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호텔 방 안 문이 닫히는 순간 외부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툭.
고요.
이다정은 그 고요가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졌다.
아직 공항의 소음이 귀 안쪽에 남아 있는 느낌.
그 사이를 엘리스의 움직임이 파고든다.
망설임이 없다.
가방을 열고, 장비를 꺼내고, 공간을 점검한다.
작고 낯선 기계들.
손바닥만 한 스캐너, 이어폰처럼 생긴 탐지기, 얇은 선이 연결된 장비.
기계가 내는 아주 낮은 전자음이 공기를 긁는다.
이다정은 말없이 그걸 지켜봤다.
…이국적인 거리보다, 지금 이 장면이 더— 현실 같다.
“이상 없어.”
엘리스가 기계를 접으며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기울인다.
“근데.”
짧은
이다정의 아버지,이대표의 사무실은 언제나처럼 정돈되어 있었다.창밖으로 한강이 보였고, 낮게 깔린 구름이 유리창에 흐렸다.이다정은 소파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그녀의 옆, 한 발 뒤에 김다온이 서 있었다.늘 그렇듯 그림자처럼.“다정아.”이대표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무게가 있었다.“이번 이사회에서 말이 많단다.”이다정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일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니?”짧은 숨.“네, 마무리 할 수 있어요.”대답은 단단했다.망설임도, 변명도 없다.이대표는 잠시 그녀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겠다.”그리고 덧붙였다.“오늘 밤 해외 회사 임원 파티가 있다. 가보렴.”명령이 아닌, 시험처럼 들렸다.이다정은 조용히 일어났다.“네.”사무실을 나오는 순간까지김다온은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엘리베이터 안.둘만 남았다.이다정은 벽면에 기대 서 있었다.“기사님.”“예.”“아버지, 아직도 저 시험하는 것 같죠?”“대표님은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그는 사실만 말했다.이다정은 피식 웃었다.“그 말, 이상하게 위로되네요.”밤.
비행은 길었다.기내 조명이 어두워지고,승객들이 잠들기 시작했을 때.이다정은 창가에 기대 있었다.눈은 감고 있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대표 자리는 감정으로 하는 게 아니다.”그가 늘 하던 말.‘난 감정으로 결정 안 했어요.’속으로 반박했지만,이상하게도 최근의 감정이 자꾸 겹친다.엘리베이터 안.허리 위의 손.업무상 보호.그녀는 눈을 살짝 떴다.통로 건너편, 두 칸 뒤.김다온이 앉아 있었다.깊게 잠들지 않는다.늘 반쯤 깨어 있는 사람처럼.이다정은 가볍게 손짓했다.그는 바로 일어났다.“불편하십니까?”“아뇨.”그녀는 작게 웃었다.“그냥… 잠이 안 와서요.”그는 고개를 끄덕였다.“도착 후 일정은 내일 오후로 비워두었습니다.”“아버지 만나는 건요?”“오전.”짧다.이다정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역시 빠르네.”그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긴장되십니까?”솔직한 질문.이다정은 대답 대신 창밖을 봤다.깜깜한 하늘.“조금은요.”그녀는 다시 그를 본
계약 강행 이후, 세상은 조용하지 않았다.아침부터 포털 메인에 기사가 걸렸다.“젊은 대표의 무리수.”“경험 부족이 부른 위험한 선택.”이다정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다가,아무 일 아니라는 듯 꺼버렸다.표정은 담담했지만, 심장은 얄궂게 반응했다.‘또 시작이네.’상처는 익숙하다.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다.그녀가 사무실을 나서자 복도 끝에 김다온이 서 있었다.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얼굴.“동선 변경했습니다.”“왜요?”“기자 대기 인원이 늘었습니다.”짧은 보고.감정은 없다.늘 그렇듯.하지만 이다정은 느낀다.그의 시선이 전보다 더 자주,더 오래 자신에게 머문다는 걸.엘리베이터 앞.로비가 소란스럽다.카메라 셔터 소리.플래시.문이 열리자 경호팀이 먼저 진입했다.이다정이 한 발 내딛는 순간—등 뒤에서 가볍게 당겨지는 힘.허리였다.김다온의 손이 자연스럽게,망설임 없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안쪽으로.”낮은 목소리.이다정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전에는 손목이었다.어깨였다.그때마다 ‘업무’라는 이름이 붙었다.그런데 이번엔.
