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시후는 자신을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에 옆의 유리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을 뒤따라오고 있는 권여빈을 발견했다.젠장!권여빈이 여기에 있는 자신을 알아차리게 되면 분명 자신이 엠그란드 그룹의 회장이라는 것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게다가 그녀는 자신이 LCS 그룹의 자제라는 것까지 알아낼 것이다!이건 정말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그래서 자신을 쫓아오는 권여빈을 보면서 시후는 발걸음을 재촉해 회장실로 들어간 다음 문을 잠가버렸다.권여빈은 회장이 갑자기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에 들어갈 줄은 몰랐다. 회장과 말 한마디 나누려고 쫓아갔던 것인데.. 이미 순식간에 사무실로 들어가버린 그였다.그녀는 회장이 이미 사무실로 들어가버린 것을 보고 실망하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이상하잖아.. 일부러 나를 피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건 뭐야...?”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사무실 문 앞으로 다가가 노크하며, “회장님 안녕하세요? 저는 새로 부임해온 경영 본부장 권여빈이라고 합니다. 제가 보고드릴 내용이 있어서요.”라고 말했다.은시후는 일부러 목소리를 깔며 “이태리 부회장에게는 보고하셨나요? 그런 내용은 당연히 자신의 상사에게 먼저 보고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설마 이런 내용도 모르는 건가요?”“아!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깜빡하고..”권여빈은 그의 말에 겁에 질려 긴장하며 생각했다. ‘회장님이 너무 까칠한 거 아냐? 대체 왜 화를 내는 거지? 보고를 직속 상사에게 바로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이렇게 얼굴도 안 보여주고 화를 내다니..”권여빈은 회장실 앞에 더 이상 머물 엄두가 나지 않아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은시후는 권여빈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자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마터면 권여빈 씨에게 정체를 탄로날 뻔 했어.. 오늘은 진짜 위험했다!앞으로도 종종 엠그란드 그룹에 들르게 될 터인데.. 권여빈은 현재 경영 본부장으로 자신과 같은 층에서 사무실을 쓰고 있었기에 더더욱 신경이 쓰였
이태리 부회장이 자신에게 볼일이 있다는 말을 들은 권여빈은 즉시 그녀의 사무실로 찾아갔다.이때 은시후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계단을 막 내려왔을 때, 유나가 지친 얼굴로 회의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유나는 분명 여러 협력사들과의 회의들로 인해 너무 지쳤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지금은 일이 많이 바빠요.. 해결해야 할 게 많아서.. 진짜 너무 바쁘니까 어찌할 바를 모르겠네요..”라고 말했다.은시후는 그런 유나를 보자 마음이 아파왔다. “그럼 일하는 다른 사람들과 일을 좀 나눠서 하는 게 어때요? 그래도 너무 힘들다면, 그만두는 건요?”“그건 안 돼요.” 유나는 “내가 이사직에 오르게 된 것이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아직 내 자리가 안정되지도 않았는데.. 제가 노력해야 하지 않겠어요?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게으름을 피운다면 아마 혜준 오빠처럼 내 자리를 탐내고 날 대신하려는 사람이 달려들 거라고요.”라고 말했다.김혜준을 생각하니, 유나는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김혜준은 특히 유나에게 짜증나는 존재였다. 늘 자신에게 맞서는 존재였고 또 항상 남의 자존심에 금을 가게 만드는 일을 즐기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돌아가는 길, 유나는 차에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고 시후는 운전에 전념한 채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같은 시각, 이태리의 사무실.이태리는 권여빈이 새로운 직책을 부여 받았고, 이에 따라 인사 이동을 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알려주었다.권여빈은 약간 놀랐다.자신이 경영 본부장의 업무를 받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마케팅 본부장을 맡으라니?? 갑자기 왜?이태리는 “우리는 여빈 씨가 능력 있는 여성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회사에서 경영 업무만 보는 건, 사실 당신의 능력을 썩히는 것이라고 판단했고요. 이력서를 봐도, 당신은 대학에서 기업관리와 마케팅을 전공하지 않았나요? 따라서 여빈 씨는 마케팅 업무와 잘 어울리는 인재이며, 우리 회사에 있어서도 세일즈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마
