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이제 그만 건드릴게요. 계주부까지는 아직 반 시진도 채 남지 않았으니 얼른 좀 쉬세요.”소우연이 말했다.이육진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품 안으로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래.”두 사람은 다시 서로에게 몸을 기대었다. 이육진이 눈을 감는 모습을 본 소우연도 그의 품에 기대어 조용히 눈을 감았다.마차가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동안 두 사람의 의식도 서서히 흐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육진은 물론 소우연에게도 졸음이 밀려왔다.그렇게 막 잠이 들려던 순간이었다.이육진이 잡고 있던 소우연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고개를 들어 보니, 이육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마치 악몽이라도 꾸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소우연이 그의 가슴을 천천히 쓸어주자,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찌푸려져 있던 이육진의 미간이 조금씩 풀렸다.하지만 정작 소우연은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이육진의 말대로 정말 용강한에게 아무 일도 없는 것일까?그렇다면 자신은 어째서 그런 불길한 꿈을 꾼 것일까?아무리 생각해도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계주부.하늘 가득 불길이 치솟고, 곳곳에서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사방에는 시체 타는 냄새가 자욱했다.한 무리의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경씨 저택으로 들이닥쳤다.“경 대인, 저희는 그저 왕후 마마와 왕자 마마, 공주 마마를 모셔 오라는 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대왕의 명이십니다!”아류가 품에서 영패를 꺼내 경장명에게 내보였다.경장명은 영패를 확인한 뒤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대왕께서 친히 그대를 보내신 것이냐?”“그렇습니다!”“그럴 리 없다!”경장명은 임설을 비롯한 이들이 이곳을 빠져나가는 순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경 대인, 설마 대왕의 명을 거역하시려는 겁니까!”아류가 경장명을 노려보며 말했다. “대왕께서 대인의 죄를 물으실까 두렵지도 않으십니까!”“두렵지 않다.”경장명은 그렇게 말하며 임설과 소승용, 소승아 남매를 바라보았다. “너희 둘은 잘 생각
화랑이 말했다. “작은 아가씨께서는 참으로 늠름하고 당당하시구려. 그야말로 여장부가 따로 없소이다!”“참 부러워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저도 여장군이 되고 싶어요!”화랑이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우리 딸도 무예를 배워보게 하는 게 어떻겠소?”“좋아요!”령이가 단호하게 말했다.소우연은 령이와 화랑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러고는 마차 문을 닫고 발을 내린 뒤 이육진을 바라보았다.마차는 산길을 따라 천천히 나아갔다.이육진이 손을 뻗어 소우연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고는 나직이 말했다. “용 대인은 무사하다. 아주 잘 지내고 있어.”“정말요?”소우연은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이내 이육진을 빤히 바라보며 그의 눈빛과 표정에서 무언가 수상한 기색이 없는지 살폈다.이육진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가 누구더냐. 용 대인이지 않느냐. 이 세상에 그가 해결하지 못할 난제가 어디 있겠느냐?”“지난번 오라버니가 저를 찾아왔던 일을 잊으신 모양이에요…”“설령 그렇다 해도 조금 까다로운 것뿐이지, 해결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이육진은 살짝 긴장을 풀며 소우연을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정말이다. 네가 너무 걱정을 해서 낮에 생각한 게 밤에 꿈으로 나온 것뿐이야.”“부군은 모르실 거예요. 그 꿈이 너무 생생해서, 오히려 이 세상이 더 허황되게 느껴질 정도였다니까요.”소우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육진이 웃으며 말했다. “허, 나는 어째서 그런 재미난 꿈을 꾸지 못하는 것이냐. 나도 네가 꿈에서 본 세상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보고 싶구나.”소우연이 입을 열었다. “그곳 사람들은 사고방식이나 행동이 훨씬 개방적이고 대담한 것 같았어요.”“남자도 여자도 다들…”소우연이 손으로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이렇게 짧은 옷을 입고, 치맛단도 이만큼 짧아요.”“여자도 이리 짧게 입는다고?”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여자도 이렇게 짧게 입어요
화랑이 곁에서 기다리다가 소우연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타오르는 불빛을 보고 부부는 동시에 입을 딱 벌렸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대체 어디에 불이 난 게야?”“계주부 쪽이에요.”령이가 대답했다.소우연이 말했다. “소항이 사람들을 이끌고 뛰쳐나간 모양이구나.”“어디로 가려는 걸까요?”령이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반란을 일으키려는 거겠죠. 상운국을 치겠다는 걸까요? 그런데 저런 오합지졸을 데리고 어떻게 상운국 같은 대국에 맞서겠다는 건지.”화랑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두 사람이 소우연을 바라보자, 소우연이 말했다. “사람은 벽에 부딪혀 봐야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는 법이다.”화랑과 령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상운국처럼 큰 나라라면, 영남의 주력 부대 둘이 이미 편입된 것은 물론이고 영남의 전군을 총동원한다 해도 상운국을 조금도 흔들지 못할 것이었다.