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솔직히 백연신이라는 남자를 이제는 마음에서 지울 수 있을 줄 알았다.실제로 근 몇 년간 점점 지워내기도 했고 말이다. 점점 백연신을 생각하는 횟수가 줄어들고 가끔 그의 얼굴을 떠올려도 전처럼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그래서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그라는 존재를 완전히 마음속에서 도려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더 이상 그 남자로 인한 그 어떤 마음의 동요도 일지 않을 수 있을 줄 알았다.그런데 최근 들어 자꾸 머릿속으로 백연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백연신이 자신을 데리고 교외 아파트로 갔던 것도, 갑자기 키스했던 것도, 백연신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했던 말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생생하게 떠올랐다.백연신 생각을 하다 잠을 설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그간의 노력이 백연신의 등장 한 번으로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버렸다.“백연신 씨와 다시 잘해볼 생각이에요?”연우진이 물었다.“고은채 씨와의 결혼도 파기됐으니 이제는 백연신 씨와 정식적인 연인이 된다고 해도 지난번 같은 일은 없을 거예요.”한지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다시 잘해볼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확실히 알아버렸거든요. 우리 둘의 차이를. 가치관이 서로 맞지 않는 사람끼리 함께 하면 결국에는 지치고 힘들어지기만 할 뿐이에요. 하지만...”한지영은 테이블 아래로 두 손을 꽉 맞잡으며 솔직하게 얘기했다.“하지만 백연신 씨가 여전히 좋은 건 맞아요. 그래서 우진 씨와는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런 마음으로 우진 씨를 만나는 건 우진 씨한테 너무 실례니까요.”“실례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연우진이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지영 씨는 처음부터 나한테 모든 걸 다 얘기해줬잖아요. 아무런 거짓도 보태지 않고. 그리고 나는 지영 씨랑 대화하는 거 즐거워서 좋았어요. 사실 나는 지금껏 여자한테 큰 관심이 없었어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래서 한때는 내가 사실은 남자를 좋아하는
“그냥 갑자기 오고 싶어져서.”강지혁은 임유진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심증만 있을 뿐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었으니까.“왜? 기분 안 좋아?”임유진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내가 기분이 안 좋아서 여기로 온 것 같아?”강지혁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아니야?”“응.”강지혁은 임유진의 팔을 잡더니 이내 자신의 품속에 끌어안았다.“오히려 그 반대야.”“응?”“나는 지금 기분이 상당히 좋은 상태라고.”하겸이 바로 그들이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아이일 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을까.임유진은 아마 그간 그토록 신경을 썼던 아이가 사실은 그녀의 아이라는 게 밝혀지면 분명히 엄청 좋아할 게 분명했다.그때는 정말 진심으로 모든 걱정을 떨쳐낸 채 환히 웃을 수 있을 것이다.임유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일단 강지혁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오늘 뭐 기분 좋은 일 있었어?”“있었지. 네가 오늘 종일 내 곁에 있었잖아.”강지혁은 그렇게 말하며 더 이상 물어보지 말라는 듯 임유진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막아버렸다.만약 강선우가 지금 이 광경을 보고 있다면 분명히 사진 속 모습과 같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것이다.그렇게도 많은 일을 겪고도 끝내는 서로의 곁에 무사히 안착했으니까.‘아버지, 저는 유진이랑 평생 행복할 거예요. 절대 유진이가 떠나게 만들지도 않을 거고 유진이를 두고 먼저 떠나지도 않을 거예요. 절대.’...레스토랑 안.연우진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한지영을 발견하고는 물었다.“왜 그래요? 뭐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어요?”“아... 아!”한지영은 그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저었다.“뒷모습이 조금 낯이 익어서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그녀는 말을 마친 후 다시 포크를 들어 고기를 입에 넣었다.“지영 씨가 봤던 사람, 백연신 씨랑 조금 닮은 것 같은데.”그때 연우진의 입에서 다시금 목소리가 흘러
