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하다고?그저 자기의 것을 빼앗겼다는 욕심 때문일 뿐이었다.원작에서도 소우희가 비록 여주인공이었지만 이민수 곁에는 수많은 후궁이 있었다. 황제로서 자손이 가장 중요하다는 명목으로 여러 명의 여인을 두고 자식을 많이 낳았다.소우연은 이민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저하께 정말로 많이 상처받았습니다.”이민수는 미안한 표정을 짓고 손을 뻗어 소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재빨리 피했다.소우연이 차분히 물었다.“이미 저흰 엇갈렸어요. 오늘 날 납치한 목적이 대체 무엇이죠? 정말 저하를 위해서라면 저를 빨리 경성으로 돌려보내 주세요.”“태자 전하께서 이 일을 아시게 된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저하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나를 걱정해 주는 것이냐?”이민수는 기대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아직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소우연은 살짝 웃었다.“모르겠어요.”사실 그녀는 그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지금은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다. 이 남자를 당해낼 자신도 없었고, 그가 갑자기 돌변해 자신의 명예를 해칠까 봐 두려웠다.“모르겠다고…”이민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부하가 소우연이 시녀와 함께 걸어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순간 그녀를 납치해 숨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녀를 숨겨놓고, 가끔씩 보러 오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한 것이다.바로 그때 농부처럼 생긴 여인이 바구니를 들고 다가왔다. 여인은 이민수를 보고 공손히 말했다.“공자님, 오늘 저녁식사입니다.”저녁…그렇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이제 한 시진 정도만 지나면 어둠이 찾아올 터였다.소우연의 마음이 급격히 조급해졌다.겉보기에 이 마당은 평범해 보였지만 그녀는 이민수의 사병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도망갈 길은 없었다.그 여인은 소우연을 힐끗 보더니 아름답다고 생각했는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물러갔다.“왜 그러느냐, 먹고 싶지 않은 것이냐?”이민수는 소우연이 젓가
자신은 다르다?아이를 낳아줄 수 있다고?소우연은 속으로 코웃음쳤다.이 남자의 역겨운 말에 속이 뒤틀렸지만, 그녀는 얼굴에 내색하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아무 말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이런 기막힌 말들을 소화하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그리고 다시 경성으로 돌아갈 방법도 생각해야 했다.“내 진심을 믿지 못하겠느냐?”그녀가 아무 말도 없자 이민수는 불안해졌다.그는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듯 급히 말을 이었다.“예전에 소 씨 사람들이 너를 대신 시집보낸다 했을 때, 나는 그저 말뿐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로 너를 보낼 줄은 몰랐다. 내 잘못은 그것을 끝까지 막지 못한 것이다. 우연아, 우리 과거는 잊고 다시 시작할 수 없겠느냐?”끝까지 막지 못했다고?과거는 잊고 다시 시작하자고?소우연은 생각했다.이민수의 입은 정말 거짓말로 가득 차 있었다.예전에는 그녀를 속이고, 나중에는 소우희까지 속였다.“생각할 시간을 주세요.”소우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당장은 도망칠 방법을 알 수 없었다.어느덧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낮에는 대나무 숲과 개울가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르지만, 밤이 되자 사방에 모기가 극성이었다. 잠시 마당에 서 있는 동안 얼굴이며 팔이며 목 뒤까지 모두 모기에 물리고 말았다.이민수는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자 말했다.“혹 누구를 기다리는 것이냐?”설마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던 폐인 이육진이 이곳까지 찾아올 수 있을 거라 믿는 건가?겨우 일년도 안 된 시간 동안 자신에게 매달렸던 소녀가 이육진에게 빠져버렸단 말인가?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마음이 답답해진 이민수는 더욱 그녀를 빨리 차지하고 싶어졌다.어차피 침상 위에서 이육진 그놈은 남자구실도 제대로 할 수 없지 않는가.남녀의 정은 원래 서로의 마음을 더욱 가깝게 만드는 법이다.일단 자신과 한 번 정을 나누면, 그녀는 자신과 이육진 중 누가 진짜 남자인지 깨닫게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소우연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