액정에 떠 있는 김혜준이란 세 글자를 본 권여빈은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지금까지 김혜준에 대해 별로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아마 조금 친분을 쌓은 뒤 자신을 김혜준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겠지..하지만, 여빈은 이런 류의 인간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냥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러나 김혜준은 몇 번이고 전화를 계속했다. 그러자 권여빈은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혜준아, 무슨 일이야?” 그녀의 말투는 냉랭했다.김혜준은 “여빈아, 잘 지내? 듣자 하니.. 이번에 마케팅 본부장이 되었다면서??”“소식통이 빠르네?”“엠그란드에 친구가 몇 명 있거든.. 하하.. 그런데 이번에 네가 새로 임명을 받았다고 해서 알려줬다.” 라고 말했다.“응, 맞아. 이제 마케팅 본부장이야.” “키야~~~ 축하한다!” 김혜준은 “이제.. 실세 아냐 실세?? 이제 할 일이 많겠네? 이번에 진짜 운이 좋았다 너?”권여빈은 “고마워.” 라며 담담하게 말했다.“여빈아, 그런데.. 네가 서울에 온 지도 이미 꽤 됐잖아? 내가 지난 번에 너에게 실수 한 것도 있고.. 사과를 좀 하고 싶어.. 내가 식사 한 끼 대접하고 싶은데 어때? 오늘 또 이렇게 마케팅 본부장도 되셨고.”“그런데, 나 오늘 늦게까지 야근해야 할 것 같은데....?” 권여빈은 완곡하게 거절했다.하지만 김혜준은 포기하지 않았다. “야, 여빈아! 이런 좋은 일은 그때그때 축하해야지~ 내일이 되면 또 오늘처럼 기쁘겠냐? 넌 서울에 친구가 별로 없잖아, 내가 보기에 우리 둘이서 축하할 곳을 찾아서 즐겁게 보내면 되는 거야~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하고.”권여빈은 살짝 마음이 흔들렸다.솔직히 그녀는 오늘을 정말 축하하고 싶었다.하지만, 유나도 올 수 없는 마당에 누구와 함께 축하를 해야 할지 막막하긴 했다.그런데 마침 김혜준이 먼저 전화를 걸어와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를 준 셈이었다.비록 김혜준이란 사람은 좀 위선적이긴 해도 두 사람이 함께 좋은 일을 축
사실 권여빈도 대충 김혜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오늘 밤은 절대 김혜준과 술을 마시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김혜준은 그녀를 설득하지 못하자 답답했지만 내색하지는 못하고 “아.. 술을 안 마시면 안 마시는 거지 뭐~ 그럼 음료나 하나씩 시키면서 축하하지 뭐!”라고 말했다.권여빈은 “이해해줘서 고마워!”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옆 테이블에 앉은 남성이 조금 전부터 권여빈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권여빈이 식사를 하러 들어온 순간부터 그는 그녀의 용모와 기품에 매료되었다.그가 보기에, 그녀는 아름다우면서도 기품이 있어서, 마치 여신이 내려온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한참을 지켜보던 그는 그녀의 앞에 앉아있는 남자가 남자친구가 아닌 것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결심했다.잠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권여빈과 김혜준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저.. 식사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만.. 당신이 들어서자마자 첫눈에 반해버렸습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연락처라도 남겨 주실 생각이 있으십니까?”권여빈은 갑자기 멍해졌다.여기서 식사를 하다가 고백을 받게 될 줄이야..김혜준은 순간적으로 머리 끝까지 화가 솟구쳤다.어디서 이런 멍청한 새끼가 튀어나온 거야? 지금 내가 여빈이를 꼬시고 있는 거 안 보이나? 감히 누굴 꼬시러 오는 거야? 이건 죽고 싶어 환장한 게 아니면 뭐겠어?그는 권여빈이 입을 떼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누구야? 지금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여기로 달려와 잡소리를 해대는 거야?”그 남자는 “지금 전 이 여성분과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그러는 당신은 무슨 상관이시죠?”라며 대꾸했다.그리고는 권여빈에게 말했다. “제가.. 저 옆 자리에서 오랫동안 지켜보다가, 실례를 무릅쓰고 용기 내어 온 것입니다. 제가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말 당신을 보자마자 너무 설렜습니다. 오늘 기회를 놓칠까 봐 이렇게 온 것이니 양해해주십
