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진이 돌아온 것은 한낮 식사를 마친 직후였다.“태자빈은 어디 있느냐?”“태자전하, 태자빈 마마께서는 지금 배나무 별채에 계십니다.”이육진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자신의 몸은 이미 다 나았는데, 또 무슨 약재를 연구하고 있는 걸까?그때 명심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그리고… 태자빈 마마께서 용 감정을 이곳 태자부로 모셔와 별채에 머물게 하셨습니다.”“뭐라고?”이육진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곧 어제 소우연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용 감정이라면…다른 사람이었으면 몰라도, 그 사람은 달랐다.수없이 자신을 도왔고, 소우연에게도 빚진 것이 많은 인물.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존재였다.그런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이육진은 바람처럼 발걸음을 옮겼다.배나무 별채까지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별채 마당 한편에는 약재 선반이 여러 개 세워져 있었고, 그 위엔 온갖 약초가 가지런히 말리고 있었다.소우연과 정연은 그 옆에서 약재를 고르고, 가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마당 한복판, 특히 시선을 끄는 곳엔 낮은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덧입은 옷만 해도 세 겹은 되는 듯한 용 감정이 햇살을 맞으며 누워 있었다.그 옆엔 경문이 양산을 들고 서 있었지만, 얼굴만 그늘지고 온몸은 여전히 따스한 햇살에 노출되어 있었다.이육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갔다.그의 그림자 아래에서 용 감정이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바라보며 공손히 인사했다.“태자전하께서 오셨군요.”그 말에 소우연과 정연도 고개를 돌렸고, 정연은 조심스레 예를 갖췄다.소우연은 곧바로 이육진 곁으로 다가왔다.“오늘은 평소보다 늦게 오셨네요.”“조금 일이 길어졌느니라.”이육진은 소우연에게 짧은 웃음을 건네고, 곧장 용강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옷이… 점점 더 두꺼워지는구나.”그 말과 동시에, 어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소우연이 말해주었던 용강한의 병. 그리고 더 오래전, 그가 직접 말한 적도 있었다.하늘의 이치를 들여다보다, 그 반동을 고스란히 받아 생긴 병이었
이육진은 상소문 정리를 마친 뒤, 곁에 앉은 소우연을 바라보며 조정 이야기를 꺼냈다.“요즘 소씨 가문 말이다. 완전히 발을 뺐더구나. 더는 태자부와 가까워지려는 낌새도 없었다.”소우연은 고요히 꽃 차를 들고 향을 맡다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와서 연을 끊는 걸 보면, 태자부에선 더 이상 얻을 게 없다고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아니면… 또 다른 쪽에 손을 뻗은 걸 수도 있고요.”“그런 자들은 원래 이익 아니면 눈길도 안 주는 법이다. 태자부가 흔들린다 싶으니 곧장 등을 돌렸겠지.”이육진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선 서릿발 같은 냉기가 느껴졌다.“소 씨 가문과 평서왕부는 처음부터 석연찮은 관계였지.”소우연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시선을 내렸다.이육진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네가 대리혼으로 들어올 때부터, 그들은 처음부터 네가 아닌 소우희와 평서왕세자의 혼인을 밀었다. 평서왕부의 권세를 믿은 거지. 하지만…”그는 짧게 숨을 내쉬며 그녀를 바라봤다.“결국 그들이 버렸던 너는 내 다리와 얼굴을 고쳤고, 지금은 태자빈이 되어 이 자리에 있지. 소 씨 가문이 내다 버린 돌멩이가 가장 귀한 옥이 될 줄은 몰랐던 거야.”소우연은 가볍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찻 잔을 흔들었다.지금쯤 소 장군은 밤마다 잠을 설치며 후회하고 있진 않을까.그녀는 정연이 건넨 꽃차를 받아들고 조용히 말했다.“태자전하, 이 꽃차 한 잔 드셔보시겠어요?”이육진의 잔에는 이미 용정차가 담겨 있었기에, 그녀가 굳이 따로 건넨 것이었다.정연은 두 사람의 분위기를 눈치채고 말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소우연은 장난기 섞인 미소로 이육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러다 밖에선 태자전하께서 대낮부터 제 방에 틀어박혀 계신다고 생각하겠어요.”이육진은 미동도 없이 말했다.“오해할 게 있느냐. 낮에 그런 일을 안 했던 것도 아니잖아.”그 말에 소우연의 얼굴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불쑥 떠오른 어젯밤의 기억에,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홱 돌렸다.“차나 드세요.