“세자 저하도 무예를 잘 하신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이민수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오늘 하루 종일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호기심을 보였다.“당연하지. 소범준은 내 상대도 못 된다.”그는 매우 자신 있게 대답했다.소우연은 아쉬운 듯 말했다.“그렇게 대단하시다니 정말 놀라워요. 하지만 직접 볼 수 없는 게 아쉽네요.”이민수가 서둘러 말했다.“안으로 들어가거라. 내가 무예를 보여줄 테니.”“무예를 구경하는 게 뭐가 재미있겠어요. 저는 그저 저하께서 직접 잡아주신 반딧불이를 보고 싶은 거지, 소범준이 잡은 걸 보고 싶은 게 아니에요.”소우연은 크게 실망한 듯 작게 중얼거렸다.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망울이 물기 어린 듯 순진하게 반짝였다.이것은 애교인가?이민수는 잠시 망설였다.남녀 사이에는 이렇게 여자들의 작은 소망을 들어주며 마음을 얻는 법이다.하지만 반딧불이 같은 것을 직접 잡으러 간다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그래도 눈앞의 아름다운 소녀를 보니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그래 알겠다. 내가 가서 잡아다 주마.”그녀만 기뻐한다면, 이 정도 하찮은 일이야 해줄 수 있었다.이민수는 말을 마치자 가볍게 몸을 날렸다.순식간에 시냇가에서 반딧불이를 잡고 있던 소범준에게로 가서 무언가 낮게 지시했다.소범준은 즉시 잡아두었던 반딧불이를 모두 놓아주었다.곧이어 소우연은 검은 밤 속에서 흰옷을 입은 이민수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열심히 반딧불이를 잡는 모습을 보았다.소범준이 다시 돌아와 마당에 섰다.그는 소우연을 한 번 바라보더니 무슨 말을 하려다 참았다.그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불쾌함이 가득했다.소우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내가 네 주인을 이렇게 부려먹는 게 싫다면 나를 도와 도망치게 해주면 되겠구나.”소범준은 차갑게 코웃음쳤다.“도와달라고요? 꿈도 꾸지 마십시오!”소우연은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도울 생각도 없으면서 왜 굳이 심술 난 표정을 지었던 걸까?그렇게 반 시진 정도 지났을까, 시냇가에서 위아래로
소우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서글픈 표정을 짓자 이민수는 순간 넋을 잃어버렸다. 그러다가 힘들게 개똥벌레를 잡아왔는데 소우연이 손쉽게 놓아버린 일로 치솟았던 분노도 조금씩 사리지기 시작했다. 결국 이민수는 재빨리 소우연에게 달려가 말했다.“그래, 연이 너는 언제나 착하구나.”소우연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하지만 세자 저하 조금 전의 표정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저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소인을 좋아하고 계신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무섭게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좋아하면 큰소리로 얘기하는 건 고사하고, 목소리가 조금만 높아도 상대방이 놀라지 않을까 걱정하는 게 정상입니다. 소인이 반딧불 초롱을 갖고 싶다고 한 건 그저 반딧불이 얼마나 밝은 지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제 충분히 보았고, 그래서 불쌍한 개똥벌레들을 놓아준 것인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겁니까?”소우연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삐죽 내밀며 이민수를 원망하고 있는 듯했다.한편, 소우연의 말에 이민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정말 그런 이유 때문에 놓아준 거라고?’살짝 의심이 들긴 했지만 가녀린 몸집에 가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소우연을 보고 있으면 농락을 당했다는 생각이 온데간데없이 싹 사라졌다.그러다가 소우연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내 앞으로 연이가 원하는 건 최대한 들어주려고 노력하겠다.”말을 하던 이민수는 뭔가 결심이 부족한 것 같아서 다시 말을 바꿨다.“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든 연이 네 소원은 다 들어줄 것이다.”소우연은 자신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이민수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욕정을 보았다.벌써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가?“연아, 난 오늘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이뤄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니 너도 이제 내 마음을 충분히 알게 되었을 것이야. 이제 우리 그만 화해해도 되지 않겠느냐?”“화해하고 나서는요?”“화해하고 나면 나중에 너를 내 관저로 데리고 가야겠지.”“그럼 나중에… 나중에 세자 저하 관
“세자…”소우연은 차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은 채 입을 꾹 닫았다. 그녀는 이민수가 어떤 방식으로 이육진을 망가트리려는 건지 정확하게 알고 싶었다.5년 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이육진을 망가트리는 건 이제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의 이육진은 언제 어디서나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고 세력 또한 점점 확장되고 있다.그래야만 원작의 설정대로 이육진이 이민수가 황위에 오르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까.“세자 저하께서는 그자를 어떻게 망가트릴 생각이십니까? 그자는 더 이상 5년 전의 회남왕이 아닙니다. 경계심도 더 높아졌고 그 누구도 쉽게 믿지 않을 겁니다.”“알고 싶으냐?”