그 사내는 김혜준에게 유리병으로 한 대를 얻어맞자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 그 자리에 똑바로 서있기가 어려웠다.주위에서 식사를 하던 사람들도 바닥에 흩어지는 유리 조각으로 인해 깜짝 놀랐다.김혜준은 피투성이가 된 사내를 노려보며 비웃었다. “빨리 꺼져, 내가 너의 다리를 분질러 버리기 전에!”사내는 이를 악물고 머리를 감싸 쥐며 “좋아, 이 새끼가.. 조금만 기다려 봐!”그는 피가 흐르는 이마를 감싸 쥐고 황급히 레스토랑을 뛰쳐나갔다.김혜준은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저런 멍청한 자식.. 별것도 아닌 주제에 감히 날 위협해?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내가 감히 누굴 두려워하겠어?”그는 짐짓 거만한 표정으로 권여빈에게 말했다. “여빈아, 어디서 저런 날파리 같은 놈이 꼬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식사나 계속할까?”권여빈은 이런 난리통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런 말이 없었다.식사 도중에 김혜준은 몇 번이나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했지만, 여빈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그녀의 눈에 비친 김혜준은 그저 무능력한 인간일 뿐만 아니라, 행동은 거칠고 경솔하기까지 하기에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김혜준은 자신이 조금 전 그 멍청한 놈을 밟아버린다면, 여빈이 자신의 남자다움에 반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여빈이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거부감과 반감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지금 둘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는 그를 굉장히 우울하게 만들었다. 권여빈이 힘쓰는 남자를 싫어할 줄이야.. 내 발등을 찍은 꼴이 아닌가?김혜준은 한 끼를 먹는데도 체한 것 마냥 속이 너무 갑갑했다.밥을 먹고 나서, 그는 원래 권여빈과 함께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며 서로의 감정을 진전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권여빈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오늘 식사 고마워!”김혜준은 그녀를 그냥 보내기 아쉬워 “그럼 내가 집까지 바래다 줄게.”라며 그녀를 설득했다.하지만 권여빈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김혜준은 날아오는 쇠파이프에 놀라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 뻔했다.이때, 김혜준은 너무 놀란 나머지 순간 권여빈을 밀쳐버렸다. 권여빈은 “꺄악!” 하는 소리와 함께 반대편으로 밀려났다.그 짧은 찰나 김혜준은 쏜살같이 자신의 차 앞으로 달려가, 문을 열고 시동을 건 다음 서슴없이 호텔을 빠져나가 버렸다.권여빈은 부아가 치밀었다.저 망할 자식!일은 자기가 저질러 놓고, 결국 중요한 순간에는 제 목숨 아깝다고 여자를 밀치고 순식간에 도망을 치는 건 대체..?이 세상에 저런 머저리가 또 있을까?김혜준이 도망가는 걸 본 사내는 욕을 퍼부었다.“저 병신 같은 놈이 지금 여자를 버리고, 살아보겠다고 혼자 도망치다니.. 쓰레기 아냐?!”말을 마치자, 그는 권여빈을 쳐다보며 냉담하게 말했다. “어이, 예쁜이! 방금 그 새끼 빨리 불러와. 안 그러면 내가 좀 무서워 질 것 같거든..?”권여빈은 “전 방금 그 사람과 잘 모르는 사이니까, 두 분의 일에 절 엮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했다.그 사내는 자신을 가리키며 이마의 거즈를 눌렀다. “아오 씨.. 내가 방금 저 새끼 때문에 이마를 열여섯 바늘 꿰맸거든? 그리고 식사도 제대로 못했지! 그 새끼가 당신을 구하러 오지 않는다면, 나랑 하룻밤 즐겁게 보내다 가면 되는 거고!”권여빈은 “왜 그러세요? 그건 범죄라고요!”“범죄?” 그는 “이 동네에서는 내 말이 곧 법이야! 나랑 즐거운 밤을 보내면 아마 뭐가 진정한 법인지 알게 되겠지~!”권여빈은 그의 말에 소름이 쫙 돋았다. 지금 이 순간.. 공포와 절망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다 그녀는 재빨리 외쳤다. “제가 그럼 그 사람에게 전화를 해볼게요!”그리고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김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혜준은 엑셀을 있는 힘껏 누르며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분명 호텔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좋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휴대폰 액정에 이란 이름이 뜨자, 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권여빈은 다리에 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절망감에 눈물을 흘렸다.눈물에 젖으니 더욱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 때문에, 사내는 흑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어서 차에 태워!”