희미한 꿈결 속.창밖에선 빗방울이 파초 잎을 두드리며 떨어지고, 거센 바람이 창틀을 덜컹이며 흔들고 있었다.소우연은 비몽사몽인 채로 고개를 돌려 창을 바라보았다.빗물이 방 안까지 들이치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정연아.”하지만 곧 귀에 들려온 대답은 익숙한 정연의 목소리와는 조금 달랐다.조금 더 낮고, 어딘가 남성적인 음성이었다.그녀가 말을 잇기도 전에 창이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곧 방 안이 조용해졌다.몸을 감싸던 싸늘한 기운도 어느새 사라지고, 등 뒤로 훈훈한 온기가 밀려왔다.마치 따뜻한 화로가 등을 데우는 듯한 느낌이었다.그 온기가 서서히 온몸을 감싸기 시작하자, 어딘지 모르게 숨결은 흐려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이건?’소우연은 문득 자신이 무언가에 휘감겨 있다는 걸 느꼈다.몸을 비틀며 벗어나 보려 했지만, 뒤에서 감싼 팔은 생각보다 단단하고 집요했다.그러다 등 뒤에서 느닷없이 입술이 목덜미를 훑었다.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밖에선 정말로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우레처럼 굵은 빗줄기가 창살을 두드리며 방 안 가득 메아리쳤다.“누가 창 닫아달랬다더냐?”낮고 짙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이육진이었다.“꿈이었어요. 비가 오는 꿈을 꿨어요.”소우연이 나지막이 대답하자, 이육진은 묵묵히 웃음을 삼켰다.“그 비가… 혹시 ‘운우지정’의 그 비는 아니었느냐?”그 말에 소우연은 흠칫 놀라더니, 얼굴을 이불 속에 파묻었다.뺨이 후끈 달아오르며, 말도 잇지 못한 채 몸을 작게 웅크렸다.이 사람은… 진짜…그녀가 앞일만 생각하고, 뒷일을 대비하지 못한 걸 그는 귀신같이 알아챘다.이육진이 원한 건 단지 대화도, 단잠도 아니었다.창밖에선 여전히 바람이 울고, 비는 퍼붓고 있었다.그 거센 폭우가 한동안 이어지다, 이내 부슬부슬한 가랑비로 바뀌었다.하늘이 어둑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물을 준비하라’고 일렀다.밖에서 대기 중이던 정연과 간석은, 서로 눈빛을 맞춘 채 깊은 탄식을 삼켰다
소우연의 손끝은 여전히 따뜻했다.“조금은 나아졌지만…”소우연은 조심스레 대답했다.“더 지켜보며 조절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그래.”이육진은 팔짱을 낀 채, 용강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나는 의술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저 사람 곁은 한기가 밀려온다. 차갑단 말이야.”소우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그렇게까지요? 전 잘 모르겠던데요.”사실, 손을 댔을 때 손목이 꽤 차갑긴 했지만. 그 외엔 오히려 덥고 습한 날씨에 시원함을 주는 약초처럼 그의 곁에선 묘하게 청량한 기운이 느껴졌을 뿐이다.그 말에 용강한이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정말 못 느끼셨습니까?”소우연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체온이 낮은 건 확실히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차가운 기운이 넘쳐흐를 정도까진 아닌 것 같아서요.”소우연이 손을 거두자, 용강한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태자빈 마마 말씀대로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치료하는 게 좋겠습니다.”소우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곁에 서 있던 경문에게 시선을 돌렸다.“앞으로 약은 명심이 가져올 거야. 꼭 챙겨 드시게 해야한다. 알겠느냐?”경문은 바로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예, 태자빈 마마. 깊이 감사드립니다.”사실 경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주군이 이 병을 앓기 시작한 이후, 수많은 의원이 불려왔지만 그는 늘 고개를 저으며 단 한 마디만을 반복했다.‘이 병은 인연이 있는 자만이 고칠 수 있다.’그래서 그는 고통 속에서도 진맥을 거절했고, 아무런 치료도 받지 않으려 했다.그런데 지금 그는 자신 앞에 있는 이 여인 앞에서는 아무런 거부도 없이 맥을 맡기고, 침까지 받아들이고 있었다..경문은 그저 조용히 속으로 중얼쳤다.‘아, 과연 이 분이 주군께서 말한 ‘인연 있는 사람’이었구나.’운명이란, 참으로 야속하고도 묘했다.“내가 연탄을 좀 보내볼까?”이육진이 문득 제안했다.하지만 용강한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이 가을 끝물에 연탄