이민수의 물음에 소우연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저하께서 얘기해주실 의향은 있으십니까?”“물론이다. 네가 나한테로 와준다면 말해줄 수 있지.”말을 하던 이민수의 시선이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가다가 이내 대놓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너와 내가 좋은 시간을 보내서 네가 온전한 내 여자가 된다면 난 무엇이든 얘기해 줄 수 있다.”이민수는 이육진을 망가트릴 확신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가 얘기한 좋은 시간이라는 건… 실로 역겨웠다.소우연은 돌아서서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들고 매혹적인 눈빛으로 이민수를 쳐다보았다.“세자 저하, 차 한잔 드리겠습니다.”차를 마시라고?“내 뜻에 따르겠다는 것이냐?”이민수의 물음에 소우연이 대답했다.“이육진 그자는 지금까지도 소인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건 소인이 그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겠지요. 오늘 밤 세자 저하와 소인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소인이 결백하다는 걸 아무도 믿지 않을 겁니다. 물론 세자 저하께서 지금 당장 소인을 돌려보내시면 말이 달라지긴 합니다만…”소우연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하자 이민수가 바로 대꾸했다.“널 돌려보내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연아,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는 걸 너도 잘 알지 않느냐…”소우연의 신뢰를 얻기 위해 이민수는 이미 반나절이나 참고 있었고 이제는
“너, 너 지금 뭐 하려는 것이냐?”이민수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한편, 손에 가위를 쥔 소우연은 천천히 이민수에게 다가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민수, 네가 남자 주인공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서방님을 함부로 망가트릴 수는 없는 거야. 일단 너부터 평생 남자구실을 못 하게 되는 고통을 한번 느껴봐.”“아니야! 아니야! 연아, 제발 그러지 말거라. 말로 하면 되지 않느냐? 보내줄게. 지금 당장 너를 보내줄 테니까 제발 그만하거라.”“늦었어. 너에게 개똥벌레를 잡아오라고 보내고 나서 내가 마당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알아?”소우연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이 마당은 관리가 잘 되어있지 않았기에 소우연은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서 꽤 잘 자란 독말풀을 발견했다.오후 내내 소우연은 이민수의 경계를 풀면서 어떻게 저 독말풀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다.다행히 욕망에 눈이 먼 이민수는 소우연에게 절호의 기회를 주었다.이민수가 개똥벌레를 잡으러 가자마자 소우연은 마당을 구경하는 척하면서 빠르게 독말풀을 뜯어 독액을 채취한 것이다.“뭘… 뭘 하고 있었던 것이냐?”“독을 조제했지. 이 독으로 네놈을 바로 죽여버릴까 아니면 목숨 정도는 남겨둘까 고민이 많았어.”소우연은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네놈이 내 서방님을 완전히 망가트리려고 했잖아. 그건 절대 안 되지. 네 놈이 아무리 남자 주인공이라고 해도 그건 절대 용납 못 해!”“남자 주인공이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네놈 말이야. 네놈이 이 세상의 남자 주인공이거든. 황제가 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제 모든 게 바뀌고 있어.”이민수는 그저 소우연의 미소가 너무 섬뜩했기에 그녀가 얘기한 남자 주인공이나 황제의 운명이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지금 그저 살고 싶었다.“연아, 내가 잘못하였다.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거라. 지금 당장 너를 경성에 돌려보내 줄 테니 제발…”말을 하던 이민수는 아랫도리
“그리고 너무 기분 나빠할 것도 없어. 예전에 내가 네놈에게 진심을 보여줬을 때 네놈도 내 진심을 무참히 짓밟았잖아.”소우연의 말은 비수가 되어 이민수의 심장에 꽂혔다. 그러다가 오늘 하루 종일 소우연을 위해 바보같이 개똥벌레를 잡으러 다녔던 것만 생각하면 너무 창피하고 억울했다.다음날 아침, 따스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방안을 비췄다.천천히 눈을 뜬 소우연은 왠지 조금 서운했다. 이육진은 아직도 그녀를 찾지 못한 건가?윗몸을 일으킨 소우연은 바닥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민수가 초점이 풀린 눈으로 소우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얼굴 근육이 완전히 굳어버렸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다.중독 증상이 심해서 온몸에 마비가 온 것이다.죽일 듯이 노려보는 이민수의 모습에 소우연은 그저 피식 웃으며 물었다.“세자 저하, 그렇게 밤새 제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던 겁니까?”“날 이렇게 만들고 넌 어떻게 그렇게 편하게 잘 수 있어?”소우연이 언제부터 이렇게 독해진 걸까?이민수는 소우연을 밤새 쳐다봤을 뿐만 아니라 살려달라고 계속 소리도 질렀지만 침대 위에 누운 소우연은 너무도 편하게 자고 있었다.그리고 그가 멀리 보냈던 호위무사들은 단 한 명도 그의 구조 신호를 눈치채지 못했다.