그의 옆에 서있던 한 사내가 말했다. “민석아, 그럼 우리는 언제 이 이쁜이랑 한 번 할 수 있는 거야?” 엄민석은 냉담하게 말했다. “내가 먼저지! 벌써부터 자기 차례를 묻고 있어?!”그리고는 손을 뻗어 그녀를 차 안으로 끌어넣으려 했다.그때, 엄민석은 갑자기 여러 번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를 들었다.“으악!! 으아!”갑자기 몇 차례 비명이 더 울려 퍼졌다.민석은 화가 난 듯 고개를 들어 “뭐야? 무슨 일이야?”라며 소리쳤다.그런데 그가 고개를 들자마자, 갑자기 강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그게 뭔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얼굴에 심한 통증을 느꼈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분명 조금 전 콧잔등이 뚝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때문인지 코피가 쏟아지고 있었다.마치 큰 망치가 머리를 내리친 것처럼 너무나 고통스러워 민석은 비명을 질러 댔고, 몸을 휘청거리며 뒤로 쓰러졌다.그가 쓰러지자, 뒤에 있던 패거리들이 죽은 토끼 마냥 땅바닥에 꼼짝 못하고 엎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권여빈이 겁에 질린 채 고개를 들자, 그녀의 아름다운 눈이 휘둥그레졌다.칼처럼 서늘한 눈빛의 검은 마스크를 쓴 한 남자가 자기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권여빈은 놀라움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마음속으로 기뻐 외쳤다. 누구지? 날 구하러 온 거야? 맞겠지? 틀림없이 날 구하러 온 거야!민석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검은 마스크를 낀 사내가 순식간에 남자 네 명을 쓰러뜨리자, 남은 나머지 몇 명은 몇 초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조금 뒤 겨우 반응했다. 그들은 고함을 치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고, 남은 동료들을 불러모았다.“당..당신은 누구죠?” 권여빈은 땅바닥에 앉아서, 눈앞에 있는 남성을 우러러보고 있었다.그는 묵묵부답으로 그녀를 번쩍 안아
은시후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회사에서 늘 자신의 정체를 캐려고 시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므로, 굳이 직접 정체를 밝혀 귀찮은 일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사실을 끝까지 숨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게다가, 그는 그녀가 권여빈을 특별 대우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 유나를 봐서 절친인 그녀를 구해준 것일 뿐이었으니까.자신을 보고도 아무 말이 없자, 권여빈은 상대방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자 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평소 남들에게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었기에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뭔가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러자 권여빈은 다시 한 번 그에게 질문을 하려고 했지만, 자신의 귓가에 걸걸하게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입고 있는 바지를 벗어.”권여빈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마스크를 낀 남성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갑자기 수치심이 느껴졌다.아니.. 겨우겨우 호랑이 굴에서 벗어났더니, 여우 굴에 들어간 셈이 아닌가..?여기는 인적이 드문 곳인 데다가, 상대방의 덩치가 꽤 커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봐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었다.권여빈은 또 다시 절망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리고는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내 몸의 털 끝 하나 건드릴 수 없어. 내가 조금 전에 얼마나 힘들게 도망친 건데!! 지금 나에게 딴짓을 하려는 거면, 그냥 여기서 죽어버릴 거야!”은시후는 당황하며 손을 들어 그녀의 다리를 가리켰다. “당신은 이미 상처 때문에 힘줄을 다쳤고, 상처가 대동맥이랑 가까이 붙어 있어 만약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다리를 못 쓸 수도 있습니다. 지금 지혈이 안 되면 병원에 가야 하는데, 내가 보기에 그 때가 되면 병원에 간다고 해도 치료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뭐 어떻게 하란 겁니까?”권여빈은 토끼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볼이 갑자기 후끈 달아올랐다.