황태후와 태상황, 월왕 전하 같은 이들을 보라. 그중 누구 하나 만만한 상대가 있었던가?바로 그 순간, 화랑과 령이의 눈에는 소항이 영락없는 광대처럼 보였다.“두 사람은 가서 짐을 좀 챙기거라. 우리도 곧 계주부로 떠나야 하니.”소우연이 령이와 화랑에게 말했다.령이와 화랑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령이가 말했다. “부군, 당신은 옷가지를 챙기러 가세요. 저는 마님과 아가씨들 짐 싸는 걸 도울게요.”“알겠소.”얼마 지나지 않아 이진이 마차를 구해 왔다. 마차를 모는 이는 다름 아닌 이진이 직접 길러낸 호위였다.소우연과 령이는 여전히 옷가지를 정리하고 있었다.이진이 들어와 함께 정리를 도왔다.분장과 변장에 쓰던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이진이 물었다. “어마마마, 이것들도 챙길까요?”“필요 없다.”소우연이 담담하게 말했다.이들은 벌써 며칠째 분장도, 변장도 하지 않았다. 오늘 이후로는 영남에서 더 이상 변장할 일이 없을 터였다.소우연은 짐을 정리하며 이육진의 옷가지 몇 벌도 함께 챙겼다. 모두 정리를
한밤중. 소우연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문득 밖을 내다보니 하늘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칠흑 같은 한밤중이었다. 노을일 리 없었다. 설마 전쟁이라도 벌어진 것일까?“어마마마! 어마마마, 어서 일어나세요! 어마마마…!”이진이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소항이 친위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갔다고 해요.”소우연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갔다.“그자가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했단 말이냐?”“오라버니께서 서신을 보내셨어요. 방 대인의 심복이 영남에 도착했다는데, 아마도 상운국 조정을 윤이가 홀로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소항에게 알린 것 같아요. 그래서 그가…”소우연은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고 여긴 모양이구나. 어쨌든 외부 사람들과 내통하고 있으니, 윤이 같은 어린 계집아이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겠지!”“그러게 말이에요!”이진은 화가 나 미간을 찌푸렸다. “그자는 정말 미련하기 짝이 없어요. 제가 그렇게 경고했는데도 기어코 사지로 걸어 들어가네요.”“사람마다 제각기 정해진 길이 있는 법이지. 결국은 그 길을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게야.”“어마마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이진은 씁쓸하게 웃는 소우연의 모습을 보자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예전에 그녀가 들려주었던 꿈 이야기, 전생과 현생, 이야기책 속 세계라는 말들이 무심코 떠올라 덜컥 불안해진 것이다.소우연은 이진의 불안함을 눈치채고는 딸의 손을 꼭 쥐었다. 모녀는 함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괜찮다. 이것도 다 사람의 운명인 것을.”“어마마마, 속으로 많이 괴로우시죠?”“아니다. 난 이미 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꿰뚫어 보았단다.”비록 그녀에게도 차마 내려놓지 못한 사람이 있었지만, 너무 많은 것을 겪어온 터라 이미 오래전에 초연해져 있었다. 소항은 자신이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온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걸었으니, 그것은 오롯이 그의 선택일 뿐이었다!“아바마마께서도 아직 돌아오지
아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진석이 손짓하자, 십여 명의 수하들이 경씨 가문 저택을 향해 길을 나섰다.십여 명이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소항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속에 일말의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 특히 경장명이 그에게 했던 말들, 그리고 소우연과 이진 같은 사람들이 떠올랐다.하지만 이미 진석에게 임설과 아이들을 빼내 달라고 부탁한 터였다. 이제 와서 후회한다 한들, 진석에게 자신의 결단력만 의심받게 될 뿐이었다!이번 일은 오직 성공만이 있을 뿐, 실패란 결단코 용납될 수 없었다!그렇게 다짐하며 소항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진석이 말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경장명 덕분이지요. 그자가 이곳에 있었기에 천왕이 바짝 뒤쫓아온 것이고, 우리에게 이토록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 아니겠습니까!”그렇다, 이 모든 것은 경장명이라는 자 덕분이었다.경장명이 있었기에 심연희가 찾아왔고, 심연희가 찾아왔기에 이천이 이윤 같은 어린아이의 손에 나라를 맡기고 떠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진 도사께서 어째서 그토록 경장명을 제 군사로 삼으려 하셨는지, 이제야 알 것도 같습니다.”“그렇게 따지면, 경장명은 실로 영남에서 두 번 다시 얻기 힘든 인재임이 틀림없군요!”진석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진 도사는 도를 깨우친 고인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어찌 틀릴 리 있겠습니까? 대왕께서 지금까지 걸어오신 길에는 우리 대인의 도우심이 있었고, 진 도사께서 열어주신 길까지 있는데 대체 무엇이 두렵단 말입니까?”소항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흠흠,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모름지기 대장부라면 모질어야 하는 법. 천하를 손에 쥐고자 한다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이전에는 반신반의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길이 이토록 훤히 뚫려 있었다. 이씨 황족 사람들이 전부 영남으로 몰려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더더욱 생각지도 못한 것은, 그들이 나라의 대사를 장난처럼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에게 덜컥 맡겨두었다는 사실