정연은 속으로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인이 주인의 허락을 받아 손님에게 상으로 내어지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궁중이나 세도가의 집안에서는 익숙한 풍경이었다.처음 자신과 명심이 이육진 곁에 배정됐을 때, 은근한 기대와 설렘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하지만 이육진은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차가운 기운이 흐르는 듯한 사람이라 속내조차 짐작하기 어려웠다.시간이 지나면서, 정연도 명심도 그 마음을 자연스레 거두게 됐다.그 뒤로 몇몇 왕비가 들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두 사람은 아예 사사로운 욕심조차 품지 않게 됐다.이제 태자와 태자빈은 궁중에서도 소문날 만큼 금슬이 좋았다. 이를 본 명심과 정연은 그가 하인을 눈여겨볼 일은 없을 거라 생각되었다.정연은 조용히 세월을 보내다 은혜를 입고 평온히 늙어가길 바랐다.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어느덧 배나무 별채 앞에 도착했다.명심이 어깨를 움츠리며 나오다 소우연을 발견하고 곧장 다가와 인사했다.“태자빈 마마, 어젯밤은 평안하셨습니까?”소우연은 명심의 겉옷 깃이 잔뜩 여며진 걸 보고 물었다.“춥니?”“경문 대감께서 급히 자리를 비우시는 바람에, 약을 제가 대신 들였습니다. 용 대감께서 약을 천천히 드셔서 꽤 오래 서 있었는데… 그 근처가 너무 차가웠습니다.”“그 정도로?”“네. 정말 한겨울처럼 느껴질 만큼이었습니다.”소우연은 조용히 정연을 바라보았다.정연도 그제야 깨달았다. 조금 전 자신을 가까이 가게 하신 이유를 말이다.함께 안으로 들어섰을 때, 안쪽에서 용강한의 목소리가 들렸다.“경문아, 내가 말한 안정환은 챙겨왔느냐?”소우연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말씀하신 안정환은 만안당에서 쓰는 것과 다른가요?”“태자빈 마마, 오셨군요.”용강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듯했으나 이내 앉은 채 인사했다.“편히 계세요. 굳이 일어나지 않으셔도 됩니다.”소우연은 손짓으로 그를 말렸다.오늘은 햇살도 흐렸고, 늦가을 바람도 매서웠기에 용강한은 실내에 머무르고 있었다.
용강한이 고개를 들었다.“제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게 궁금하신 겁니까?”소우연은 눈을 피했다.그의 시선은 그녀를 지나 멀리 담장 너머, 새하얀 구름 위에 가닿았다.“태자빈 마마를 믿는 이유는 저 역시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다시 살아가는 사람 말이에요.”그건 더 이상 숨기지 않는 고백이었다.“저는 아주 오래 살았습니다. 오랫동안 스승님이 남긴 수첩을 파고들었고, 마침내 그 안의 내용을 해독해 마마와 제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죠.”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소우연을 바라보았다.입가에 맑은 미소가 스며들었다.“하지만 그 시간들이 길어질수록, 외로움만 짙어졌어요. 흠천감은 신성한 곳이었지만… 그만큼 고립된 곳이기도 했으니까요.”그의 눈빛엔 따뜻한 온기와, 지우기 힘든 쓸쓸함이 서려 있었다.“이젠 조금 덜 외로운 것 같습니다. 마마가 계시고 또 제가 설 수 있는 자리가 있으니 말이에요.”그가 웃어 보였지만, 입꼬리 끝엔 씁쓸함이 맴돌았다.“다만 미련을 다 놓지 못한 채 살고 있어서일까요. 요즘 들어 자꾸… 주공께서 꿈에 찾아오십니다.”소우연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그 역시 자신처럼 오랜 시간과 기억을 품은 채 이곳에 선 사람이었다.“그 꿈 속은 괜찮으셨어요?”그녀는 천천히 물었다.단순한 말이 아니었다.그가 겪은 전생 역시 고통으로 점철된 것이었을까. 혹시 자신처럼 매 순간이 지옥 같았던 건 아닐까.용강한은 눈을 감은 듯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그리고는 담담히 말했다.“확실한 건 하나뿐입니다. 제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을 잃었다는 사실 말이죠. 평생 지켜내고 싶었던 그것을 놓치고 나니, 그 뒤의 삶은 더는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소우연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그가 말한 '소중한 것'은, 혹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번 생에서는 되찾으셨어요?”잠시 침묵하던 용강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조금은요.”“조금…이요?”“그 정도입니다.”소우연의 마음 한편이 서늘해졌다.