시후의 외할머니가 시후를 직접 만나고 싶다고 말하자, 배유현은 급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여러분들을 살려주신 은인께서는 행방이 일정하지 않으셔요. 이번에도 저에게 약을 전달해주신 후, 아직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많다며 바로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배유현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시후는 정말 자주 이동했기 때문에 행방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에는 캐나다, 미국, 홍콩, 멕시코를 오가는 터라 시후의 구체적인 계획은 배유현도 알지 못했다. 게다가, 시후는 이미 페이셔스 그룹의 냉동 센터를 떠난 상태였다. 그는 지금 버킹엄 호텔로 돌아가, 이토 그룹과 하영수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시후의 외할머니는 배유현의 말을 듣고 매우 아쉬운 듯 말했다. “그분께서는 우리 집안 구성원들을 모두 구해주셨고, 이번엔 제이크 한 경감까지 살려주셨어요. 이처럼 큰 은혜는 우리 자손 대대로 다 갚지 못할 만큼 대단한 것인데, 그분은 단 한 번도 우리에게 보답할 기회를 주지 않으셔서...”배유현은 위로하듯 말했다. “사모님, 그건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은인께 큰 은혜를 입었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보답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저 그분을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며 곁에서 도울 수 밖에요.”이때 안충주가 말을 이었다. “배유현 회장, 예전에 한국의 경매장에서 당신의 할아버지인 전 회장님께서 갑작스레 몸져 누우셨고, 그 틈을 타서 당신의 큰아버지가 권력을 빼앗았죠. 그런데 전 회장님께서는 다시 건강을 회복하셨고, 당신과 함께 뉴욕으로 돌아오셔서 결국 페이셔스 그룹을 다시 맡으셨는데... 내가 짐작하는 게 맞다면, 그 당시 우리의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 당신 역시 도와주신 겁니까?”“네 맞습니다.” 배유현은 숨김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제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목숨을 부지하셨다 해도, 저와 함께 큰아버지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겁니다.”안충주는 눈빛이 번뜩이며 말
안산과 안충주는 재빨리 두 사람을 AB 빌딩 안으로 데리고 갔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층으로 올라갔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안산은 제이크 한을 이끌고 회의실로 향했다.현재 Samson 그룹의 구성원들은 안산의 뜻에 따라, 모두가 배유현에게 직접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응접실에 모여 있었다. 안산이 응접실의 문을 열자, 그 안에 앉아 있던 Samson 그룹 구성원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들은 문 너머로 들어오는 사람이 배유현이 아니라, Samson 그룹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던 제이크 한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제이크 한을 본 순간, Samson 그룹 식구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고, 어느 누구도 이 상황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제이크 한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그것도 Samson 그룹과 관련된 일에 휘말려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제이크 한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을 때, 현장에 있던 모든 Samson 그룹 사람들은 마치 사고 기능이 정지된 것처럼 얼어붙고 말았다.시후의 외할머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앞으로 다가가 안산에게 물었다. “여보... 이... 이 사람이 정말 제이크 한 그 친구가 맞아요? 아니면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혹시 내 정신이 이상해진 건가요?”“맞아. 제이크 한 그 친구가 맞다고!” 안산은 흥분하여 말했다. “정말로 제이크 한이 맞아! 이 친구가 살아 있었어! 배유현 회장이 데려온 거요!”그제야 가족들은 뒤따라 들어온 배유현을 발견했다.시후의 외할머니는 놀람과 기쁨이 교차된 표정으로 배유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배유현 회장...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해줄 수 있을까요? 그날 사건이 벌어졌을 때, 우리를 살려준 분께서는 제이크 한은 이미 살릴 수 없는 상태라고 하지 않으셨나요?”배유현은 사실대로 말했다. “그때 그 분은 제이크 한 경감의 뇌가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셨어요. 하지만 신체의