침대에서 내려온 소우연은 차를 한잔 더 따르더니 이민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세자 저하, 아무래도 조금 더 마셔야겠습니다. 이따가 호위무사가 찾아오면 저하께서 어젯밤 너무 무리하셔서 더 쉬어야 한다고 전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너… 읍!”“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얼른 마셔요.”소우연은 이민수의 턱을 확 잡더니 손쉽게 그의 입을 벌리고는 독이 든 차를 이민수의 목구멍에 들이부었다.그러고는 바닥에 흥건한 핏자국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 정도로 피를 많이 흘렸는데도 살아있는 걸 보면 이민수는 확실히 남자 주인공이 맞다.“독한 년! 천한 년!”팍!이민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우연이 그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네 놈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이 세상에서 독한 놈은
쾅!문이 벌컥 열렸고 이육진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소우연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녀는 너무 힘들었다.“죽여야 됩니다. 저자를 죽여야 합니다…”소우연은 가까스로 중얼거렸다.한편,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이육진은 바닥에 쓰러진 소우연과 주위에 퍼진 핏자국을 보자 한걸음에 달려가 소우연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이민수는 곁에 누워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이육진을 쳐다보았다.“연아, 연아!”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는 소우연을 보며 이육진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이육진의 모습에 소름이 쫙 돋은 이민수는 갈라진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이 피들은 소우연의 것이 아닙니다. 제 것입니다. 소우연은 그저 잠깐 기절했을 뿐입니다.”이육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소우연을 자세하게 살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한 치의 헝클어짐도 없이 온전했지만 이와 반대로 바닥에 널브러진 이민수의 아랫도리는…순간,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오른 이육진은 분노가 더욱 확 치솟았다.품에 소우연을 꼭 끌어안은 이육진은 이민수의 허벅지를 발로 힘껏 차면서 물었다.“네 놈이 연이한테 무슨 짓을 한 것이냐?”카리스마 넘친 이육진을 보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이민수는 두려운 마음에 말을 더듬었다.“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우연이 저에게 독을 먹인 겁니다!”“네 말이 사실이어야 할 것이다!”보아하니 이민수는 이제 평생 남자 구실을 못할 것 같았기에 이육진은 이민수가 더욱 하찮고 가소롭게 느껴졌다.소우연을 안아들고 벌떡 일어선 이육진은 발로 이민수의 가슴을 힘껏 밟고는 방을 나섰다.이때, 진규가 달려와 이육진에게 보고했다.“태자 저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살해했습니다.”이육진 품에 안긴 소우연을 보자 진규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마마는 괜찮으신 건가?’“가자.”이육진이 말했다.소우연이 이민수의 아랫도리만 잘라버린 건, 그가 소우희처럼 앞으로 폐인이 되어 힘겹게 사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
용부에 도착하자 하인이 다가와 알리겠다고 했지만, 소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미리 알리지 않으셔도 돼요.”정연과 진우를 데리고 주합문 앞에 다다랐을 때, 소우연은 마당 한가운데서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는 용강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얇은 담요 하나 덮은 채 대나무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은 그의 온몸을 감싸며 은은한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햇살 속에 스며들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소우연은 잠시 숨을 삼켰다.곁에 있던 호위가 다가오려 하자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저는 태자빈입니다. 용 감정과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호위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그는 그녀를 몰라볼 리 없었다. 주군께서 가장 자주 안부를 묻던 이였다. 위급한 상황에는 도우라는 명까지 내려졌으니, 그가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었다.소우연은 조용히 정연과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문 앞에서 기다리세요. 누구도 들이지 말고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발소리조차 삼키며 마당을 가로질렀다.낙엽과 풀이 깔린 바닥 위로 바스락이는 소리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돌려보내라.