용강한은 웃으며 말했다.“그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생활이 좀 궁핍해지겠지만요.”소우연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용강한은 계속해서 말했다.“어젯밤 달 밝고 별이 빛나고 있어 왕세자의 별자리가 매우 안정적이더군요. 그래서 점을 좀 봤습니다.”그 말을 듣자 소우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마지막 남은 힘으로 점을 친 것이 이육진을 위한 일일까? 아니면 그들 모두를 위한 일일까 궁금해졌다.“마마, 천명으로 따지면 태자전하는 왕세자보다 뒤처지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태자전하야말로 정통이니 서두르셔야 합니다.”“뭐… 뭘 서두르란 말인가요.”소우연은 갑자기 막막해졌다. 소설 속 그녀의 역할은 불행한 들러리 역에 지나지 않았다.회귀한 이후로 그녀는 운명을 바꾸기로 다짐했다.여주인공인 소우희가 죽었는데도 운명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단 말인가.용강한이 괜한 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그녀는 사내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대체 무슨 자격으로 태자와 경쟁하려 하는지 모르겠네요.”이육진이 황제의 유일한 아들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어쨌거나 빠른 시일 내에 태자전하와 아이를 가지는 게 좋겠습니다.”용강한은 담담히 말했다.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우연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었다.하지만 그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황실 핏줄은 줄곧 중요한 문제로 여겨지고 있었다.소우연은 물론이고 덕빈, 심지어 황제까지 회임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회진 때 왕세자의 아이를 회임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얼굴도 예쁜데다가 성격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그녀를 제외하면 딱히 적당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게다가 그녀는 소우연에게 이상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민수 때문에 그녀에게 적개심을 품은 거라고 하기엔 또 아닌 것 같았다.“생년월일만 알 수 있다면….”하지만 그게 있다고 해도 옅은 운명만 점칠 수 있지 깊게는 엿볼 수 없을 것이다.소우연은 용강한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다른 건
“전생에 전하께 저한테 잘해주라고 귀띔하신 것도, 저에게 도망치지 말라고 말을 전해준 것도 오라버니셨지요.”이번 생의 그녀는 가마에 오를 때 전갈을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회귀한 시점이 도주 이후가 아니라 신혼 밤이라서 정말 다행이었다.“오라버니 말씀이 맞아요. 지금 시급한 건 태자의 후대를 낳는 일입니다.”소우연은 초조하고 가슴이 쓰렸다.만약 그녀가 아이를 갖지 못한다면 다른 여인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용강한은 소우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다른 여인을 시켜 태자의 자식을 갖게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약간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이지만 이육진이 다른 여인을 품고 자식을 보게 된다면 태자의 자리는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우연이는….’과연 그녀는 이곳에서 벗어나 아무도 그들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까?‘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평범한 삶은 그가 원하는 삶이지 소우연이 그걸 원한다고 한 적은 없었다.이 시대의 여인들은 이해심 많다고 하지만 진심으로 다른 여인과 달갑게 부군을 공유할 여인이 어디 있을까?두 번의 생을 연모한 여인이 그런 서러움을 감내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갑갑했다.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가 말했다.“서두르지 말고 조금만 시간을 갖고 지켜보세요.”아직 이 주제를 다루기에는 이른 시점이었다.하지만 모든 일이 그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다.이육진이 관저로 돌아온 후, 소우연은 온종일 고민 끝에 시간을 더 갖기로 했다.그런데 그날 저녁, 수현이 예쁘장한 용모를 가진 두 여인을 태자 관저로 들였다.“소인 상연, 상란 태자 전하와 태자빈 마마를 뵈옵니다.”두 여인은 소우연보다도 한두 살 많아 보였지만 몸매가 요염하고 용모가 빼어난 것이 보고 있자니 불안감이 들게 했다.