배유현은 안산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며, 곧바로 공손하게 말했다. "회장님, 요즘 건강은 괜찮으시지요?"안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배유현 회장 덕분에 요즘 꽤 잘 지내고 있습니다."배유현은 재빨리 말했다. "안 회장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나이도 많이 어리고, 그런 말씀을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그러자 안산의 곁에 있던 안충주도 이때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배유현 회장님, 안녕하십니까."배유현 역시 공손히 인사했다. "안충주 선생님, 안녕하세요."안충주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배유현 회장님, 실례가 안 된다면... 제 친구 제이크 한은 지금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가능하시다면 주소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조만간 찾아가 조의를 표하고 싶어서요.”배유현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녀의 옆에서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던 한 남자가 갑자기 소리쳤다. "충주! 나 제이크 한은 아직 안 죽었어!"그 말이 떨어지자, 안충주와 그 곁에 있던 안산은 모두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들은 그 목소리가 분명 제이크 한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했지만, 눈앞에 서 있는 이가 제이크 한이 맞을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듯했다.왜냐하면 그날 체육관에서 Samson 그룹 최정예 경호원들이 암살자들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을 때, 그들은 직접 시체를 보지는 못했지만 가장 먼저 총알에 맞은 제이크 한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을 구해준 시후도 분명히 제이크 한이 이미 죽었으며, 신 조차도 그를 살릴 수 없을 거라고 말했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어떻게 제이크 한이 죽은 뒤 살아 돌아왔다는 걸 믿을 수 있겠는가?제이크 한은 Samson 그룹의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뜨고 아무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참지 못하고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확 벗으며 외쳤다. "나야! 나! 아직 안 죽었다고!""이런 젠장!" 안충주는 너
안충주는 서둘러 휴대폰으로 인터넷에서 배유현의 사진 몇 장을 검색해 안산에게 보여주었다.안산은 몇 번 사진을 훑어본 후 휴대폰을 돌려주었지만, 순간적으로 멍하니 한 사람의 모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듯하더니 갑자기 물었다. “충주야... 제이크 한, 그 친구를 배유현 회장이 데려간 거 아니었나?”안충주는 놀라며 되물었다. “아버지, 제이크 한을 기억하신 거예요?”안산은 멍하니 말했다. “조금 전 머릿속에 뭔가 스치듯 지나갔어. 그날 우리를 구해준 은인이 ‘제이크 한은 이미 죽었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러면서 재빨리 물었다. “충주야, 그날 그 은인이 그러지 않았니? 제이크 한의 시신은 자신이 사람을 보내 정중히 장례 치르겠다고?”안충주는 아버지가 그날의 일부를 기억해낸 것에 놀라면서도,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 은인은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그 일을 배유현 회장에게 맡긴 것 같아요.”그러자 안산은 눈가가 붉어지며 자책했다. “나는 제이크 한 그 친구에게 정말 면목이 없다... 그 친구의 부친에게도, 그 친구의 아내와 딸에게도... 나는 그들에게 모두 죄인이나 마찬가지야...”안충주는 서둘러 위로했다. “아버지, 이건 아버지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에요. 우리 집안 전체가 큰 빚을 진 거니까요.”안산은 다시 물었다. “그럼 제이크 한의 아내와 딸은 어떻게 됐냐?”안충주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쪽은 제가 손을 쓸 수가 없었어요... 그날 은인이 분명히 당부했었으니까요. 제이크 한의 죽음을 누구에게도 알려선 안 된다고... 심지어 그의 아내에게도요. 그래서 제이크 한의 아내가 저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남편의 행방을 묻고 있는데, 저도 어쩔 수 없이 그 부분은 모른다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아마도 이미 경찰에 실종 신고까지 한 걸로 알고 있는데, 뉴욕 경찰은 아직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한 것 같습니다...”“하아...” 안산은 깊게 한숨을 쉬며 당부했다. “방법을 좀 찾아서, 그의
안산의 갑작스러운 분노 섞인 외침에 Samson 그룹 삼형제는 일제히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비록 모두가 이미 같은 결론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아버지인 안산이 직접 그렇게 말하자, 그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안태풍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저 자들이 우리와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기에, 20년 동안이나 집요하게 우리를 노린 거죠?”안재남도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 집안이 자산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큰 잘못을 저지른 일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요...! 그동안 우리 집안의 자산 대부분은 당시 엔젤투자에서 비롯됐고, 게다가 누나는 실리콘밸리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던 인물이었어요. 그런데 누가 우리와 그렇게 원한 관계에 있다는 거죠?”안충주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어쩌면, 그들은 우리에게서 뭔가를 얻어내고자 하는 걸 수도 있지.”