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용강한은 눈도 뜨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소우연은 멈추지 않았다.“제가 오늘 올 거라는 예감이 들진 않으셨나요?”그제야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햇살을 뚫고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그대로 누운 채 손을 모아 가볍게 인사했다.“태자빈 마마셨군요. 자리에 앉으시지요.”소우연은 그제야 그의 옆에 놓인 또 하나의 안락의자를 발견했다.방석까지 가지런히 놓인 자리가, 누가 봐도 ‘그녀’를 기다린 자리였다.“이걸 미리 준비하셨군요. 오늘 제가 올 걸 아셨던 거네요.”“예. 그리고 약간의 수를 써서 태자 전하께서 잠시 궁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단둘이 뵙고 싶었거든요.”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진맥해드릴게요.”“괜찮습니다…”그의 말이 끝나
이민수는 혜주와 소범준만 남긴 채,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가 떠난 뒤, 아령은 소씨 가문 안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 소지윤에게 아이를 얻기 위한 계획도 한결 수월해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주는 속으로 생각했다.아씨는 누구에게도 깊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소지윤 대인에게만은 그 마음이 다른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면 왜 하필 그의 아이를 가지려 하시는 걸까.한편, 태자부.이육진은 연회를 열고, 용강한과 심소균을 초대했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즈음, 소우연이 용강한더러 ‘오라버니’라 부르자 심소균은 술잔을 들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아니…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거지?’태자빈이 ‘오라버니’라 부를 정도라면, 절대 가벼운 인연이 아닐 터.그보다 더 놀라운 건, 태자 이육진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심소균은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기분에, 괜히 청주를 몇 잔 더 들이켰다.“그냥 조용히 마시죠.”용강한은 무심히 말하며 자신도 잔을 비웠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소우희는 이미 죽었다.그토록 집요하게 소우연을 괴롭히던 이가 사라졌다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법도 했다.하지만, 연회 자리를 둘러싼 이들의 표정은 어딘가 무거웠다.심소균은 내막을 알지 못했지만, 용강한은 알고 있었다.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결말이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심소균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자, 이육진은 하인을 불러 그를 데려가게 했다.연회가 마무리되고, 소우연이 조심스레 물었다.“오라버니,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세요?”“괜찮습니다.”용강한은 담담히 웃었지만, 이어진 기침은 거셌고… 이내 곧 수건에는 선혈이 스며들었다.그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망토를 여미고는, 여느 때처럼 미소를 띠었다.그러나 그를 지켜보는 눈은 날카로웠다.소우연은 물론, 이육진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용 감정, 네 몸 상태가 왜 이리 나빠졌느냐.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그는
서재 안은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숨막히는 분위기로 가득했다.이민수는 의연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예전에 우희가 소우연에게 얼마나 애원했는지, 부인께서 또 얼마나 고개를 숙였는지… 다들 기억하시겠지요? 그런데도 소우연은 우희를 단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답니다.”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지금 잠시 조용하다고 이게 끝이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내민 손길을 뿌리치셨으니, 훗날 다시 찾아오신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고, 서늘한 눈빛을 떨구었다.“우희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아령이 눈물로 애걸복걸하지 않았다면… 소씨 가문을 위해 이 더러운 일에 제 발로 들어설 생각 따윈 없었습니다.어차피 저희 평서왕부는, 태자부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소홍범의 안색이 굳어졌다.평서왕의 야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과거 이육진이 불구가 되고 얼굴까지 망가졌을 무렵, 평서왕은 황태자의 자리를 가장 가까이서 노릴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이었다. 비록 직접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의 장남 이민수가 황제에게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가 될 거란 이야기는 조정에 이미 돌고 있었다.수년간 평서왕부는 조용히 인맥을 조율하고 관료를 포섭해왔다. 이육진이 회복했다고는 하나, 평서왕 부자의 야망은 그 무엇으로도 꺾이지 않았다.