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보다 너는 정말 괜찮은 거 맞아?”강지혁이 임유진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물었다. 그는 아까 미친 듯이 차를 몰아 산으로 향했을 때도 방금 강현수를 끌어올렸을 때도 줄곧 임유진 생각뿐이었다.“나는 괜찮아. 그런데 겸이가... 진세령이 무슨 약을 먹였는지 좀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그래, 진세령! 진세령을 잡으면 알 수 있을지도 몰라!”강지혁은 잔뜩 흥분한 임유진을 단숨에 안아 들며 말했다.“진세령은 이미 잡아뒀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고문을 해서라도 겸이한테 무슨 약을 먹였는지 꼭 알아낼 테니까.”임유진은 그 말에 그제야 천천히 진정하며 머리를 강지혁의 품 쪽으로 기댔다. 익숙한 냄새를 맡고 있으니 긴장했던 몸도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을 안아 든 채 산 아래로 걸어갔고 고이준과 몇 명은 겸이와 율이를 데리고 그 뒤를 따라갔다.“괜찮으십니까? 저희가 업어드릴까요?”강현수의 근처에 있던 경호원들이 물었다.“혼자 걸어갈 수 있어요.”강현수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고 이에 경호원들도 조용히 뒤를 지키며 그를 천천히 따라갔다.내려가는 길, 강현수는 줄곧 임유진과 강지혁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딱 한걸음 늦은 것뿐인데 이제는 그 거리가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벌어졌다.아무리 노력해봐도 임유진의 마음속에는 강지혁밖에 존재하지 않았다.만약 그때 강지혁보다 한발 먼저 임유진을 찾아냈으면, 만약 그때 질투 같은 유치한 감정 따위 배제하고 딱 한 번만 임유진의 말을 들어줬으면 어쩌면 임유진은 강지혁과 결혼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물론 이런 식의 가정은 전부 자기 위로밖에 안 된다는 걸 강현수는 알고 있다.하지만 이렇게 못난 자신이라도 임유진은 목숨을 다해 구해주려고 했다. 그가 사랑한 여자는 이렇게도 미련할 정도로 착하고 또 다정한 사람이었다.평생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이라도 그는 임유진을 사랑한 게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강현수는 왼손을 들어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꽉 움켜쥐
“믿어! 아무리 기억을 잃었어도 혁이는 날 구하러 올 거야. 분명히... 지금쯤 사람들 데리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 빨리... 빨리 내 손을 잡아. 나 정말 더 이상은...”임유진은 손을 덜덜 떨며 애원하듯 강현수에게 부탁했다.하지만 강현수는 여전히 잡을 생각이 없어 보였고 이에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겸이를 한번 보더니 이를 꽉 깨물며 나머지 한 손도 아래로 내밀었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강현수의 손을 꼭 잡았다.양손을 전부 다 아래로 내린 탓에 임유진의 상체는 한 순간에 앞으로 쏠려버렸다. 만약 지금 상황에서 폭탄이 한 번 더 터지면 그때는 두 사람 모두 아래로 떨어질 수 있었다.“손 놓으라니까 뭐 하는 거야!”강현수는 임유진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이대로 가다가는 너도 떨어져!”“알아!”임유진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한가득 맺혀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잖아. 지금 이대로 손을 놓아버리면 나는 아마... 평생 후회할 거야. 너 구하지 못한 거 평생 후회할 거라고! 그러니까 너도 버텨... 윽... 사람들 올 때까지 버텨!”임유진의 땀방울이 강현수의 얼굴 쪽으로 뚝뚝 떨어졌다.꼭 그때처럼.그때도 그녀는 이런 식으로 그의 손을 꼭 붙잡고 이를 꽉 깨물며 어떻게든 위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임유진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강지혁이 사람들을 데리고 뛰어왔을 때 임유진은 여전히 강현수의 손을 꽉 붙잡고 있었고 이제는 거의 상체 전부가 다 아래로 떨어질 듯한 지경에 도달했다.정말 한순간이라도 힘을 빼거나 하면 언제든지 두 사람 다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그 광경을 본 강지혁은 순간 가슴이 찌릿하며 아파 왔지만 그것도 잠시 얼른 두 사람 쪽으로 다가가 한 손으로는 임유진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강현수의 손목을 잡았다.“혁아!”임유진은 강지혁의 등장에 활짝 웃으며 그제야 안심한 표정을