안재남이 물었다. “형 말은... 돈을 노린 다는 거야?”“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안충주가 말했다. “하지만 저들이 이토록 정교하고 집요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단순한 증오심이나 원한 때문은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그러자 안산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만약 돈이 목적이라면, 굳이 우리 전부를 죽일 필요는 없지 않겠니? 요즘은 대부분 자산을 디지털 형식으로 가지고 있기에 은행 계좌나 증권 계좌, 신탁 계좌에 숫자로만 남아 있다. 그러니 우리를 죽인다고 해도 그 자산이 그들 손에 들어가는 건 아닐 것 아니냐!”안충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바로 저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네 사람은 곧 깊은 침묵에 빠졌다.그때, 막내딸 안유진이 문을 두드리며 밖에서 말했다. “아버지, 배유현 회장이 조금 뒤에 찾아 뵙고 싶다고 전화가 왔는데요.”“배유현...?” 안산은 인상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배유현 회장이 누구냐?”안충주가 얼른 말했다. “아버지, 또 잊으신 거 아니죠? 아침에 말씀드렸잖아요. 우리가 사건을
그 순간, 안태풍, 안충주, 그리고 안산 모두의 얼굴이 일제히 굳어졌다.안태풍은 반사적으로 외쳤다. “큰 누나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 너는 권아현을 만났고... 권아현은 이번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네 곁에서 무려 19년 동안 숨어 지냈어... 우리를 죽이려 한 자들과 누나가 그 해에 죽었던 일은 분명 관련이 있는 거야!”안산은 경악하며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놈들은 예선이와 은 서방을 죽이고도 모자라, 재남이 곁에 무려 19년이나 묵혀 놓은 시한폭탄을 이번에 터뜨린 셈이군... 대체 이 놈들은 뭘 노리고 있는 거지?! 만약 우리 집안을 없애는 게 목적이라면, 왜 지금까지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린 거냐고?”“그러게 말입니다...” 장남 안충주 역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라면, 뭔가 깊은 원한을 품고 있을 때 진작에 손을 썼겠죠. 굳이 지금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을 텐데...”안산이 말했다.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이 자들이 우리에게 대체 얼마나 큰 복수심을 품고 있길래, 이렇게까지 큰 판을 벌이는 건지 말이야...”안재남은 참다 못해 말했다. “아버지, 형님들... 꼭 제 아내를 19년 전에 그 조직에서 일부러 저에게 심어놓은 인물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잖아요? 중간에 회유되었거나, 협박을 받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그럴 리 없어.” 안충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만약 네 아내가 중간에 회유된 것이라면, 그 집안 가족들 역시 그때 함께 배신했겠지. 그런데 그 집안의 일련의 행동들은 그런 식으로는 설명이 안 되잖아. 그러니 나는 오히려 권아현과 그 일가 전체가 애초부터 철저하게 설계된 함정이라고 판단한다.”안태풍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고, 이어서 안재남을 바라보며 물었다. “재남아, 너와 권아현이 처음 만났을 때 구체적인 상황을 떠올릴 수 있겠어?”안재남은 말했다. “그 당시 내가 석사 2학년이 막 시작되었을 때였는데, 아내는 막 석사에 입학했었지. 신입
유럽과 미국에서는 가족 신탁 상품이 매우 신뢰할 수 있는 자산 보호 방식으로 여겨진다.한국에는 ‘부자는 삼대를 넘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부모 세대가 어렵게 일군 부를 자손 세대가 사치스러워 함부로 낭비하고, 눈은 높지만 능력은 부족하여 유산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상황은 쉽게 가족의 파산으로 이어지고, 하룻밤에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게 만든다. 이것은 자손 세대의 능력과 인품이 통제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일단 능력이나 인격 중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가문의 몰락은 피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인재 외에도 천재지변 같은 변수도 존재한다.그러나 가족 신탁은 이러한 인재와 천재지변의 리스크를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먼저 자신의 자산을 신탁에 넣는 순간, 겉으로 보기에는 본인조차 해당 자산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자산은 특정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에만 자녀나 지정된 상속인이 받을 수 있다. 따라서 훗날 중대한 문제가 생겨 가문이 빚더미에 앉게 되거나 파산을 하게 되더라도, 이 가족 신탁은 정부나 채권자에 의해 임의로 처분될 수 없다. 이것은 바로 유럽과 미국에 있는 유서 깊은 가문들이 여러 세대, 심지어는 수십 세대에 걸쳐 부를 유지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라고 할 것이다.비록 권아현 집안 식구들은 현재 모두 자취를 감췄지만, 그들의 자산은 이미 모두 가족 신탁으로 옮겨졌다. 이는 더없이 안전한 보관 방식으로, 권아현의 집안 식구들이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기업 운영에는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으며, 자산의 가치가 떨어지거나 예기치 않은 상황이 생길 걱정도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돈은 신탁에 들어가 있는 이상 줄어들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불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방 정부조차 이 자산에는 손을 대지 못할 것이다.이런 행동은 곧 권아현 집안 식구들, 혹은 그들 뒤에 있는 그 미스터리한 조직의 입장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그들의 입장은 바로 잠적하는 것은 단지 일시적인 전략적 후
