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진기태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다만 진기태는 몸을 비스듬히 한 채 앞이 아닌 사무실 안을 바라보고 있어 임유진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강지혁, 네가 뭘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임유진이 그렇게 된 건 네 탓도 있어!”진기태의 분노 어린 말에 임유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저도 모르게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갔다.그러자 그때 사무실 안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그때는 진화 그룹과 당신 가문을 완전히 없애버릴 거야.”임유진은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은 평소와 달리 분노가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 예쁜 두 눈에 살기도 어려 있었다.‘살기...? 내가 뭘 잘 못 본 건가?’진기태는 강지혁의 위협에 겁을 먹고는 그의 눈을 피하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드디어 임유진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금세 험악한 표정을 지었고 곧바로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강지혁도 그때쯤 임유진이 밖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는 그녀를 보더니 그대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서둘러 분노를 지우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해봤지만 눈가에 서린 당황함과 초조함은 감춰지지 않았다.진기태와의 대화를 들은 걸까?만약 들었으면 어떡하지?임유진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멀리하려고 들면...강지혁은 그 생각에 순간 호흡하는 것조차 곤란해지며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임유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혁아, 방금 진기태 회장이랑...”“일 얘기 했어. 일 얘기만...”강지혁은 서둘러 대답하며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애썼다.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고 호흡은 점점 더 딸리기 시작했다.“너 얼굴이 왜 그래? 괜찮아?!”임유진은 창백한 그의 얼굴이 걱정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얼굴에 닿기도 전에 강지혁에 의해 손이 저지당하고 말았다.“난... 괜찮아.”임유진은 강지
강지혁은 꼭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대체 뭘?혹시 진기태와 연관이 있는 건가?아까 진기태는 분명...임유진은 순간 뭔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들며 그에게 물었다.“혁아, 너 혹시 내가 화낼까 봐 무서워서 이러는 거야?”그녀의 말에 강지혁은 몸은 또다시 굳어졌고 호흡도 다시 거칠어졌다.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 조금 더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정답인가 보네.’강지혁은 지금 진기태가 마지막에 한 말 때문에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다.‘하긴 아까 엄청 세게 화를 내기는 했지.’강지혁은 아까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모습으로 진기태를 협박했다.꼭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 건드려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화 안 낼 거니까.”강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임유진에게 물었다.“정말...? 정말 화 안 내?”“응. 안 내.”임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진 회장이 너 찾아온 거 진가원 프로젝트 때문이지? 네가 내 복수를 해주겠다고 이러는 거, 나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고작 그 사람 말 때문에 우리 사이가 흔들릴 일은 없으니까.”강지혁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 인간이 했던 말, 정말 신경 안 써?”“응. 그때는 너도 내가 누군지 몰랐을 때잖아. 그때의 나는 그저 너한테 네 약혼녀를 차로 죽인 사람일 뿐이었어. 너한테 잘 보이겠다고 사람들이 일부러 나를 더 괴롭히기는 했지만 그게 네 탓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 원망할 생각 없어.”임유진은 강지혁을 빤히 바라보며 그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사실 너랑 사귀고 너를 정말 사랑하게 됐던 순간부터 나는 그 일을 이미 내 마음속에서 지웠어. 그리고 너도 그랬잖아. 만약 조금만 더 빨리 나를 알게 됐으면 절대 내가 그런 고통을 겪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그녀의 말에 강지혁의 눈빛이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그녀는 그가 무서워하는 게 그저 그 이유일 뿐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방관한 것으로 여태 이렇게까
“하지만...”임유진은 말을 하려다가 순간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끌어안았다.“왜 그래?”강지혁이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다.“방금 아이가 내 배를 찼어!”임유진은 이쯤이면 태동이 느껴질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전까지는 거의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태동이 미약했는데 방금 그건 정말 누가 뭐라 해도 확실한 태동이었다.심지어 지금도 계속해서 배를 차고 있다.“아이가 네 배를 찼다고?”강지혁은 시선을 그녀의 배로 옮겨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응! 한번 만져봐.”임유진은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복부를 만지게 했다.강지혁은 확실하게 느껴지는 태동에 조금 놀랍기도 하고 또 신기하기도 해 그만 몸이 경직되어버렸다.