그때 폭탄 하나가 세 사람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터졌고 그 여파로 돌과 나무들이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강현수는 거의 본능적으로 임유진의 앞을 막아서며 겸이를 꽉 끌어안았다.“윽!”고통에 찬 그의 신음에 임유진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아요?! 많이 아파요?”“...괜찮아. 빨리 움직여.”강현수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지만 애써 괜찮은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몸을 다시 일으키며 다시 앞으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발밑의 무너지더니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폭탄으로 인해 지반이 약해진 탓이었다.강현수는 빠르게 겸이를 다시 임유진에게 넘겨준 다음 그녀의 등을 세게 밀어 안전한 곳으로 보냈다.그 덕에 임유진은 단단한 땅으로 갈 수 있었지만 강현수가 있던 곳은 빠르게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이대로 죽는 건가...?’강현수는 자신의 죽음이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하지만 임유진을 구하기 위해 죽은 거라면 가치 있는 죽음이라고 여겨도 될 것 같았다. 그녀가 힘들어할 때 한번도 곁에 있어 주지 못했으니까.지금 이건 어쩌면 하늘이 그의 아쉬움을 달래주기 위해 선물한 상황인지도 모른다.강현수는 체념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죽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그런데 그때 강력한 힘이 그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추락하던 몸을 단번에 멈추게 했다.익숙한 느낌에 강현수가 눈을 번쩍 떠보니 가녀린 손으로 있는 힘껏 그의 손목을 잡아당기는 임유진의 얼굴이 보였다.하지만 두 사람의 무게로 봤을 때 임유진이 그를 끌어올릴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웠다.“빨리... 빨리 내 손 잡아요! 나 지금 힘이 점점 빠지고 있으니까... 빨리!”임유진이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가뜩이나 오랜 상처로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손인데 떨어지는 강현수까지 잡으려고 하니 점점 더 힘이 빠져갔다.강현수는 고통으로 가득 일그러진 임유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녀의 손이 어떤 상태인지는 소영훈으로부터 정확히 들은 바 있었다. 지금
고이준은 순간 5년 전의 강지혁이 떠올랐다. 그때도 강지혁은 임유진을 구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죽음을 택하며 기폭 장치의 버튼을 눌렀다.경호원들은 강지혁의 말에 더 이상 다가가지 못했고 강지혁은 그사이 빠르게 액셀을 밟으며 폭탄 음이 연이어 울리는 산 쪽으로 향했다.“회장님 뒤를 따라!”고이준의 외침에 다시금 정신을 차린 경호원들은 지시대로 하나둘 차에 올라 강지혁의 차량을 따라갔다.집 안에 있던 진세령은 얼이 빠진 얼굴로 창문을 통해 강지혁의 차량을 바라보았다.‘임유진을 구하러 가는 거야? 죽을지도 모르는데?’그녀의 언니가 그토록 바라던 애정을 임유진은 너무나도 쉽게 가져버렸다.“언니, 보여? 언니가 사랑했던 남자도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인간이었어. 하하하... 하하하...”진세령은 빈정거리며 점점 더 크게 웃었다.“지금 이 상황을 언니가 직접 두 눈으로 봤어야 하는데. 나중에 그쪽으로 가면 아주 실컷 비웃어 줄 거야. 언니는 엄마와 아빠 말고 그 누구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했다고.”진세령은 진애령을 생각하며 한참을 웃어젖히다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집안의 재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언니의 목숨을 빼앗고 소민준을 곁에 두기 위해 임유진을 감옥에까지 보내버렸는데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는데 그녀는 점점 더 비참한 몰골이 되어갈 뿐이었다.“안 돼. 이렇게 끝나서는 안 돼. 적어도 임유진은 나랑 똑같아 져야 해. 강지혁, 넌 임유진 못 구해. 이번에는 절대 네 뜻대로 안 될 거야...”진세령은 저주가 한가득 담긴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폭발 소리는 여전히 끊임없이 들려왔고 임유진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겸이를 품에 꼭 끌어안으며 최대한 몸을 낮춘 채 앞으로 뛰었다.다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겸이만은 어떻게든 산 아래로 데려다줘야 했다.하지만 정신없이 휘날리는 먼지 때문에 시야는 이미 흐릿해졌고 돌과 나뭇가지들은 아프게 그녀의 몸을 때렸다.‘제발... 제발