“그런 것은 제가 알 바 아닙니다. 대왕께서 당장 대인과 손을 잡고 움직이지 않으신다면, 제가 먼저 대왕의 목을 베고 소씨 일가를 모조리 도륙할 것입니다!”진석이 서슬 퍼런 얼굴로 악독하게 내뱉었다.“물론 대왕의 처자식이 경장명의 저택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마음만 먹으면 경씨 가문 저택쯤은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가, 감히!”“제가 감히 못 할 것 같습니까?”그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아류를 제외한 여러 명의 무장한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검을 빼 든 그들은 본래 소항의 암위였으나, 지금은 온전히 진석의 명을 따르는 결사대가 되어 있었다!아류는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발만 동동 굴렀다. 당장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제야 그는 주인이 왜 왕후와 아이들을 미리 왕부 밖으로 피신시켰는지 깨달았다.지금 보니, 그것은 필시 마지막 남은 핏줄이라도 지키기 위한 뼈아픈 수였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과연 경장명이 소항의 처자식을 무사히 지켜낼 수 있을까?소항이 진석을 가리키며 다급히 말했다.“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인데, 정말 해낼 수 있겠습니까? 대인께 전해 주십시오. 우리 다시 한번 다른 방도를 의논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불가능합니다! 이번에 대인께서 나서지 않으신다면, 그 어린것에게 모든 것을 망치게 될 테니까요!”어린것?소항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진석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 역시 몹시 답답했다. 대체 진 도사가 어째서 소항 같은 겁쟁이를 대왕으로 선택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놈의 담력은 대인의 만분의 일도 따라가지 못했다!“어리석군요. 아까 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여황제는 물론이고 천왕과 월왕까지 모두 영남에 와 있습니다. 지금 상운국 조정에는 고작 다섯 살 난 여자아이가 자리를 지키고 있단 말입니다. 지금 손을 쓰지 않는다면 대체 어느 세월을 기다리실 셈입니까!”“다섯 살 난 여자아이가…”소항은 또다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당연히 그 여자아이가 천
이영도 심초운과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얼마나 많이 흔들렸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가끔 이런 짓까지 한 우리가 너무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구나.”이영의 말에 심초운이 대답했다.“너무한 건 없습니다. 연희와 경장명 그자의 혼약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연희의 참 인연이 형님이 아니라고 해도 절대 경장명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심초운의 부모님, 그리고 황태후와 태상황에 이어 주익선의 부모님까지, 그들은 전부 일부일처를 고집하여 왔으며 평생 다들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부
“제가 좋아하는 꽃이네요.”그녀가 가늘고 고운 손으로 꽃을 받아들며 향기를 맡았다.경장명이 물었다. “낭자, 아까는 무슨 생각에 그렇게 빠져 있었던 겁니까? 혹시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그는 알 수 없었다. 혹시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하는 걸까. 처음에는 그녀가 잘 감추고 있는 듯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딘가 마음이 산만해 보였다.이 모든 것은 그녀가 이천이 장안거리에서 점을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였다.“아닙니다.”그녀는 청년의 시선을 피하며 교외를 흐르는 강을 바라보았다. 강 양쪽으로는 잡초가 무성했지
이튿날, 경문과 이천은 말을 달려 운불사에 당도하였다.달리는 내내, 이천의 가슴 속엔 설명할 길 없는 불길한 예감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큰일이 아니고서야, 사부님께서 경문을 보내어 자신을 부를 리 없었다.“사부님.”이천은 용강한의 얼굴을 보자 안절부절못한 채 입을 열었다.“이영 누님은 사부님께서 누님 때문에 경성을 떠나셨다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용강한은 조용히 응하였다.“그 일은 이미 심초운에게 부탁하였다. 그 아이가 영이를 잘 달랠 것이다.”“경성을 떠나신 것이 누님 때문이 아니라면…”이천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이육진을 떠올리자, 소우연의 가슴 한켠이 은근히 저려왔다. 그가 두 사람의 인연을 받아들이겠노라 말하긴 했지만, 그 말이 모든 것을 지워주지는 못했다. 미안함은 여전히 얇은 그림자처럼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용강한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보따리를 풀어 수통과 몇 가지 다과를 꺼내 가지런히 늘어놓았다.“이 야명주는 마계를 떠날 때 챙겨온 것이긴 하나, 폐하의 물건은 아니다.”담담한 설명에 소우연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어디서 난 건가요?”“혼돈에게서 얻은 것이란다.”순간 소우연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혼돈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