태동이라는 게 무엇이고 언제쯤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그도 임유진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하지만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으로 실제로 이렇게 태동을 느끼게 되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이제야 진정으로 이 작은 배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머리에 박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이 조그마한 아이들은 머지않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거고 크게 울고 또 활짝 웃으며 서서히 커가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넋을 잃은 표정에 피식 웃었다.평소에도 물론 상당히 귀엽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귀여워 보였다.이런 얼굴은 아마 그녀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녀밖에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임유진은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아이가 차고 있는 곳이 어딘지 그의 손을 이곳저곳 움직이며 알려주기 시작했다.아이들은 큼지막한 아빠의 손길을 느껴서 그런지 그에 보답하듯 더 세게 발길질을 해댔다.덕분에 임유진의 배는 계속해서 꿈틀거렸다.강지혁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복부를 쓰다듬으며 진지한 얼굴로 태동을 느꼈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갑자기 사진은 왜 찍어?”강지혁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기념하려고. 나중에
네티즌들은 공수진과 주원호에게 각종 비난과 욕을 해댔고 대대적으로 기사가 난 탓에 병원 관계자들도 공수진의 병실을 지나칠 때마다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공수진은 그들의 눈빛에 제대로 고개를 들 수 가 없었고 이를 깨물며 하루빨리 퇴원하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드디어 다가온 퇴원하는 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침부터 진을 치고 기다린 기자들이었다.“공수진 씨, 현재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동영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강 그룹 대표의 약혼녀로 알고 있는데 이경빈 씨는 동영상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하시는 겁니까?”“유산한 아이가 이경빈 씨의 아이가 아니라 영상 속 남자분의 아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맞습니까?”“탁유미 씨를 음해하려고 일부러 밀쳐진 척 넘어져 유산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연이은 날카로운 질문에 공수진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버렸다.“찍지 마세요! 찍지 마시라고요!”공씨 부부는 공수진이 지나갈 수 있게 고용한 경호원들과 함께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기자들을 뚫고 간신히 차에 오른 후 공수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탁유미 때문에 이게 뭐야!”만약 탁유미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할 일도 없었을 거라며 그녀는 모든 걸 다 탁유미 탓으로 돌렸다.“일단 S 시를 떠나는 게 좋겠다. 며칠 뒤에 사태가 조금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경빈이 불러서 얘기하는 거로 해.”공한철의 말에 차량은 고속도로로 향했다.그렇게 20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모를 검은 차들이 거리를 바짝 좁혀오며 공수진네 차를 에워싸기 시작했다.끼익.“뭐야, 저것들은!”공한철이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정차된 앞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공씨 일가를 막아선 건 다름 아닌 이경빈이었다.이경빈이 내리자 검은 차에서 내린 부하직원들이 하나둘 공수진 일가를 차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경, 경빈 씨,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공한철은 이경빈의 기에 눌려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경빈 씨, 혹시 아직도 화 나 있는 거예요? 기증 일은 내가 거짓말한 게 맞지만 그건 다 경빈 씨를 사랑해서 그런 거예요. 나는 경빈 씨가 나를 모르고 있을 때부터 쭉 경빈 씨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아니,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짓말도 무릅쓰고 내가 기증해줬다고 한 거예요! 내가 경빈 씨를 속인 건 맞지만... 그게 범법 행위까지는 아니잖아요...”공수진은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을 했다.이에 이경빈은 시선을 돌려 공수진을 빤히 바라보았다.“내가 아닌 우리 집안을 사랑하는 거겠지. 더 정확히는 우리 집 재산을. 공수진, 네 그 욕심 때문에 나는 인생이 망가졌어!”“거짓말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시작해요. 네?”공수진은 전과 같은 유약한 얼굴을 하며 그를 붙잡았다.“나 정말 경빈 씨 사랑해요. 경빈 씨 속상하게 만든 거 내가 다 잘못했어요. 탁유미 씨한테 사과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사과할게요. 보상도 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잘해봐요. 나 정말 경빈 씨 없으면 못살아요!”“사랑이라고? 사랑한다는 사람을 그렇게도 감쪽같이 속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까지 주면서? 탁유미를 범죄자로 몰아가 결국 감방에까지 보낸 게 나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야? 탁유미만 사라지면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오는 게 쉬울 것 같았어? 그래?!”이경빈은 공수진을 턱을 으스러질 듯 잡으며 분노를 표출했다.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공수진은 자신의 턱뼈가 이대로 부서질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경빈이 그때 당시의 진상을 모두 알아버렸다는 것에 그녀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어떻게 된 거지? 이경빈이 그때 일을 다 알아버렸다고? 증거는 이미 내가 다 소거했는데?! 그래, 그냥 추측일 뿐일 거야. 실질적인 증거는 없는 게 분명해!’“오, 오해예요.”공수진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나는 탁유미 씨를 범죄자로 몰아간 적 없어요. 나는