강지혁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아이를 보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그 표정은 차에 올라타서도 계속되었고 이에 이상하게 여긴 임유진이 왜 그러냐고 묻자 그는 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린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 이만 집으로 돌아가자.”“응.”그날 밤.강지혁은 임유진이 아이들을 재우러 간 틈을 타 혼자 별채로 왔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버지의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사진 속 그의 아버지는 너무나도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단순히 입만 웃는 게 아니라 눈매까지 휠 정도로 정말 예쁘게 웃고 있었다.그런데 이 눈을 강지혁은 오늘 하겸이라는 아이의 얼굴에서 봤다.전에 놀이공원에서 봤을 때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터라 얼핏 스치다시피만 봤을 뿐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그러다 오늘에서야 드디어 아이의 얼굴을 바로 앞에서 자세히 볼 수 있었다.처음에는 아이의 눈동자가 빛이 없고 어딘가 공허했던 터라 단번에 알아채지는 못했지만 보면 볼수록 그의 아버지의 눈과 닮아있었다.강지혁은 잠시간 아버지의 사진을 바라보다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갔다.거기에는 그와 그의 아버지를 버린 여자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자신을 버린 사람이라 그런지 강지혁은 그녀의 얼굴이 오히려 아버지의 얼굴보다 훨씬 더 강하게 뇌리에 박혀 있었다.그래서 아까 하겸을 봤을 때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린 동시에 바로 그의 어머니의 얼굴도 떠올렸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 사진을 바로 눈앞에 두고 아까 봤던 하겸의 얼굴과 겹쳐 보니 역시나 놀랍도록 비슷했다. 입술도 그렇고 이마도 그렇고 하다못해 귀 모양까지, 정말 너무도 닮아있었다.게다가 임유진의 말에 의하면 하겸은 고아였다가 하씨 집안에 입양이 된 거라고 하니 하겸이 바로 그들이 그토록 찾고 있는 마지막 아이일 가능성이 더 농후해졌다.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하나 있었다.‘왜 김재호는 그 아이를 하씨 집안에 입양을 보낸
“누나가 아주 잘했네. 겸아, 지금 당장은 아프지 않을 수 있지만 언젠가는 그 상처 때문에 크게 아플 수도 있어. 그러지 않기 위해 미리미리 치료하는 거야. 만약 다친 게 피부가 아니라 뼈인데 겸이가 아프지 않다고 계속 병원에 가지 않았으면 그대로 평생 다리를 절뚝이면서 걸었을 수도 있었어. 그러면 누나가 얼마나 속상해하겠어. 안 그래?”임유진의 설명에 하겸은 그녀의 말을 한번 곱씹어보듯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겸아, 지금 있는 집 말고 아줌마랑 아저씨가 있는 집에서 같이 살지 않을래? 우리랑 같이 살면 그 누구도 널 이렇게 때리지 못할 거야.”하겸은 임유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갑자기 한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곧바로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다. 딱히 위협이 되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아이는 언제든지 달려들 수 있다는 자세까지 취하며 마치 아기 맹수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은 자신을 마치 나쁜 사람 보는 노려보는 아이의 눈빛에 심장이 찌릿하며 가슴이 찢길 듯 아파 왔다. 왜 몇 번밖에 안 본 아이 때문에 이러한 감정이 드는지 그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옆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강지혁은 아이가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자 얼른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했다.“너랑 네 누나를 갈라놓으려고 하는 게 아니야. 너한테 더 나은 가정환경을 주려고 이러는 거야.”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싫어. 난 누나랑 있을 거야!”하겸은 자기보다 키가 훨씬 큰 강지혁을 앞에 두고도 겁먹는 법 없이 소리를 빽 하고 질러댔다.강지혁은 그런 아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어느 한순간 갑자기 미간을 움찔하더니 곧바로 다시 아이의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았다.그때 하교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하나둘 학교 건물에서 빠져나왔다.하겸은 하유은이 나오는 것을 보더니 곧바로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난 절대 누나랑 안 떨어져!”하유은은 갑작