소우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다가 정연을 시켜 그들의 처소를 안배하게 했다.“부인, 아바마마의 뜻이고 난 전혀 생각이 없소. 걱정 마시오, 나에겐 부인뿐이오. 절대 저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어둠 속에서 이육진은 여린 소녀를 안고 생각에 잠겼다. 조금 질투가 났다. 소우연이 이러는 게 마치 이민세에게 배신당하고 억울해서 자신에게 온 것 같기도 했다.사랑이 없으면 증오도 없는 법, 가끔은 소우연의 진심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또 가끔은 그녀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느껴졌다.감정기복이 너무 심해서 순간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기도 했다.품 안의 여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가끔 정말 궁금할 때가 많았다.“아닙니다. 어찌 감히 그런 놈을 전하와 비교하겠어요.”그녀가 걱정하는 건 이민수가 가진 남자주인공의 운명이었다.천명이 정한 주인공의 운명을 가진 자!이육진은 그녀가 또 소설 얘기를 꺼내는 줄 알고 골치가 아팠다. 소설 속 세상은 환상에만 존재하는 것이었다.이육진은 자신의 허리를 꽉 껴안는 소녀를 바라보며 분노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용강한의 병세와 아바마마께서 보내온 미인들 때문에 아마 많이 속이 상했을 것이다.이육진이 말했다.“이틀 후에 황가 수렵대회가 열릴 텐데 나와 같이 갑시다.”“수렵대회요?”소우연이 놀라며 되물었다.“제가 그런데 가도 되나요?”“물론이오. 아바마마께선 매년 어마마마와 같이 가신다오.”황제는 어딜 가든 덕빈을 데리고 다녔다. 사람들은 덕빈이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다고 부러워하지만, 현실은….이육진은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한숨이 나왔다.그는 품 안의 소녀를 꽉 껴안으며 말했다.“중대사를 해결한 후에 시간이 나면 부인과 함께 어디든 가겠소.”“어디든지요?”“그럼, 어디든지.”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달콤해졌다.다음 날은 보슬비가 내렸다. 그리고 어느덧 수렵대회 날이 되었다.황가 수렵장은 일찍부터 황실 수비군이 겹겹이 호위했고 황실 귀족들과 조정의 대신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입장할 수 없게 했다.최근 들어 몸 상태가 좋지 않은 황제는 이육진과 다른 귀족 자제들을 시켜 시합에 참가하게 했다.말을 탄 이육진은 소우연의 앞으로 다가와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소우연은 죄책감이 들었다.이육진이 화를 낸 게 이해가 됐다.‘내가 과연 그렇게 이해심 넓은 사람일까?’갓 피어난 꽃처럼 아름다운 상연, 상란이 언젠가 이육진의 마음을 앗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갑갑하고 아파왔다.“네 말대로 하자꾸나.”결국 소우연은 정연을 봐서 명심을 처벌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내보내면 다시 안 볼 사람이었다.“명심을 대신해서 마마께 감사드립니다.”정연은 소우연에게 큰절을 올렸다.그날 밤.소우연은 정연에게서 태자가 배나무 별채로 가서 용 대인과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했다.소우연은 못내 서운했지만 자신이 자처한 일이니 차마 찾아갈 수가 없었다. 입맛이 사라진 그녀는 대충 끼니를 때우고 방으로 들었다.날이 어두워진 후, 처소로 돌아온 사내는 그녀가 저녁식사도 걸렀다는 얘기를 듣고 표정이 더 매섭게 굳었다.“저녁식사를 내오라 하거라.”이육진이 정연에게 분부했다.잠시 후, 반찬들이 식탁에 올라오자 이육진은 소우연을 끌고 식탁으로 가서 마주앉았다.그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없이 그녀의 접시에 반찬을 챙겨주었다.“전하….”소우연은 식사가 끝나자 일어서는 이육진을 다급히 붙잡았다.“저는 전하께서 그런 마음을 갖고 계실 줄 몰랐습니다.”“몰랐다고?”이육진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티를 내고 다녔는데 여전히 부족했나 보군.”그는 할 수만 있다면 가슴을 갈라서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저는 자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하물며….”소우연은 최근 들어 귀가가 늦어지는 사내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도 많이 재촉하시죠?”가끔 궁에 한번 갈 때마다 잔소리를 듣는 그녀였다.이육진은 거의 매일 궁에 가니 얼마나 재촉을 많이 들었을까?“부인은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시오.”그는 살짝 누그러진 어조로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다른 여인과 이부자리에 들면 정말 속이 안 쓰릴 자신이 있는 거요?”“저는….”