다음 날.이사회장은 냉랭했다.긴 테이블 위로 차가운 조명이 떨어지고,정돈된 서류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그 질서정연함이 오히려 압박처럼 느껴졌다.이다정은 가장 끝 자리에 앉아 있었다.대표의 자리.“리스크가 큽니다.”재무이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해외 파트너의 재무 구조가 아직 완전히 투명하지 않습니다.지금 계약을 강행하는 건 무모합니다.”“시장 반응도 지켜봐야 합니다.”또 다른 이사가 거들었다.“대표님 취임 후 첫 대형 계약입니다.조금만 삐끗해도 책임은전적으로 대표님께 돌아갑니다.”책임.그 단어가 공기 중에 묵직하게 떨어졌다.이다정은 서류를 천천히 덮었다.그녀의 표정은 고요했다.하지만 속에서는 파도가 일고 있었다.‘도망치면 편해.’연기하고, 유예하고,책임을 나눠 가지면 된다.하지만.그녀는 알고 있다.이건 기회다.회사를 바꿀 수 있는,그리고 자신이 대표로서 자리 잡을 수 있는.“계약 강행합니다.”담담한 선언.회의장이 잠시 조용해졌다.“대표님.”“리스크는 제가 집니다.”그녀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데이터 검토는 충분했습니다.불안은 이해하지만, 기회는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이다정이 묻는다.“기사님은.”그의 손을 잡은 채였다.빛 아래에서, 도망칠 구석도 없이.“나한테 선 긋는 거죠?”조용한 목소리였다.따지듯도, 매달리듯도 아닌.그저 확인하듯.김다온은 그녀의 손을 내려다봤다.가늘지만 단단하게 얽힌 손가락.풀 수 있다.조금만 힘을 주면.그런데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업무니까요.”낮게 떨어진 말.이다정은 눈을 가늘게 떴다.“그럼.”숨이 얕아진다.“업무 아니면요?”그 질문은 공기보다 가벼운 톤이었지만,무게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김다온은 답하지 못했다.정확히는—답을 알고 있으면서도,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그의 침묵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이다정은 안다.이건 부정이 아니다.유예다.그는 선을 긋고 싶어 한다.하지만 그 선을 그을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그녀는 손을 천천히 놓았다.그의 손가락이 마지막까지 따라오듯 움직였다가,허공에서 멈췄다.이다정은 돌아섰다.하지만 걸음이 느렸다.도망치듯 빠르지 않았다.기다리듯, 아주 미묘하게.김다온은 그 뒷모습을 보았다.흘러내린 머리카락.얇은 실내 원피스가허리선을 따라 부드럽게 떨어
문이 닫혔다.복도에 혼자 남은김다온은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손을 내려다봤다.손을 내려다봤다.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손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직 체온이 남아 있었다.김다온은 천천히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훈련으로 단단해진 손, 수많은 위기상황에서 망설임 없이 움직였던 손.그 손이.방금 전까지는 한 사람의 손을,지나치게 오래 붙들고 있었다.‘업무.’스스로에게 되뇌어본다.위험 요소 차단. 시야 확보 전 대기. 대표 안전 확보.논리적으로 완벽하다.그런데.업무라면, 조명이 돌아온 순간바로 놓았어야 했다.경호팀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거리 복귀가 우선이었어야 했다.그는 알고 있었다.놓지 않은 건 계산이 아니라, 선택이었다는 걸.복도 끝에서 경호팀 팀장이 다가왔다.“이상 없습니다. 단순 전력 계통 오류로 확인됐습니다.”“확인했습니다.”짧은 보고.짧은 답변.완벽하게 평소와 같은 톤이었다.하지만 팀장은 아주 잠깐, 그의 손을 흘끗 봤다.무언가 느낀 듯한 눈빛.김다온은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대표님 객실 앞 대기하겠습니다.”“예.”그는 다시 문 앞 자리로 돌아왔다.조용한 복도.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