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날 밤 외가 식구들은 나를 만났고, 내가 부른 사람들이 당신을 데려갔다는 건 알고 있을 겁니다. 다만 당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죠. 그러니 당신과 외가 식구들이 다시 만났을 때, 어떤 정체불명의 인물이 알약 하나를 먹인 뒤 당신을 구했다고만 알려주고, 이후 배유현 양에게 당신을 그들에게 데려다 주라고 했다고 말하세요. 그리고 정체불명의 인물이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하시고요. 그러면 그들은 당신을 살린 사람과 자신들을 살린 사람을 연결 지으려 할 거고, 그 뒤는 외가 식구들이 스스로 추측하게 내버려 두면 됩니다.”“알겠습니다, 도련님!” 제이크 한은 진지하게 말했다. “기억해 두겠습니다.”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고 배유현을 불러들였다. “배유현 씨, 헬기를 좀 준비해주시고, 제이크 한 경감을 맨해튼의 AB 빌딩까지 모셔다 드리세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먼저 내 외삼촌께 연락을 드려 방문 의사를 전해주시고요. 그 날 그들을 구한 후 현장을 수습한 사람은 배유현 씨이기 때문에, 그들은 당신에 대해서는 크게 경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배유현은 공손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은 선생님. 바로 Samson 그룹 측에 연락하겠습니다.”......같은 시각, 맨해튼 AB 빌딩.Samson 그룹은 함께 모여 회의를 열고는 최근 각종 정세를 종합하여 토론하고 있었다. 안산은 최근 알츠하이머 증상이 계속 악화되고 있었기에, 아침에 눈을 뜨면 아내와 자식들은 그에게 현재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오랫동안 설명해주곤 했다. 다행히도 안산은 수많은 풍파를 겪어온 인물이라, 그날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는지 직접적으로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식들의 설명을 들으면 곧바로 현재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 날 암살 사건이 발생한 이후, Samson 그룹 사람들은 줄곧 뉴욕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가족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다시 손을 대기 시작했지만,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안산은 당분간 가족
이야기를 들은 제이크 한은 매우 놀라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이전의 경력 때문에 블랙 드래곤에 대해서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블랙 드래곤이 시리아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영구 거점을 건설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용병 조직에게 있어 영구 거점을 보유한다는 것은, 단번에 다른 용병 조직들에 비해 훨씬 앞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용병이라는 존재는, 이화룡이 거느리는 조폭들에 비해 각국 사법기관이 훨씬 더 경계하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용병 조직은 세계 각국에서 길거리의 쥐와 같은 존재로 비밀리에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오직 정부와 깊이 협력하는 조직이 아니라면 절대로 대놓고 간판을 걸고 활동하지 못한다.물론 미국에도 용병 조직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백악관과 협력하며 그들의 총알받이 노릇을 하는 일부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대부분 은밀히 활동할 수밖에 없다. 용병 조직의 대다수는 미국 퇴역 군인 출신으로, 본국 경찰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개개인으로 위장 생활을 하다가 해외에서 임무를 수행하곤 한다. 예를 들어, 한 용병 조직은 100명 남짓한 구성원들에 불과한데 그들은 평소 각자 합법적인 직업과 신분으로 위장하여 일반 시민처럼 지내다가 임무가 떨어지면 관광객을 가장해 출국을 한다. 비록 이들이 본국에서 불법적인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무장 전투 요원이기 때문에 정부의 감시를 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조용히 움직여야 한다는 제약이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대부분의 용병 조직의 성장이 제한되는 것이다.하지만 용병 조직이 대놓고 합법적인 영구 거점을 보유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블랙 드래곤이 시리아와 협력했을 당시 미국 CIA는 그 이유를 조사했는데, 조직이 시리아에서 너무 빨리 성장하는 걸 우려해 개입까지 시도했었다. 하지만 시리아는 블랙 드래곤과의 협력을 고수했고, 그 뒤에는 시리아 내 영향력 있는 반정부 인사 하미드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