소우연이 잠깐 넋을 잃고 있는 사이, 명심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계속해서 말했다.“금일 폐하와 덕빈 마마께서 상연과 상란을 태자 관저로 보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내일이면 또 다른 여인들을 보내겠지요. 저들은 남이지만 소인은 태자빈 마마의 사람이니 태자빈 마마의 말씀만 따를 것입니다.”정연은 다급히 명심의 어깨를 밀쳐 바닥에 쓰러뜨리며 호통쳤다.“너 미쳤니? 태자빈 마마께서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뭐가 있겠어?”명심이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정연은 고개를 들고 표정이 굳은 소우연의 눈치를 살피며 다급히 명심을 타일렀다.“빨리 태자빈 마마께 사죄드리지 못할까? 너 정말 욕심에 눈이 멀어서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구나.”하지만 명심은 뜻을 굽히지 않고 간곡히 청했다.“마마, 상연과 상란을 태자 전하께 보내실 바에는 제가 낫지 않겠습니까?”소우연은 이육진이 나가기 전 했던 말을 떠올렸다.“난 한 번도 부인 이외의 여인을 고려해 본 적이 없소.”정연은 한심한 얼굴로 명심을 밀쳤다.명심은 모든 걸 다 내걸겠다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태자빈이 마음이 약해져 허락할 수도 있지 않은가?태자빈도 아예 모르는 여인을 태자의 신변에 두기를 꺼릴 것이다. 그녀는 적어도 태자빈의 시종이니 앞으로 다루기도 쉬울 테고 오늘 들어온 여인들에 비해서는 쓸모가 많았다.소우연은 길게 심호흡하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누굴 선택해서 태자의 옆으로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다.”“마마….”“이만 물러가거라!”소우연의 호통을 들은 정연이 명심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소우연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책상 위에 턱을 괴고 앉았다.‘방금 그 사람 화난 거 맞지?’타 여인과 부군을 공유하고 싶은 여인이 어디 있을까?이 일은 그녀의 오랜 고민이었다. 그녀는 이육진이 안전하게 즉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육진이 첩실을 전혀 원하지 않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참 좋은 분이야.’소우연은 그런
“전생에 전하께 저한테 잘해주라고 귀띔하신 것도, 저에게 도망치지 말라고 말을 전해준 것도 오라버니셨지요.”이번 생의 그녀는 가마에 오를 때 전갈을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회귀한 시점이 도주 이후가 아니라 신혼 밤이라서 정말 다행이었다.“오라버니 말씀이 맞아요. 지금 시급한 건 태자의 후대를 낳는 일입니다.”소우연은 초조하고 가슴이 쓰렸다.만약 그녀가 아이를 갖지 못한다면 다른 여인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용강한은 소우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다른 여인을 시켜 태자의 자식을 갖게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약간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이지만 이육진이 다른 여인을 품고 자식을 보게 된다면 태자의 자리는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우연이는….’과연 그녀는 이곳에서 벗어나 아무도 그들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까?‘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평범한 삶은 그가 원하는 삶이지 소우연이 그걸 원한다고 한 적은 없었다.이 시대의 여인들은 이해심 많다고 하지만 진심으로 다른 여인과 달갑게 부군을 공유할 여인이 어디 있을까?두 번의 생을 연모한 여인이 그런 서러움을 감내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갑갑했다.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가 말했다.“서두르지 말고 조금만 시간을 갖고 지켜보세요.”아직 이 주제를 다루기에는 이른 시점이었다.하지만 모든 일이 그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다.이육진이 관저로 돌아온 후, 소우연은 온종일 고민 끝에 시간을 더 갖기로 했다.그런데 그날 저녁, 수현이 예쁘장한 용모를 가진 두 여인을 태자 관저로 들였다.“소인 상연, 상란 태자 전하와 태자빈 마마를 뵈옵니다.”두 여인은 소우연보다도 한두 살 많아 보였지만 몸매가 요염하고 용모가 빼어난 것이 보고 있자니 불안감이 들게 했다.소우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다가 정연을 시켜 그들의 처소를 안배하게 했다.“부인, 아바마마의 뜻이고 난 전혀 생각이 없소. 걱정 마시오, 나에겐 부인뿐이오. 절대 저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용강한은 웃으며 말했다.“그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생활이 좀 궁핍해지겠지만요.”소우연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용강한은 계속해서 말했다.“어젯밤 달 밝고 별이 빛나고 있어 왕세자의 별자리가 매우 안정적이더군요. 그래서 점을 좀 봤습니다.”그 말을 듣자 소우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마지막 남은 힘으로 점을 친 것이 이육진을 위한 일일까? 아니면 그들 모두를 위한 일일까 궁금해졌다.“마마, 천명으로 따지면 태자전하는 왕세자보다 뒤처지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태자전하야말로 정통이니 서두르셔야 합니다.”“뭐… 뭘 서두르란 말인가요.”소우연은 갑자기 막막해졌다. 소설 속 그녀의 역할은 불행한 들러리 역에 지나지 않았다.회귀한 이후로 그녀는 운명을 바꾸기로 다짐했다.여주인공인 소우희가 죽었는데도 운명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단 말인가.용강한이 괜한 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그녀는 사내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대체 무슨 자격으로 태자와 경쟁하려 하는지 모르겠네요.”