하지만 실상은 아무도 없어야 할 집 앞은 현재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들로 완전히 포위되어버렸고 강지혁은 그녀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왜, 왜 네가 여기 있어! 그럼 산 아래에 있는 건 누구야! 왜... 왜!”진세령은 많이 당황했는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너만 가짜 신분을 만들고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나 보지? 그딴 영상 조작하는 건 1분이면 충분해.”강지혁은 싸늘한 눈빛으로 진세령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널 도와주던 두 명도 이미 잡혔어. 네가 이길 줄 알았던 게임은 네 패배로 완전히 끝났어. 이제부터 너는 지난날의 빚과 오늘의 빚을 전부 다 합산한 지옥보다 더한 지옥에서 살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거 거든.”진세령은 강지혁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다.강지혁이 잡은 두 명의 남자는 진세령이 배우로 활동했을 때부터 쫓아다녔던 열혈 팬으로 그중 한 명은 현재 경찰에서 수배 중인 범죄자이기도 했다.이번 일은 셋이서 함께 계획한 것이기에 두 사람이 잡혔다는 건 모든 계획이 다 발각됐다는 뜻이었다.“이제 끝이야.”강지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경호원 두 명이 다가와 진세령을 빠르게 제압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탁자 위에 있던 리모컨을 회수하고 임유진과 연결된 휴대폰을 강지혁에게 가져다주었다.강지혁은 전화를 건네받자마자 임유진의 이름부터 불렀다.“유진아, 내 말 들려? 지금 바로 위쪽으로 사람을 보낼 테니까 겸이 데리고 조금만...”그런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갑자기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단지 휴대폰으로만 들린 것이 아니라 산속에서 시작된 폭발음이 방 안 전체에 선명하게 전달됐다.“유진아! 유진아!”강지혁은 휴대폰을 꽉 말아쥐며 임유진의 이름을 간절히 불렀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봐도 임유진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하하하! 꼴 좋네. 나만 잡으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어? 폭탄이 리모컨으로 조작해야만 터진다고 생각했나 보지? 하하하. 그 폭탄은 애초에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터지게 세팅되어 있었어.”
“애한테 뭘 먹였는지는 네가 돈을 입금한 게 확인되고 우리도 무사히 이곳을 벗어나면 그때 알려줄게. 우리도 보장 같은 게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너희들이 한 말 지키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가만 안 둬.”임유진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곧바로 노트북을 켜며 입금을 진행했다.요구대로 200억이 입금된 순간, 남자는 겸이를 데리고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임유진이 아이를 건네받으려고 손을 뻗은 그때 남자 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미안해.”“너...!”그때 휴대전화 너머로 폭소와 함께 다시금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하하, 이렇게도 순진해서야. 임유진, 돈은 잘 받았어. 그곳은 내가 널 위해 마련해둔 네 무덤이야! 한때 사랑했던 남자와 함께 거기서 마지막 순간을 잘 보내도록 해봐! 하하하.”“뭐?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로봇 가면을 쓰고 있던 소민준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이건 약속에는 없는 상황이었다.‘진세령,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야!’“말한 그대로야. 앞으로 5분 정도 지나면 거기는 폭발하게 될 거야. 내가 산 곳곳에 어마어마한 양의 폭탄을 심어뒀거든. 너희들이 지금 당장 그곳에서 나와 산 아래로 뛰어간다고 해도 이미 늦었어.”“진세령!”임유진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진세령의 이름을 외쳤다.“역시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구나?”진세령은 조금도 놀랍다는 반응이 아니었다.“난 너희들이 유괴범이 나인 걸 알아챘어도 상관없었어. 내 목적은 강지혁과 너를 떨어트리는 것이었으니까. 강지혁네 사람들은 지금 다 산 아래에 있지? 이제 어떡하나? 강지혁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폭탄이 쫙 깔린 산속에서 널 구해주지는 못할 텐데.”진세령이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임유진, 내가 바라는 게 뭔지 알아? 네가 강지혁 앞에서 죽어버리는 거, 그게 내가 가장 원하는 거야!”“진세령, 돈만 얻으면 된다며! 그런데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거야!”소민준이 가면을 벗어던지며 큰소리로 외쳤다.“너도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