘... 그렇게 무릎 꿇고 부탁한 거, 정말 미안해. 네가 어머니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잘 알면서도, 그걸 알면서도, 내가... 계속 용서해 달라고 부탁했으니까.”임유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그 어떤 날보다 혼란스러웠던 오늘, 임유진은 처음으로 이토록 모순된 감정 앞에 무력감을 느꼈다.스승님 부부는 그녀에게 은인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들을 돕지 않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동시에, 그 누구보다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 사람은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 강지혁이었다.세상이 뭐라 해도, 그녀의 마음속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언제나 강지혁이었다.임유진은 조심스럽게 다가섰다.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이제 둘 사이엔 고작 한 발짝의 거리만이 남아 있었다.“혁아, 제발... 날 용서해 줘.”그 말에 강지혁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그 깊고 차가운 눈동자가 그녀의 눈을 정확히 응시했다.그 안에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슬픔, 분노, 실망,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 기대.“나한테... 용서를 바란다고?”임유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강지혁이 돌연 물었다.“그럼, 넌 날 얼마나 사랑하는데?”그 질문에 임유진은 순간 숨을 삼켰다.대답을 하기도 전에 한 장면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
“그러니까... 지금 더더욱 찾아야 해요!”임유진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지금 당장 강지혁을 찾아야 했다.지금 사과하지 않으면 오해는 더 깊어질 것이고, 끝내 돌이킬 수 없는 틈이 생겨버릴지도 모른다.“그럼 제가 차량을 준비하겠습니다.”집사가 서둘러 말했다.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시에 있을 때 이미 운전면허를 다시 취득했고 운전도 해 봤지만, 지금처럼 마음이 복잡하고 불안한 상황에서는 운전대를 쥐는 것보다 기사에게 맡기는 게 더 나았다.차는 곧 준비되었고, 임유진은 기사와 함께 먼저 GH 그룹 본사 건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강지혁을 찾을 수 없었다.임유진은 곧바로 별장 중 하나로 향하자고 지시했다.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차가 낯선 길로 접어들었고, 임유진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왜 직진 안 하고 돌아가요?”“내비게이션에 앞쪽 도로가 통제 중이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돌아가는 중입니다.”“통제?”임유진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앞에 있는 그 길... 거긴 강지혁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장소였다.그리고 바로 그날 밤, 자신이 처음으로 강지혁과 마주쳤던 곳.그때 그는 길가에 서 있었고, 그 거리 전체를 통제한 채 홀로 있었다.‘혹시... 지금도?’“그쪽 길로 가요. 통제된 그 거리로.”임유진이 단호히 말했다.기사는 곧장 방향을 틀었고 차량은 조심스럽게 그 거리로 진입했다.그리고 골목 어귀.역시나 길은 바리케이트로 막혀 있었고, 그 뒤편엔 낯익은 차량 한 대가 주차돼 있었다.강지혁의 차였다!임유진은 급히 차에서 내렸다.그리고 곧 한 사람이 그녀 앞으로 걸어 나왔다.하지만, 그녀가 기대한 사람은 아니었다.“사모님.”고이준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혁이, 여기 있어요?”임유진이 다급히 물었다.“예, 저쪽 앞에 계십니다.”임유진은 숨을 가다듬고 발을 떼려 했지만, 고이준이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아섰다.“회장님께서 오늘은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사모님도 예외
“현이는 해원이를 친구라고 생각해!”적어도 임유진이 보기에는 딸아이의 마음은 진심이었다.그리고 어떤 친구는 평생 함께할 수도 있는 법이니까.하지만 강지혁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그래? 그럼 두고 보자고. 현이가 진해원을 친구로 여기는지, 그냥 장난감으로 생각하는지.”결국, 이 문제는 결론 없이 묻혀버렸다.임유진은 몇 번이나 현이를 타일러 보려 했다. 더 이상 진해원의 방에 가서 자지 말고, 제 방에서 자라고 설득해 보았지만... 말로는 듣는 척하다가도, 결국엔 소용이 없었다.밤에는 분명히 자기 방에서 잠든 듯 보여도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꼭 진해원의 방에서 현이를 찾아야 했다.다행히 아직 아이들은 다섯 살.결국, 임유진은 당장 이 상황을 고치긴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성장이 더딘 시기이기도 하니 조금은 더 느긋하게 지켜보기로 했다.그 시각, 율이는 아직 잠들지 않은 채 침대 위에서 두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그 아이의 커다란 눈동자엔 익숙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강지혁과 꼭 닮은, 그 깊은 눈빛.“왜, 우리 율이는 아직 잠이 안 와?”임유진이 다가가며 부드럽게 물었다.“엄마가 이야기 읽어줄까?”율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물었다.“엄마, 혹시... 아빠랑 싸운 거예요?”뜻밖의 질문에 임유진은 순간 얼어붙었다. 그러고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왜 그렇게 생각했어?”“어제 아빠가 오늘은 일찍 들어온다고 했는데, 안 왔잖아요. 전화해도 안 받으시고... 그리고 오늘 엄마 표정이 계속 슬퍼 보여요. 웃고 있어도 슬퍼 보여요.”그 말에 임유진은 마음이 아릿해졌다.자신이 애써 감췄다고 생각한 감정이 고작 다섯 살짜리 아들의 눈에 그대로 비친 것이다.“엄마랑 아빠, 괜찮아. 조금 의견이 달랐던 것뿐이야. 걱정 안 해도 돼. 금방 화해할 거야.”임유진은 아들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으며 안심시켰다.하지만 율이는 여전히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정말로... 아빠랑 화해할 수 있어요?”“응, 정말이야.”임유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