이육진이 황제의 유일한 아들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어쨌거나 빠른 시일 내에 태자전하와 아이를 가지는 게 좋겠습니다.”용강한은 담담히 말했다.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우연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었다.하지만 그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황실 핏줄은 줄곧 중요한 문제로 여겨지고 있었다.소우연은 물론이고 덕빈, 심지어 황제까지 회임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회진 때 왕세자의 아이를 회임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얼굴도 예쁜데다가 성격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그녀를 제외하면 딱히 적당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게다가 그녀는 소우연에게 이상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민수 때문에 그녀에게 적개심을 품은 거라고 하기엔 또 아닌 것 같았다.“생년월일만 알 수 있다면….”하지만 그게 있다고 해도 옅은 운명만 점칠 수 있지 깊게는 엿볼 수 없을 것이다.소우연은 용강한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다른 건
용강한이 고개를 들었다.“제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게 궁금하신 겁니까?”소우연은 눈을 피했다.그의 시선은 그녀를 지나 멀리 담장 너머, 새하얀 구름 위에 가닿았다.“태자빈 마마를 믿는 이유는 저 역시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다시 살아가는 사람 말이에요.”그건 더 이상 숨기지 않는 고백이었다.“저는 아주 오래 살았습니다. 오랫동안 스승님이 남긴 수첩을 파고들었고, 마침내 그 안의 내용을 해독해 마마와 제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죠.”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소우연을 바라보았다.입가에 맑은 미소가 스며들었다.“하지만 그 시간들이 길어질수록, 외로움만 짙어졌어요. 흠천감은 신성한 곳이었지만… 그만큼 고립된 곳이기도 했으니까요.”그의 눈빛엔 따뜻한 온기와, 지우기 힘든 쓸쓸함이 서려 있었다.“이젠 조금 덜 외로운 것 같습니다. 마마가 계시고 또 제가 설 수 있는 자리가 있으니 말이에요.”그가 웃어 보였지만, 입꼬리 끝엔 씁쓸함이 맴돌았다.“다만 미련을 다 놓지 못한 채 살고 있어서일까요. 요즘 들어 자꾸… 주공께서 꿈에 찾아오십니다.”소우연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그 역시 자신처럼 오랜 시간과 기억을 품은 채 이곳에 선 사람이었다.“그 꿈 속은 괜찮으셨어요?”그녀는 천천히 물었다.단순한 말이 아니었다.그가 겪은 전생 역시 고통으로 점철된 것이었을까. 혹시 자신처럼 매 순간이 지옥 같았던 건 아닐까.용강한은 눈을 감은 듯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그리고는 담담히 말했다.“확실한 건 하나뿐입니다. 제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을 잃었다는 사실 말이죠. 평생 지켜내고 싶었던 그것을 놓치고 나니, 그 뒤의 삶은 더는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소우연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그가 말한 '소중한 것'은, 혹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번 생에서는 되찾으셨어요?”잠시 침묵하던 용강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조금은요.”“조금…이요?”“그 정도입니다.”소우연의 마음 한편이 서늘해졌다.
정연은 속으로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인이 주인의 허락을 받아 손님에게 상으로 내어지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궁중이나 세도가의 집안에서는 익숙한 풍경이었다.처음 자신과 명심이 이육진 곁에 배정됐을 때, 은근한 기대와 설렘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하지만 이육진은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차가운 기운이 흐르는 듯한 사람이라 속내조차 짐작하기 어려웠다.시간이 지나면서, 정연도 명심도 그 마음을 자연스레 거두게 됐다.그 뒤로 몇몇 왕비가 들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두 사람은 아예 사사로운 욕심조차 품지 않게 됐다.이제 태자와 태자빈은 궁중에서도 소문날 만큼 금슬이 좋았다. 이를 본 명심과 정연은 그가 하인을 눈여겨볼 일은 없을 거라 생각되었다.정연은 조용히 세월을 보내다 은혜를 입고 평온히 늙어가길 바랐다.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어느덧 배나무 별채 앞에 도착했다.명심이 어깨를 움츠리며 나오다 소우연을 발견하고 곧장 다가와 인사했다.“태자빈 마마, 어젯밤은 평안하셨습니까?”소우연은 명심의 겉옷 깃이 잔뜩 여며진 걸 보고 물었다.“춥니?”“경문 대감께서 급히 자리를 비우시는 바람에, 약을 제가 대신 들였습니다. 용 대감께서 약을 천천히 드셔서 꽤 오래 서 있었는데… 그 근처가 너무 차가웠습니다.”“그 정도로?”“네. 정말 한겨울처럼 느껴질 만큼이었습니다.”소우연은 조용히 정연을 바라보았다.정연도 그제야 깨달았다. 조금 전 자신을 가까이 가게 하신 이유를 말이다.함께 안으로 들어섰을 때, 안쪽에서 용강한의 목소리가 들렸다.“경문아, 내가 말한 안정환은 챙겨왔느냐?”소우연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말씀하신 안정환은 만안당에서 쓰는 것과 다른가요?”“태자빈 마마, 오셨군요.”용강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듯했으나 이내 앉은 채 인사했다.“편히 계세요. 굳이 일어나지 않으셔도 됩니다.”소우연은 손짓으로 그를 말렸다.오늘은 햇살도 흐렸고, 늦가을 바람도 매서웠기에 용강한은 실내에 머무르고 있었다.