철썩.둔탁한 마찰음 소리에 공수진은 휘청거리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옆으로 힘껏 돌아간 그녀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그대로 나 있었다.하지만 공수진은 아픔을 못 느끼는 건지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았다.“그 여자 결백을 찾아주고 싶지? 하지만 그럴 시간은 없을 거야. 네가 찾아주기도 전에 저세상으로 가버릴 테니까!”이경빈은 그 말에 눈을 부릅뜨고 공수진을 노려보았다.“유미가 병에 걸린 걸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공수진은 이경빈의 얼굴을 보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하하하하. 이경빈 너 진짜 등신이구나? 너 정말 그 여자 좋아하는 거 맞아? 그런데 어떻게 나보다 더 몰라?”그녀의 말대로 이경빈은 등신이 맞다. 누가 진정한 은인인지도 모르는데 등신이 아니고 뭘까?그래서 지금 벌을 받는 것이다. 멍청했던 대가를 이제야 받고 있는 것이다.“그래, 나 등신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네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너희 집안은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공수진의 얼굴을 더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성큼성큼 차로 다가갔다.공수진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마치 미친 사람처럼 외쳐댔다.“이경빈, 탁유미가 죽는 날 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내가 꼭 지켜볼 거야! 네가 어떤 말로는 맞이하는...”탁.이경빈은 평소보다 세게 차 문을 닫으며 공수진의 목소리를 차단했다.그는 천천히 눈을 감은 후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병원으로 가지.”“네, 대표님.”차량에 시동이 걸리자 그는 시트에 등을 기댔다.“간암 3기예요. 현재로서는 간이식 수술을 받는 것밖에 언니 목숨을 살릴 길이 없어요. 만약 언니한테 사죄하고 싶다면 언니한테 이경빈 씨 간 일부를 기증해주세요.”임유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간 일부를 기증하라고? 탁유미를 위해서라면 그는 간 전부를 기증할 수도 있다.간암 3기가 어떤 상태인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경빈은 알고 있다.그간 탁유미가 보였던 고통을 참는 듯한 증상은 모두 간에 암이 퍼지고 있는 신호였다.
이경빈은 이제야 그날 탁유미가 웃으며 고맙다고 했던 말의 의미가 뭔지 알아챘다.아주 조금의 감정마저 남지 않게 만든 그에게 철저하게 실망하고 그로 인해 그를 완전히 내려놓게 된 게 틀림없었다.정말 그는 너무나도 멍청한 사람이었다!차량이 멈춘 후 기사는 이경빈에게 도착했다고 하려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대표님, 입술에 피가...!”이경빈은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뜨더니 기사의 시선을 따라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얼마나 세게 깨물었던 건지 입술에 피가 흥건했다.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으로 피를 닦아내더니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입원 병동으로 들어가려는 그때 탁유미와 김수영, 그리고 일전 그녀의 병실을 지켰던 경호원 두 명이 함께 병동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경호원들의 손에 짐이 들려있는 것으로 보아 퇴원하려는 것 같았다.이경빈은 서둘러 그들 앞으로 다가가 탁유미에게 물었다.“퇴원하려고? 벌써?”탁유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경호원들이 빠르게 그를 제지했다.탁유미는 이경빈의 얼굴을 보고는 금방 미간을 찌푸렸다.‘그날 알아듣게 얘기한 것 같은데 왜 또 여기 있는 거야?’“너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비켜.”“하지만 네 몸은 아직 입원해있는 게...!”이경빈은 말을 끝까지 하려다가 멈칫했다.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안색이 갑자기 안 좋아진 것이 이 이상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녀가 아프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며칠 더 입원해있는 게 좋지 않을까? 치료도 안 끝났을 것 같은데.”이경빈은 억지로 말을 끝마쳤다.“필요 없어. 내 몸이 어떤지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탁유미는 싸늘하게 말을 내뱉은 후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잘 안다고? 그런 사람이 이렇게 빨리 퇴원하려고 해? 너 정말 이대로 죽고 싶기라도 한 거야?!”이경빈이 다급하게 그녀의 팔을 잡으려 하자 경호원들이 더 빨리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탁유미는 발걸음을 멈추고 조금 의아한 눈으로 이경빈을 바라보더니 이내
지금의 그는 탁유미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받고 싶었지만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를 몰랐다....탁유미는 김수영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후 강지혁이 붙여준 경호원 두 명에게 집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이만 가봐도 된다고 했다.작은 집이라 건장한 남성 두 명까지 들이게 되면 집이 꽉 찰 테니까.경호원 두 명이 떠난 후 김수영은 창밖을 힐끔 바라보았다.“저거 설마...”그녀는 창밖으로 보이는 이경빈의 차량에 미간을 찌푸렸다.“저거 이경빈 차 아니야? 기어이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엄마,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여기서 밤을 새우든 말든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잖아요.”탁유미의 태도는 무척이나 태연했다.“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런데 갑자기 왜 저래? 뭐 잘못 먹기라도 한 거야?”