소씨 가문은 이제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아버지…”소현우가 조용히 일어섰다. 우희를 향한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소우연에 대한 원망은 이미 마음속에서 불덩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지옥이라면, 차라리 평서왕세자의 손을 잡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소홍범은 고개를 돌려 소현준을 바라보았다.소현준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소우연을 직접 만나야 하나… 아직은 이르다.’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그 순간.이민수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서자, 소현우가 갑작스레 그의 등
“누구지?” 임진숙이 물었다.“평서왕부의 세자저하, 그리고 스스로 둘째 아씨의 지기라 밝힌 여인입니다.”소현우가 곧장 말했다. “어머니, 우희와 친하다고 했던 그 손수건 친구입니다. 어제 시신 수습을 도왔던 그 아가씨예요.”임진숙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모셔라. 우희의 친구라니... 잘 모셔야 한다. 알겠느냐?”“예.”소현우는 급히 나가 마중을 나갔다.지금의 소씨 가문에겐 더 이상 발버둥칠 힘도, 핑계도 없었다.평서왕 세자 이민수, 한때는 소우희의 혼처 상대였던 사내. 소우연만 아니었다면, 소씨 가문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일도, 우희가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자신이 직접 여동생의 목을 조르는 죄를 짓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이민수가 도착하자, 병중에 있던 소홍범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맞았다.가족 모두가 알고 있었다.태자부는 이제 발붙일 수 있는 곳도 없었고, 의지할 곳도 아니었다.소씨 가문이 마지막으로 기대어볼 곳은 오직 평서왕부뿐.본래부터도 세상은 소씨 가문이 평서왕부의 그늘 아래 있다고 여겨왔다.“소 장군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다시 뵙는 자리가 이리도 쓸쓸할 줄은 몰랐습니다.”소홍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얼굴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있던 소한준은 냉랭하게 내뱉었다.“소우연만 없었더라면, 우희는 진작에 세자저하의 곁에 있었을 겁니다. 이런 참변도 없었겠지요.”이민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 다 지켜주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형식적인 위로가 몇 마디 오간 뒤, 아령은 이민수의 배려로 이당에 남아 임진숙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소홍범과 이민수, 소현우, 소현준은 서재로 향했고, 소한준은 하인의 부축을 받아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임진숙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참을 흐느꼈다.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았다.‘우리 우희가 왜 이리 비참하게 갔을까… 우리 집안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그녀는 끝없는 자책과 회한 속에 빠져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믿었어. 그 은인이 우리 어머니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라고. 그런데 우리가 피를 말리며 상운국에 도착했을 땐 외가 쪽은 이미 떠난 뒤였지. 나중에야 들었어. 멀리 남강으로 이사했다는 걸 말이야. 그 은인은 어머니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했나 봐. 결국 어머니를 다시 백화루에 팔아넘겼어. 그리고 나도… 결국 기생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지.”아령은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로 조용히 혜주를 바라봤다.“넌 어떻게 생각해? 내 이모인 임진숙이라는 사람… 참 무섭지 않아? 그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지 않아? 왜 그 사람은 고귀한 장군 부인으로 살아가고, 우리 어머니는 천한 기생이어야 해? 왜 그 사람 자식들은 다들 한 자리씩 가질 때, 나는 태어날 때부터 천한 신분이었던 걸까? 우리 어머니가 그걸 참지 못했어. 나도 마찬가지였고.”아령의 눈빛은 억눌린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그래서 맹세했어. 어머니랑.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기회가 생긴다면, 꼭 그 사람과 그 사람 가문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겠다고.”그녀는 눈물을 훔친 뒤, 환하게 웃었다.그 미소는 해맑았지만, 그 속에 담긴 결심은 날카롭고 서늘했다.“그게 바로 내가 살아 있는 이유야.”그 이야기를 들은 혜주는 마음 깊은 곳이 흔들렸다.‘그랬군요… 그래서…’소 부인 임진숙. 겉으론 다정하고 자애로워 보였지만, 어린 동생을 백화루 문 앞에 유기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분명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이중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소우희 아씨가 그렇게 악랄했던 것도… 이유가 있었군요.’‘진짜…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네요…’“그 진홍색 비단함, 꼭 잘 보관해. 그 안엔… 언젠가 그 집안 사람들의 뼛가루를 담게 될 거야. 그래야 어머니의 영혼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테니까.”아령은 혜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너도 쉽지 않은 삶을 살았잖아. 그 마음, 나도 잘 알아. 평서왕부로 돌아가면 널 풀어줄거야. 그때 내가 준 돈으로 아무도 널 모르는 곳에 가서… 조용히, 너답게 살아.”그 말을 들은