“네. 그렇게 됐어요.”탁유미는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더 이상 예전으로는 못 돌아가니까요.”“이경빈 씨가 남은 생을 전부 탁유미 씨 곁에서 잘못을 뉘우치는 데 쓰겠다고 해도요?”“혁아!”임유진이 강지혁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렸다.이건 누가 봐도 선을 넘은 발언이었다.하지만 강지혁은 임유진이 끌어당기는데도 여전히 탁유미를 빤히 바라보며 답을 요구했다.“네, 그런다 해도 저는 이경빈과 다시 뭘 시작할 생각이 없어요.”탁유미의 단호한 말에 강지혁은 미간을 찌푸렸다.“왜죠? 이경빈 씨도 따지고 보면 속아서 그런 거잖아요.”“이경빈은 처음부터 나한테 일부러 접근했고 내가 자신을 사랑하게 했어요. 그리고 사건의 진상을 재조사할 기회라면 얼마든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고 끝까지 내가 잘못한 거라고 믿었죠.”탁유미는 담담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이경빈을 정말 많이 사랑했던 건 맞아요. 하지만 그 감정도 상처를 여러 번 받고 나니까 다 마모돼 사라져버렸어요. 강지혁 씨, 세상에는 평생에 걸쳐도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어요. 그리고 한번 변하면 영원히 원래대로는 돌아가지 못하는 감정도 있고요.”강지혁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언니, 미안해요! 혁이가 한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임유진이 난감해하며 탁유미에게 대신 사과했다.“괜찮아요. 못 할 얘기도 아니었는데요 뭘.”탁유미는 싱긋 웃고는 마침 들어온 손님에게 인사를 하며 그쪽으로 다가갔다.임유진은 강지혁의 팔을 꽉 잡으며 조금 화난 얼굴로 물었다.“너 왜 그래? 언니 곤란하게.”“미안.”강지혁은 순순히 사과한 후 임유진의 손을 잡았다.탁유미는 이경빈이 한 짓을 용서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경빈을 향한 마음도 완전히 내려놓았다.하지만 임유진은 그가 한 잘못도 용서해주고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이경빈에 비하면 그는 꽤 운이 좋은 편인데 어째서인지 그는 기쁘기보다는 불안한 마음이 더 앞섰다.아무래도 아직 되찾지 못한 기억 때문에 여전히
“갑자기 웬 입양?”강지혁이 의문 어린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그게... 오늘 지영이랑 같이 유미 언니 분식집에 갔다가 학교 앞에서 또 겸이라는 아이를 보게 됐는데...”임유진은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 강지혁에게 얘기해주었다.“그렇게 예쁜 아이를 입양해놓고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될 때까지 때리는 게 그게 제정신이야? 손을 올린 게 절대 이번이 처음이 아닐 거야. 앞으로도 수틀리면 또 아이를 때릴 거야.”임유진은 자신의 한마디로 하겸의 양부모가 갑자기 바뀔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그런 걸 무서워할 사람들이었으면 손을 올리는 일 자체가 없었을 테니까.“그러니까 우리가 데려오자. 응?”임유진의 간절한 부탁에 강지혁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그 애가 그렇게도 예뻐? 유난히 신경을 많이 쓰네?”“우리 애들이랑 비슷한 또래라서 그런가 봐. 그리고...”임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좀 특별해.”“어떤 부분이?”“분명히 애교도 없고 무뚝뚝하고 제대로 답도 안 해주는 앤데... 자꾸 눈에 밟혀.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됐는데도 아무 말 안 하는 것도 안쓰럽고 속상해. 꼭 끌어안아 주고 싶어.”임유진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강지혁은 손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원상 복구시키고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는 뭐든 네 의견에 따를 거야. 그런데 입양이 된다고 해도 그 아이가 원하지 않을 것 같은데?”“왜?”“그때 보니까 누나를 엄청 따르고 좋아하던데 애가 오려고 하겠어?”“그 집안이랑 완전히 연을 끊으라는 소리는 안 할 거야. 그리고 유은이가 보고 싶다고 하면 바로 보여줄 거고.”“그런다고 해도 아마 원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이 확신하며 말했다.“그 집에서 나오면 더 이상 맞는 일도 없을 거고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텐데?”“누나가 없잖아.”“보고 싶을 때마다 보여준다니까?”“그래도 매일 같이 있는 거랑은 다르지. 그 아이한테는 눈을 뜨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