김수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공수진이 유산한 게 네 탓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고 해도 사과하려고 이렇게까지 할 인간은 아니잖아.”공수진 일은 비단 인터넷에서만 뜨거운 일이 아니었기에 가십거리에는 일절 관심이 없는 김수영도 공수진과 주원호 일에 대해 아주 잘 알게 되었다.“그것도 그거지만 아마 몇 년 전에 골수를 기증해준 게 나라는 걸 알게 돼서 저러는 걸 거예요.”“뭐?!”김수영은 그 말에 깜짝 놀라더니 이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이경빈이었어? 네가 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너한테서 받을 건 다 받아놓고 간 기증 좀 해달라니까 딱 잘라 거절한 인간이 쟤라고? 뭐 이런 배은망덕한 인간이 다 있어?!”김수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이경빈에게 따지려는 듯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엄마!”그러자 탁유미가 서둘러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난 괜찮으니까 그러지 마세요. 기증하겠다고 한 건 나예요.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고요. 이경빈이 간 기증을 거절했다고 한들 배신감이 들 이유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간이식 수술을 받는다고 해서 꼭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수술을 받고 또다시 재발해 수명이 오히려 단축된 케이스도 많아요.”탁유
“응, 말해.”강지혁은 손에 든 서류 자료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임유진과 눈을 맞췄다.“그... 김승수 말이야. 전에 나랑 스승님이 짜고 치고 자기를 감옥살이시켰다고 주장하던 그 사람. 오늘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김승수가 그 일로 나랑 스승님을 고소했더라고. 사건은 이미 검찰로 송치된 상태야. 아마 조만간 검찰 측에서는 그때 사건이랑 스승님 관련해서 나한테 조사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오게 될 거야. 근데... 조사가 시작되면 기자들이 냄새를 맡을 거고 그러면 높은 확률로 헛소문이 돌게 돼. 어쩌면 그 영향으로 GH 그룹에 영향이 갈 수도...”“내가 오해라도 할까 봐?”강지혁이 임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네가 권건우 변호사를 단지 스승으로서 좋아하고 또 존경하고 있다는 거 알아. 오해 안 해. 라온시에 있을 때 너한테 많은 도움이 되어주신 분이잖아. 회사 걱정은 하지 마. 고작 언론에 흔들릴 정도로 나약한 회사가 아니니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의 일로 강지혁에게 피해가 가는 건 정말 너무 싫었으니까. 또한 그가 뭘 오해하는 것도 싫었고 말이다.“네 곁에는 항상 내가 있어. 그러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기대.”임유진은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임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화분 떨어질 때 나 구해줬던 사람, 소민준이야.”아마 강지혁이라면 진작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통해 보고를 받았을 테지만 임유진은 자기 입으로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이 행여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의심이 많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고 있다.“알아.”강지혁은 탁자 위에 내려놓은 서류 자료를 다시 집어 임유진에게 건넸다.“볼래? 소민준에 관한 자료야. 꽤 힘들게 살아온 것 같더라고.”임유진은 그 말에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자료를 건네받았다.자료 안에는 소민준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역시 부끄러워 임유진은 얼른 다른 핑계를 댔다.“밥, 밥마저 먹어야지. 너 아직 다 안 먹었잖아.”“알았어.”강지혁은 그 말에 그제야 손을 풀어주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손은 계속 아팠어?”“전이랑 같지 뭐. 날씨가 추워지면 통증이 좀 느껴져.”“소영훈 선생한테 다시 찾아가서 봐달라고 할까?”강지혁의 입에서 소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소 선생님을... 기억해?”강지혁은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응, 며칠 전에 과거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기억이 났어?”임유진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흥분한 임유진과 달리 강지혁은 꽤 담담한 얼굴이었다.“내가 기억을 다 회복했으면 좋겠어?”“그야 당연히...”임유진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칫했다.강지혁이 예전 기억을 되찾는 게 과연 좋은 건가?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일까지 모두 떠올리게 되면, 강문철이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걸 알게 되면 강지혁은 어떻게 되는 거지?혹 정신 상태가 불안해지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이와 같은 생각에 말하는 것을 주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응?”“혁아,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기억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임유진은 그 언젠가 강지혁이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 날, 강문철 때문에 평생 속에 남을 응어리는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강문철 때문이니까.만약 5년 전 그날 강문철이 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으면 강지혁과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행방불명된 나머지 한 아이를 지금껏 찾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아이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으며 우울해졌다.“나 지금 행복해.”강지혁이 말했다.“너는 어떤데? 너는 내 곁을 떠났을 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글쎄. 솔직히 말하면 기억을 되찾는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