그녀가 한때 이민수의 침소를 지키던 몸이었다는 사실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그랬군요...”소현우는 장정답지 않게 눈가가 붉어졌다.멀찍이서 하인들이 수레를 끌고 오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저건...”“우희 언니에요.”아령은 숨김없이 고백하며, 눈가를 눌렀다. 슬픔을 삭이는 듯한 손짓이었다.소현우에게는 낯선 장면이었다.소우희에게 이런 절절한 마음을 나누던 벗이 있었던가.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소현준은 그리 쉽게 믿지 않았다.여인의 말은 빈틈이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그럼에도 혜주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었다.소현준은 혜주를 일으켜 세우며 눈을 맞췄다.“정말... 둘째를 원망하지 않느냐?”혜주는 힘 있게 고개를 저었다. 그 눈빛엔 감사와 충성이 담긴 듯 보였다.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그녀는 소우희를 증오했다. 결국 바랐던 대로 소우희는 혀를 잃고,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그것으로 충분했다. 모든 것이 보상받은 기분이었다.소현우는 그런 혜주의 내면까지는 읽지 못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어릴 적부터 함께한 사이니... 주인과 종이라도 정이 있었겠지.”사실 혀를 자른 것도 그날 격분한 소홍범의 지시였다.이제 소우희는 죽었고, 더는 이 하녀에게 뭐라 할 이유도 없었다.소현우는 이마를 짚으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아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고맙다. 혜주가 그대 곁에서 지낼 수 있다면... 그 또한 우희가 남긴 인연이라 생각한다.”아령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오라버니... 아니, 장군님. 죄송해요. 순간 감정이 북받쳐서...”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치 실수라도 한 듯 웃어 보였다.소현우는 손을 내저었다.“우희의 벗이라면, 오라버니라 불러도 괜찮다.”잠시 후, 소씨 가문의 하인들이 아령 일행의 수레 대신 소우희의 시신을 직접 실었다.이제 그녀를 보내는 건, 가족의 몫이었다.소현준은 형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형은 어
전날엔 폭우가, 오늘은 뙤약볕이 내리쬐었다.이런 날씨 속에서, 소우희의 시신은 또 얼마나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을까.강직한 무장이자 소씨 가문의 주인인 소홍범조차 그 앞에선 중심을 잃을 뻔했다.말을 꺼내려다 삼킨 그는, 결국 큰아들 소현우와 둘째 소현준에게 시신을 찾으러 가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난장골.산바람은 살을 찌를 듯이 뜨겁고, 공기마저 눅눅하게 달아올라 있었다.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 숙취에 시달리던 소현우는 동생과 함께 난장골에 도착했다.주위를 둘러보니, 시신을 찾아 이곳을 헤매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그중 한 무리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희고 단정한 옷차림의 소녀가 한 대의 수레를 따라가고 있었고, 수레 위엔 희미한 천이 덮인 시신 하나가 실려 있었다.소녀의 눈가엔 희미한 붉은 기가 맴돌았다.썩은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소현준은 코끝을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호위병 하나는 이미 참지 못하고 옆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소현준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둘째 아씨 시신부터 찾아라.”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 하인들은 이를 악물고 악취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였다.하얀 옷의 소녀와 그 일행이 소씨 가문의 마차 앞으로 다가왔고, 소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실례합니다. 혹시 소씨 가문의 도련님들이신지요?”마차 안에 있던 소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마차 옆에 서 있던 소현준만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그리고 그 소녀 옆에 선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혜주였다.혜주는 곧장 무릎을 꿇으며 조용히 예를 올렸다.그 눈동자엔 아련한 빛이 어려 있었고, 그리움과 슬픔이 섞인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소현준은 미간을 좁히며 소녀에게 물었다.“너는 누구냐?”시선은 혜주에게 있었지만, 질문은 분명 그 소녀에게 향한 것이었다.소녀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몸을 낮추며 답했다.“아령이라 합니다. 예전에 소우희 아씨를 몇 차례 뵌 적이 있고, 개인적인 은혜를 입은 바 있습니다. 서로 손수건을 나