소우연의 손끝은 여전히 따뜻했다.“조금은 나아졌지만…”소우연은 조심스레 대답했다.“더 지켜보며 조절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그래.”이육진은 팔짱을 낀 채, 용강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나는 의술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저 사람 곁은 한기가 밀려온다. 차갑단 말이야.”소우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그렇게까지요? 전 잘 모르겠던데요.”사실, 손을 댔을 때 손목이 꽤 차갑긴 했지만. 그 외엔 오히려 덥고 습한 날씨에 시원함을 주는 약초처럼 그의 곁에선 묘하게 청량한 기운이 느껴졌을 뿐이다.그 말에 용강한이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정말 못 느끼셨습니까?”소우연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체온이 낮은 건 확실히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차가운 기운이 넘쳐흐를 정도까진 아닌 것 같아서요.”소우연이 손을 거두자, 용강한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태자빈 마마 말씀대로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치료하는 게 좋겠습니다.”소우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곁에 서 있던 경문에게 시선을 돌렸다.“앞으로 약은 명심이 가져올 거야. 꼭 챙겨 드시게 해야한다. 알겠느냐?”경문은 바로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예, 태자빈 마마. 깊이 감사드립니다.”사실 경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주군이 이 병을 앓기 시작한 이후, 수많은 의원이 불려왔지만 그는 늘 고개를 저으며 단 한 마디만을 반복했다.‘이 병은 인연이 있는 자만이 고칠 수 있다.’그래서 그는 고통 속에서도 진맥을 거절했고, 아무런 치료도 받지 않으려 했다.그런데 지금 그는 자신 앞에 있는 이 여인 앞에서는 아무런 거부도 없이 맥을 맡기고, 침까지 받아들이고 있었다..경문은 그저 조용히 속으로 중얼쳤다.‘아, 과연 이 분이 주군께서 말한 ‘인연 있는 사람’이었구나.’운명이란, 참으로 야속하고도 묘했다.“내가 연탄을 좀 보내볼까?”이육진이 문득 제안했다.하지만 용강한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이 가을 끝물에 연탄
희미한 꿈결 속.창밖에선 빗방울이 파초 잎을 두드리며 떨어지고, 거센 바람이 창틀을 덜컹이며 흔들고 있었다.소우연은 비몽사몽인 채로 고개를 돌려 창을 바라보았다.빗물이 방 안까지 들이치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정연아.”하지만 곧 귀에 들려온 대답은 익숙한 정연의 목소리와는 조금 달랐다.조금 더 낮고, 어딘가 남성적인 음성이었다.그녀가 말을 잇기도 전에 창이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곧 방 안이 조용해졌다.몸을 감싸던 싸늘한 기운도 어느새 사라지고, 등 뒤로 훈훈한 온기가 밀려왔다.마치 따뜻한 화로가 등을 데우는 듯한 느낌이었다.그 온기가 서서히 온몸을 감싸기 시작하자, 어딘지 모르게 숨결은 흐려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이건?’소우연은 문득 자신이 무언가에 휘감겨 있다는 걸 느꼈다.몸을 비틀며 벗어나 보려 했지만, 뒤에서 감싼 팔은 생각보다 단단하고 집요했다.그러다 등 뒤에서 느닷없이 입술이 목덜미를 훑었다.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밖에선 정말로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우레처럼 굵은 빗줄기가 창살을 두드리며 방 안 가득 메아리쳤다.“누가 창 닫아달랬다더냐?”낮고 짙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이육진이었다.“꿈이었어요. 비가 오는 꿈을 꿨어요.”소우연이 나지막이 대답하자, 이육진은 묵묵히 웃음을 삼켰다.“그 비가… 혹시 ‘운우지정’의 그 비는 아니었느냐?”그 말에 소우연은 흠칫 놀라더니, 얼굴을 이불 속에 파묻었다.뺨이 후끈 달아오르며, 말도 잇지 못한 채 몸을 작게 웅크렸다.이 사람은… 진짜…그녀가 앞일만 생각하고, 뒷일을 대비하지 못한 걸 그는 귀신같이 알아챘다.이육진이 원한 건 단지 대화도, 단잠도 아니었다.창밖에선 여전히 바람이 울고, 비는 퍼붓고 있었다.그 거센 폭우가 한동안 이어지다, 이내 부슬부슬한 가랑비로 바뀌었다.하늘이 어둑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물을 준비하라’고 일렀다.밖에서 대기 중이던 정연과 간석은, 서로 눈빛을 맞춘 채 깊은 탄식을 삼켰다