반 시진이 지나고, 어느덧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붉게 타오른 노을이 하늘 끝에 걸려 있었고, 맑고 푸른 하늘은 마치 물로 씻어낸 듯 투명했다.그 풍경은 마치 소우연의 마음과도 같았다.모든 짐을 내려놓은 듯, 가볍고 평온했다.소우희는 죽었다.이 세계의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남주는 더 이상 남자 구실을 할 수 없었다.모든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새로 쓰일 터였다.진원 장군부.소현우는 돌아오자마자 술을 들이켰고, 그날 밤을 고스란히 의식을 잃은 채로 보냈다.그리고 다음 날, 해가 지기 직전에서야 겨우 눈을 떴다.헝클어진 머리에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못한 채, 그는 하인에게 명했다.“소씨 가문 사람들을 전부 정청으로 불러라.”며칠째 앓고 있던 소홍범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군의 업무는 거의 대부분 부장들에게 넘긴 상황이었고,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이육진이 그의 군권을 서서히 회수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다.지금 그의 수하 중 대부분은 본래 이육진의 옛 부하였다.이육진은 별다른 수를 쓰지 않아도, 그저 말 한마디면 모두가 따랐다.그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소홍범, 그리고 그의 아들들마저도 과거엔 모두 이육진의 군 아래 있었다.5년 전,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이육진이 매복을 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 소현우는 전방에서 적과 싸우며 지원 한 번 받지 못한 채 중상을 입었다.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그 순간, 그를 구해낸 사람은... 소우희가 아니었다.소우연이었다.소홍범은 이를 악물었다.소우희를 미워했다.믿고 싶었지만, 결국 기대를 저버린 딸이었다.소우연이 그의 큰아들을 살려냈다고 해서,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가족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그게 소우희의 자리를 대신할 이유는 아니었다.결국 일을 망쳤다.감히 소우연을 건드려, 집안 전체가 흔들리는 사태를 자초했다.정청에 모두가 모였다.눈이 퉁퉁 부은 임진숙이 조심스레 물었다.“어머님은 안 오는 거니...? 혹
‘세상에 진심이란 없어.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야.’그 말이 또렷이 귓가에 맴돌았다.마지막까지 아령의 목소리가 소우희의 머릿속을 울렸다.‘날 미워하지 마. 미워할 거면 너 자신을 미워해. 네가 소씨 집안의 자식이라는 걸. 네 어머니가 악독한 여자였다는 걸. 그 여자가 내 어머니 인생을 망쳤고, 그래서 난 태어나자마자 천민이 되었어.’‘난 바라는 거 없어. 단 하나, 너희 소씨 집안이 완전히 무너지는 걸 두 눈으로 보는 것. 그것만이 내 삶의 이유야.그리고 지금 난 그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어. 나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소우희는 그녀가 정말로 복수가 성공하길 바랐다.여자의 숨소리가 멎었다.소현우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비틀거리며 주저앉을 뻔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우희의 콧날 아래를 짚어보았다.숨이 없었다.정말로 죽은 것이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오라버니’라 불렀던 여동생. 그 목소리가, 그 웃음이,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았건만.소우희는 정말로 죽었다.그는 허둥지둥 감방을 뛰쳐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임진숙이 그 얼굴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니?”소현우는 눈을 피하며 단호히 말했다.“아무 일 아니에요. 어서 돌아가요. 어머니, 어서요.”말을 재촉한 뒤, 급히 달려가는 소씨 가문의 마차를 바라본 옥졸은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불안한 기운에 곧장 감방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았고, 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소우희가 죽어 있었다.그녀는 움직일 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그렇다면 가능한 건 단 하나.소현우 장군.그는 자신의 손으로 친여동생의 목숨을 거두었다.옥졸은 온몸이 얼어붙었다.어떻게 이런 일을 책임자에게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더욱이 태자에게...그는 급히 의원을 불렀지만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소우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옥졸은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직접 태자부로 달려갔다.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금세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